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과장님, 껌 씹으실래요?”
“…….”
“졸리실까 봐…….”
최강현은 황당한 눈으로 우예린을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흘렸다. 최강현이 웃는 걸 처음 보는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운전하는 게 신경 쓰이나?”
속내를 들켜 깜짝 놀란 우예린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아……, 보통 운전은 부하 직원이 하는 거잖아요. 근데 제가 운전면허가 없어서…….”
“그건 우예린 씨가 신경 쓸 건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김 대리를 책할 일이고. 김 대리도 운전이 거칠어서 어차피 내가 했을 거야.”
“아, 그런가요?”
운전하는 최강현이 신경 쓰여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했던 우예린은 멋쩍게 웃었다. 최강현이 아까보다 부드럽게 풀어진 입으로 중얼거렸다.
“우예린 씨는 섬세하군.”
“…….”
“아기자기하고.”
‘근데 탕비실에서는 왜 그러고 있었던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정신이 든 최강현은 눈을 멍하게 뜨고 있는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네?”
크흠, 헛기침을 한 최강현이 고개를 전방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처음보다 더 무뚝뚝해진 최강현을 힐끗한 우예린은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최강현의 말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는데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어 눈을 끔벅였다. 그래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어색한 분위기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아 기분은 한결 편안해졌다.
한편 최강현은 우예린과 달리 곤혹스러움이 절정에 달했다. 이제 잊어버린 줄 알았던 탕비실에서의 우예린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사라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미치겠군.’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처음이라 골머리를 썩였다.
“탕비실 벽이 매직미러로 되어있는 건 알아?”
“아, 몰랐는데 나중에 알았어요. 매직미러라는 경고문도 붙었던데요. 과장님께 보고하러 갔다가 탕비실에서 코 파는 거 봤다는 사람도 있고, 혼자 몰래 뭐 먹는 사람도 봤다 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웃기만 하는 우예린의 얼굴을 룸 미러로 보며 최강현이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한 실수는 생각 안 나나 보군.’
“그래, 그러니까 실수하지 마.”
“네? 아……, 네.”
영문을 모르는 우예린은 갑자기 냉랭해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커피를 홀짝였다.
최강현의 말대로 공장 출장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우예린이 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냥 최강현을 보필하고 소소한 심부름을 하는 것이 다였는데, 이래서 김 대리가 별일 아니라는 듯 자신에게 일을 떠맡겼구나 하고 깨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우예린 씨는 내가 알아보라 한 거 알아보고 있어. 나는 책임자와 얘기하고 갈 테니까.”
우예린은 공장장과 공장실로 향하는 최 과장을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원하시는 자료는 제가 내어드릴게요.”
공장의 자료를 정리하는 경리는 아주 친절한 분이었다. 30대의 푸근한 인상의 그녀가 자료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설명해 준 덕에 최강현이 시킨 일을 수행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일을 끝낸 우예린은 시간이 남자 손님 휴게실에서 음료나 홀짝였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네 시밖에 되지 않았다.
‘과장님이 공장장님과 얘기만 하면 끝난다고 했으니까.’
대화 시간을 넉넉잡아 한 시간이라고 한다 해도 평소보다 일찍 끝날지도 몰랐다. 내심 늦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우예린은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다.
‘무슨 통금 시간이 일곱 시야.’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충남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친구들이 유난 아니냐고 할 정도로 부모님이 엄했고 통금 시간도 당연히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지정된 통금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그때는 통금 시간 자체가 답답했는데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아주 살 만한 시절이었다.
‘……당분간만 참자.’
울적해진 우예린은 이 순간이 오래 가지 않을 거라며 애써 위안했다.
지잉.
진동이 울렸다.
[오늘 몇 시에 와?]
도준희였다.
‘진짜 양반은 아니야.’
양반과 도준희.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네.
‘조선 시대라면 망나니였을 거야.’
망나니 도준희? 매일 주변 처녀들이 줄 서서 도준희 망나니가 하는 꼴을 바라봤을지도……. 폐위 태자 같은 게 더 잘 어울리는 듯도 하다.
[왜요?]
[꿈자리가 사나워.]
[늦잠 잤어요?]
도준희의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생각하고 보내는 듯했다.
[어. 꿈꿨는데 느낌이 더러웠어.]
우예린은 핸드폰을 들고 고민했다. 무슨 꿈이냐고 물어봐야 하겠지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데.
[너, 얼굴 반반한 놈이 다가온다고 훅 따라가거나 하지 마라.]
답장하지도 않았는데 도준희의 문자가 왔다.
‘내가 무슨 먹을 거 주면 따라가는 일곱 살 애도 아니고.’
기가 막혀 핸드폰을 쏘아보자 문자가 또 왔다.
[설마 지금 남자랑 있냐?]
소름이 쫘악 끼쳤다. 최 과장님을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성별은 남자가 맞지.’
자신이 아무리 상사라 남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도준희에겐 먹히지 않을 말이다. 거시기가 달려있지 않냐고 빈정거릴 게 뻔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문자를 보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 근무 시간이에요.]
괜히 황당하다는 듯 정색하며 문자를 보내놓고 두근두근 뛰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도준희는 미친 짐승도 짐승이라는 듯 가끔 소름 끼칠 정도로 감이 좋을 때가 있었다. 도준희의 문자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꾹 쥐었다.
[일찍 들어와.]
평범한 답장 내용을 확인하자 안도하여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지잉.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금세 도준희가 마음을 바꾸어 통화를 하자거나 주변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할까 봐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폴더를 열어젖혔다.
[예리나, 내일 시간 있어?]
긴장하던 우예린이 눈을 깜박였다. 도준희가 아니라 이지나에게서 온 문자였다.
* * *
다음 날, 우예린은 회사 건물 1층 카페로 내려왔다. 시간을 확인하자 30분은 여유 시간이 있다. 오늘은 평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최 과장과 김 대리가 공장으로 출장을 간 탓에 사무실 분위기가 평소보다 적막하고 고요했던 것도 있지만, 퇴근할 때 최 과장과 김 대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어깨가 홀가분했다.
사무실 대부분의 사원들이 퇴근 시간 땡, 하는 순간 가방을 들기 시작했으니 퇴근하는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예린아.”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들고 있는 이지나가 눈에 띄었다.
“일찍 왔네?”
이지나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네가 일찍 와야 한다고 했잖아. 하여간 좀 떨어진 곳에 분위기 좋은 곳 가면 어디가 덧나? 꼭 이 회사로 오라 그래서는…….”
이지나는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우예린은 조금 미안해서 뺨을 긁적였다.
어제 뜬금없이 연락한 이지나는 우예린과 만나기를 원했다. 다른 때였으면 만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인생에 도준희가 끼어든 요즈음은 약속 하나에도 도준희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웬만하면 도준희에게서 의심받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이지나가 꼭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라, 하는 수 없이 이곳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게 기분이 나쁜 건가 했으나 이지나의 표정을 살핀 우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 몰라.”
“무슨 얘기를 하려고 꼭 만나야 한다고 한 거야?”
입술이 댓 발은 더 나온 이지나가 살벌하게 눈을 치켜떴다.
“남친 새끼가 바람이 난 것 같아.”
꼭 만나야 한다고 했을 때부터 할 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자극적인 화제에 우예린이 흠칫하고 눈을 굴렸다.
“확실해?”
“그래.”
“어떻게 알게 된 건데?”
“서프라이즈 이벤트 해주려고 몰래 가게에 갔는데 여자를 다정하게 배웅해 주고 있더라니까. 말로는 손님이라는데 지금까지 걔가 손님을 배웅해 준 적은 없었다고!”
“손님?”
“그래, 마사지 샵 손님 말이야.”
우예린은 조금 놀랐다.
“너 아직도 그 사람 만나는 거야?”
“응, 헤어졌다고 한 적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졸업 후에는 남자면 그냥 만났던 과거와 달리 얼굴, 몸, 재산, 집안 다 따진다고 했던 이지나를 기억한 우예린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을 뭐 하러 배웅까지 하냐고.”
“핸드폰은 봤어? 핸드폰 보면 웬만하면 다 나온다며.”
“당연히 걔 잘 때 털었지. 아무것도 없었어.”
“그럼 좀 더 기다려 봐.”
“……하아.”
이지나는 남성 편력이 화려한 만큼 연애 경험치가 높다. 바람의 기미만 보여도 헤어진다고 했던 이지나의 얼굴이 심란하자 우예린은 물을 마시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많이 좋아하나 보구나.”
“어? 뭐……. 이것저것 잘 맞기는 해.”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인 이지나가 이번에는 우예린에게로 화제를 넘겼다.
