05.
‘왜 이렇게 앞이 잘 안 보이지.’
평소와 달리 시야가 좁았다. 욕실에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짜며 고개를 든 우예린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돌처럼 굳어졌다.
칫솔을 꽉 잡고 거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우예린은 다른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틀림없이 자신의 얼굴이었다.
눈두덩이가 평소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부어올라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얼굴이 전체적으로 미묘하게 부풀어 올랐다. 꼭 발효된 빵 반죽처럼 말이다.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부을 거라고 생각했고 붓기를 유도한 것도 맞지만 상상 이상으로 땡땡 부어서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이 정도면 진짜…… 없던 정도 떨어지겠다.”
우예린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고 깨닫는 건 우울한 일이었다. 자신의 얼굴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거울 속 모습에서 시선을 떼며 우예린은 애써 침착하게 생각했다.
‘일부러 의도한 거잖아.’
이걸로 도준희를 약간이나마 정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다. 거울을 보지 않은 채 양치와 세수를 한 뒤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인기척이 느껴지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이제 일어났어?”
주방을 왔다 갔다 하며 도준희가 우예린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벽걸이 시계를 보자 벌써 11시였다.
“오늘 밥은 간단하게 달걀볶음밥이다.”
‘밥은 꼬박꼬박 잘 주네.’
하긴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이 집에 감금해 놓고 밥까지 안 주면 그건 정말 너무한 거였다. 세상에서 밥 해먹는 게 제일 귀찮아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던 우예린은 조금 머쓱하게 의자에 앉았다.
‘도준희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식탁 위에는 이미 김치와 깻잎절임 등의 반찬이 놓여있었다. 우예린은 반찬에는 시선도 안 주고 도준희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볶음밥을 하느라 우예린을 보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완성했는지 가스레인지 불을 끄자 우예린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도준희가 몸을 돌려 프라이팬을 식탁 위에 올려두며 우예린을 흘끗했다. 우예린의 기대 어린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자, 이제 내 얼굴을 봐. 보고 반응해.’
도준희가 피식 웃었다.
“배 많이 고팠냐? 아주 뚫어지겠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냉장고로 걸어갔다. 우예린은 눈을 깜박이며 도준희의 움직임을 쫓았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낸 도준희가 식탁에 물병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먹어.”
우예린은 머뭇거리며 숟가락을 잡고는 도준희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을 너무 잠깐 봐서 모르겠나? 왜 아무런 반응도 없지?’
도준희의 반응을 보고 계획을 계속할 것인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인지를 결정하려던 우예린은 혼란에 빠졌다.
도준희가 볶음밥을 한 입 먹다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우예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드디어.’
우예린은 숟가락을 꽉 움켜쥔 채 얼굴을 당당하게 들었다.
‘그래. 미친개, 역시 반응이 없을 리가 없지. 너도 이런 얼굴은 싫구나?’
도준희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우예린은 그녀의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훑어보는 도준희의 시선을 의식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험한 말투의 도준희가 어떤 말로 이 얼굴을 지적할까 상상하자 절로 상처받는 기분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얼굴 봐라, 쯧쯧. 찐빵이냐?”
‘찐빵. 좋아, 이 정도는 괜찮아.’
우예린은 긴장을 풀지 않으며 도준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말에 따른 대응 대사까지 생각해 두었다. 김 대리처럼 얼굴 관리하라는 말을 한다면 원래 꾸미는 거 안 좋아한다고, 앞으로도 화장은 안 할 생각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김 대리보다 과격하게, 그 얼굴 보니까 밥이 안 넘어간다든가…… 그런 말을 하면 멍청한 얼굴로 못 알아듣는 척해야지.
도준희가 벌떡 일어나자 긴장하던 우예린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역시 입맛이 떨어진다는 반응인가?’
그러나 도준희는 아무 말 없이 냉장고로 걸어갔다.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준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부은 눈두덩 때문에 시야는 여전히 좁은 상태였다.
냉동실을 연 도준희가 얼음 틀을 꺼냈다. 그리고 그릇에 얼음을 담고 찬장에서 위생 봉지를 꺼내 식탁으로 돌아왔다.
우예린은 눈을 끔벅이며 얼음과 도준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봉지에 얼음을 부으며 혀를 찼다.
“술 먹을 때나 쓰던 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그러더니 멀뚱멀뚱 쳐다보는 우예린의 눈으로 얼음이 든 봉지를 들이밀었다.
“아, 차거!”
화들짝 놀란 우예린이 고개를 뒤로 빼자 도준희가 짤막하게 명령했다.
“대.”
“차, 차가워요.”
“그럼 얼음이 차갑지 뜨겁냐?”
한심하단 눈빛에 우예린은 울컥했다. 도준희가 귀찮다는 듯 눈짓했다.
“빨리 대.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이때다. 역시 이렇게 흉한 얼굴은 보기 싫다는 거지. 우예린은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 안 해요. 나 원래 잘 붓는 편이거든요.”
“눈 꼬라지 보니까 퉁퉁 부어서는. 뭐가 보이기는 하냐?”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내버려 둬요. 왜요, 내가 흉해요?”
우예린은 도준희를 빤히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긴장이 되어서였다. 도준희의 행동을 예측하는 건 힘든 일이었기에 우예린은 김 대리를 생각했다. 사람 좋은 척하기를 좋아하는 김 대리라면 어물거리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할 거다. 아니면 예쁜 게 보기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거나.
도준희는 우예린을 빤히 바라보더니 툭 뱉었다.
“뭔 개소리야.”
“…….”
“그럼 눈이 개구락지처럼 부풀었는데 흉하지 안 흉하냐?”
우예린은 머릿속으로 김 대리를 대상으로 한 상상을 삭제했다. 도준희를 예측하는 데는 영 쓸모가 없다.
흉하다고 여기는 건 맞는데 어쩐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다. 우예린이 당황하며 도준희를 쳐다보자 도준희는 딱 한 마디를 했다.
“대.”
“…….”
“안 대?”
도준희가 눈을 부라렸다.
“대요, 대. 댄다고요.”
우예린은 소심하게 중얼거리고는 도준희가 들고 있는 얼음 비닐봉지에 눈을 댔다. 시리도록 차가운 얼음이 단단하게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식혀주었다.
도준희에게서 얼음 봉지를 건네받고 눈두덩이를 문지르자 도준희는 그릇에 볶음밥을 담아 그녀의 앞에 놔주었다.
“이따가 단호박 삶아줄 테니 먹어.”
“……왜요?”
“호박이 붓기에 좋다니까. 붓기 빼야 할 거 아냐.”
우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어요.”
“뭐가? 호박 싫어해?”
도준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예린은 문득 그 표정이 재밌다고 느꼈다가 정색하고 말했다.
“붓기 안 뺄 거라고요.”
“……?”
“절대로.”
의아해하는 도준희와 눈을 마주쳤다. 결연히 눈을 빛내는 우예린을 향해 도준희가 입을 열었다.
“별 희한한…….”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맘대로 하든가.”
“…….”
떨떠름한 목소리에 우예린은 계획에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도준희에게 부은 얼굴은 그다지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소가 아닌 듯했다.
대신 다른 의미로 도준희에게 각인된 것 같았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을 느끼며 잠자코 숟가락을 쥐었다. 미친놈에게 이상한 놈 취급받는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이려나.
* * *
날씨 좋은 토요일 저녁. 우예린은 침실의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 집은 쓸데없이 넓고 화려해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단 하나, 창을 통해 보는 바깥 경치는 제법 보기 좋았다. 바깥 구경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 더 그랬다.
날씨가 좋은데 기분은 어째서 더 우울해지는 걸까. 우예린은 시간이 지나자 붓기가 조금 가라앉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우울해졌다.
‘이런 날은 예쁘게 차려입고 한강 나들이라도 가야 하는 건데.’
햇살 좋은 파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밖을 힐끗했다. 문밖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준희는 가끔 밖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에 붙어있었다. 하는 거라곤 먹고 뒹굴고 자는 것뿐이다.
회사에 다닐 땐 주말이 너무 좋았는데 이 집에 갇히게 된 이후로는 회사에 갈 수 있는 평일이 더 기다려졌다. 통탄할 일이다.
‘그러니까 이번 주말은 알차게 써야 해.’
도준희를 떨쳐내기 위해서. 첫 번째 방법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으니 다음 방법을 실행할 차례인데 무턱대고 하기만 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걸 오전에 깨달았던지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듯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 우예린은 적을 알기 위해 방을 나섰다. 도준희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졸린지 눈이 반쯤 감겨있었다. 우예린은 그의 옆에 살짝 엉덩이를 붙였다. 기척 없이 앉으려고 했는데 소파가 그녀의 자취방 침대보다 푹신했다.
앉자마자 푹 들어가서 도준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신경 쓰지 않는지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우예인이 텔레비전을 흘끗했다. 두 팔을 쭉 뻗은 것보다 긴 텔레비전에서는 아이돌들이 나와 공연을 하고 있었다. 3주째 1위라는 아이돌이 나와 귀엽고 상큼한 춤을 추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나?’
시큰둥한 도준희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예린은 그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
다음 무대는 남자 아이돌의 무대였다. 전반적으로 훌륭하게 잘생겼다고 생각한 그룹이었다. 이번 역시 도준희는 표정 변화가 없었고, 우예린은 화려한 춤판이 벌어지는 화면에 잠깐 집중했다.
남자 아이돌의 무대가 끝나고 다시 도준희를 관찰하려던 우예린은 시선을 돌렸다가 움찔했다. 도준희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예린은 깜짝 놀랐지만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렇게 봐요?”
눈을 깜박이며 묻자 도준희의 입술 끝이 비죽하니 올라갔다.
“지랄.”
“…….”
“얼굴 반반한 놈들만 나오면 아주 눈이 돌아가지. 티브이에 빠져들겠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우예린은 억울한 얼굴을 했지만 도준희는 코웃음만 쳤다. 도준희를 알아보려고 나온 거였는데 도리어 그녀의 얼굴 밝힘증에 대해 확신만 주게 된 꼴이었다.
우예린은 더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다음 무대는 다행히도 여자 가수였다. 청순하고 맵시가 좋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가수가 노래를 시작했다. 가창력이 아주 뛰어나진 않은 것 같았으나 목소리는 예뻤다.
가수 역시 매력적으로 생겼지만 평범해서 우예린은 크게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심코 도준희를 흘끗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텔레비전은 그냥 틀어놓은 것이었는지 시종 지루한 표정이었던 도준희가 집중하여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우예린은 침을 삼키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도준희가 처음으로 제대로 보인 반응이었다.
“저런 스타일 좋아해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반대로 행동해야지. 이상형과 반대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마음이 식기 마련이니까. 도준희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지만 그의 거친 언행에 기겁했던 자신처럼.
우예린은 다시 한번 텔레비전에 비치는 가수를 살폈다.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노래가 애절해졌다. 예쁜 목소리에 노래도 그럭저럭한다. 얼굴은 그녀의 차림처럼 청순했다.
‘나와 닮은 건 없는 것 같은데.’
도준희가 싫어하려면 보이시하게 다녀야 할까? 그게 지금 하고 다니는 스타일과 정반대일 거 같기는 했다.
계속 대답이 없는 도준희를 힐끗했다.
“도준희?”
도준희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우예린은 혹시 그녀가 생각하는 걸 들킬까 봐 눈을 연신 깜박였다.
도준희가 입을 열었다.
“아니.”
도준희가 모양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빠진 섹시한 입술을 양옆으로 늘렸다. 야릇한 미소에 도준희의 짓궂은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우예린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려다가 도준희가 다시 입을 열자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백부가 곁에 끼고 다니던 앤데.”
“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백부 옆에서 엉덩이 흔들던 때랑은 영 딴판이라 보고 있었어.”
흠칫한 우예린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다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가수의 골반으로 시선이 갔다. 앞모습뿐이라 잘 안 보이지만 엉덩이가 유독 예쁜 것 같기는 했다.
노래가 끝난 가수 대신 새로운 남자 가수가 무대 위에 등장했다. 도준희는 다시 지루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고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알아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도준희가 그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이런 그가 지극히 평범한 그녀에게 집착한다는 건 갑작스러운 자연재해처럼 두려운 일이었다. 편의점 쌍화탕과 연고가 원망스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이나 잘 먹고 다니라고 우유 한 팩이나 사다 줄 걸 그랬다.
천성이 유약하지만 정이 많은 우예린은 다친 사람이었던 도준희를 외면하는 선택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문득 도준희가 말했다.
“아까 뭐라 했지?”
흠칫한 우예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도준희의 입에서 나온 엉덩이를 잘 흔든다는 말은 묘하게 천박하고 색스러워서 본능적으로 그쪽은 파고들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던 참이다.
“별말 안 했어요.”
“아까 그 여자 같은 스타일 좋아하냐고?”
우예린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정확히 들었으면서 왜 다시 묻는지 모르겠다. 의기소침해진 우예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도준희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돌연 도준희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준희의 얼굴은 청순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선한 인상이었지만 본성이 드러난 미소만큼은 퇴폐적이었다. 우예린은 그의 미소에서 위협을 느꼈다.
‘악마도 섹시하고 퇴폐적이잖아.’
본래 인생을 망치는 것들은 다 매력적이다. 우예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음속으로 성경 말씀을 외웠다.
기도로 도준희를 물리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워하며 말씀 구절을 줄줄이 생각하고 있는데 도준희의 목소리가 귀를 선명히 파고들었다.
“청순하고 귀엽지.”
“…….”
“왜? 질투해?”
저게 무슨 귀신 콩 까먹는 소리인가. 도준희의 눈이 한순간 묘하게 반짝였다.
“괜찮아, 너도 나쁘지 않으니까.”
“…….”
“엉덩이나 잘 흔들어 봐. 이제 다리로 허리는 꽉 붙잡을 수 있더만.”
도준희의 새카만 눈이 우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엉덩이를 가렸다가 그게 오히려 도준희의 시선을 끄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무료해 보였던 도준희의 눈이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것처럼 반짝였다. 우예린은 금방이라도 그가 달려들 것 같아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어디 가?”
나른한 호랑이처럼 소파에 누운 채 도준희가 물었다. 우예린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배를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어제 라면을 늦게 먹었더니 배가 슬슬 아프네요. 방에 들어가서 쉬어야겠어요.”
보통 사람들에게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지만 상대가 도준희였으므로 소주에 고춧가루 타 먹으라고 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감기일 때 통하는 거였던가?
어쨌든 우예린은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변명을 주워섬기며 천천히 방 쪽으로 물러났다. 도준희는 우예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선을 떼면 달려드는 맹수를 경계하는 것처럼 도준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우예린은 얼추 방과 거리가 가까워졌다 싶을 때 홱 몸을 돌려 달아났다.
우예린은 문득 도망가는 자신이 나무꾼에게 쫓기는 고라니 같다는 생각을 하며 열린 방 문틀에 발을 들이밀었다. 재빨리 방문을 닫고 잠그려는 순간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도준희가 문틈으로 손을 뻗어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기겁하는 우예린의 허리를 붙잡아 올렸다.
순식간에 발이 땅에서 멀어진 우예린이 공중에서 다리를 파닥거렸다. 호랑이에게 목덜미를 물린 고라니의 버둥거림처럼 연약했다.