“너는 무슨 소리야?”
“응?”
“통금 시간이 있다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자취하는데 무슨 통금이야?”
“어쩌다 보니까, 생겼어.”
우예린은 생각난 김에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여섯 시 15분이었다.
‘지나 보내고 택시 타면 아슬아슬하겠다.’
배가 슬슬 고파왔지만 음료 말고는 입에 대지 않았다. 도준희가 집에서 저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본인이 만든 음식을 깨작이면 말도 못 하게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풍겨대는 탓에 회사에서 저녁을 먹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무슨 소리야? 설마 너 부모님 올라오셨어? 너희 부모님 통금 시간에 집착하시잖아.”
“아니, 그건 아닌데…….”
우예린은 이지나를 보자 갑자기 속에 꾹꾹 담아둔 말을 하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말이 속에만 쌓여가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지나야.”
“어, 말해. 역시 뭐가 있는 거지?”
“너는 나보다 경험이 많잖아. 만약에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약간 제정신이 아닌 미친 남자가 너한테 집착하면 어떡할 거 같아? 막 헤어진다고 해도 안 헤어지고 그런다면?”
“헤어져야지.”
고민할 게 있냐는 듯 이지나가 딱 잘라 말했다. 우예린의 얼굴이 흐려졌다.
“헤어지자고 해도 안 헤어진다고 하면…….”
“골치 아프긴 한데, 그래도 웬만하면 아는 오빠 데려가서 협박하면 해결돼.”
우예린은 우중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거로도 해결이 안 된다면?”
“해결이 안 된다고?”
“어지간한 남자는 상대도 안 되는 것 같아. 나도 다양하게 시도해 봤는데 효과가 없었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 네 문제구나. 어떤데 그래?”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못 말하고 말고 할 게 없다 싶은 우예린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엄청 잘생겨서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위험한 사람이었어.”
“내가 예전에 말해준 적 있잖아. 찢어지게 가난한 척해 봐.”
“그거로는 안 돼. 돈이 엄청, 엄청 많아서 하나도 신경 안 쓰더라.”
“…….”
“의심도 많아서 늦게 가면 득달같이 전화가 오고. 회사 다니는 것도 싫어해. 그냥 집에 가만히 있으래.”
“…….”
“사실 통금도 그래서 생긴 거야. 저녁도 먹고 가면 안 되고…….”
“저녁까지 해준다고?”
이지나의 목소리가 미묘해졌지만 눈치채지 못한 우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거 아니야?”
“많이 안 먹으면 기분 나빠 해서 배부르도록 먹어야 하니까, 그것도 부담이더라고.”
우예린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평소라면 가차 없이 혀를 차거나 호들갑을 떨었을 이지나가 조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괸 채 빤히 바라보던 이지나가 눈이 마주치자 쯧쯧, 혀를 찼다.
“우예린아.”
“왜?”
“병원은 가봤어?”
“…….”
“야, 내가 저번에 병원 가보라고 했잖아. 가만 보니까 저번에 통화로 얘기하던 그거 아니야. 아니면 너 요즘 뭐 소설 같은 거 써? 딱 그거네, 그거.”
어리둥절하던 우예린의 눈썹이 구겨졌다.
“씨이, 야!”
소리를 버럭 지르자 이지나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막았다. 우예린은 답답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나도 거짓말하는 거면 좋겠다!”
그러자 이지나가 눈을 끔벅였다.
“네 망상 아니야?”
여전히 의심스러운 이지나를 쏘아보며 우예린이 눈에 힘을 주었다. 이지나는 측은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조언했다.
“현실 애인을 만나. 너 예전에 도준희 짝사랑하던 거 말고 남자를 만난 적이 없어서 그래.”
“…….”
“망상증도 정신병이래. 정신병 있는 여자를 누가 상대해 주겠냐. 다른 사람들한텐 그런 소리 말아.”
소설 쓰냐는 말에 이어 정신병으로까지 흐르는 이지나의 의심을 받으며 우예린이 관자놀이를 손가락 마디 관절로 꾹꾹 눌렀다.
“도준희야.”
“응?”
“내가 말한 사람이 도준희라고.”
이름까지 밝혔는데도 이지나는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더 측은한 눈빛으로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냈다.
“병원을 한번…….”
이번에는 전보다 좀 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는 이지나에게 핸드폰 문자 목록을 보여주었다.
“이게 뭐야?”
무심코 핸드폰을 들여다본 이지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문자 내용 하나하나를 확인한 이지나의 굳은 눈빛이 우예린의 얼굴을 향했다. 선홍빛 입술이 달싹거렸다.
“진짜야……?”
“진짜라고.”
이지나가 우예린에게서 핸드폰을 가져가 본격적으로 통화 내역과 문자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훑는 눈동자가 아래위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 사람이 도준희라고?”
“…….”
“미친놈이네?”
마침내 핸드폰을 다 본 이지나가 단정적으로 말하자 우예린이 바로 그거라는 양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아니, 무슨 하루에 어디냐고 물어보거나 뭐 하냐고 물어보는 문자가 열 개나 와?”
“의심이 많다니까. 남자랑 있는 거 아닌지 확인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때 마사지 샵에서 도준희를 만난 후로 계속 이러고 지냈다는 거지?”
이지나의 아연한 물음에 우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도준희. 이래서 걔가 그런 소리를 했나?”
“걔?”
“내 남친! 도준희에 대해서는 말 잘 안 해주려고 하더라고.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도준희가 도련님이라고 불린다고. 그거 말고도 뭔가 더 있는 눈치였어. 궁금해서 더 물어보려고 했는데 안 말해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
“근데 지금 네 말 들으니까 알겠어. 도준희,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닌가 봐.”
흥분한 이지나의 목소리는 우예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침울해진 우예린을 뒤늦게 눈치챈 이지나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도준희랑 무사히 헤어져야 한다 이거지?”
“…….”
“헤어지자고 해봤어?”
우예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마다. 이 지경이 된 이유였으니.
“이상하네. 대학 다닐 때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으면서 지금 와서 왜 그런데.”
도준희가 언뜻 했던 말로 미루어 보면 도준희와 자신은 동향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대학 다니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우예린은 이지나와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법을 짜내었다.
“그거 어때?”
생각에 잠겼던 이지나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뭔데?”
“망상증도 정신병이라고 했던 거.”
“그게 왜?”
“정신병 말이야. 커플의 흔한 이별 사유 중 하나가 한쪽의 건강 문제이기도 해. 그중에서 우울증 같은 건, 아무래도 연애를 지속하기가 힘들지.”
“나보고 우울증에 걸리란 거야?”
“그런 척을 하라는 거야. 우울증보다 미친 척을 해보는 건 어때?”
우예린은 이지나의 말을 듣고 생각에 골몰했다. 이지나의 해결책은 자신이 계획을 세울 때 생각했던 방법과도 흡사했다.
미친 사람인 척하기. 의심하지 않을 만큼 은근하면서 지속적으로 굴어야 하는 게 까다롭기는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면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한번 시도를…….”
이지나의 묘한 얼굴을 발견한 우예린이 말을 멈추었다.
“왜 그렇게 봐?”
이지나가 턱을 괴며 말했다.
“근데 너 도준희 많이 좋아했잖아. 그냥 만나보는 건 어때?”
“뭐? 무슨 소리야? 너도 저번에 말했잖아. 도준희 좀 이상한 것 같으니까 거리 두라고.”
“그땐 그랬는데…… 네 말 들어보니까 돈도 많다며. 좀 아깝지 않나 싶어서.”
“그건…….”
그 순간이었다. 우예린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보자 액정에 도준희의 이름이 떠있었다. 어느새 시계는 여섯 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회사에서 출발했을 시간이다.
“도준희네?”
이지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예린은 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쉿.’
영문을 모르는 이지나가 입을 다물자 그제야 핸드폰 폴더를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출발했어?
“지금 하려고요.”
―좀 늦네.
도준희의 목소리가 금세 못마땅해졌다.
―야근이 좀 잦다?
“퇴근이 좀 늦은 건데 무슨 야근이에요.”
―정시보다 늦게 퇴근하면 야근이지.
‘어련하시겠어.’
―야근하다가 사원들끼리 눈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하던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우예린은 도준희의 말을 막고자 재빨리 대꾸했다.
“빨리 갈게요.”
폴더를 접고 한숨을 쉬자 지켜보던 이지나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뭐래? 빨리 오래?”
“통금 있다고 그랬잖아.”
“아니, 친구 만난다고 그러면…….”
“안 통해.”
“…….”
“또라이라니까.”
우예린이 울적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이지나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보이네. 미안하다야. 만나보라는 말 괜히 했네.”