“왜, 왜요?”
마침내 도준희가 놔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우예린이 의아한 척 물었다. 끔벅이는 눈망울은 순진하고 처연했으나 도준희는 그녀의 눈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커다란 손이 우예린의 엉덩이를 콱 쥐자 우예린이 위로 튀어 올랐다. 튀어 올랐다고 해봤자 도준희의 품에서 움찔거린 정도였다.
“뭐 하는 거예요!”
“엉덩이 얘기했더니, 네가 엉덩이 흔드는 거 보고 싶어서.”
도준희는 벌써 흥분했는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뭘 어쨌다고 흥분을 해!’
“오늘은 위에서 해봐.”
도준희에게 안긴 채로 침대로 걸어가며 우예린이 핑계를 늘어놓았다.
“배, 배 아프다니까요.”
“약손 해주면 되잖아.”
“필요 없어요.”
“약손 안 하고 바로 해도 된다는 거지?”
침대로 가는 그 짧은 사이에 도준희는 벌써 우예린의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주물거렸다. 우예린이 숨을 들이켜자 도준희는 우예린을 안아 든 채로 팬티를 벗겨냈다. 발목에 걸린 팬티를 힐끗한 도준희가 피식 웃었다.
“레이스?”
우예린은 도준희가 웃자 레이스가 달린 미색의 팬티를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튀지 않지만 예쁘고 아기자기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건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이지나가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 승부 속옷이라고 일컬었던 딱 그 스타일이다. 저런 팬티밖에 없어서 그냥 입은 거였는데 도준희는 여성미를 물씬 풍기는 레이스 팬티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흥분한 숨소리가 사나웠다.
“더럽게 귀엽네.”
도준희는 감탄마저도 거칠었다. 도준희의 손에 의해 잠옷이 순식간에 벗겨졌다. 도준희가 가슴을 움켜쥐자, 긴장한 우예린이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팬티가 문제야!’
* * *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한 시경.
달칵. 끼이익.
침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우예린이 더욱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닫았다. 소리 없이 문이 닫히자 우예린은 살금살금 거실을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드레스 룸이었다.
탁. 파앗.
드레스 룸의 문을 닫고 불을 켜자 사방이 환해졌다. 방음이 잘되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온 우예린은 긴장이 풀려 옷장 문을 편하게 열어젖혔다.
이 옷장은 우예린 전용이었다. 웬만한 자취방만 한 이 드레스 룸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많은 옷에 놀랐고 그 옷이 대부분 검은색이라는 데 두 번 놀랐다.
도준희가 입는 옷은 대체로 무채색이었다. 옷은 많지만 몇 번 구경한 우예린은 도준희가 꾸미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
드레스 룸 구경은 언제 입고 처박았는지 모를 피 묻은 가죽 재킷을 발견한 후에 끝났다. 그 이후로는 도준희의 옷을 둘러볼 생각을 접었기 때문이다.
우예린은 옷장 안에 있는 작은 서랍을 열었다. 위아래 속옷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아기자기한 무늬가 있거나 레이스가 있거나 했다. 지금까지는 무의식적으로 무늬가 있는 얌전한 팬티만 입었는데 도준희는 레이스 팬티가 좋은 모양이다.
우예린은 레이스 팬티를 들어 서랍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레이스 팬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당분간은 멀리할 생각이었다.
한숨을 쉬고 일반 팬티를 집어 들려던 우예린은 멈칫했다. 잡았던 팬티를 내려놓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옆에 있는 옷장은 도준희의 옷장이었다. 반듯하게 서있는 고급 옷장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문고리를 붙잡아 열었다.
무채색 티셔츠와 청바지, 편한 운동 바지가 드러났다. 무늬 없는 단순한 스타일이었지만 하나하나가 유명 브랜드였다. 우예린이 한참 손대지 않았던 도준희의 옷장을 연 것은 그런 옷들을 확인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옷장 아래에 위치한 서랍들을 열어보았다. 양말 칸, 벨트 칸, 사놓고 처박아 놓은 것 같은 넥타이가 눈에 띄었다. 마지막 서랍을 열자 우예린이 찾던 게 나왔다. 잘 개어진 남자 팬티 칸이었다.
‘여기 있었네.’
우예린은 손가락을 들어 가장 위에 있는 팬티의 끝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떨떠름한 눈으로 팬티를 응시했다. 라텍스 재질의 검은 속옷이다.
도준희는 탄력 있는 사각팬티를 주로 입었다. 엉덩이와 성기를 잘 감싸주는 팬티였다. 우예린은 고개를 갸웃하고 검은 속옷을 내려놓고 다시 속옷 뭉치를 뒤적였다.
미친개 떨쳐내기 프로젝트. 이 계획의 관건은 도준희가 느끼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정체 모를 매력을 떨어뜨리는 거였다.
우예린은 속옷 칸 가장 깊은 곳에서 검은색 면 팬티를 꺼냈다. 다른 팬티가 라텍스 재질로 매끈하다면 이건 천이라 그런지 헐렁거렸다. 툭 튀어나온 남자 팬티 특유의 모양이 아니었다면 짧은 반바지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우예린은 검은 팬티를 든 채 망설였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이지나가 진저리를 치는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이지나는 남성 편력이 대단한 편이었고 그만큼 다양한 남자를 만났다. 어떻게 아냐면, 그녀가 본인이 겪은 일을 술자리 안주로 심심찮게 꺼낸 걸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이지나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은 대부분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만큼 신기하고 재밌는 얘기들이라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집중이 잘되었다.
어쨌든 그녀가 한 얘기 중에 워낙 충격적인 탓에 머릿속에 콕 박힌 일화가 있다.
“벗겨보기 전까지는 그게 크냐 안 크냐만 생각했지. 내가 의심이나 했겠니. 그런 게 나올 줄은……. 분명 여자 취향의 티 팬티였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당연히 쫓아냈겠지, 예상했는데 이지나는 머쓱한 얼굴로 대답을 피했다.
“매력이 확 떨어져서 헤어졌지 뭐.”
캐물었더니 그렇게 대꾸했고, 헤어진 건 사실인 모양이었지만 정작 그날 밤은 거사를 치른 게 분명한 눈치였다.
“그 후부터는 남자로 안 보이더라고.”
아무튼 그때 이지나가 한 말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그래, 이거야.’
팬티를 내려다보았다. 툭 튀어나온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억지로 팬티를 꼭 쥐었다.
* * *
일요일 밤. 우예린은 잠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컴퓨터에 비해 느리고 성능이 좋지 않아 급할 때만 사용하는 거였다. 그리고 김 대리가 연락해 얼른 봐달라고 하는 일은 나름 급한 일에 속했다.
김 대리가 보낸 파일을 열어보니 최 과장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였다. 또 까일까 봐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고작 입사한 지 1년도 안 되는 자신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본다고 뭐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그래도 우예린은 열심히 보고서를 훑어보고 오타와 의문점을 표시하여 김 대리의 메일로 보냈다. 이 정도면 내일 출근할 때 김 대리에게 싫은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왕 노트북을 켠 김에 포털 사이트나 둘러볼까 싶어 인터넷 창을 켰다. 뒤를 흘끗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도준희는 아까부터 전화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오래도록 통화했으면 좋겠다.’
포털 사이트의 재미난 글들을 읽는 우예린의 눈이 반짝거렸다.
한참 노트북에 빠져있던 때였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싶더니 윗옷이 들춰졌다. 우예린은 히끅, 숨을 들이켰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뻔했다.
언제 통화를 끝내고 들어온 건지, 움직임 한번 귀신같았다.
‘헉!’
크고 서늘한 손이 등을 덮고 등줄기를 따라 내려왔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 더운 여름인지라 솔직히 말하자면 도준희의 서늘한 손은 퍽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손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움직이는지 알기에 우예린은 바싹 긴장했다.
‘흐읏.’
도준희가 침대 매트에 눌린 가슴을 비집고 손을 넣어 주물럭거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도준희의 손놀림은 거리끼는 게 없어 지나치게 천박하고 야한 느낌이 났다.
도준희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젖꼭지를 비틀거나 키스할 때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느 정도냐면, 우예린이 마음 속에 색마가 사는 게 아닐까 의심하며 우울해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마음에 색마가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도준희가 색마인 건 분명했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사람이 색마가 아니면 뭐겠는가.
주방에서 물을 마시다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도준희를 받아들인 후로, 그가 다가오면 긴장을 풀 수가 없다. 도준희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야한 공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침대 매트에 부러 가슴을 눌렀는데도 도준희는 용케도 끝에 있는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틀었다.
어느새 도준희가 양손을 매트와 가슴 사이에 넣어서 우예린은 상체를 엉거주춤 들어 올렸다. 헐렁한 잠옷은 도준희의 손이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도준희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우예린의 젖꼭지를 자비 없이 꼬집었다.
“헉!”
우예린은 결국 참았던 신음을 흘렸다. 등 뒤로 도준희가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뒤이어 느긋하게 우예린의 하체를 더듬은 도준희가 잠옷 바지를 붙잡아 내렸다. 잠옷 원피스는 도준희가 하도 들춰대 옷장에 박아놓았는데 잠옷 바지라고 큰 차이점이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바지는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다는 양 아래로 쑥 내려갔다.
멈칫.
우예린은 우뚝 멈춘 도준희의 손에서 후다닥 벗어나 침대 머리맡에 등을 딱 붙였다. 그 바람에 침대 가로 밀려난 노트북이 떨어질 듯 기우뚱거렸다.
재빨리 노트북을 붙잡아 덮고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도준희를 바라보자, 도준희는 아직까지도 멍하게 우예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입고 있는 팬티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남자 팬티를 발견한 도준희의 입매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우예린이 억지로 라면을 먹고 얼굴을 붓게 만들었던 그날도 변함없던 얼굴이 말이다.
‘통했어.’
드디어 도준희를 질리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예린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도준희를 주시했다. 도준희가 메스꺼운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뭐가요?”
“뭘 입고 있는 거야.”
떨떠름한 목소리에 우예린은 하반신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릎까지 벗겨지다 만 잠옷 바지와 검은색의 헐렁한 팬티가 보였다.
“팬티요.”
“어디서 났어.”
“옷장이요. 도준희 옷장.”
“……변태야? 왜 남의 걸 입고 있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통풍이 잘된대요, 이게.”
“통풍 잘되는 빤스가 그것만 있냐?”
“그건 아니지만 이건 유난히 통풍이 잘 돼요.”
“…….”
“저번에 그거, 정……조대 찬 이후로 통풍이 잘 되는 게 좋더라고요.”
우예린은 정조대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도 민망하여 어물거렸다.
‘좋은 핑곗거리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통풍이 전혀 안 된다고 하더라도 남자 팬티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 팬티 특유의 툭 튀어나온 부분을 흘끗했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정조대만큼은 아니더라도 흉하기 그지없었다. 우예린은 팬티에서 시선을 떼고 도준희의 눈치를 살폈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팬티를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거 입지 마.”
“왜요?”
“이상해.”
도준희가 처음으로 보이는 질색하는 반응에 우예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음기 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싫어요.”
도준희의 눈이 가늘어지자 우예린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섭다. 하지만 무섭다고 물러나면 언제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통풍이 잘돼서 이제 이거 말고 다른 건 못 입겠어요.”
“…….”
“여자로 안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도준희라도 내겐 건강이 더 중요하단 말이에요.”
이 정도면 KO패다. 우예린은 자기가 말하고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사랑하는 남자가 티 팬티를 입고 괄약근의 건강을 위해 존중해 달라고 하면 정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도준희를 떼어내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수치스러워도 되는 걸까. 우울해진 우예린은 한숨을 쉬다가 흠칫했다. 스스로가 한 말이 충격적이라 도준희를 깜박 잊어버렸다.
도준희는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하여 그를 힐끗했다. 도준희의 아름다운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진 채였다.
“별…….”
혀를 찬 도준희가 몸을 돌려 나갔다. 우예린은 바지가 반쯤 벗겨진 상태로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계획은 적중했지만 어쩐지 기대와 달리 상쾌하지 못하고 울적했다. 자유와 인권을 맞바꾼 느낌이라 해야 하나. 주섬주섬 바지를 올려 입고 노트북을 마저 할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는 게 나을 듯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도준희의 질색한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 얼굴을 흩트렸다.
우울한 기분과 달리 잠기운은 금방 몰려들었다. 요 며칠, 도준희와의 정사로 인해 하루 여섯 시간도 채 자지 못했던 탓이었다. 긴장하느라 심력까지 소모했더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잠들기 전, 우예린은 몽롱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잘된 거야. 내일부터는 더 편해지겠지…….’
까무룩, 잠이 든 우예린의 입술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다음 날, 우예린은 오랜만에 상쾌하고 가뿐한 기분으로 회사 일을 마쳤다. 어젯밤, 방을 박차고 나간 도준희는 새벽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 덕에 우예린은 꿈도 꾸지 않고 질 좋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충분히 자면 이런 상태가 되는구나.’ 하고 우예린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평온한 일상이 한층 소중하게 느껴진 건 덤이었다. 간밤의 수치스러움과 싱숭생숭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옅어지고 역시 잘했다는 생각만 남았다.
계획이 하나 유효하더라도 몇 번은 계속 반복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각오했지만 어제 도준희의 표정을 보면 이대로 끝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지나도 그랬잖아. 한번 정떨어지면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안 잘생겨 보인다고.’
아직도 도준희가 그녀를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정이 떨어졌으니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퇴근 후 남의 집에 가는 일도 없을 거고.’
우예린은 펜트하우스를 눈앞에 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준희가 언제쯤 짐을 빼라고 할까. 보통 사람이라면 민망함과 미안함을 느낄 거다.
다만 도준희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게 문제였다. 여기에 억류시킨 건 도준희지만 그 거칠 것 없는 미친 성정으로 보건대 흥이 떨어졌으니 꺼지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집에 없을지도 모르고.’
가능성 있는 상상을 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우예린은 현관에 떡하니 자리한 도준희의 신발을 보고 멈칫했다.
차라리 도준희가 집에 없는 게 나을 텐데. 그 틈에 짐을 정리하면 서로 얼굴 붉히며 어색해질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준희는 집에 있었고, 그건 지금 당장 얼굴 보며 얘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때마침 도준희가 커피 잔을 든 채 방에서 나오다 우예린을 발견했다.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왔어?”
도준희는 그간 그녀가 펼쳤던 모든 상상의 나래와 달리 태연하게 인사하고는 거실을 향해 손짓을 했다.
“네?”
“선물 사 왔으니까 풀어봐.”
그제야 도준희를 신경 쓰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쇼핑백이 보였다. 거실 소파 옆에 있는 쇼핑백은 크기가 컸는데 뭐가 들었는지 안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정이 떨어져 데면데면하게 굴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선물이지? 우예린은 예상외의 상황에 우물쭈물하다가 도준희가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 쇼핑백을 확인했다.
안에 손을 집어넣자 물건을 포장할 때 쓰는 비닐이 느껴졌다. 고개를 갸웃하고 물건을 쇼핑백에서 빼낸 우예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
비닐 안에 있는 건 옷가지 같은 거였다. 비닐을 뜯어 옷가지를 펼치자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팬티였다. 회색 남자 팬티.
굳어진 우예린은 쇼핑백에서 또 하나를 꺼냈다. 빨간색이긴 하지만 먼저 꺼낸 것과 똑같은 팬티였다. 우예린의 앞에는 비닐 포장지 두 개와 팬티 두 개가 펼쳐진 채였다.
우예린은 쇼핑백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설마, 싶어 쇼핑백을 거꾸로 뒤집어 물건을 다 빼냈다. 앞에 수북하게 쌓인 건 모두, 팬티였다. 망연자실한 채 자리에 앉은 우예린에게 도준희가 다가왔다.
우예린은 간신히 물었다.
“이게 뭐예요?”
“뭐긴, 팬티지.”
“그러니까 왜 팬티를…….”
그것도 남자 팬티다. 도준희가 우예린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거지도 아니고, 내가 입던 거 입지 말고 새 거 입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우예린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않으면 대놓고 얼굴을 찌푸릴 것 같아서였다.
“그런 깊은 뜻이…….”
“여자용 사각팬티 있으면 사 오려 했는데 없어서 그냥 이거 사 왔어. 새끼들이 그런 것도 안 만들고 뭐 하는 건지.”
피식, 웃는 도준희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별걸 다 한다. 남의 빤스나 사 오고.”
“…….”
“근데 표정이 왜 그러냐? 내 거 살 때보다 고심해서 샀는데. 싫어?”
도준희의 표정이 비딱해지자 입만 웃고 있던 우예린은 얼른 활짝 웃어 보였다.
“고,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도준희의 표정을 흘끗하자 여전히 비딱해서 우예린은 들뜬 목소리를 냈다.
“와, 기뻐라.”
즐거운 척을 하며 바닥에 흩어진 속옷을 다시 주섬주섬 종이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정리 좀 하고 올게요.”
어색하게 드레스 룸을 손으로 가리키고 종이 가방을 품에 안은 채로 걸어갔다. 도준희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했지만 그 행동까지 저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탁.
무사히 드레스 룸에 들어가 문을 닫은 우예린이 바닥으로 주륵 미끄러졌다. 종이 가방 가득 담긴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이 미친 또라이야…….”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중에도 문밖의 도준희가 들을까 봐 목소리는 한없이 작았다.
자신 같으면 정이 떨어져도 한참 전에 떨어졌을 텐데 도리어 남자 팬티를 사 오다니. 그것도 심지어 비싼 브랜드다.
‘저 사람의 정신세계는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어.’
그의 사고방식에 경악하는 한편,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기대를 했던 만큼 실망감도 컸다. 어제 질색하는 표정은 뭐였지? 순간 도준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남자 팬티 자체가 아니라 자기 것을 입는 게 이상했나 보다.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오늘 도준희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예린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아니야, 내 생각을 눈치채고 일부러 저렇게 구는 것일 수도 있잖아? 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우예린은 자신 없이 중얼거리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포기하긴 이르다. 애매하긴 하지만 반응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니 그것만으로도 몇 번 더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억지로 힘을 북돋운 우예린의 시선이 종이 가방 속 속옷으로 향했다.
* * *
일주일 후 출근하는 아침, 우예린은 일어나자마자 씻고 나온 다음 팬티를 입다 말고 흠칫했다. 그녀의 손에는 파란색 남자 팬티가 들려져 있었다.
도준희가 선물이라고 사다준 그 팬티 중 하나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남자 팬티를 입으려 했던 스스로가 당황스러워 눈을 끔벅였다.
우예린의 사각팬티로 질색했던 도준희는 처음에만 그랬고 그 다음부터는 바지를 내렸을 때 사각팬티가 나타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기가 입던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효과가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으니 이제 그만해도 될 텐데 우예린은 여전히 남자 팬티를 입고 있었다.
‘요즘 날씨에 딱 좋단 말이지.’
지금은 장마가 시작되는 여름 즈음, 덥고 습한 날씨에 꽉 끼는 여자 팬티보다 남자 팬티가 편하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우예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불쾌지수가 치솟는 요즘 날씨를 생각하고는 입던 팬티를 조용히 입었다. 그 위로는 펑퍼짐하고 긴 치마를 걸쳤다. 멋이나 상식보다는 편함이 중요한 날씨였다.
나가려던 우예린은 빈손을 보고 아차, 했다.
‘핸드폰.’
핸드폰은 아직 침실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우예린은 협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쥐고 살금살금 문으로 걸어갔다.
방을 나가기 전 침대를 흘끗했다. 도준희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자고 있었다. 아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하고 다니는 꼴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마초 아저씨랑 비슷한데 추해 보이지 않는 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제 새벽, 출근을 해야 하니 그만하자고 울먹였던 게 그의 발작 버튼을 눌렀던 게 틀림없었다. 이미 세 번이나 사정했던 도준희가 갑자기 더 집요하게 구는 게 아닌가.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헐떡이는 우예린의 귓가로 악마 같은 음성이 흘러들어왔었다.
“그만둬, 회사. 응? 그러면 매일 아침에 힘들게 일어날 필요 없잖아. 대신 하루 종일 뒹굴 수 있어.”
‘누굴 발정 난 개 취급하는 거야!’
싫다고 고개를 젓노라면 도준희가 젖꼭지를 세게 깨물어 허리가 강하게 튀어 올랐다.
처녀를 유혹하여 파멸로 이끌었다는 악마처럼, 도준희의 목소리가 꼭 그랬다. 내용은 천박하고 야하기 그지없는데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아서 나중에는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다른 감각에만 집중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겨우 출근이 가능하게 됐는데 도준희의 스킬로 무너질 뻔했다는 게 우예린은 믿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도준희와 자는 건 나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 편이지.’
언젠가 도준희는 침대 위에서 너와의 잠자리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우예린은 남의 말을 함부로 거짓이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코웃음을 쳤다.
내 평생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처음 들어본다고 생각하면서 도준희 앞에서는 믿는 척을 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점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준희의 섹스 스킬은 시간이 지날수록 황홀해졌다. 그와 하고 난 뒤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까지 발전할지 상상하기 두려웠다.
‘이러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
우예린은 정신을 못 차리게 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했다. 도준희와의 섹스는 격렬한 데다가 터무니없이 길어서, 우예린이 생각했던 일반적인 잠자리와 다른 점이 많았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미묘하고도 찝찝한 죄책감이 우예린을 괴롭혔다.
“잠자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 뒤에 해야 하는 거야. 그게 하느님의 뜻이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상경하는 우예린이 부모의 감시를 피해 남자랑 놀아날까 봐 걱정이 됐는지 우 목사와 권 집사는 그녀가 상경할 때까지 매일같이 그녀를 불러 설교를 늘어놓았다.
초경을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혼전 순결의 중요성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우예린이다. 지금의 찝찝한 죄책감은 그 기억들로부터 기인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위험한 미친개인 도준희에게서 안전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보름에 한 번, 부모님이 자신을 보러 올라온다. 대체로 겨울과 가을 사이에 올라오셨으니 그 전에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얼른 출근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은 우예린은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우예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마가 끝물인지 오늘 날씨는 어제에 비해 쾌청했다. 더운 건 여전했으나 비가 오지는 않을 것 같다.
‘바람이 좀 세네.’
정류장 뒤, 유행에 뒤처진 옷을 팔고 있는 옷 가게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잠깐 노래에 집중하던 우예린은 곧 기다리던 버스가 오자 버스에 올라탔다.
우예린이 올라탄 버스의 문이 닫히자 노래가 끝난 라디오에서 낭랑한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전국이 태풍의 영향권에 들었다고 하니 바람을 조심하셔야겠어요. 태풍이 아무 피해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이현서 씨의 「태풍아 안녕」 들려드리겠습니다.
우예린은 일을 하다가 결국 부채를 들었다. 한 손으로는 마우스를 클릭하고 다른 손으로는 부채를 부치자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선풍기라도 틀어야지 안 되겠다.’
지난번에 스탠드 선풍기 세 대를 창고에서 꺼냈던 것을 기억해낸 우예린은 선풍기를 찾아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선풍기 세 대는 이미 몇 명의 상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남은 직원들은 우예린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을 하는 중이었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직원들을 더위 속에 그냥 방치할 정도로 이 회사의 직원 복지가 형편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풍기조차 없어 허덕이는 사무실 풍경이 연출되는 건 바로 오늘 아침, 에어컨이 고장 났기 때문이었다.
“수리 업체 언제 온대?”
김 대리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이 주임에게 물었다. 선풍기를 틀었다지만 에어컨의 서늘한 공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에어컨 고장을 발견하고 수리 업체에게 전화했던 이 주임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세 시 넘어서 올 거라고는 하는데요.”
“지금이 두 시 반인데 좀 일찍 오면 어디가 덧나나.”
사실 당일에 수리 업체가 온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었지만 더위에 뇌가 녹아내린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 있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우예린의 부채질이 좀 더 빨라졌다. 도준희의 펜트하우스는 항상 쾌적하고 시원한 공기를 유지했기에 알게 모르게 그 쾌적함에 길들어 있던 그녀는 에어컨 없는 덥고 불쾌한 공기가 곤욕스러웠다.
다행히도 에어컨 수리 업체는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안심한 얼굴로 업체 직원들이 에어컨을 수리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품과 연결선이 노후화된 거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수리 업체 직원들이 오기 전에는 그들이 오기만 하면 바로 고쳐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리 시간이 꽤 길어졌다. 사람들이 불쾌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얼굴로 땀을 뚝뚝 흘렸다. 다들 일은 뒷전이었다.
달칵.
과장실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부터 최 과장이 나왔다. 넥타이를 느슨히 한 채 위 단추가 두 개 정도 풀려있었다. 소매를 접으며 나온 최 과장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옷차림에 칼 같은 최 과장도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하기야 폐쇄된 과장실도 어지간히 더웠을 터였다.
“과장님, 선풍기도 안 쓰시고 덥지 않으세요?”
김 대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 쓰라며 선풍기를 양보했던 최 과장의 눈썹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조금 찌푸려진 상태였다.
그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사원들은 물에 절은 파김치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수리가 다 될 때까지 카페에 가있지.”
무뚝뚝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김 대리가 어색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할 일이 좀 남아있는데…….”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는 머리도 안 돌아가. 효율성 없게 하느니 조금 쉬는 게 좋아.”
반신반의하던 사원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점심시간이 끝난 이후의 휴식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이 사무실의 최고 결정권자인 최 과장의 말이니만큼 문제도 없을 터.
“그러면 옥상 카페에 갈까요?”
지수련이 낭랑한 목소리로 제안하자 최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일어났다. 그 뒤를 김 대리가 밝은 얼굴로 따랐고 눈치를 보던 사원들도 작게 환호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느지막이 엉거주춤 일어난 우예린도 지수련과 함께 이동했다.
“과장님은 역시 융통성이 있어.”
많이 더웠는지 옥상 카페로 향하는 지수련의 표정도 활기찼다.
옥상 카페는 회사 건물 옥상에 있는 카페인데 개방형이었다. 이런 날씨에 웬 개방형 카페인가 싶었으나 바람이 잘 통하고 환기가 잘되어서 그런지 오히려 폐쇄된 카페보다 시원했다.
사원들이 다 올라오고 나서 음료를 시켰다. 계산은 최 과장의 카드로 이루어졌다. 다 같이 얻어먹는 거니 묻어갈 만하지만 우예린은 사원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싶어 쭈뼛거렸다.
“우예린 씨, 뭐 마실 거야?”
주문을 맡은 김 대리가 재촉했다.
“그냥 시원한 커피 주세요.”
최 과장을 흘끗하자 그는 어느새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과장님, 잘 마시겠습니다.”
우예린의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최 과장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예린은 지수련과 함께 주문한 음료를 받아 들고 자리를 찾아다녔다. 이미 앞선 사원들이 안쪽 자리를 다 차지한 터라 외부 자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가게 밖에 있는 파라솔 아래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안쪽보다는 더웠지만 사무실보다야 천국이었다.
빨대를 쭉 빨자 시원한 커피가 마른 입 안을 적셨다. 하아, 우예린과 지수련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근무 중에 옥상에 온 건 처음이야.”
기대하지 않았던 여유에 우예린이 들뜬 목소리로 감탄하자 지수련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난 몇 번 와봤어. 커피 사준다고 해서.”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사준 이들은 회사 남사원들일 것이다.
지수련이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남사원들은 업무 중 휴식을 핑계로 지수련을 불러냈다. 핑계인지 아닌지 우예린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에게는 같은 제안을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순수한 호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린아, 요즘 무슨 일 있어?”
“응? 무슨 일?”
“많이 피곤해 보여. 표정도 안 좋고.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회사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쉬었더니 지수련이 이상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예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일은 무슨……. 괜찮아, 날이 더워서 그래.”
남사스러워서 이지나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일이었다. 한마디로 그녀의 상황을 정의하면 이거다. 짝사랑하던 남자의 정체를 모르고 사귀었다가 아름다운 이별을 바라며 회사만 겨우 다니고 있는 신세.
이지나는 부러운 연애사부터 추잡스러운 연애사까지 얼추 알고 있는 터라 말하기가 수월했지만, 인생 탄탄대로에 남자 친구에게까지 공주 대접을 받는 지수련에게 말하기엔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염려하는 지수련의 마음이 고마워 희미하게 웃은 우예린이 옥상 난간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카페 주위로 공원처럼 꾸며놓은 옥상은 구경하기에 좋았다.
난간 너머로는 세련된 빌딩 산이 높게 솟아있었다. 하늘은 꾸물꾸물하니 좋지 않았지만 세찬 바람은 마음속에 있는 고민을 찌꺼기까지 모두 쓸어갈 것처럼 시원했다.
“밖에 구경할래?”
우예린은 충동적으로 벌떡 일어나 난간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린 지수련이 그녀를 따라왔다.
우예린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손가락처럼 작게 보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녀의 존재가 아주 작아 보였다.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조차 별것 아니게 느껴졌다.
“하아, 속이 아주 시원하다.”
“날씨는 별로 안 좋은데. 기분 좋나 보다.”
지수련이 피식 웃자 우예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거고, 나쁜 일이 나중에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에어컨이 고장 났지만 덕분에 이런 생각지도 않은 휴식을 갖게 된 것처럼.
도준희와의 인연 또한 나중에 어떻게 작용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하나는 깨달았다.
‘겉모습만 보고 홀리지 말 것.’
천사의 외면 속에 최악의 악마가 들어앉아 있을 수도 있으니.
“미친놈…….”
“어머, 예린이 네가 욕하는 거 처음 들어. 누구? 김 대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지수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는 미친놈이 하나 있어.”
남자랑 눈 맞을까 걱정된다며 정조대를 채우는 미친놈이.
우예린이 씁쓸하게 웃고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유였다. 앞으로 계획을 착실히 실행한다면 완전히 자유가 될 터였다.
바람이 휘이잉, 불어오자 우예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상찮게 거센 바람이었으나 우예린은 왠지 가슴이 더 시원해졌다.
“하아, 좋다.”
중얼거리는 그녀의 치마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김 대리가 옆에서 수다를 떠는 가운데 최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커피를 마시니 사무실에서의 답답한 기분도 한결 가셔 미묘하게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 난간 쪽에 서있는 우예린과 지수련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우예린에게 유독 시선이 갔다.