* * *
한밤중의 펜트하우스는 지독하게 고요했다. 20층이 넘는 높은 위치에 있어 자취방과 달리 자동차 경적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성방가 소리도 닿지 않아 잠자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우예린도 만약 도준희가 잠을 재우지 않는 일만 아니었다면 자취방보다 편히 잠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조용한 밤, 우예린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흘끔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곤히 잠든 도준희의 얼굴이 보였다. 성질 더러운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도준희도 잠을 방해받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며칠 전 주말, 낮잠을 자던 도준희의 잠을 깨운 한 통의 전화가 있었다. 눈을 뜬 도준희는 조용히 전화를 받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방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설을 떠올린 우예린의 얼굴이 살짝 해쓱해졌다.
‘무시무시했지.’
지금 우예린은 도준희의 잠을 깨우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도준희를 짜증나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두려움에 손가락이 가늘게 경련했다.
‘때리면 어떡하지?’
우예린은 어두워진 얼굴로 눈을 꽉 감고 두 손으로 도준희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도준희, 도준희.”
“…….”
“도준희!”
“으음…….”
도준희가 눈을 뜨자 눈빛에서 신경질이 그득 묻어났다. 찌푸려진 눈매가 날카로워 순간 계획도 잊고 겁을 집어먹은 우예린이 우뚝 굳어졌다.
“뭐야?”
자다 일어난 도준희의 목소리는 다소 잠겨있었고 평소보다 낮아서 귀가 오싹했다. 우예린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겁을 먹은 척을 하려고 했는데 도준희 때문에 정말로 겁을 먹어서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아, 악몽을 꿨어요.”
“…….”
“요즘 계속 악몽을 꿔요.”
머릿속으로 이지나가 비밀 이야기를 해주듯 속삭였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신내림 받는 사람들은 꿈을 통해서 계시를 받는 경우가 있다더라. 우리 엄마 친구가 그래서 신내림 받았잖아.”
“악몽?”
도준희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는 듯 한쪽 눈을 구겼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자꾸 찾아와요. 자기 말을 전해야 한다고 해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 거래요.”
“나는 사실 정신병이나 신내림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해. 주변 사람들이 피한다는 점에서 말이야. 나 믿어. 걱정 말고. 제정신이라면 자기 애인이 신내림을 받았다는데 그걸 끌어안고 있겠어?”
예전이라면 이지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겠지만 몇 번 실패를 겪어보니 자신이 없었다. 걱정이 많은 우예린의 얼굴이 어둑했다. 도준희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잠이나 자라.”
순식간에 도준희의 팔을 베고 자리에 누운 우예린의 귓가로 도준희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도준희는 우예린이 악몽 운운하는 것을 하나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도준희라면 그럴 것 같아서 우예린은 놀라지도 않았다.
‘역시 이번에도 실패인가.’
뭐 한 번으로는 그럴 수 있겠지. 한 번으로 힘들다면 반복하면 될 일이다.
* * *
3일 후 새벽 두 시경, 우예린이 도준희의 옷을 붙잡고 흔들었다. 도준희가 익숙한 듯 눈을 뜨고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잠기운 없는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을 본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요 며칠 도준희가 잠이 들려고 하면 매번 깨웠더니 이제는 흔들기만 해도 눈을 뜨는 도준희다.
‘이 정도 했으면 다른 방에서 잘 법도 한데, 그러지는 않네.’
그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늘어놓을 준비를 했다.
“도준희…….”
“또 악몽을 꿨다고?”
말이 끊긴 우예린이 흠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문제?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알아보니까 이런 게 신내림의 전조 증상이라고 하던데…….”
너무 속 보였나 싶어 우예린이 도준희의 눈치를 흘끗 살폈다. 도준희는 한 팔로 우예린의 어깨를 단단히 안은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악몽을 꾼다고 한 이후로 계속, 도준희의 팔베개를 하고 있다. 우예린은 그게 신경이 쓰였다. 이제까지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자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제는 팔베개를 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
“젊은 여자?”
“네?”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난다며. 젊은 여자야?”
“응. 아니, 할머니였던 것 같아요.”
“자꾸 나타나?”
우예린이 맞다고 말하자 도준희가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우예린을 곁눈질했다.
“할머니 무서워하냐? 친할머니?”
“그런 게 아니라, 모르는 할머니예요. 나 혼자 집에 있는데 자꾸만 문을 두드려요. 열어달라고.”
“신내림이라고…….”
심각해진 얼굴을 보며 우예린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믿는 눈치이지 않은가. 도준희가 우예린을 힐끗했다.
“무섭냐?”
“다, 당연하죠. 신내림을 받으면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하고, 그러면 도준희랑도 이렇게 못 살게 되는 거고…….”
무심코 원하는 바를 흘려버린 우예린은 아차, 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이 집을 좀 떠나있어야 할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내자 도준희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팔에 힘을 주어 우예린을 끌어당겼다. 도준희의 탄탄한 몸과 완전히 밀착된 우예린은 뭔가 불편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도준희가 그녀의 손을 잡아채 깍지를 꼈다. 그 바람에 도준희의 근육질 팔뚝에 어깨가 완전히 감싸인 형태가 되었다.
“우예린.”
“네?”
“다음에 또 꿈꿀 거 같으면 나 깨워.”
우예린은 도준희와 손깍지를 낀 게 신경 쓰여서 손을 흘끔거리며 대꾸했다.
“왜, 왜요?”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즈음에 엄마 손에 이끌려서 점을 보러 갔는데.”
“점을요?”
“어. 내 주변 애들이 하도 다치니까 살이 꼈나 물어보려고.”
“…….”
“엄마가 걱정이 좀 많은 사람이었어.”
우예린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 어린 나이에 건강 문제를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살이 꼈는지를 물어본다고?’
얼마나 개차반처럼 살았으면…….
“그때 무당이 귀신도 때려잡을 상이라고 하더라고.”
“…….”
“신내림을 받으면 결혼도 못 하는 거잖아. 그건 곤란하지.”
“…….”
“할멈이든 처녀든 쫓아내 줄 테니까 깨워. 알았지?”
“…….”
“꼭 깨워라.”
“……네에.”
우예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도준희는 정말로 귀신도 도망갈 것처럼 사나워서 할 말이 없었다.
‘신내림을 들먹거려도 소용이 없는 거면, 정말 미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야?’
* * *
그다음 날부터, 우예린은 도준희 앞에서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원래 평범하지 않은 것은 배척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꺼림칙하니까.
우예린은 고향에 있을 적 이상한 짓을 한다고 집에만 갇혀 사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지금은 그들이 우울증에 걸렸거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시골에서 정신병은 건강의 문제라기보다 굿을 하고 숨겨야 하는 문제였다.
무지에서 비롯된 슬픈 일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요지는, 유별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배척당한다는 거다.
돈을 빌리는 계획을 세운답시고 인생이 도준희에게 말릴 뻔한 사건 뒤로 우예린은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 완벽하게 미친 사람처럼 굴겠다고.
“우예린!”
침대 위에서 우예린은 부러 천천히 눈을 떴다. 거실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쓰러진 탓에 바닥에 부딪힌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도준희…….”
얼굴을 구긴 도준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예린은 아련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자꾸 헛것이 보여요.”
솔직히 말해서 도준희가 자신에게 질리기를 바라는 한편,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잠시 후, 우예린은 다급하게 구는 도준희에 의해 침대에 누워있게 되었다.
“진찰상으로는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만…….”
곤란해하는 의사의 말에 도준희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말이 돼? 갑자기 쓰러지고 멀쩡히 자다가도 비명을 지른다고. 근데 멀쩡하다고?”
“가끔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해요. 심인성, 그러니까 마음의 문제로 인해 통증이 올 수도 있고요. 혹시 모르니 신경 안정제를 처방하고 가겠습니다.”
한쪽 눈을 뜨고 도준희와 하얀 가운 의사를 살피던 우예린은 도준희가 그녀를 쳐다보자 재빨리 눈을 감았다.
‘의사를 부를 줄은 몰랐네.’
도준희답지 않게 지극히 상식적인 대처였다. 혹시 꾀병인 게 드러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의사가 떠나고 도준희가 침대에 앉는 기척이 났다. 우예린은 눈을 감은 채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조용한 도준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살짝 실눈을 뜨는 순간, 바로 앞에 있는 도준희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뭐…….”
깜짝 놀란 우예린은 목 졸린 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든 도준희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안 자고 있었네.”
뜨끔한 우예린이 억지로 슬프고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들었다가 할머니가 또 찾아올까 봐 무서워서요.”
“…….”
“내가 미친 걸까요, 도준희?”