의도치 않게 과장실에서 우예린의 치마 속을 본 이후로 때때로 그녀가 시선에 걸려 곤혹스러웠다.
우예린이 차고 있던 정조대에 대해선 그 이후에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얌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던 그 흉물스러운 물건은 알고 보니 더 기괴한 물건이었다. 물건의 유래야 서양에서 전쟁에 나간 사이 와이프가 걱정되어 채우는 물건이라고 하지만, 요즘 그런 이유로 저런 걸 하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은밀한 성생활에 사용되는 물건밖에 더 될까.
‘남의 사정에 관심 둬봐야 뭐 해.’
평소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억지로 관심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럼에도 우예린에 대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우예린을 바라보는 최강현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커피 잔에서 입을 떼며, 우예린에게서도 억지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돌연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더니 우예린의 치마가 펄럭였다. 그 바람에 안이 살짝 보이고 말았다.
최강현은 눈을 의심했다. 안에 입은 파란 팬티는 그의 것과 상당히 유사해 보였다. 또 한 번 치마가 펄럭였다. 확실하다. 최강현의 눈이 홉떠졌다.
“과장님.”
“……어?”
“뭘 그렇게 보고 계신 거예요?”
최강현이 제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김 대리가 의아하게 물었다. 최강현은 김 대리가 혹여 우예린을 볼까 싶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김 대리는 이미 우예린을 본 상태였다.
곧이어 김 대리의 의뭉스러운 시선이 굳어있는 최강현에게 향했다.
“지수련 씨 보고 계셨어요? 과장님이 보시기에도 괜찮은 여자죠?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잖아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최강현의 어깨가 느슨해졌다.
“이만 내려가지.”
길어질 듯한 김 대리의 말을 끊고 일어서자 김 대리도 본인의 커피 잔을 들고 일어났다. 옥상을 내려가기 전, 흘낏 뒤를 돌아보자 난간에서 수다를 떨던 우예린도 돌아오는 중이었다.
최강현은 안도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쯧, 저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그는 음전하고 말이 잘 통하는 여자가 취향이었다. 우예린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성실하고 상식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던 부하 직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의심스러웠다.
‘저 여자, 도대체 뭐야?’
이제는 그녀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사무실에 내려가자 에어컨 수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과장실로 들어간 그는 프린트기를 작동시켰다. 퇴근 시간 전, 탕비실에는 전에 없던 경고문 한 장이 붙었다.
[매직미러 앞에서는 행동을 주의할 것.]
* * *
3일 후, 태풍이 지나간 한반도는 덥지만 맑은 하늘을 되찾았다. 화창한 하늘과 달리 우예린은 굳은 얼굴로 펜을 들어 다이어리에 분명하게 X자를 표시해 넣었다.
미친놈 떨쳐내기 프로젝트 중 더러움으로 도준희를 퇴치하겠단 생각으로 만든 항목에 X자가 그어졌다. 위생 문제는 기분만 더럽지 소득이 하나도 없었다.
우예린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싫어하는 성정으로, 우스꽝스러운 꼴을 들키는 것도 매우 싫어했다. 학생 주임 선생에게 괴롭힘 당할 때도 누군가 이걸 알고 그녀를 이상하게 볼까 봐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을 해댄 적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방귀나 트림으로 정떨어뜨리기 방법은 굉장히 난도가 높은 방법이었다.
‘하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그럼에도 우예린은 시도했고, 시도했으니 성공하기라도 했으면 나았을 텐데 결과는 장렬한 실패였다. 도준희는 가시가 뾰족뾰족 난 철옹성 같았다.
트림을 나오게 하려면 탄산음료가 즉효라는 걸 알고 있기에 시도한 날에 도준희가 말했다.
“너, 앞으로 콜라 먹지 마.”
도준희치고는 완곡하지만 의미가 분명한 말이었다.
다음에는 고구마를 사와 가득 삶아 먹었다.
“고구마 먹었냐?”
정색하며 묻는 도준희를 보자, 우예린은 자신이 이 계획만큼은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준희를 떨쳐내기에 앞서 너무나도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도준희가 미친놈답게 예상 못 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렇게 정색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표정에 용기를 내서 콜라와 고구마를 추가로 사려던 우예린은 인간의 존엄성이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 계획이 완전히 성공하기까지 겪을 고난과 수치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이런 데 힘쓸 바에는 차라리 다른 걸 시도하자.’
결국 위생 공격은 우예린이 포기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X자가 선명히 쳐진 위생 공격에서 애써 시선을 뗀 우예린은 프로젝트 리스트를 다시 살폈다.
이미 민낯 공격도 실패한 상황이다. 팬티 공격은 뜻밖에도 남자 팬티의 효용성만 남긴 채 실패했다. 과연 이게 성공할 수 있을까? 우예린은 고개를 젓고 꺾이려는 의지를 북돋았다.
‘아직 할 수 있는 건 몇 개 남았어.’
그녀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다음 단계는 금전 공격이었다. 자고로 옛날부터 진정한 내 사람을 가리는 게 돈이라고 했다.
그녀는 부모님 말씀을 생각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 일상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라고 얘기하며 한 말이었다.
“내가 이 교회 지을 때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는데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하다고 생각한 놈도 등을 돌리고 연락을 끊는 거다. 그때 알았지. 돈 앞에서는 친구도 가족도 없다는 걸.”
우 목사가 그때 일을 투덜거리면 그녀의 모친인 권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액수가 좀 크기는 했지.”
우예린은 물었다.
“그래도 초기 자금은 다 모으신 거잖아요. 이렇게 멋진 우리 교회가 생겼으니까요. 큰돈을 덥석 빌려주신 친구분이 계신 거 아니에요?”
우 목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고 권 집사는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다 은행 거란다.”
“아…….”
“아무튼 너 서울 올라가면 신난다고 쏘다닐 생각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라. 그래야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거야.”
우 목사의 엄격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쿡쿡 쑤셨다. 우예린은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한눈팔지 않고 공부는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는데 부족했던 걸까? 훌륭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만난 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상종 못 할 미친놈이다.
요즘 들어 마사지 샵이 종종 생각이 났다. 자신을 희롱하는 남자들의 뒤통수를 차던 도준희의 악마 같은 얼굴과 기괴할 정도로 그를 두려워하던 마사지 샵 직원들.
도준희는 본인이 조폭이 아니라 했지만 우예린에겐 다를 것도 없었다. 덜덜 떨던 마사지 샵 직원들. 나중엔 자신이 그 꼴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미친놈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엮였으면 벗어나는 게 차선이다. 우예린은 오늘도 의지를 다지며 세부 계획을 짰다.
사실 우예린은 국민학교 때부터 누군가에게 돈을 꿔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 친구들이 간식을 사기 위해 백 원, 이백 원 쉽게 빌릴 적에도 그랬다.
돈이 없으면 차라리 간식을 포기했다. 소액이었으니 빌려달라고 했다면 빌려줄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무슨 조화인지 우예인은 돈 빌려달란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를 못했다.
그런고로 금전 공격은 그녀에게 쉬운 방법이 아니었으나 위생 공격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간의 존엄성을 내려놓은 우예린은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이미 갖은 수치심은 다 겪었는데 염치없는 모습 정도야 뭐, 어떨까 싶기도 했다.
‘우울한 얼굴, 우울한 얼굴.’
일단 우예린은 밑밥부터 깔았다.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으로 누구에게 하는 건지 바쁘게 문자를 치는 그를 힐끗하며 조심스럽게 다리를 모았다.
눈치를 보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한숨 끝이 지렁이 기어가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하아…….”
도준희가 그녀를 곁눈질했다. 우예린은 시선을 느끼고 의도적으로 깊은 한숨을 더 내쉬었다. 마침내 도준희가 미끼를 물었다.
“왜 그래?”
“……아니에요.”
“나가고 싶어?”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화창한 주말인데 나들이 하나 없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지겨운 이 펜트하우스에 갇혀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가슴이 답답한 차였다.
오로지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일념으로 참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우예린은 도준희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번뜩이는 걸 발견했다.
여기서 우예린이 그렇다고 한다면 도준희는 입매를 비틀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왜, 이제 좀 밖에 나가서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싶어? 얼굴 반반하고 몸 좋은……. 응? 이젠 내가 질린다 이거야?’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쳐졌다. 자신을 봐왔다면 자신이 남자와 친하기는커녕 대화조차 잘 못 한다는 걸 알 텐데 꼭 저런 의심을 해대었다.
‘미친놈이라서 그런 거겠지.’
고개를 끄덕여 이해한 우예린은 나들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도준희의 눈빛이 유순해졌다.
“그럼 왜?”
“……하아.”
“한숨 쉬면 복 나간다.”
우예린은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돈 빌려달라는 말을 하는 건데 너무 덥석 말하면 노린 티가 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아.”
“우예린.”
“네?”
“한 번만 더 한숨 쉬면 키스한다.”
입을 딱 다물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얘기해.”
핸드폰을 매만지는 도준희의 목소리가 아래로 묵직하게 깔리자 우예린은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도준희는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 같았다.
우예린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그러나 다소 급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뭔데?”
“빚 때문에요. 갚아야 할 빚이 조금 있거든요.”
“네가 빚?”
“네, 그래서 얼른 갚으라고 하니까 걱정이 많이 돼서…….”
“사채야?”
“아.”
‘아무래도 사채를 썼다는 게 가장 꺼림칙하겠지.’
자신이 생각한 것도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채, 둘은 보증.
우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핸드폰을 보던 도준희가 고개를 들었다.
“이름.”
“네?”
“이름 대봐.”
“무슨…….”
“네가 쓴 업체 이름 대보라고.”
업체 이름이 이 상황에서 왜 필요한 거지? 당황해서 눈을 끔벅거리는 우예린를 보고 도준희가 손끝으로 미간을 긁었다.
“아는 업체면 적당히 타협되니까. 네가 썼으면 어차피 충남 아니면 서울에 있는 업체일 거 아냐.”
설마.
“……그러면 다 알아요?”
“다는 아니더라도 이 바닥이 그렇게 넓은 건 아니라서, 굵직한 곳은 웬만하면 알고 자잘한 곳은, 뭐…….”
도준희가 씨익 웃었다. 자잘한 곳이라면 대화도 필요없다는 의미 같은데, 확대 해석일까?
아차, 했다. 일반인에게 사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십여 년 전 대통령 정권 때, 폭력배들이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고 하지만 아직은 그 잔재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시달려 오거나 티브이를 통해 접했던 이들은 사채라면 진저리를 쳤다. 그런 사채가, 같은 조폭들은 무섭지 않은 걸까?
그럴 리가 없겠으나 우예린은 혼란스러웠다. 도준희라면 정말 업체를 찾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즉석에서 계획을 수정했다.
“사채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친구에게 빌렸어요. 근데 그 친구도 사정이 어려워져서…… 얼른 갚아야 할 거 같은데 저한테 돈이 없어요.”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준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이었다.
“얼만데.”
우예린은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돈이 영 적으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테고 액수가 터무니없이 크면 의심을 살 것 같았다.
‘딱 적당한 액수가 어느 정도지?’
우예린은 그녀가 10년을 일해도 모으지 못할 액수를 떠올렸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니야?’
흘끗 도준희를 보자 쳐다보고 있어서 가슴이 덜컹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말처럼 평생 해본 적 없는 거짓말을 하려니 속이 탔다.
눈 딱 감고 이번 한 번만 거짓말 해보자.
“1, 1억이요.”
“1억?”
우예린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뱉은 액수에 압도된 탓이었다. 부모님이 충남 유흥 거리에 세운 교회도 1억이 살짝 넘었다. 서울에서도 1억이면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너무 크게 불렀나?’
도준희가 안 믿으면 어떡하지. 살짝 후회하며 도준희를 응시하자 도준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집이라도 샀냐?”
“그게…… 집안 문제라서.”
도준희가 못마땅한 듯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핸드폰을 한다. 거짓말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긴장했던 우예린도 진정이 되어 도준희를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 쳐다보지 않는 도준희는 다른 말을 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를테면 내가 도와주겠다, 같은 말 말이다.
‘적당한 금액을 말했나 봐.’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갚아주기에는 큰 금액이었던 게 분명했다. 하기야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몇백 빌리는 것도 힘들었던 부모님을 떠올리니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아…….”
고개를 돌린 우예린이 한숨을 깊게 쉬었다. 자신이 부담스러워진 도준희가 자신을 내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리라. 그때까지는 열심히 낙담하는 척을 할 생각이었다.
부러 축 어깨를 늘어뜨린 우예린은 도준희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 * *
방에 틀어박혀 있던 우예린은 문밖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에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돈을 달라고 요구한 후로 도준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예린은 그의 속내를 짐작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쉬는 노력을 계속했다.
자취방에선 하지 못했던 반신욕을 하고 나와 나른해지다가도 도준희를 발견하면 눈꼬리를 내린 채 한숨을 쉬는 식이었다.
도준희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우예린은 그가 속으로는 신경을 쓰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도준희라도 돈 문제는 누구에게나 예민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도준희의 미묘한 반응이라도 눈치채고자 그에게 촉각을 곤두세운 우예린은 방문에 귀를 바싹 가져다 댔다.
“야, 오늘 차 대기시켜 놔. 저번에 말한 거 찾으러 갈 거야.”
도준희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했다. 우예린은 얼굴을 찌푸리고 문을 살짝 열었다.
“어, 집에 있는 거 답답하지.”
우예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곧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닫혔다. 우예린은 잠시 더 기다렸다. 도준희가 나갔다고 바로 밖에 나갔다가 도준희를 마주치면 낭패였다.
어느새 극도로 조심스러워진 우예린은 도준희가 이만하면 떠났겠다 싶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도준희가 없는 집은 적막하고 평화로웠다. 고작 한 사람 없어졌는데. 좋게 말하면 대단한 존재감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시무시했다.
물론 우예린은 무시무시한 도준희가 사라지자 가슴이 뻥 뚫렸다. 그 변화는 비단 도준희가 집을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그가 한 말 때문이었다.
‘집에 있는 게 답답하다고?’
그녀가 이 집에 머문 후로 도준희가 집 밖에 나가는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회사에 있는 동안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밖에 자주 나가는 편은 아닌 듯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집에 있는 게 답답하다니 그 이유가 뭐겠는가.
‘나 때문인 거야.’
우예린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곧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위로 솟구쳤다. 우예린은 작은 주먹을 꼭 쥔 채 흔들며 춤 비슷한 몸동작을 취했다. 의미 불명인 춤사위였지만 기쁨을 표현하는 건 분명했다.
“이야호!”
마침내 참았던 환호성을 지른 우예린은 주먹을 쥔 채 어깨춤을 추었다. 신입생 시절, 신입 사원일 때, 장기자랑을 해보라는 선배들의 끈질긴 권유에도 나오지 않았던 춤이었다.
“하아.”
한참 격렬하게 기쁨을 표하던 우예린이 길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었다.
‘내가 말한 돈 문제를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도준희의 태도로 인해 마음 한구석으로는 아주 약간 불안하기도 했던 터다. 도준희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게 확실하자 마음이 놓였다.
“그만 나가달라고 하면 아주 아쉬운 얼굴을 해야겠지.”
우예린은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면 마지막까지 돈 달라고 해볼까? 그럼 정말 정이 확 떨어질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우예린은 아무래도 이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살갗을 시원하게 했다. 우예린은 소파에 뺨을 댄 채 눈을 감았다. 도준희가 자주 사용하는 소파라서 그런지 그의 체취가 맡아지는 것 같았다. 무시하려던 우예린이 돌연 벌떡 일어났다.
도준희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자 왜인지 그에게 안겨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던 도준희의 손길까지 생각이 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우예린은 눈을 깜박이며 소파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마야. 악마가 틀림없어.”
거칠고 또라이인데, 사람을 홀리는 악마이기까지 하니.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이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도준희는 두 시간 후에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기색에 침실로 후다닥 뛰어간 우예린은 침대에 뛰어들어 읽다가 뒤집어 놓았던 책을 들었다. 독서하는 척을 하며 방문 밖의 동태에 신경을 집중했다.
달칵.
문이 열리자 우예린은 책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후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생각했다.
‘거짓말이 점점 느는 것 같아.’
그녀의 부모님이 아셨다면 죄를 저지른다고 혼을 내셨을 일이다. 도준희와 함께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고 내심 변명했다.
“한숨 그만 쉬라고 했다.”
“아, 알았어요. 하지만 자꾸 걱정이 되니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봤자 갚을 능력도 없는데 어떡해요. 염치없이 그냥 달라고 하는데 들어줄 사람이 있겠어요?”
우예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신세 한탄을 하는 척 ‘돈을 갚을 능력도 없다’는 것도 암시했다.
“쯧, 요즘 밥도 잘 안 처먹고.”
“……하아, 밥이 안 넘어가서 그래요.”
사실 이 집에서 안 먹은 만큼 회사에서 많이 먹고 있었다.
“빼빼 말라서 안을 맛도 안 나잖아.”
그래서 이만 꺼지라는 밑밥을 까는 걸까? 우예린은 귀를 기울였다.
“자.”
그러나 도준희는 더는 말하지 않고 우예린 앞에 뭘 던졌다. 그것은 얇고 가볍게 날아와 침대 위에 안착했다. 우예린이 그 물건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통장이었다.
우예린은 갑자기 굉장히 불길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예요?”
“열어봐.”
도준희를 힐끗 올려다보자 한 손을 비딱하게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도준희가 눈짓을 했다. 우예린은 다시 시선을 통장으로 돌리고 손을 뻗었다.
열어보자 깔끔한 숫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어, 억…….’
1에 0이 여덟 개나 붙어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시민으로 살아온 우예린은 난생처음 손에 쥐어보는 큰 액수에 숨까지 멈추었다.
“그리고 이거, 읽어봐.”
팔랑이며 종이 하나가 더 떨어졌다. 또 뭔가 싶었지만 통장으로 이미 심장이 한 차례 떨어진 우예린은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종이를 폈다.
[각서]
우예린(을)은 도준희(갑)으로부터 1억 원을 받음으로써 그녀의 신체와 일신의 자유를 도준희에게 넘긴다.
그 이외에도 뭐라 뭐라 길게 조항이 써있었지만 눈에 띄는 건 그거 하나였다. 맨 아래에는 서명란이 있었고 갑, 도준희의 이름엔 이미 그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통장을 보고 더는 놀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예린은 놀라다 못해 눈앞이 깜깜해졌다.
제 꾀에 제가 당한다.
이 집에 들어온 후로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 우예린은 자신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이게 뭐예요?”
“각서.”
“이런 건 효력이 없잖아요?”
장난인가, 반신반의했지만 도준희의 얼굴을 보자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묻자 도준희가 고개를 저었다.
“백부가 사용하는 대부업 신체 포기 각서를 조금 수정한 거니 문제없어. 변호사 공증이야 뭐, 당장 받을 수 있고.”
심지어 이딴 게 효력이 있단다. 점입가경이었다. 우예린의 표정이 안 좋았던지 도준희가 가볍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신체 포기 각서란 말까지 나온 마당에 바보가 아니고서야 저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터였다. 우예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혹시나 싶어 물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데요?”
“말 그대로야. 지금과 크게 다를 거 없어. 단지…….”
도준희가 피식 웃었다.
“앞으로 내 허락을 받고 움직여야 한다는 거지.”
“…….”
“별것도 아니지?”
별거다. 매우 별거다. 별것도 아니라며 가볍게 얘기하는 도준희를 보며 우예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정 악마의 음성이 아닐 수 없었다.
평생 이런 식으로 산다는 건 별것이 아닌 게 아니다. 아주 큰일이다. 1억으로 인생을 저당을 잡히는 거라는 뜻이다.
그런 큰일을 저렇게 가볍게 얘기하다니 과연 조폭 집안이라고 해야 할까? 우예린은 소름이 돋아난 팔을 힐끗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치, 친구는 내가 이러면서까지 돈을 주기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
“친구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아. 돈이면 눈 돌아가는 게 인간이야. 계속 스트레스 받았잖아. 그냥 받아.”
“친구가 원하지…….”
“받아.”
“괜찮아요.”
싫다는데도 집요하게 돈을 주려고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우예린. 받아, 돈.”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우예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래도 도준희는 이 끔찍한 각서를 철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 말 없는 우예린에게 다가온 도준희가 귀밑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이렇게 어려울 때 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
“나도 널 1억에 사서…… 아니, 도와줄 수 있어 안심이 된다.”
떨리는 눈으로 도준희를 올려다보자 도준희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엄한 생각 못 하겠네. 반반한 놈이 나타나도, 그렇지?”
나름대로 달래려는 것 같았으나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은 그의 속마음이 틀림없었다.
우예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상황은 이곳에 온 뒤로 가장 큰 위기…… 정도가 아니다. 일생일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심장이 멈추었다가 뛰는 소리가 제 귀로 들리는 것 같았다.
우예린은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저도 모르게 펄쩍 뛸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도준희의 눈치를 보자 그는 눈살을 찡그렸다.
받지 말라고 할까 봐 반사적으로 폴더를 열어젖히는 그 순간 머릿속이 번뜩였다. 인간은 위기 앞에 생각지도 못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던가?
성실함이 장점인 우예린은 평생 꾀를 부려본 적이 없지만 인생을 저당 잡힐 위기 상황 앞에서 쥐꼬리만 한 임기응변 능력이 최대치로 발휘되었다.
“응, 지나야.”
―우예린. 나 지금 어디게?
“으응……, 열심히 돈 모으고 있지. 너도 급하다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자연스럽게 소리 버튼을 눌러 소리를 최소로 만들었다. 이러면 지나의 목소리가 흘러나가 도준희에게 들릴 일도 없을 터였다.
“뭐? 안 갚아도 된다고? 왜? 급하다고 했잖아!”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도준희를 흘끗했다. 도준희가 눈을 치켜뜨자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 무슨 소리냐고. 나 지금 남자 친구랑 데이트 중이야. 내가 너 때문에 도준희에 대해 물어봤는데 글쎄, 얘가 계속 말 안 하다가 이제는 너에 대해 궁금해하는…….
더 크게 목소리를 키웠다.
“부모님께서 돈을 구하셨다고? 아, 그래서 당장 안 갚아도 돼? 다달이 상환하면 나야 좋지.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뭐라는 거야?
“고마워, 지나야. 응, 매달 빼먹지 않고 송금할게.”
―야, 야, 우예린. 귀먹었어?
“정말 고마워!”
탁.
폴더를 닫자 정적이 찾아왔다. 우예린은 흘끔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도준희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지나?”
“…….”
“너랑 같이 다니던 그 여자애?”
“네, 맞아요.”
이지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도준희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돈이 많아 보이진 않았는데.”
혹시 거짓말한 거 아니냐고 캐물으면 어쩌지 싶어 우예린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 없기는요. 하고 다니는 것도 다 명품이고, 돈이 얼마나 많은데요.”
물론 집안 돈이 아니라 열심히 알바하면서 번 돈으로 산 것들이기는 하다.
“그래?”
우예린의 필사적인 변호에 도준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쨌든 도준희가 이지나에게 더 관심을 가지면 큰일이다. 우선은 이 위기를 탈출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우예린은 발치에 있는 갑을 관계 계약서, 우예린에게는 신체 포기 계약서로 보이는 계약서를 슬그머니 도준희 쪽으로 밀었다.
“다행히 당장 돈을 갚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
“물론 생각해준 도준희 마음은 고맙지만요.”
도준희가 화를 낼까 봐 마지막 말을 서둘러 붙였다. 도준희는 여전히 뭐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아냐.”
도준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인 줄 알고 우예린이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그냥 내 돈으로 갚아.”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천천히…….”
“아무리 친구라도 채무자 신세가 얼마나 서러운지 네가 몰라서 그래.”
도준희가 바지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여전히 불은 붙이지 않고 물기만 했다. 입술 사이로 담배를 끼운 채 도준희가 계약서를 눈짓했다.
“그러니까 도장 찍어.”
“하, 하지만 이러면 채권자가 바뀌는 거잖아요. 제 친구에서 도준희로…….”
그럴 바에는 마음 편한 친구가 채권자인 게 낫지 않겠냐는 속뜻이 담겨있었다. 혹여 도준희가 기분 나빠할까 봐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조심스럽게 도준희를 바라보자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예린.”
“네?”
“나 못 믿어?”
그걸 말이라고 할까.
‘당연히 못 믿지.’
그러나 우예린은 도준희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믿죠. 믿……어요.”
“그럼 뭘 고민해.”
도준희가 입술로 담배를 질겅였다.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얼른 도장을 찍으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여기. 인주랑 네 도장.”
“내 도장은 어떻게……?”
도장이 없어서 망설인 게 아니었는데 도준희는 그거 때문인 줄 알았는지 인주와 도장을 우예린 앞에 떨어뜨렸다. 도장을 살피니 정말 우예린 자신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도준희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막도장 하나 팠어.”
‘내 도장을 네가 왜?’
이제 정말로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이다. 도장을 양손에 꽉 들고 멍해졌던 우예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얼렁뚱땅 도준희에게 말린다면 순간이 아니라 인생이 말릴 것이다. 게다가 1억이라는 빚 자체가 가상의 빚이 아니던가. 스스로 판 함정에 뛰어드는 미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예린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요.”
“뭐가.”
“제가 빌린 돈인데 남이 준 걸로 갚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힘으로 갚는 거야말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 일은 스스로 해야 하잖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자기가 갚아도 좋고 남이 갚아주면 더 좋은 게 빚이란 걸 알고 있었다.
우예린의 부모님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고 했지만 열성적인 신도가 빚을 갚아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뒤탈 없는 사람에 한해서였지 도준희 같은 사람은 절대로, 절대로 피해야 했다. 도준희가 주는 돈이야말로 폭탄이나 다름없으니까.
“무슨 개소리야? 답답하게 굴지 마.”
“정말 제힘으로 갚고 싶어요. 제가 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요, 도준희.”
자존심 얘기까지 나왔다. 우예린은 간절한 눈으로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간절했는지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도준희는 담배를 문 채 우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그 시선에 희망을 얻었다. 가늘고 매끄러운 입술이 살짝 열렸다.
“갚아.”
“…….”
“내 돈으로.”
우예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준희에겐 사람이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측은지심이란 덕목이 아예 없는 게 분명하다.
“아니, 그냥 내 힘으로…….”
“갚아.”
“괜찮다니까요.”
“갚으라고.”
위기의식이 점점 강해진 우예린은 덥지도 않은데 식은땀이 났다. 돈을 준대도 거절하고, 싫다는데도 돈을 주겠다는 이상한 풍경이었으나 우예린은 살면서 이렇게 간절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죽으면 죽었지 남의 돈으로 내 빚을 갚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어요.”
“…….”
“죽으면 죽었지!”
우예린이 결연하게 강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준희에게 신체를 일임하는 신체 포기 계약서를 쓰는 것보다 최악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갚으라고 즉답하던 도준희가 이번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우예린이 도준희를 올려다보았다.
도준희가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별…….”
“…….”
“그 정도로 돈 갚고 싶어 하는 또라이는 처음 보네.”
졸지에 또라이가 되어버린 우예린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그것도 그녀가 아는 제일 또라이 미친놈인 도준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자괴감에 울적해진 우예린은 그래도 괜찮다며 마음을 다독였다. 다행히 위기는 벗어난 것 같으니까.
“그럼 돈 갚는 건 됐다 치고, 내 수고비는 어떻게 할 거야?”
“…….”
뜬금없는 말에 우예린의 표정이 멍해졌다.
“무슨 수고비요?”
“무슨 수고비?”
기가 막히다는 듯 도준희가 눈썹을 꿈틀했다.
“통장 따로 만들어왔지, 변호사 통해 자문해서 계약서 만들어왔지, 도장 파왔지.”
“…….”
“내 수고가 어마어마했는데?”
“그건…….”
‘내가 해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름다운 이별 방법을 계획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우예린이 당황하며 입술을 뻐끔거리자 도준희가 그녀의 도톰한 분홍빛 입술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 백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
“……뭔데요?”
궁금하지 않았지만 물어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우예린이 목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우예린의 푸르죽죽한 얼굴과 달리 도준희는 빛이 나는 얼굴로 생긋, 아니, 우예린의 시각으로는 사악하게 웃었다.
“손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자. 나아가서 손해도 이득으로 만들자.”
“…….”
“그래서 내 수고비는?”
‘이런 지독한…….’
우예린은 치를 떨다가 도준희랑 소득 없이 설왕설래하느니 돈을 주고 깔끔히 해결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냈다. 머릿속으로 융통할 수 있는 돈을 생각하며 물었다.
“얼마면 될까요?”
다소 순종적인 질문에 도준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돈은 필요 없어.”
“……그럼요?”
도준희가 한 손가락으로 입가를 쓸었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무슨 말을 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도준희의 입술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흠을 잡고 싶어도 잡기가 힘든, 얇고 매끈한 입술에 시선을 뺏기려는 찰나.
“가끔 우예린 너를 보면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예상치 못한 정확한 지적에 우예린의 심장이 땅끝까지 떨어졌다.
“왜, 왜 그런 생각을…….”
“네가 겁은 많아도 말은 똑바로 하는데 나만 보면 어물거리는 것도 그렇고.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도 그렇고. 지금도 봐. 내가 주는 돈도 싫다고 하잖아.”
도준희의 수준급 관찰 능력에 우예린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도준희가 화를 낼까 봐 덜컥 두려웠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정조대 사건이 하도 충격적이었던 탓에 우예린은 팽 돌아버린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내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그에게 솔직한 그녀의 마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도 조그맣게 똬리를 틀었다.
헤어지자고 하는 말을 싹 무시했던 도준희를 생각하면 역효과가 날 것 같다는 짐작에 억누르기는 했으나 지금이 바로 솔직해져야 하는 그 순간이 아닐까.
‘여기서 싫은 게 맞다고 한다면…….’
우예린은 떨리는 눈으로 도준희를 보았다. 도준희는 날개 없는 천사처럼 완벽히 잘생긴 얼굴로 우예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우예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홀린 듯 고백하려던 우예린은 멈칫했다.