도준희가 우예린을 빤히 보더니 손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약간 곤란해 보이는 그와 달리 우예린의 얼굴에는 은은한 화색이 돌았다. 도준희가 입을 열자 얼른 표정을 아련하게 꾸며냈다.
“그런 기미가 보이기는 하네.”
“…….”
‘그래, 미친 여자는 아무래도 곤란하겠지?’
“뭐, 그래도 내가 계속 곁에 있어줄 테니까 걱정 마.”
“그래도 저는 다 이해……, 네?”
한발 늦게 그의 말을 이해한 우예린이 쇳소리를 냈다.
“신내림이라면 너 혼자 두는 게 더 불안하지.”
“아니, 왜요?”
“내가 귀신도 때려잡을 상이라고 했잖아. 나랑 있어서 이 정도로 그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마라.”
‘어떻게 저런 식으로 생각할 수가 있지?’
예상 못 한 방향의 대꾸에 우예린은 말문이 막혔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옆에 누워 그녀의 목덜미 뒤로 팔을 넣고 팔베개를 해주었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괸 채 우예린을 응시하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고.”
우예린은 눈동자만 굴려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미친놈이라고만 생각했던 그의 번들거리던 눈빛이 평소와 달리 퍽 다정해 보였다.
넋이 나간 우예린의 가슴 깊은 곳, 평온했던 마음 한구석이 그 눈빛에 반응했다.
두근.
‘두근?’
우예린은 심장이 크게 뛰는 감각에 기함했다.
* * *
다음 날, 우예린은 공장에서 할 일을 먼저 끝낸 채 차 안에서 최강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시간이 남을 때면 도준희와 문제없이 이별할 수 있는 방법을 골몰했던 우예린은 멍한 얼굴로 차창에 기대어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시들하게 느껴졌다. 이제까지의 계획이 모두 실패했다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과는 사뭇 달랐다.
‘그 얼굴. 대학 다닐 때 도준희랑 똑같았어.’
팔베개를 해주며 미소 짓던 도준희. 분명 천사의 탈을 쓴 악마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좋아해 마지않았던 그 시절의 도준희처럼 보였다.
우예린은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평소처럼 잔잔하게 뛰고 있는 심장 고동을 확인하는 우예린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달칵, 차 문이 열렸다. 공장장을 만나고 온다 했던 최강현이었다.
“오셨어요, 과장님?”
“그래.”
“빨리 끝나셨네요.”
“마무리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우예린은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일이 끝났는데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도 다섯 시도 되지 않을 듯했다.
몇 번 최 과장의 출장을 따라가던 김 대리가 어느 날 앞으로의 출장을 자신에게 떠넘길 때는 곤혹스러웠지만 일도 쉽고 일찍 끝나기도 하니,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바로 차를 출발시킬 줄 알았던 최강현이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예린 씨, 시간 괜찮나?”
“네?”
“괜찮으면 저녁 먹고 가지.”
“네? 저녁이요?”
멍하게 있던 우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
“일찍 끝났잖아. 그동안 출장 따라다니느라 수고했어. 김 대리 대신에.”
“아…….”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통금 시간을 생각했다.
“안 되나?”
최강현이 시동을 걸며 우예린을 힐끗했다. 우예린은 잠깐 고민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끝나 시간이 여유로웠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사가 밥을 사준다는데 감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럼 내가 잘 아는 곳으로 가지.”
차는 30분간 도로를 달려 어느 한정식 집에 도착했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왜 웃냐는 듯 최강현이 그녀를 바라보자 얼른 웃음을 그쳤다.
“아, 저, 그게…… 과장님이 잘 아는 집 맞는 것 같아서요. 단아하고 고적한 게.”
“…….”
“취향이 고급스러우신 것 같습니다.”
우예린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최강현은 별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머쓱해진 우예린은 안전벨트를 분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난 아부를 잘 못 해.’
누구나 어려워하는 과장님과의 식사는 감사한 일이지만 체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한정식 집은 넓은 한옥에 그보다 넓은 마당을 갖춘 식당이었다. 식당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데 놀란 우예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최강현이 도착하자 안내하러 나온 종업원이 방을 안내해 주었다.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무심코 메뉴판을 펼쳐 메뉴를 확인한 우예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무슨 음식 가격이 이래?’
고작 음식인데 값이 그녀의 한 달 월세에 육박했다. 익숙한 듯 주문하는 최강현 앞에서 우예린은 말없이 메뉴판을 치우고 수저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종업원이 우아한 태도로 주문을 받고 나가자 우예린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깔끔한 가게와 가격대가 꽤 있는 메뉴, 그리고 세련된 서비스까지. 고급스러운 가게였다.
월급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대학생 때는 가격 탓에 자주 먹지 못한 것도 스스럼없이 먹게 된 우예린이었지만, 이렇게 비싼 가게는 처음이라 음식은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더부룩한 기분이었다.
“뭐가 불편한가?”
최강현이 안절부절못하는 우예린을 눈치채고 물었다. 우예린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최강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 아뇨.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요.”
‘굳이 비쌀 것 같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리 상사라도 이런 비싼 밥을 얻어먹기가 민망했다. 남사원들이 일하느라 수고한다고 지수련에게 몇 번 사주는 걸 본 적은 있었다. 차라리 그런 가게였다면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좀 부담스럽네.’
“과장님 하고 다니는 거 다 명품이야. 집이 꽤 잘사나 봐.”
지수련이 감탄하며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에게는 부담스럽지만 그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은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부담을 털어버렸다.
‘도준희도 그렇고, 대한민국에 부자가 많나 봐.’
“음식 맛이 꽤 괜찮아. 입에 잘 맞을 거야.”
우예린은 긴장한 채로 “잘 먹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첫 번째 코스 음식은 잣죽이었다. 한 숟갈 떠먹자 고소한 맛이 확 퍼졌다.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네요.”
“다행이군.”
최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우예린은 그를 흘끔하며 죽을 떠먹었다.
‘웃으니까 덜 무섭네.’
처음 회사에 입사하여 무표정한 최강현을 만났을 때는 너무 긴장되어서 숨 쉬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문득 그때에 비하면 간이 조금 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준희랑 있다 보니 그런가.’
그토록 어려워했던 최 과장이나 김 대리이지만, 도준희에 비하면 그다지 무섭지도 않은 것 같다.
‘상사라서 긴장은 되지만…….’
소심이, 겁쟁이라고 불리던 자신이 그 무섭다는 최 과장과 멀쩡히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고 있다니. 이것도 도준희의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이었다.
내내 긴장이 되는 식사 자리일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최강현과의 식사 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다. 최강현이 어색하지 않게 말을 걸어준 탓일지도 몰랐다. 이 자리를 빌려 우예린은 입소문으로만 들었던 최강현이란 사람에 대해 그의 입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사님이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이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분이 내 아버지란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이지?”
“음…….”
선배들에게서 들었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자 알 만하다는 듯 최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사 이사가 아버지는 아니더라도 가족이기는 한 거니까. 교수에, 임원에, 혀가 내둘러진다.
‘과장님 집안이 대단하다는 건 사실이었네.’
소문이 사실이라는 게 알려지면 이미 과장님을 흠모하는 여사원들이 한층 더 눈을 빛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재밌어서 웃음이 나왔다.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시며 최강현이 우예린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좀 편해졌나 보군.”
젓가락으로 돼지갈비를 집어 먹으며 우예린이 쑥스럽게 웃었다.
“실은 되게 무서운 분이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부하 직원 밥도 사주시고, 출장 가서도 과장님이 다 하셨잖아요. 전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챙겨주시니까……. 감사합니다. 밥도 맛있어요.”
“한 게 없지 않은데.”
물을 내려놓은 최강현이 우예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우예린은 음식을 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운전자 졸지 않게 껌도 챙겨주고, 분위기 좋은 노래도 틀어주고, 공장 자료 꼼꼼하게 정리한 것도 우예린 씨잖아. 한 게 없지 않은데?”
우예린은 고기를 씹다가 눈을 깜박였다.
‘인정받은 건가?’
회사 생활은 멋있게 해나갈 거라는 초기 생각과 달리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렵고 바빴다. 인정받기는커녕 질책받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시간들이 떠오르자 가슴이 짜르르했다.
일 잘하기로 소문난 최강현에게 받은 칭찬이라 그런지 얼굴에 열까지 오르는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마저 먹어.”
기분 탓인지, 최강현의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러워진 듯했다.
* * *
다음 날 점심시간, 우예린은 오랜만에 회사 사람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김 대리를 대신해 최강현의 출장에 따라붙다 보니 아주 오랜만에 함께하는 커피 시간이었다.