‘가만. 만약 싫다고 한다면 도준희가 나를 놔줄까?’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도준희가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우예린은 그 온화한 얼굴이 어쩐지 더 무섭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얘기해도 괜찮을까. 반신반의하며 도준희를 살피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까만 눈 안에 이글거리는 뭔가를 보았다. 도준희를 통해 자신은 정말 사람을 볼 줄 모른다고, 한탄하기도 했었지만 저 눈빛만큼은 분명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정조대가 채워지는 것보다 더한 꼴을 당할 거라고, 백 퍼센트 강한 확신이 들었다.
우예린은 살짝 열렸던 입술을 다시 꾹 닫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어댔다.
“그렇지 않아요.”
“…….”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굳는 것은 맞지만 나를 관찰했다면 그것도 알 거 아니에요. 제가 잘생긴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된다는 걸요.”
우예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싫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차마 좋다고도 말할 수 없어서 나온 변명이었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생각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살 떨리는 시선을 받으며 하하, 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변명이 통했을까. 도준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 긍정에 우예린의 입술이 설핏 일그러졌다.
“그것 봐요. 그러니까…….”
“…….”
“싫어하는 건 아니라니까요.”
우예린이 힘없이 웅얼거렸다.
“나를 싫어한다면 좋아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어떻게요?”
“몸정이 들게 한다든가.”
태연히 흘러나온 말에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이 가까우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니까. 계속 같이 있으면 좋아하겠지.”
“…….”
회사도 안 보내겠다는 말인 것 같다.
‘싫다고 말하지 않기를 잘했어.’
가슴을 쓸어내린 우예린은 도준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속이 진탕되는 것 같았다.
“싫어하지 않는다니 기쁘기는 한데…….”
도준희가 심상찮게 말을 끌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까맣고 번들거리는 시선이 우예린을 빤히 응시했다.
“못 믿겠네.”
“…….”
우예린은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신체 포기 계약서의 탈을 쓴 함정은 피했는데. 왜인지 또 다른 함정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과한 생각인가.
“…….”
아무 말 없는 우예린을 도준희는 여전히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우예린은 도준희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못 믿겠다고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예린은 마지막 말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을 하면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도준희가 원하는 대로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자신이 이 사람을 경계하기 때문에 과한 걱정이 드는 걸까. 우예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도준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예린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예린이 마지못해 다시 입을 열었다.
“각서라도 쓸까요?”
각서는 우예린이 머리를 굴린 결과였다. 신체 포기 계약서 따위를 내민 걸 보면 서류를 어지간히 믿고 있는 모양이니까.
‘도준희를 믿는다는 종이 증서 같은 건 얼마든지 써줄 수 있어.’
그런 건 아무런 효력도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사실 난 종이를 믿지 않아.”
도준희의 말에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도준희가 떨어뜨린 신체 포기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저걸 당당히 내민 게 십 분도 안 되었는데 종이를 믿지 않는다니?
우예린은 미약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준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우예린의 의문 섞인 시선에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도준희는 나른하게 제 할 말만 중얼거렸다.
“그런 종이 말고, 증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
도준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우예린은 미칠 노릇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한 번에 말하면 되지 왜 이렇게 드문드문 말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느냔 말이다. 긴장하고 있는 터에 도준희가 말까지 끌자 우예린은 점점 초조해졌다.
“어떤 증명이요?”
하는 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도준희가 묘하게 어둑해진 눈으로 우예린을 응시했다.
“그냥.”
“…….”
“내가 믿을 수 있게 해줘.”
우예린은 침묵했다.
‘장난을 하려는 건가? 원하는 게 뭐지?’
도준희의 표정을 살폈지만 짜증이 난 듯 좁혀진 미간과 나른하게 살짝 감긴 눈매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었다. 결국 우예린은 도준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돈도 아니고. 각서도 아니다.
‘얘기를 꺼낸 건 헛수고했다고 짜증나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예린은 곤혹스러워졌다. 도준희와 침묵에 잠긴 이 긴장된 분위기를 참기가 힘들어져서, 착각인지 숨까지 막히는 것 같았다.
도준희가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위험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풀어진 태도. 우예린은 도준희를 살피면서 바싹 긴장이 되는 걸 느꼈다.
‘설마.’
기겁한 우예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응.”
도준희의 짤막한 대꾸에 우예린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달라. 이는 곧 행동으로 네 마음을 표현해 달란 소리였다. 우예린은 그제야 도준희의 속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자기를 싫어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한 순간부터 도준희가 바란 것은 따로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말이나 종이 같은 건 당연히 성에 안 차겠지.
‘미친놈, 변태, 미친놈, 변태, 미친놈.’
머릿속으로 도준희에게 뱉고 싶은 단어들이 둥둥 떠다녔다. 우예린은 고민했지만 도준희가 자기를 싫어하는 게 아니냐며 미친 짓을 할 생각을 하니 생각보다 결심은 빨리 섰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준희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작은 우예린이었지만 침대에 서니 도준희보다 눈높이가 높아졌다. 우예린은 부러 그의 눈은 보지 않은 채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냅다 입술을 부딪쳤다.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고작 키스, 아니 뽀뽀를 하는 거잖아.’
우예린은 도장이라도 찍는 것처럼 도준희의 입술에 대고 입술을 비볐다가 얼른 얼굴을 뗐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뽀뽀 정도니 괜찮다고 세뇌해도 효과가 없었다. 도준희의 숨에서는 달콤하고 시원한 향내가 났다.
잠자리에서는 정신이 없어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는데, 그때보다도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어색해진 우예린의 얼굴이 터질 듯 벌겋게 변했다.
‘생각해 보니 난 뽀뽀도 처음인데.’
그런데 자발적으로 이 미친놈에게 뽀뽀를 하다니. 우예린의 빨갛던 얼굴이 곧 하얘졌다. 힘이 빠진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우예린은 털썩 주저앉는 대신에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죠?”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도준희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거리가 가깝다 보니 속눈썹이 팔랑이는 것까지 다 보였다. 도준희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빛이 한층 음험하게 가라앉았지만 우예린은 도준희의 표정이 안 좋다고만 생각했다.
“왜, 왜요?”
“이거로는 모르겠어.”
“아니, 누가 싫어하는 사람한테 이, 입을 맞춰요?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충분히 알았잖아요.”
“충분히?”
도준희가 그게 말이 되냐는 듯한 시선으로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다소 신경질적인 눈빛에 우에린이 움찔하자 도준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족하다니까. 모르겠어, 네가 아직도 날 싫어하는 것 같아.”
‘차라리 싫어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예린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미친놈이 다 알고서 이러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어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우예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도준희는 미친 상태와 덜 미친 상태의 경계에 있었다. 이럴 때 자극하면 또다시 정조대가 채워질지도 몰랐다.
‘도준희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우예린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도준희에게 입을 맞추었다. 한 번 했으니 두 번이 어렵겠나 싶은 자포자기의 마음이었다.
입술이 부딪치자마자 떼려고 했으나 도준희가 덥석, 목덜미를 붙들고 혀를 내미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앗!”
도준희의 혀가 우예린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깜짝 놀란 우예린이 몸을 뒤로 물렸지만 도준희가 뒷덜미를 움켜쥔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예린의 입으로 들어온 도준희의 혀가 따뜻한 입 안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혀가 우예린의 고른 치열과 작은 혀를 부드럽지 못하게 빨아들였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신음을 흘렸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입 속을 양껏 탐한 후에야 물러났다. 입술을 떼자 우예린은 격한 숨을 토해냈다.
우예린이 헐떡이면서 물었다.
“이, 이제 됐죠?”
“아니.”
“네?”
이게 끝이겠거니 했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불만족스러운 표정에 입을 벌렸다.
“됐잖아요!”
“되긴 뭐가 돼.”
“키스했잖아요!”
“키스는 내가 한 거잖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키스가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진 않지.”
키스로 촉촉해진 우예린의 입술을 엄지로 천천히 닦으며 도준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기가 막힌 우예린이 입을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그런 게 어딨어요. 나도 싫지 않으니까 밀치지 않은 거잖아요.”
“도망가려고 했잖아.”
“내가 언제……!”
도준희의 혀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던 순간이 떠오르자 우예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거 가지고 도준희의 말을 수용하기엔 너무 억울해져서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런 건 너무 억지예요. 나는 충분히 표현했어요.”
“…….”
우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도준희도 양심이 있으면 여기서 그만하겠지. 내가 너무 휘둘렸다, 하는 자책까지 들었다.
‘그래, 양심이 있으면…….’
불안해진 우예린이 재차 생각하는 순간, 도준희의 눈이 차가워졌다. 오랜만에 보는 도준희의 서늘한 눈빛에 우예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래서…….”
“…….”
“표현을 못 한다?”
겁을 먹은 우예린은 기다, 아니다 말도 못 하고 도준희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는 사이 분위기는 계속해서 차가워져 마침내는 찬바람이 씽씽 날리는 것 같았다.
도준희가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
“싫어하는 거 맞잖아.”
‘어떻게 얘기가 바로 거기로 튀지?’
우예린은 생각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도준희는 양심이 없는 종자였다. 양심이란 게 있었으면 미친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도준희는 양심 없는 미친놈이다.
“씨발, 그러면서 왜 사람을 기대하게 해?”
‘누가? 누가 기대를 하게 해 이 미친놈아!’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우예린은 눈을 벌겋게 뜬 도준희를 진정 미친놈 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냥 미친놈이면 알아서 피할 텐데 이 사람은 힘도 센 미친놈이라 피할 길도 없었다. 억울하다 표현도 못 하고 납작 숙여야 한다는 게 현재 상황에서 가장 통탄스러운 사실이었다.
우예린은 가슴을 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지만 반대로 눈꼬리는 울 것처럼 아래로 휘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긴. 싫다면 처음부터 그냥 싫다고 말하든가. 안 싫다고 해놓고서 결국은 싫다는 거잖아. 사람 기만하는 게 취미야? 그런 거 좋아했어?”
문득 우예린은 솔직하게 고백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졌다. ‘너 싫어 미친놈아.’라고 한다면 도준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요?”
“뭐?”
“내가 도준희를 싫어하지 않는 건 맞지만 만약 싫어한다고 했다면요?”
도준희가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우예린을 바라보더니 입매를 비틀었다.
“말했잖아.”
“…….”
“좋아할 때까지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거야.”
“…….”
“몸의 거리가 곧 마음의 거리니까.”
‘아니야, 미친놈아.’
우예린은 도준희의 번들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하면 도준희가 믿을 수 있을까요?”
“…….”
“내가 도준희 안 싫어한다는 거.”
결국 납작 엎드리기로 결심한 우예린이 조심스럽게 웃자 도준희가 사납게 치켜떴던 눈을 조금씩 온순하게 내렸다. 그리고는 툭 뱉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
우예린은 일그러질 뻔한 얼굴 근육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미친 변태 새끼. 뻔뻔하기까지 하네.’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녀의 말씨는 점점 험해지고 있었다. 도준희가 원하는 게 뭔지는 어렴풋하게 알겠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거였다. 우예린은 머뭇거리다가 도준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도준희는 ‘또?’라는 표정으로 심드렁해졌지만 우예린이 뺨에도 키스하자 의외라는 듯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도준희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적이 없었던 우예린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키스하는 지금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민망했기 때문에 도준희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도준희의 코에도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입술을 뗐다.
“……어때요?”
“좀 낫네.”
도준희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서 흘러나왔다. 좀 낫다니. 우예린은 안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해서 아연해졌다.
“뭘, 어떻게 해야…….”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머릿속이 깜깜한 우예린이 중얼거리는 순간 도준희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우예린은 몸이 들리는 느낌에 입을 크게 벌렸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허리를 붙잡은 채로 침대에 앉았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우예린과 눈을 마주쳤다. 어안이 벙벙해진 우예린이 놀라서 눈을 깜박이자 도준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편하게 해봐.”
도준희와 너무 가깝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은 우예린이 도준희의 몸에서 얼른 내려왔다. 도준희는 쿠션과 베개까지 허리 뒤로 넣은 채로 편하게 기대 누웠다.
편하게 벌린 긴 다리가 침대에 자연스럽게 걸쳐졌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누워있는 것을 힐끗하고는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도준희의 까만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는데, 우예린은 그게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예린의 시선이 도준희의 얼굴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평소에 자주 입는 하얀색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우예린의 시선을 오해했는지 도준희가 갑자기 팔을 들더니 티셔츠를 홱 벗어던졌다. 그러자 근육으로 탄탄한 크림색 가슴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옅게 난 흉터도 눈에 띄었다.
티셔츠까지 벗자 갑자기 긴장이 확 되어 우예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도준희가 팔을 자연스럽게 양옆에 내리며 말했다.
“편하게 해, 편하게.”
어딘지 신이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예린은 여유롭게 곤란한 말만 해대는 도준희가 원망스러웠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우예린이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도준희를 흠칫해서 바라보았다. 깊게 팬 가슴의 고랑에 눈길이 갔다.
“뭐 해?”
“…….”
비딱한 말씨에 우예린은 손을 움찔했다. 시간을 끌었다가 도준희가 또 가지고 논 게 아니냐느니 농락한 게 아니냐느니 하는 말을 할까 봐 두려웠다. 우예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몰라, 이제.’
우예린이 양손을 도준희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피부색과 달리 가슴의 피부는 딱딱하고 매서운 느낌까지 났다.
불에 덴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란 우예린이 손을 뗐다. 만지면 안 되는 곳에 손을 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도준희가 뭐 하냐는 듯 눈짓을 했다. 우예린이 다시 양손을 도준희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이 가늘게 흔들렸다. 도준희와 섹스를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주 많이 한 편이었지만 스스로 도준희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정신이 없어 도준희에게 매달린 적은 있으나 이렇게 맨정신으로 그의 몸을 만지는 것은 처음이다.
“이제 조금 알겠어. 네가 나 안 싫어한다는 거.”
도준희가 나른하게 말하자 우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준희에게 말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지금 이 순간의 최대 난제였다.
‘차라리 얼른 끝내버리자.’
결심한 우예린은 도준희가 그녀에게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도준희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뭐 해, 때 밀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준희가 툭 던지자 우예린이 손을 멈칫했다. 이게 아닌가. 그녀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도준희도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막 움켜쥐는 것처럼 가슴을 거세게 주무르면 자신은 정신을 못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통증과 쾌감이 혼재한 이상스러운 감각에 입이 절로 벌어지지 않았던가.
자신과 달리 도준희는 별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점점 못마땅해지는 도준희의 얼굴을 힐끗한 우예린이 손을 좀 더 올렸다.
서툴게 가슴을 문지르다가 손가락에 작은 젖꼭지가 툭, 하고 걸렸다.
“흐음.”
처음으로 나온 도준희의 반응에 우예린이 눈을 굴려 그를 흘끗했다. 슬쩍, 손바닥으로 젖꼭지를 굴렸다.
여자의 것과 달리 좁쌀만큼 작은 젖꼭지. 굴리면 굴릴수록 그게 점점 딱딱해지자, 그 와중에도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우예린은 침을 꼴깍 삼키고 계속해서 가슴을 문질러댔다.
도준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우예린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이리 올라와.”