커피를 들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우예린은 누가 등을 콕콕 찌르자 뒤를 돌아보았다.
지수련이 밖을 향해 손짓했다. 더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
“하늘 엄청 우중충하네.”
지수련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비 많이 온대.”
“에이, 나 비 오는 거 싫은데.”
투덜대면서 커피를 마시는 지수련은 찌푸린 얼굴마저도 예뻤다. 김 대리가 왜 그렇게 수련 씨, 수련 씨. 하는지 이해가 될 만큼.
커피를 홀짝이던 지수련이 우예린을 돌아보았다.
“걱정거리는 이제 다 해결된 거야?”
“응?”
“며칠 내내 표정이 안 좋았잖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참견은 안 했는데 요즘은 또 얼굴이 괜찮아 보여서.”
“그래?”
우예린은 새삼스러운 기분에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도준희 때문에 걱정이 많아 회사에서도 얼굴을 펴지 못하기는 했다.
‘걱정도 무뎌지는 거겠지.’
벌써 도준희의 펜트하우스에서 지낸 지 한 달이 훌쩍 넘어갔지 않은가.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지수련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린이 너 보면 대단한 것 같아. 처음에는 너무 긴장한다 싶었는데 시킨 일은 다 책임지고 잘하고, 갑작스럽게 생긴 일도 잘 마무리하고. 회사 사람들도 점점 널 믿는 게 보여.”
“나를?”
전혀 생각 못 한 칭찬에 우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수련이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과장님도 그래. 김 대리님이 과장님 기분 안 좋은 날 너한테 출장 떠넘긴 것만 봐도, 과장님이 널 못 미더워했으면 그대로 돌려보냈을 텐데 안 그랬잖아. 김 대리가 그날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알아? 문제없이 넘어가니까 엄청 놀라더라.”
꼴 보기 싫었다며 지수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중에는 김 대리 대신에 널 데리고 다니시기도 했고 말이야. 그게 네 능력이 회사에서 인정받았다는 말 아니겠어?”
“그렇게 봐줘서 고맙기는 한데, 아니야. 다른 사람이 갔어도 아무 말 안 하셨을걸.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한 분이셨어.”
지수련이 웃으면서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건 좀 아니다. 멋있는 분이긴 한데, 무뚝뚝하지 따뜻하진 않잖아.”
“따라다니는 거 수고했다고 밥 사주셨으면 따뜻한 거 아닌가? 김 대리님은 절대 그런 밥 안 사주실 것 같은데.”
우예린이 출장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말하자 지수련이 눈을 크게 떴다.
“밥까지 사주셨어?”
지수련이 약하게 비명을 질렀다.
“예린아, 너 과장님 라인 탄 거 아니니? 과장님 회사 사람들이랑 절대 단둘이 밥 안 드신대.”
“어?”
“왜, 우리 회사에서 과장님 좋게 보는 사람들 많잖아. 밥 사달라고 한 사람도 많았는데 아무도 과장님이랑 밥 먹는 데 성공한 사람이 없어.”
“그때는 배가 안 고프셨던 거겠지.”
우예린이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대화하면서 곧잘 웃었던 최강현의 얼굴을 떠올리자 지수련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고. 어쨌든 나도 너처럼 성실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노력하는 건 다 보이나 봐.”
뭐든지 잘하고 여유로웠던 지수련이 이런 말을 하다니 조금 놀라웠다.
“난 수련이 네가 더 부러운걸.”
“너 따라서 과장님 라인이나 타볼까? 고작 신입 사원을 택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쑥스러워 고개를 젓기는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상사가 좋게 보고 있다는데 싫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우예린이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자 하얀 뺨이 움푹 들어갔다.
* * *
하루 종일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저녁 일곱 시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든 우예린은 귀를 쫑긋했다. 비바람이 세게 몰아쳐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번쩍.
주변이 새하얗게 변했다.
1초 후.
우르르쾅!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던 우예린은 번개 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도준희를 깨워야 하는데…….’
신내림이니 악몽이니 하는 게 생각만큼의 효과는 없어도 질리게는 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에 우예린은 아직 ‘미친 척하기’ 계획을 이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싶었던 우예린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꼼짝하기도 힘들었다.
번쩍.
우르르 쾅!
우예린은 겁이 많지만 그건 모두 사람과 관련된 것일 뿐 심령 현상이나 공포 영화에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번개가 치는 밤이다.
‘그때도 딱 오늘 같은 날이었어.’
때는 7년 전, 여름 이맘때. 우예린이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이미 그때는 학생 주임 선생님의 치부를 목격한 터라 괴롭힘을 한창 받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날도 우예린은 학생 주임 선생님에게 붙잡혀 하지 않아도 될 잡일을 하는 중이었다.
늦은 저녁, 아무도 없는 적막한 교실은 불을 켜놔도 무서웠다. 수행 평가 검사지를 채점하는 우예린의 손이 빨라졌다. 밖에서는 오늘처럼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고 학교는 습하고 서늘했다. 일을 시킨 학생 주임 선생은 교무실에 있는지 집에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학생 주임 선생님이 시킨 채점 일을 끝마쳤을 때는 열두 시로, 우산이 없었던 우예린은 빗속을 뚫으며 집까지 달려갔다.
번개 치는 소리가 클수록 정신없이 다리를 놀렸었다. 그 순간의 일이 머릿속에 콕 박혔는지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몸이 굳어버렸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우예린은 태아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감각을 차단하려고 해도 번갯불이 반짝이는 것과 귀를 울리는 번개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우예린의 마른 어깨가 잔경련을 일으켰다. 그때 어깨 한쪽이 따뜻해졌다. 우예린은 흠칫, 몸을 굳혔다.
도준희의 손이 목덜미를 감쌌다. 그녀의 체온보다 따뜻한 손가락이 목덜미를 간질이자 어깨가 움찔거렸다. 우예린은 울상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하필 이럴 때 도준희가 먼저 일어나다니.
‘섹스하고 싶나 봐.’
하필 이럴 때.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닌 우예린은 모르는 척 눈을 질끈 감았다.
“우예린.”
“…….”
“무서워?”
도준희가 속삭였다. 이미 귀를 멍멍하게 하는 번개로 머릿속이 꽉 찬 우예린은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이불이 확 내려가고 우예린의 몸이 도준희 쪽으로 돌아갔다.
목덜미를 건드리며 성감을 자극하는 줄 알았던 손은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번개를 무서워해?”
“…….”
“애기야? 우예린답네.”
약간 긴장이 풀린 우예린이 이불을 다시 올리며 웅얼거렸다.
“무슨 의미예요?”
“한심해서.”
도준희가 툭 뱉은 말에 우예린은 발끈했지만 여전히 목덜미의 긴장을 풀려는 듯 주물거리는 손은 다정해서 그 괴리감에 멈칫거렸다.
도준희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한심해서 귀여워.”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우예린이 미심쩍은 눈으로 도준희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이리 와.”
도준희를 경계하는데도, 그 목소리는 유난히도 다정하게 들려왔다.
도준희가 목덜미를 주무르던 손을 쭉 뻗어 우예린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에게 안긴 채로 그를 힐끗거렸다. 반쯤 감긴 눈꺼풀에 잠기운이 묻어있지만 잘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왜 안 자냐고 투덜거렸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도준희가 잠들지 않는 데 안도했다.
우르르쾅!
번개가 한차례 내리쳤다. 우예린이 눈을 꽉 감자 도준희가 그녀의 머리를 팔뚝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우예린은 도준희에게 폭 안긴 상태가 되었다.
번쩍!
쾅!
우예린은 꽉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도준희의 단단한 가슴팍이 눈앞에 보였다. 무슨 조화인지, 번개가 쳐도 이전보다는 덜 무서웠다.
도준희의 심장 부근에 코를 박고 가만히 있었다. 어디선가 쿵, 쿵 야릇한 소리가 들렸다. 갸웃. 고개를 기울인 우예린이 슬쩍 귀를 도준희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도준희의 가슴에서부터 심장 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약간 빠르고, 규칙적인 고동 소리였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차분해지는 스스로를 느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심장 소리에 안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어두운 가운데 도준희의 나직한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넌 내가 있는데 뭘 번개 같은 걸 무서워하냐? 한심하게.”
‘자신감은 세계 최강이라니까.’
“사람마다 무서워하는 건 다른 거예요. 도준희는 무서워하는 거 없어요?”
도준희가 말이 없자 우예린이 귀를 쫑긋하고 눈을 힐끔 올렸다. 도준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좁혔다.
“나도 있지.”
“뭔데요?”
“안 가르쳐줘.”
도준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도준희랑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안긴 채로. 이상해.’
친밀하게 껴안고 있는 상황이 어색했지만 거기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우예린은 약하게 한숨 쉬듯 웃으며 투덜거렸다.
“번개보다 얼마나 무서우면 한심하지 않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비교도 안 되게 무섭지.”
도준희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우예린은 도무지 무서워하는 게 없을 것 같은 도준희가 무섭다는 게 뭔지 궁금해졌다.
“……뭔데요?”
“…….”
“안 비웃을게요.”
“네가 뭔데 날 비웃어?”
“그러니까 안 비웃는다고요.”
“말대꾸 잘하네.”
도준희에게 제대로 말도 못 붙이고 무서워했었던 처음을 생각하자 기분이 상했나 싶어 그의 눈치를 보았다.
대학생 때는 도준희를 너무 좋아해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긴장이 되었고 얼렁뚱땅 사귄 뒤에는 도준희의 본성을 보고 겁먹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입이 트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상외로 도준희는 웃고 있었다.
“계속 그렇게 해.”
‘반어법인가?’
우예린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도준희는 기분이 나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도 같아서 우예린은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사람 마음이 제일 무서워.”
“…….”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니까.”
평범하게 말하지만 어쩐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우예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우예린, 네가 나 무서워하는 거 알아.”
“아니에요, 안 싫어해요!”
싫어하는 게 맞지 않냐고, 눈을 번들거렸던 도준희가 생각나서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아직도 신체 포기 계약서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
“누가 뭐래?”
도준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서워한다고. 네가 날.”
싫어하는 것과 무서워하는 것. 차이점을 깨달은 우예린은 차분하게 도준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도준희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네 앞에서 평생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이런 내게 익숙해져야 해.”
“…….”
“아무리 내가 무섭고 싫어도, 넌 도망 못 가니까.”
윽박지르는 것도, 협박하는 것도 아닌 덤덤한 말씨였다. 그러나 우예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도준희의 말은 그녀가 머릿속으로 어떤 궁리를 하더라도 소용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고작 번개 따위에 겁먹지 마.”
“…….”
도준희의 말에 소름이 돋아서인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가. 그녀의 두려움을 하찮은 것 취급하는 도준희에게 화가 날 법도 하건만, 희한하게도 그의 말처럼 천둥 번개가 더는 무섭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자 굳었던 우예린의 몸에서도 긴장이 풀렸다. 천둥 번개도 그쳤는지 잠잠하다.
투둑, 툭, 툭.
비 오는 소리만 자장가처럼 공기를 울렸다. 우예린의 머릿속은 잠기운 하나 없이 말똥했다. 도준희 덕분에 처음으로 천둥 번개 치는 밤이 무섭지 않아졌는데, 협박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말 때문에 소름이 돋아 잠이 싹 달아났으니 뭐가 더 나은 건지 모르겠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품속에서 뒤척거렸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도준희의 팔은 여전히 단단했다.
“왜 안 자.”
잠기운 어린 목소리에 우예린이 꼼지락대던 손을 멈추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어색하게 묻고는 도준희의 팔을 치우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쥐 새끼처럼 끙끙대는데 어떻게 자.”
‘쥐 새끼처럼 끙끙댄다니. 말을 해도 참.’
우예린은 혀를 끌끌 차다가 저도 모르게 툭 뱉어버렸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면서, 학교 다닐 때는 어떻게 말 안 하고 참았대요.”
“뭐?”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뒤에 놀라 헉, 헛숨을 들이켠 우예린은 눈을 위로 굴렸다가 번뜩이는 도준희의 눈빛을 보고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나쁜 말이 아니고요. 대학생 때는 말하는 걸 많이 못 봤는데 지금은 너무 막 거리낌 없이, 아니, 날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고요.”
“아, 그때는.”
도준희가 지금 생각났다는 듯 입을 뗐다.
“더럽게 힘들었지. 계집애들은 엉겨오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은 시비를 걸어대지……. 생각해 보니 많이 참았군.”
인기인에게 으레 안티가 있듯이, 호리호리한 도준희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던 이들도 존재했다. 도준희가 화제의 신입생이었을 때 들었던 일들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도준희 성격으로 가만히 안 뒀을 것 같은데.’
“학교 밖에서 족치지 않았다면 스트레스로 돌아버렸을 거야.”
‘역시나.’
예상대로의 전개에 우예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성질을 죽여가면서 대학을 다닌 건데요? 지금 보니까 졸업할 마음도 없는 것 같은데.”
도중 휴학하고 모습을 감춘 도준희를 떠올렸다.
“네가 있었잖아.”
“……뭐라고요?”
우예린은 귀를 의심했다.
“네가 얼굴 잘생기고 착하고 성실한 새끼가 좋다며. 내가 그래서 별 지랄을…….”
“…….”
“씨발. 생각해 보니 열받네.”
도준희는 지난날이 후회되는 듯, 아니면 고생했던 날이 생각난 듯 얼굴을 구겼다.
“조그만 게 얼굴만 더럽게 밝혀가지고.”
“……그런 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런 거 아니긴. 마사지 샵에서 나 봤을 때 얼굴 빨개진 건 뭔데. 내 눈이 동태 눈알이라서 그런 거냐.”
그건 사실이라 우예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개소리하면서 나 상처 주지만 않았으면 지금도 네가 좋아하는 대로 연기해 줬을 거야.”
울적했던 우예린은 그 말에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짓말.”
“…….”
“내 기억으로는 그 전에도 기미가 보였는데요.”
“…….”
“도준희의 더러운 본성이…….”
“뭐?”
“진솔한 본연의 성격 말이에요.”
아직도 마사지 샵에서 헛소리를 하던 직원의 머리를 치던 장면이 생생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도준희가 우예린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우예린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긴장감이 높아지는 순간, 도준희는 돌연 눈에 힘을 풀었다.
“……안 속네.”
“속이려고 한 거예요?”
“하여튼 눈치는 없는데 머리는 좋아.”
“…….”
우예린은 머리 좋다는 칭찬도 이렇게 기분 나쁠 수가 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에 멍해졌다.
“내가 부처도 아니고 어떻게 평생을 연기하면서 사냐. 네가 헤어지자고 하는 거 보고 깨달았지.”
“…….”
“이래도 저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도준희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낮아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 많이 무서워해.”
“…….”
“공포도 겪다가 보면 무뎌져. 나한테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놓아줄 생각 없으니까.
뒷말은 들릴 듯 말 듯 해서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준희가 팔베개를 한 손으로 우예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 이상형은 잘생기고 착하고 성실한 놈이 아니라 잘생기고 운동 잘하고 말도 터프하게 하는 사람이 될 거야.”
“…….”
“가끔 불법적으로 정의 구현도 하고.”
우예린은 머리를 굴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했다.
운동 잘하는 건 사람을 패는 것일 테고 말을 터프하게 하는 건 욕을 잘한다는 거겠지?
우예린은 반쯤 포기한 채 중얼거렸다.
“맘에 안 드는 사람 패는 게 불법적 정의 구현이에요?”
“내 맘에 안 드는 놈이 문제인 거니까. 바로잡으면 그게 정의 구현이지.”
매번 느끼지만 도준희와 말싸움을 하면 이길 수가 없다. 말싸움에 강한 사람은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신념이 강한 사람일 것이다.
* * *
우예린은 그날의 기억을 꿈으로 꾸었다. 고3 여름철 장마 시기였다.
비가 많이 왔고 하늘에서는 간간이 번개가 쳤다. 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며 학생 주임 선생님을 피해 다녔지만 괴롭힘 당한 기억은 단 한 순간도 흐려지지 않고 생생했다.
천둥 번개가 치는 그날, 갑자기 그간의 설움이 폭발해 버렸다. 귀를 우렁우렁 울리는 천둥이 무서웠고 자신을 괴롭히는 학생 주임 선생님이 미웠다.
잘못을 저지른 건 당신인데 왜 날 못살게 구는 거야. 당사자에게 하지 못한 말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엄마, 아빠.”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의 방을 찾자, 자다 일어나 게슴츠레한 눈으로 일어난 부모님이 한숨을 푹 쉬었다.
“괜찮아, 괜찮아.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니.”
학생 주임 선생님 일을 알고 있는 엄마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자는 도중 일어난 터라, 지금 상황이 귀찮은 것 같았다. 밤새 신도들과 기도를 하다 막 잠들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이해했으나 아쉬웠다. 좀 더 뜨겁고 마음이 놓이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성경을 읽다 자면 좀 괜찮아질 거야.”
어깨를 토닥였던 손길은 오래가지 못했고, 포옹은 한 번뿐이었다.