위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에 귓가에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도준희의 허벅지를 깔고 앉은 우예린은 낯선 느낌에 자꾸만 입이 말랐다. 또 눈높이가 높아졌다. 도준희가 그녀보다 낮은 곳에서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예린은 그 시선에 숨이 가빠왔다. 시선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도준희의 시선은 아주 뜨겁고 따가웠다.
우예린은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도준희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을 내밀어 도준희의 젖꼭지를 툭, 쳤다. 흘끗 도준희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표정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우예린은 긴가민가하면서 도준희의 상체를 어루만졌다. 최대한 머릿속으로 그가 자신을 자극했던 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문지르면 야릇한 기분이 들었어.’
손끝으로 도준희의 가슴 근육을 지그시 누르고 문질렀다. 그러는 한편 손바닥으로 옆구리에서부터 가슴까지를 느릿하게 쓸 듯이 지나갔다. 도준희의 크림색 뺨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후우…….”
도준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흥분한 숨결이었다. 우예린이 움찔해서 손을 멈추고 도준희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됐냐고 물어보려던 우예린은 뭔가 불편하게 허벅지를 찔러서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다 눈을 크게 떴다.
면바지의 사타구니 부분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허벅지가 불편했던 건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우예린.”
굳어있던 우예린은 이름이 불리자 펄쩍 뛰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도준희에게서 내려오자, 그런 우예린을 힐끗한 도준희가 바지를 벗었다. 그러자 검은색 드로즈가 드러났다.
드로즈 한가운데가 흉흉하게 곤두서 있었다.
우예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슴은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어댔다. 도준희가 팬티를 벗기 위해 팬티 고무줄에 손가락을 걸쳤다.
그대로 내리려 해서 우예린은 홱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조용한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가 도준희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도준희는 팬티를 내리려는 그 자세 그대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
도준희가 팬티에서 손을 뗐다.
“벗겨.”
“…….”
“그럼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좀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미친놈.’
미친 데다가 교활하기까지 한 도준희.
누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자신이 제발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줄 알 것이다. 우예린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도준희의 뻔뻔한 얼굴은 매끈하고 여유롭기만 했다.
머뭇거리던 우예린이 결국 한숨을 쉬고 도준희의 팬티 고무줄을 붙잡았다. 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노력이 부질없게도 사납게 튀어나온 부분에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는 못처럼 돌아갔다.
팬티를 내리자 팬티 안에 갇혀있던 성기가 기지개를 켜듯 튀어나왔다. 자신의 손목보다 두꺼운 것 같은 두께에 길이는 한 뼘보다도 긴 성기가 흉흉한 기세로 곤두섰다.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우뚝 서 있는 성기를 응시했다.
매끈하고 두툼한 귀두 아래 기둥은 두꺼운 데다가 살짝 휘기까지 해서 더 사나워 보였다.
‘생긴 것도 꼭 도준희 같네.’
붉은색 핏줄이 도드라진 검붉은 색의 성기. 위협받는 기분이 들어 슬그머니 손을 떼려 했으나 눈이 마주친 도준희가 성기를 눈짓하자 다시 손을 붙였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기둥을 쥐자 뜨겁고 건조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대로 성기가 손바닥에 달라붙을 듯했다. 이상하고 낯선 느낌. 두 손으로 기둥을 붙잡았다. 상대적으로 시원하고 부드러운 손이 성기를 쥐자 도준희의 매끈한 눈썹이 위로 비죽 올라갔다.
“음.”
나직한 신음에 놀라서 도준희를 올려다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과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기둥을 감싼 채로 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위아래로 흔들자 도준희의 성기가 좀 더 단단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느낌이 이상해.’
우예린은 손바닥을 마찰하는 성기의 건조한 살갗과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한 기둥의 느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릿속이 뜨겁고 어지러운 느낌도 심해졌다.
“이제 그만해도…….”
고개를 들어 도준희를 바라본 우예린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도준희의 뺨이 볼 터치를 한 것처럼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흥분으로 짙어진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번들거렸고 매끈하고 얇은 입술 사이로는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꼭 19금 화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우예린의 얼굴도 화악 달아올랐다. 그녀는 말없이 도준희의 성기를 위아래로 문지르기만 했다.
도준희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숙였던 우예린은 성기의 열기가 뺨을 간질이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준희의 성기와 코끝의 거리가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소스라친 우예린은 눈앞에서 번들거리는 도준희의 성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준희가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빨아봐.”
우예린은 번개를 맞은 듯 온몸의 털이 바싹 곤두섰다. 도준희의 말이 말캉한 혀가 되어 귓바퀴를 핥는 것 같았다. 우예린은 무의식적으로 귀에 힘을 주었다.
우예린은 두툼한 귀두를 흘끗, 아름다운 얼굴도 흘끗. 위아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과 흉흉한 성기의 간극이 크다. 우예린은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
단순히 도준희가 무섭다는 걸 떠나, 도준희의 검붉은 하반신은 본능을 쿡 건드려댔다.
도준희가 손으로 우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뜻 다정한 것 같았으나 얼른 빨라고 독촉하는 느낌이었다. 우예린의 입술이 도준희의 귀두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는 입술로 성기의 열기를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뜨거워…….’
후끈거리는 열기가 우예린의 입술을 간질였다. 우예린은 재차 눈을 굴려 도준희를 흘끗했다. 도준희의 코 밑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할짝, 혀가 입술을 핥으며 들어갔다.
지나치게 새빨간 혀였다. 꼭 악마의 것처럼.
우예린은 떨리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 빠끔 나온 혀가 도준희의 귀두에 살짝 닿았다.
‘윽…….’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맛이었다. 일반적인 피부라고 생각할 수 없게 약간 짭짜름하면서도 이상야릇하여 우예린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맹세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맛이다.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야한 느낌에 죄악감마저 느껴졌다.
남자의 그것을 입에 댄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인데 어째서 이러고 있을까. 상황이 인식되자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무슨 정신으로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혀까지 내밀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성기를 움켜쥔 채 우뚝 굳은 우예린이 이상해 보인 걸까. 도준희가 한 손으로 우예린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번들거리는 도준희의 사나운 눈과 우예린의 혼란스러운 눈이 맞부딪쳤다.
도준희의 짙은 시선에 우예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못…….”
“…….”
“못 하겠어요.”
도준희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게, 눈물이 고여 흐릿한 시야로 보였다. 도준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무서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다. 자의적으로 남자의 것을 핥는 것 따위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취를 하며 맛본 해방감에 여태껏 잘 떠올리지도 않던 부모님 생각까지 새록새록 나는 것이,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거 환장할 일이었다.
다 도준희가 악마 같기 때문이라고, 우예린은 지금 느끼는 이상한 감정에 이유를 붙였다.
“도준희를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뭐, 됐어.”
“…….”
우예린이 울먹거리자 도준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이제 됐어.”
눈앞의 장면이 반전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예린은 어느새 침대에 등을 댄 채 도준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도준희가 입술을 실룩였다.
“지금 나 머리끝까지 흥분해서.”
“…….”
“터지기 직전이야.”
도준희가 우예린의 옷을 벗겼다. 우예린은 몸을 들 필요도 없었다. 그가 한 손에 힘을 주자 우예린은 인형처럼 일으켜졌고 팔을 세웠으며 옷은 인형 옷처럼 쉽게 벗겨졌다.
금세 나체가 된 우예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다리를 벌린 도준희가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홱 고개를 뒤로 젖힌 우예린은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자 기함하여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의 까맣고 복슬복슬한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혀를 내밀어 우예린의 음부를 핥던 도준희가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런 자세가 영 적응이 되지 않는 우예린이 붉어진 얼굴로 도준희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도준희가 묘한 표정으로 우예린의 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음부를 문질렀다. 배려 없는 손놀림에 우예린의 허리가 튀었다. 머릿속이 아찔해서 입이 헉, 하고 벌어졌다.
“뭐야.”
도준희가 젖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 때에는 눈앞까지 하얘졌다.
“흥분했네?”
“그, 그럴 리가요.”
전혀 느끼지 못했었는데. 그러나 이미 팬티까지 축축할 정도로 젖은 아래를 훤히 드러내놓은 탓에 설득력이 없었다.
피식, 웃은 도준희의 눈동자가 질척하게 변했다. 돌연 그가 입을 벌려 우예린의 아래를 한입에 삼켰다. 우예린은 수치심과 쾌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베개에 뒤통수를 처박았다. 아래가 축축하고 뜨거운 곳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흐릅, 흡. 점막끼리 마찰하고 혀가 핥아대는 음란한 소리가 귓가를 쑤셔댔다. 우예린은 할 수 있다면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준희가 입을 떼자 우예린은 해방된 기분에 숨을 길게 토했다. 다리에 어찌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허리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누운 채로 우예린을 그의 다리 위로 올렸다.
도준희는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으나 힘은 우예린이 본 누구보다도 장사여서, 우예린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몸이 번쩍번쩍 들리는 걸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가 어지러워 손으로 바닥을 짚어 고정했다. 그런데 그 바닥이란 게 하필이면 도준희의 배였다. 도준희가 우예린을 그의 위로 올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벌써 몇 번째 자세가 바뀐 우예린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왜……?”
왜 또 그러냐는 질문에 도준희가 배를 짚은 우예린의 손 하나를 그의 성기로 가져다 댔다. 우예린은 다시 뜨거운 기둥을 붙잡게 되었다.
‘설마 또 빨아달라는 건가?’
우예린의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그건 도저히 못 하겠는데.’
우예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만 있자 도준희가 속삭였다.
“네가 넣어 봐.”
“네?”
“싸고 싶은데 흥분만 하고 싸지를 못했잖아.”
“…….”
“아니면 빨래?”
우예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세차게 저었는지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때릴 정도였다. 격한 부정에 기분이 상했는지 도준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우예린은 수틀린 도준희가 망측한 명령을 할까 봐 서둘러 성기를 고쳐 쥐었다. 그러나 뭘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막막하기만 했다.
“어떻게…….”
“어떡하긴. 넣어. 네 구멍에.”
‘어쩜 말도 저렇게 천박하게 하지.’
이렇게 말한다면 도준희는 섹스에 천박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냐며 코웃음을 칠 것이다. 우예린은 도준희에게 한마디 하려던 마음을 고이 접고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고서 도준희의 성기 부분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구멍이 손바닥만 한 것도 아닌데 앉는다고 삽입이 될 리가 만무했다. 우예린의 엉덩이에 깔린 성기가 꿈틀거렸다.
“아, 씨발!”
도준희가 재빨리 우예린의 손목을 잡고 신음을 흘렸다. 깜짝 놀란 우예린이 엉덩이를 살짝 떼고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성기를 쥔 그는 얼굴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
“부러지는 줄 알았잖아.”
“…….”
“내 거 부러지면 나을 때까지 호호 불게 될 줄 알아.”
세상 어떤 협박보다 무서운 말이었다. 매일매일 도준희의 성기에 대고 입김을 불게 되다니. 우예린은 얼른 엉덩이를 앞으로 옮겨 도준희의 성기에서 벗어났다.
치골과 장골 사이에 앉아 도준희를 내려다보니 상당히 민망했다. 여전히 한 손에 성기를 쥔 도준희가 우예린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우예린의 분홍색 젖꼭지를 손가락에 낀 채 살짝 비볐다.
찌릿한 느낌에 우예린이 입술을 깨물자 도준희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처음에는 도준희의 거친 섹스에 정신없이 휘둘리기만 해 몰랐지만 도준희는 자신의 반응을 즐겨보는 걸 상당히 즐겼다. 섹스를 하다가도 자신을 살피는 듯한 눈동자를 본 적도 몇 번이었다.
우예린은 어쩐지 수치스러운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으나 도준희가 반복해서 젖꼭지를 비비자 당할 수가 없어 허리를 꼬았다. 도준희가 젖꼭지를 애무하던 손을 내려 그녀의 아래를 가볍게 훑었다.
“아주 질질 흐르네.”
“…….”
“젖꼭지 만져주는 게 좋은가 봐.”
도준희가 아름다운 얼굴로 야한 말을 뱉을 때면 우예린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앉아 봐. 막 깔고 앉지 말고.”
도준희가 손으로 먼저 성기를 눕히고 그 위로 우예린을 앉혔다. 그리고는 우예린의 골반을 붙잡고 통통한 볼기 위쪽을 툭 쳤다.
“앞뒤로 움직여.”
“……?”
“허리를 흔들면 돼. 엉덩이랑.”
우예린은 홀린 것처럼 도준희의 말대로 하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아무리 도준희가 무서워도 그렇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색하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도준희에겐 그런 면이 있었다. 명령하면 도저히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어디든 도준희가 있는 공간은 온전히 그의 지배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일까.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우예린은 도준희의 말에 따라 엉덩이를 착실히 흔들고 있었다. 음부와 도준희의 성기가 마찰되었다.
처음에는 마찰력 때문인지 매끄럽게 움직여지지가 않았으나 음부에서 애액이 흐르자 움직이기가 한층 수월해졌다.
곤혹스럽고 어색했던 우예린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찌걱.
애액이 윤활유 역할을 하자 이번에는 지나칠 정도로 매끄럽고 뜨거웠다. 마찰이 지속될수록 아랫배가 짜릿하고 가슴이 진탕되었다.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강하게 느껴졌다. 직접 삽입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콘돔을 끼지 않은 성기끼리 마찰하는 느낌이 이상야릇했다.
“흐읏.”
당장이라도 삽입해서 이 간질간질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이 느낌을 극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저도 모르게 열중해서 허리를 흔들던 우예린은 움찔, 허벅지를 떨었다. 도준희가 두꺼운 엄지로 우예린의 클리토리스를 꾸욱 비비듯 눌렀기 때문이다.
도준희의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우예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우예린의 흥분해서 살짝 입술을 깨무는 표정이나 불긋한 뺨 같은 것들을 핥듯이 응시하며 손가락을 놀렸다.
몇 번 그렇게 문지르자 허리를 떨던 우예린은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약한 비명을 지르며 도준희의 가슴 위로 엎어졌다.
“으, 흐으…….”
그 틈을 타서 도준희가 이빨로 콘돔 포장지를 뜯었다. 한 손으로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바들바들 떠는 우예린을 들어 그 위에 앉혔다. 이번에는 구멍과 귀두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쑤욱, 두툼한 귀두가 우예린의 질구를 꿰뚫었다. 우예린이 그대로 앉자 질이 도준희의 성기를 완벽히 집어삼켰다. 빠듯한 감각에 입을 벌린 우예린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도준희가 허리를 튕겼다.
퍽!
“하악! 아, 아아, 아앙! 그, 그만. 너, 너무 세요!”
그 한 번으로 자궁구까지 닿은 느낌에 우예린이 도망가려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으나 도준희에게 골반이 붙잡혀 다시 앉혀졌다. 결합이 깊어지자 성기가 마치 꿰뚫는 것처럼 깊은 곳에 처박히는 느낌이 났다.
퍽, 퍽, 퍽!
도준희가 거칠게 허리를 튕기자 귀두가 우예린의 질내를 쿵, 쿵 찧어댔다. 머릿속 생각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우예린은 붙잡을 곳이 필요하여 손을 버둥거렸다.