뒤늦게 열아홉 살이나 먹은 주제에 부모님께 칭얼거렸다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건네받은 부모님의 낡은 성경을 품에 안고 돌아와, 천둥 번개가 멈출 때까지 성경 구절을 읽었다.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어도 무작정 읽었다. 읽는 행위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경건하고 고아한 말로 이루어진 성경 구절에 매달리다 잠에 들었다.
“괜찮니? 성경은 읽다 잤고?”
부모님의 질문에 머릿속에 얼마 남지 않은 성경 구절을 떠올랐다. 읽는 행위 자체에 집중했지,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졌어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힘든 일은 스스로 견뎌야 하는 것이다. 아무도 대신 힘들어해 주지 않으니까. 그랬는데…….
“이리 와.”
“번개 따위에 겁먹지 마.”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품은 이상야릇했다. 무서운 동시에 마음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얼떨떨하고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경계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적어도 성경 구절보다 위로가 됐다.
‘따뜻했어. 사람의 체온이란 건…….’
잔뜩 힘주고 있던 어깨가 부드러워지는 기분. 따뜻한 치즈 퐁뒤에 퐁당 빠진 듯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 우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에게서도 받지 못한 위로를 도준희에게서 받게 되다니.’
사실 도준희가 팔베개를 하고 꽉 안아줬을 때는 눈물이 찔끔 흐를 것도 같았다.
‘천둥 번개가 무서워서였겠지만.’
그래도 도준희의 품에서 안도했던 건 사실이다.
‘도준희는 미친놈이지만, 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급기야 도준희를 호의적으로 여기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숙면한 사람 특유의 나른하게 기분 좋은 감각에 우예린은 부드러운 베개를 품에 안았다. 더워서 자던 중에 바지를 벗었던 걸까? 맨살에 여름 이불의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엉덩이 간지러워.’
무심코 생각했던 우예린이 눈을 번쩍 떴다.
‘엉덩이?’
홱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는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자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팬티가 보이게 벗겨진 바지와 그 안을 더듬거리는 도준희의 손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드니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도준희가 보였다. 반짝반짝하고 해사한 얼굴을 뚫어져라 보면서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네 엉덩이 만지고 있잖아.”
‘누가 들으면 자기 엉덩이 만진다고 얘기하는 줄 알겠어.’
황당해진 우예린은 침묵을 지켰다. 도준희의 말에 납득해서 그런 게 아니라 말문이 막혀서였다.
안온한 만족감과 은은한 감동에 푹 빠져있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태연자약한 얼굴을 보자 물에 빠진 듯 정신이 들었다.
‘이런 사람에게서 안도감을 느끼다니. 미쳤구나, 우예린.’
나직한 탄식을 흘렸다.
‘악마에게 홀리고 있는 거야.’
우예린이 진지한 고민에 빠진 사이 팬티 안으로 들어온 손이 검지 끝으로 우예린의 질구를 쿡 찔렀다.
“꺄악!”
“아, 깜짝이야.”
반쯤 눈을 뜬 도준희가 아직 완전히 깨지 않아 멍한 눈으로 우예린을 보았다.
“……왜?”
“…….”
미친놈, 악마 그리고 변태. 우예린은 도준희를 정의하는 말을 하나 더 추가했다.
* * *
우예린은 잘 우러나온 삼계탕 국물을 떠먹었다.
‘엄청 진해.’
속이 따뜻해져서 우예린의 눈이 스륵 감겼다. 더위와 스트레스로 축난 몸에 기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맛있냐?”
도준희는 그의 앞에 있는 밥도 먹지 않고 턱을 괸 채 우예린이 먹는 걸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우예린은 쑥스러워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천둥 번개가 치던 밤에 도준희의 품에서 잠든 이후로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도준희가 만들었어요?”
“이건 아줌마가.”
“…….”
“나 생고기는 못 만져. 징그러워서.”
도준희가 빙그레 웃었다. 마사지 샵에서 자신을 희롱하던 직원들을 거침없이 갈기던 도준희를 떠올린 우예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많이 먹어, 많이.”
“…….”
“저녁엔 장어 먹을까? 양념 장어 잘하는 데 있어.”
“장어?”
“응, 몸에 좋아. 안 먹어봤어?”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는 교회를 지을 돈을 모았고 교회가 지어진 후에는 빚에 허덕였던 집안은 검소함이 필수 강제적 덕목이었다. 삼계탕도 아주 특별한 날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저녁에 먹자. 냉장고에 한약 넣어놨으니까 매일 챙겨 먹으면 돼.”
“…….”
“좀 쓰긴 하지만 까먹지 말고 먹어.”
우예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이상하다. 온갖 보양식에 한약까지. 상황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살면서 이렇게 호사를 누린 적이 있었던가?
‘갑자기 왜 이렇게 잘 챙겨주지?’
숟가락으로 삼계탕을 뒤적이다가 흰 쌀밥에 얹어진 뽀얀 고기에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가 손수 고기를 발라주고 있었다.
“많이 먹어.”
문득 어젯밤 도준희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자신이 있어서 대학을 다녔다니. 그가 자신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흘리기는 했지만 대학 얘기는 다른 문제였다. 단순히 똥 밟은 것처럼 재수 없게 미친놈과 엮인 줄로만 알았던 우예린은 혼란스러워졌다.
도준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집착한다는 것도 호감이 바탕이 되어야 하니까. 그러나 그 마음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진지하게 생각하기 이전에 도준희가 너무 무서웠고, 도준희의 마음이 진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예린에게 이 모든 건 단순히 재수 없게 똥을 밟은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에 도준희가 정말로 진지하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겠는가. 폭력적인 사람은 질색이다. 도준희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과 같은 게 하나도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교접점이 있을 수 없는 사람.
우예린은 같이 있는 게 마음 편하고 착한, 성실하고 가능하다면 얼굴도 잘생긴 사람과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 자체로 긴장이 되는 도준희는 전혀 아니다.
‘진지하게 거절해야 하는 건 아닐까.’
도준희가 미친놈이라 이런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심란했다.
‘생각해 보니 자기 멋대로 하다가도 내가 다치면 멈추기도 했고.’
끄응, 신음을 흘리는데 도준희가 큼지막한 고기를 뜯어 자신의 밥그릇으로 옮겨주는 게 보였다.
“왜 이렇게…….”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렸다.
“왜 이렇게 잘 챙겨줘요?”
“뭘 잘 챙겨줘?”
“요즘 끼니마다 보양식 챙겨주고, 한약도…… 지어왔잖아요.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게 안 해주는데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요.”
도준희가 사랑해서 그런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복잡한 눈으로 도준희를 응시했다. 도준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곤란한 얼굴로 우예린을 힐끗하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요즘 너 좀…….”
“…….”
“어디 아픈 거 같아서.”
“…….”
“…….”
“……네?”
긴장했던 우예린은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악몽 꾸고 그런 게 다 기가 허해서 그래.”
“…….”
“많이 먹고 정신 차려라.”
진지하게 말하는 도준희를 보자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제까지 했던 짓이 효과가 있기는 있었구나.
‘어디 아픈 애처럼 보였나 봐.’
허탈한 결과에 우예린은 말없이 밥을 크게 떠먹었다. 분노의 수저질로 입 안 가득 밥을 물고 우물거렸다. 김치를 찢어 밥 위에 올려주며 도준희가 툭 말했다.
“그리고 좋아해서.”
“네?”
“그래서 챙겨주는 거야.”
“장난하지 마요.”
이미 긴장이 풀린 우예린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난 아닌데.”
“…….”
“당연히 좋아해서 이런 짓거리도 하는 거지. 나는 애새끼들한테도 이렇게 안 해.”
“…….”
“당연한 걸 물어보고 있어. 나 놀리려고 그러냐?”
흡, 사레가 들릴 뻔한 우예린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토끼 눈으로 도준희를 보자 도준희는 퉁명스럽게 말한 주제에 귓바퀴가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더워서 그런 거겠지?’
우예린은 의심스럽게 도준희를 살펴보았다. 또다시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물을 마시며 간신히 밥을 씹어 삼켰다.
“나를 좋아한다고요?”
“…….”
도준희가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자 우예린은 왜 그렇게 쳐다보냐며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이 지랄을 하고 있지, 싫어하면 왜 이런 짓을 해?”
“…….”
“우린 안 맞는 것 같다느니 뭐니 하는 개소리는 하지 마라.”
익숙한 말이다 했더니, 도준희에게 헤어지자고 할 때 했던 말이었다. 우예린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어물거리자 도준희가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맞는 게 뭐가 있어. 안 맞는 퍼즐 조각도 어떻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맞게 되어있어.”
“…….”
“자르고 붙이면 맞겠지 뭐.”
작게 덧붙인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튀어나왔다.
‘미친놈.’
도준희는 미친놈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전처럼 무섭지만은 않은, 그런 미친놈이 된 것 같았다.
* * *
‘아파.’
태풍과 장마와 번개가 모두 지난 주말, 하늘은 화창한데 우예린은 방구석에 앓아누웠다.
눈을 떴을 때부터 몸이 아래로 푹 꺼지는 것 같더니 온몸이 불덩이처럼 느껴졌다. 땀이 어찌나 나던지 이불까지 땀으로 푹 젖어버린 듯했다.
‘너무 아파.’
우예린은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에 체력도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육체지만 의외로 잔병치레는 잘 하지 않았다. 그런데 1, 2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앓아누울 정도로 아프고는 했다.
대학교 졸업 직전, 졸업 논문을 쓰느라 긴장했는지 제출한 바로 다음 날부터 눈물이 주륵 흐를 정도로 아픈 적이 있었다.
자취방에서 끙끙거리며 앓았는데, 아무도 그녀가 아픈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틀 후, 이상한 걸 눈치챈 이지나가 죽과 약을 사 오지 않았더라면 일주일은 더 앓았을지 몰랐다.
‘하필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곳이 도준희의 집이란 게 걱정스러웠다. 시도 때도 없이 지칠 때까지 몰아붙이는 도준희가 이 상태에서 잠자리를 요구하면 최악이다. 이번에야말로 울고불고 소리치며 당신 따위 무섭고 끔찍하다고 퍼부을 수도…….
‘그러면 회사마저 나가지 못하게 될 텐데.’
아니면 이번엔 정말 자신에게 질리게 될지도 모른다. 매번 잠을 못 자게 하고 이상한 짓을 했으니까. 아프다고 끙끙 앓는다면 지겨워하지 않을까.
‘우리 엄마도 내가 아픈 게 길어지면 힘들어하셨으니까.’
어릴 때 아프면 엄마가 죽을 끓여주셨다. 아빠는 그녀를 업고 병원을 뛰어갔다. 그러나 걱정하는 건 하루, 이틀이고 시간이 지나자 걱정도 무뎌졌다.
부모님은 교회를 짓기 위해 바쁘셨고 교회를 지은 후에는 신도 관리로 항상 바쁘셨으므로, 그들의 관심을 오래 끄는 건 힘든 일이었다.
‘엄마, 아빠 보고 싶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이 아파서 그런지 일 년에 한두 번도 얼굴을 보지 않는 부모님이 그리웠다. 엄마가 끓여주시는 죽과, 열을 재는 아빠의 큼지막한 손이 떠올랐다.
돌봐줄 사람 없는 타지에서 아픈 건 이래서 최악이다.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게 되니까.
“뭐야.”
갑자기 큼지막한 손이 이마에 얹어졌다. 기억 속 아빠의 손보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우예린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시원해…….’
“엄청 뜨겁잖아.”
시원한 손을 잡기 위해 손가락을 움찔거렸는데 붙잡기도 전에 시원한 손이 멀어져간다. 우예린은 아쉬움에 신음을 흘렸다. 희미한 감각 속에서 도준희가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가지 마. 나 아파.’
흐릿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물에 닿은 잉크가 흐려지듯 시간이 지나자 사라졌다. 아픈 와중에도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에서 깬 우예린은 몸이 한결 가볍다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손가락 하나를 툭, 움직이자 눈이 떠졌다.
눈을 끔벅이며 천장을 보았다. 눈곱인지 눈물인지 눈앞을 가리고 있어 시야가 뿌옇다.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눈을 비비고 싶었으나 힘이 없어 손가락을 까딱하는 게 다였다.
“으음.”
눈앞으로 손이 다가온다. 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이 눈 밑을 슥슥 문질러주자 한결 앞을 보기가 편했다.
고개를 돌리자 당연한 것처럼 도준희가 있었다. 의자를 끌어와 다리를 꼰 채 앉아있는 그의 얼굴엔 아주 오랜만에 안경이 얹어져 있었다.
까만 뿔테 안경이 하얗고 잘생긴 얼굴과 어우러지자 우예린은 아파서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감탄했다.
“안경…….”
목소리가 세상 다 산 할머니처럼 쉬어있었다. 우예린은 깜짝 놀라 큼큼,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
“갑자기 웬 안경이에요? 시력 나빠졌어요?”
“패션.”
도준희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몸은?”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러면 죽 먹어.”
“…….”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움찔거리는 몸짓밖에 되지 않았다. 우예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도준희가 그녀의 몸을 일으켜 허리 아래 쿠션을 놓아주었다. 우예린은 묵묵히 도와주는 그를 흘끗했다. 평소와 달리 조용한 게 이상했다.
“먹어.”
도준희가 그녀의 무릎에 쟁반을 놓아주고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와 달리 부드럽다.
우예린은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엉거주춤 숟가락으로 죽을 떴다. 손에 힘이 없어서인지 죽을 먹다가 가슴 쪽에 흘려버렸다. 우예린은 깜짝 놀라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칠칠치 못하기는.”
도준희가 툭 뱉더니 티슈로 죽을 닦아주었다. 가슴 부분을 건드릴 때는 긴장했지만 의외로 담백하고 부드럽기만 한 손놀림이었다.
‘이상한데.’
우예린은 도준희의 눈치를 보며 죽을 뜨려 했다. 손에 힘이 없었다. 도준희가 그녀의 손에서 숟가락을 가져가 대신 죽을 떴다. 그리고 입 안에 가져다 댔다.
“아, 해.”
가까이 다가온 숟가락을 마주한 우예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 떠올랐다.
“아, 하라고.”
한 톤 낮아진 목소리가 경고성을 띄고 있다.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맛은 있다.
“맛있네요.”
“내가 한 거야.”
후, 불고 다시 죽을 입가로 가져다 대는 도준희를 보며 우예린은 머리가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도준희가 평소랑 다르다.
‘우선 너무 얌전하고…… 착해. 도준희답지 않게.’
도준희가 신경 쓰였지만 어쨌거나 죽을 한 그릇 다 먹으니 힘없던 몸에 기력이 조금 돌아왔다. 우예린은 몸이 말끔한 게 신기했다.
분명 땀을 엄청 흘렸던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 몸이 보송보송하지 않은가. 힐끗, 주변을 돌아보자 바닥에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이 보였다.
우예린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홱 고개를 원상 복귀했다. 이마에 땀이 흘렀다.
“아파?”
“예에…….”
우예린이 힘없이 비척대자 도준희가 다시 그녀가 눕도록 도와주었다. 우예린은 누운 채로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할 말이 있는 건지, 나갈 것 같지가 않다. 담이 약한 우예린은 침묵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원래 한번 아프면 지독하게 앓는데 면역력이 강해졌나 봐요. 약도 안 먹었는데 몸이 괜찮네요.”
할 말이 없어 한 말인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약 먹었어.”
“예? 언제요?”
우예린은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목구멍이 좁아서 조금이라도 큰 알약은 삼키기 버거워하는 편이었다. 하물며 잠든 상태였다면 목구멍이 더 좁아져 약을 먹이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체 무슨 수로?’
“의사가 왔었어.”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자는 사람에게 약 먹이는 거 쉽지 않은데 의사 선생님이 솜씨가 좋았나 봐요.”
“뭔 소리야. 자다가 먹이지는 않지. 목에 걸리면 큰일인데.”
응? 우예린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럼 어떻게 약을 먹인 건데요?”
“…….”
“먹인 게 아니에요? 수액 놨어요?”
“먹이긴 먹였지.”
고민하는 눈치로 느리게 말하는 도준희를 보자 우예린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떻게요?”
뜸을 들이던 도준희는 눈을 떼지 않는 우예린의 집요한 눈치에 쯧, 혀를 찼다.
“엉덩이로.”
집중하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예?”
멍한 우예린이 되묻자 도준희는 눈을 굴리더니 오히려 당당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좌약 넣었다.”
좌약. 우예린은 자신이 뭘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엉덩이에, 좌약?”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하자 도준희가 약간 머쓱한 듯, 그러나 특유의 뻔뻔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어.”
“먹였다면서요?”
우예린이 황당하고 억울하여 바로 되묻자 도준희가 눈썹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엉덩이로 먹였다고.”
‘이…… 씨이…….’
우예린의 눈 밑이 파들거렸다. 방금까지는 몸이 아파 쓰러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수치심으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걱정 마. 의사가 아니라 내가 했으니까.”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의사가 나아…….’
(첫사랑과 미친개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