겨우 도준희의 가슴을 붙잡고 헐떡였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무게를 감당하며 허릿짓을 했다. 그의 뒤로 뻗어 나온 우예린의 가느다란 다리가 맥없이 휘둘렸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위로 상체를 겹쳤다.
“씨발.”
신음 같은 소리가 우예린의 귓가로 흘러들어갔다.
“존나 좋아서 뇌가 녹을 것 같아.”
거칠고 천박한 내용과 흥분해서 갈라진 목소리. 그게 섹시하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뇌도 녹아버린 게 아닌가, 우예린은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 * *
월요일 아침, 출근한 우예린은 퀭한 눈으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주말 동안은 침대 위에만 있었다. 말 그대로, 침대 위에서 나가지 못했다. 화장실을 갈 때만 도준희에게 안겨서 옮겨지고 밥도 침대 위에서 먹었다.
그놈의 수고비가 아직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탓에 우예린은 주말이 있었나 싶을 만큼 월요일이 낯설었다.
멍한 머릿속을 깨우기 위해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고는 뭐에 홀린 양 주변을 살피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켰다. 우예린은 벽에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습관적으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는 사람이었다.
‘유한…… 펜트하우스.’
타닥탁.
부동산 창을 켜자 현재 나와 있는 매물의 목록이 떴다. 그리고 그 옆에 적혀있는 가격들도.
멍했던 우예린의 눈동자가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앞으로 튀어나간 얼굴이 화면에 코를 박을 듯했다.
‘집값이 이게 맞아?’
새로 고침을 해도 액수는 변하지 않았다.
‘이게 집값이야?’
가장 싸게 나온 매물도 20억이 넘어갔다. 수도권의 30평대 아파트가 1억 원 남짓, 좀 비싸다 싶은 동네도 5억을 넘어가지 않은 현 부동산 시세에서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액수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저렴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지라 우예린은 괜히 뒷골이 당겼다. 도준희의 나이와 고급 펜트하우스를 연관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우예린의 자취방은 월세가 20만 원이고 전세가 2,000만 원이었다. 전세 가격의 100배가 넘는 집에서 지내고 있는 거다, 지금. 머릿속으로 액수를 셈하다가 그 액수 자체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사람에게 1억 원을 빌렸는데 어떻게 하냐고 징징거렸다니.
1억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큰돈이었고, 도준희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부족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서민이었어, 나…….’
1억 원의 신체 포기 계약서에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던 게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1억 원을 받아버리고 튀었다면…….
‘사기죄로 고발당했을 거야. 분명해.’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도준희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조폭들에게 끌려간다든가?’
이게 맞는 것 같다. 도준희에겐 푸른 제복의 경찰보다 검은 양복의 조폭들이 더 어울렸다.
‘확실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 우예린은 지금 그게 중요한가 싶었다. 절망하며 다이어리 위에 이마를 쿵, 하고 박자 마침 지나가던 김 대리가 기겁을 헸다.
“깜짝이야! 우예린 씨, 뭐 해?”
김 대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예린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뭣 때문에 그러나 하던 그의 눈빛에 변화가 생겼다.
“여긴 왜 알아봐? 텔레비전에서 엄청 광고했던 그 집이잖아. 아, 나도 언젠가 돈 많이 벌어서 여기 살아봤으면 좋겠다.”
갑자기 한탄조로 흘러가는 김 대리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우예린이 시들시들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니에요. 제가 서민이라는 걸 느껴본 적은 처음이라…….”
“온실 속 화초로 자랐구먼. 아직 사회의 쓴맛을 못 봤어.”
“쓴맛이 한꺼번에 밀려오기도 하나요?”
“뭐, 그렇기도 하지. 인생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니까.”
김 대리는 평소와 다른 모습의 우예린이 이상한지 그녀를 흘낏거리며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이야기했다.
우예린은 그렇게 말하는 김 대리 또한 30대 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가 넋을 잃은 듯한 우예린을 보고 쯧쯧 혀를 차며 지나간 것도 몰랐다.
우예린이 이렇게 맥을 못 추는 건 몸이 축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격렬하고 길었던 도준희와의 잠자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의욕을 잃어버렸다.
도준희와의 문제없는 이별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파스스 흩어졌고 뭔가를 더 해봐야 한다는 마지막 의욕까지 꺾여버렸다. 그만큼 인생을 말아먹을 뻔한 이번 사건이 충격적이었다.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뜨거운 볕에 말려지는 명태처럼 바싹바싹 말랐다. 한 발짝 내밀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지점 위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답답하다…….’
점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뭘 먹긴 먹어서 배는 찼는데 먹은 순간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우예린은 얼이 빠져있었다. 오늘따라 우예린이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던 김 대리가 갑자기 일이 생긴 것 같은 기세로 우예린의 어깨를 탁, 탁 쳤다.
“무, 무슨 일이세요?”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는 반복적인 프로그램 작업을 하던 우예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김 대리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손짓을 했다.
“얼른 짐 챙겨.”
“네?”
“우예린 씨 출장 한 번도 안 가봤지?”
“네, 그렇죠?”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은 김 대리의 표정을 보자 우예린은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한번 가봐. 최 과장님이랑 가는 거니까 배우는 것도 많을 거야.”
“……예?”
“예는 무슨 예야. 얼른 준비해! 과장님 나오시기 전에.”
“하지만 원래 과장님 출장은 김 대리님 전담…….”
“전담이고 자시고 그런 게 어딨어! 경험 쌓을 수 있으면 다 하는 거지.”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우예린이 혼란스러운 이유가 있었다. 라인 타는 데 혈안이고 능력보다는 인맥으로 승진하는 게 목표인 김 대리와 원칙주의자인 최 과장은 물과 기름처럼 맞지 않았지만 김 대리는 최 과장에게 최선을 다해 알랑거렸다. 꼬리라도 있으면 엄청나게 살랑대는 걸 눈으로 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그가 최 과장의 라인을 타고 싶어 한다는 걸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다 알았다. 그러니 최 과장을 따라다니는 건 언제나 김 대리의 몫이었는데 갑자기 왜 이럴까?
우예린이 우물쭈물하자 김 대리가 눈을 부라렸다.
“과장님이 어려워서 그래? 그래서 가기 싫어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 김 대리님.”
“아직 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모르나 본데, 우예린 씨. 회사란 게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런 곳은 학교지 회사가 아니잖아.”
김 대리가 느물느물하게 말했지만 눈빛으로는 얼른 수락하라는 독촉을 했다.
김 대리 뒤에서 지수련이 입을 뻐끔거리는 게 보였다.
‘안 돼?’
가지 말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김 대리의 갑작스러운 출장 요구는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다. 김 대리 말이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하라면 하는 곳이 회사인 건 맞으니까. 원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예린이 마음에 걸리는 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펜트하우스에 있을 도준희였다.
회사도 간신히 허락받아 나오는 건데 출장이라니. 그것도 남자와. 우예린은 상사를 남자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우예린이 얼굴 반반한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도준희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도준희가 스산하게 웃는 걸 떠올리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탕!
“안 돼요!”
마우스를 던지듯 내려놓은 우예린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금방 깨달았다. 김 대리가 구겨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안 되는 게 아니라요…….”
파랗게 질린 우예린이 침을 꿀꺽 삼키고,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출장 가면 많이 늦나요?”
“지금 출발하면 늦지는 않겠지.”
“…….”
우예린은 고민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일곱 시까지 귀가하지 않는다면 도준희의 소름 끼치는 문자 폭탄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김 대리님, 예린 씨 바쁜 것 같은데 제가 갈게요.”
일어난 사람은 지수련이었다. 우예린에겐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던 김 대리가 지수련에게는 방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지수련 씨는 팀장님이 맡기신 거 해야지. 과장님 출장에는 꼼꼼하고 섬세한 우예린 씨가 동행하는 게 맞아. 그렇다고 지수련 씨가 꼼꼼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 내 맘 알지?”
김 대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자 지수련은 상한 과일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예린 씨, 출장 가면 오히려 칼퇴 시간보다 빨리 끝날 때도 있으니까 얼른 준비하고 나가. 과장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셔.”
“이렇게 갑자기요?”
“내가 밥 먹을 때 얘기 잠깐 했던 것 같은데 못 들었어?”
오늘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저 말은 믿기지 않았다. 김 대리는 이런 식으로 내가 말했는데 네가 못 들은 것뿐이라는 야비한 전법을 써댈 때가 종종 있으니까.
그러나 출장을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아, 우예린 씨. 이것도 가지고 가. 그쪽 공장 생산 라인 자료야.”
“네……, 감사합니다.”
“수고해.”
우예린에게 서류 파일을 떠넘긴 김 대리가 바쁜 일이 있는 양 유유히 사라졌다. 귀찮은 짐을 넘긴 듯 한결 후련해 보이는 김 대리의 뒷모습을 보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과장님은 이미 내려가 계신다고 했지.’
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잡아타자마자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과장님 오늘 기분 최악이래. 김 대리가 욕받이 하기 싫어서 너 떠민 거야. ㅠㅠ]
지수련에게서 온 문자였다. 그런데도 대신 가겠다고 나서준 지수련에게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대놓고 떠넘기는 느낌이 난다 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최 과장의 차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몇 번 회식할 때 보았던 최 과장의 차는 세련된 검은 세단이라 찾기 쉬웠다. 기억에 남은 세단 옆으로 걸어가 조수석의 창문을 톡톡 쳤다.
곧 선팅이 된 창문이 내려가고 과장의 무표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뭐야?”
“…….”
“김 대리는?”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기분이 최악이라 하더니 과연 평소보다도 한층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김 대리님이 저보고 따라갔다 오라고 하셨어요.”
“뭐?”
최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차갑고 칼 같은 엘리트 과장으로 불라는 그의 얼굴이 한층 싸늘해지자 우예린은 저를 이곳으로 보낸 김 대리가 새삼스럽게 원망스러워졌다.
“……김 대리가 준 건 있어?”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최 과장은 무덤덤했다. 우예린은 김 대리가 마지막에 떠넘겼던 갈색 서류 봉투를 들어 올렸다.
“네, 자료는 주셨어요.”
최 과장이 갈색 봉투와 우예린을 눈으로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타.”
차 안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 최 과장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우예린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서울 외곽 교외에 위치해 있다는 출장지는 차로 한 시간가량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지금은 차도 안 막히는 시간이고……. 이런 출장은 현장 확인만 한다고 그랬으니까 오래 걸리지 않겠지.’
잘하면 시간 내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내내 마음에 가시처럼 걸려있던 문제가 해결되자 우예린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룸 미러를 통해 우예린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최 과장이 룸 미러를 곁눈질하고 이내 전방을 바라보았다. 꽉 다물린 냉랭한 입술이 얼핏, 곤혹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니 그제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어색해서 소름이 돋는 분위기 같은 것들 말이다. 우예린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최강현의 눈치를 보았다.
‘이런 식으로 과장님과 둘이 있는 경우는 처음이네.’
친하지 않은 상사라 그런지 많이 어색하다. 우예린이 알고 있는 최강현은 누구와도 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업무적으로 가까운 건 팀장과 대리 정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어색하게 느낄 거라고 생각하니 불편함이 줄어들었다.
우예린은 쭉쭉 뻗어나가는 고속 도로와 주변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가방을 뒤졌다.
“과장님. 커피 드실래요?”
“커피?”
“혹시 몰라서 출발 전에 텀블러에 커피 담아왔거든요.”
“…….”
최강현은 룸 미러로 그녀의 텀블러를 힐끗했다. 우예린은 텀블러 뚜껑에 커피를 따르려다가 최강현에게 텀블러 뚜껑을 주는 것이 과연 괜찮은가 하는 문제에 휩싸였다.
곤란한 얼굴로 머뭇거리자 운전을 하던 최강현이 까딱, 턱짓을 했다.
“서랍 열면 종이컵 있어.”
우예린이 조수석 서랍에서 종이컵을 꺼내 커피를 따랐다. 최강현은 앞을 바라보며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커피를 홀짝이자 딱 적당히 따뜻한 커피가 입술을 적셨다.
“아, 과장님. 껌도 있어요. 사탕도 있고.”
우예린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 가방에서 주전부리를 부랴부랴 꺼내놓았다. 그러더니 반응하지 않는 최강현을 보고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운전하면 입이 심심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말이 없는 최강현의 정적이 어색하여 우예린은 시선을 돌리다 무심코 룸 미러를 바라보았다가 움찔했다. 최강현이 룸 미러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무뚝뚝한 눈동자가 왜인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최강현이 눈을 돌렸다.
“급하게 전달받았을 텐데 그건 또 언제 챙겼지?”
“필요할 것 같아서 서랍에서 챙겨왔어요.”
다소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우예린의 표정도 편해졌다.
“담배 피워도 되나?”
“예? 아, 네네.”
담배를 싫어하지만 우예린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현이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 붙여드릴까요?”
우예린이 저도 모르게 묻자 최강현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흘끗했다. 우예린은 열혈 신입 사원으로서의 열의를 불태웠다.
최강현이 아무 말 없자 굳이 필요 없는데 나섰나 보다 싶어 금세 소심해진 우예린은 최강현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뜬금없이 도준희가 생각났다.
‘누구보다 골초일 것 같은데 담배를 물고 있기만 했지.’
도준희는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꽤 많아 보였다.
‘나 때문에 안 피웠던 건 아니겠지?’
그는 자신이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듯했다.
‘에이, 설마.’
제멋대로가 일상인 도준희가 그런 섬세한 배려를 할 리가 없지. 우예린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니까 약속이라도 있나?”
“예?”
“퇴근 시간 물어보는 것 같아서.”
“아, 네에…….”
우예린은 짤막하게 대꾸했다가 최강현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핸들을 툭 치자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약속은 아니고요, 집에 일찍 가야 해서요.”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우예린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꿀단지라니, 도준희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달콤하고 귀여운 단어다.
‘뱀 구덩이라면 모를까.’
투덜거리다가 최강현의 시선을 느끼고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은 일찍 끝날 거야.”
‘오늘은?’
“김 대리가 얘기 안 했나 보군. 당분간은 계속 출장 예정이야. 오늘은 공장 둘러보고 공장장과 얘기만 나눌 테니 금방 끝날 거고.”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관련이 없는 얘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다음엔 김 대리님이 가시겠지.’
바람이 안쪽으로 불어 담배 연기가 안으로 훅 들어왔다. 담배 냄새를 들이킨 우예린이 격하게 기침하자 최강현이 담배를 비벼 껐다.
“아, 아니, 괜찮은데……. 콜록콜록.”
“싫다면 싫다고 말해. 끌려다니지 말고.”
“…….”
“적당히만 하면 아무도 기분 나쁘게 생각 안 해.”
우예린은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강현을 흘끗하자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이었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얘기하시는 거지? 우예린은 김 대리를 떠올렸다.
‘내가 답답하신가.’
머쓱한 기분에 뒷덜미를 긁적였다. 원래도 우예린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사람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좀 더 그런 성향이 심해진 게 없지 않아 있었다.
그녀를 눈엣가시 취급했던 학생 주임 선생님은 본인의 말에 단 한 소리라도 반박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본의 아니게 학생 주임 선생의 치부를 보게 된 우예린은 졸업할 때까지 그의 괴롭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더 그를 긁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성격으로까지 굳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