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3권) (7/9)

07.

우예린은 수치심으로 도준희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자신도 보지 못한 그 부분이 도준희에게 훤히 공개되었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새삼스럽게 엉덩이가 의식되었다.

어쩌다 보니 부모님과도 공유하지 않은 걸 이 남자와는 모두 공유했다는 생각이 들자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차라리 잠이 들기를 바랐으나 잠은 또 오지 않았다.

“너 아픈 거.”

도준희가 헛기침을 했다.

“의사가 스트레스 받은 거 없는지 물어보던데.”

도준희의 갑작스러운 말에 우예린은 눈을 살며시 떴다.

“…….”

“…….”

멀뚱멀뚱 눈을 마주한 우예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

도준희는 그 말만 꺼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도준희가 뭐라고 더 말을 이을 줄 알았던 우예린은 ‘어쩌라는 거지?’ 싶어 도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무릎을 벌린 채로 손을 맞잡고 있었다. 우예린은 그가 하릴없이 손가락을 얽어대는 모양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 그래요?”

묘한 기분에 말을 끌자 도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까 굳이 모든 걸 오픈해서 살 필요는 없겠어.”

“…….”

“적당히 네가 원하는 모습도 보여줄게.”

“…….”

“그럼 될 거 아니야.”

마지막은 거의 버럭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우예린은 눈을 끔벅거렸다. 도준희가 하는 말의 맥락과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그럼 아프지 않을 거 아니야.”

‘아, 그러니까 내가 쓰러진 걸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도준희를 훑었다. 도준희가 그렇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그럼 안경은…….”

안경을 쓴 도준희는 옛날을 생각나게 했다. 대학생 때의 도준희, 마사지 샵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도준희. 안경을 쓴 도준희는 지적이면서도 선해 보이고, 그러면서도 차가워 보였다.

도준희가 안경을 만졌다가 마지못한 듯 불퉁하게 말했다.

“안경 끼면 좀 착해 보이잖아. 네 취향에 맞춰주겠다고. 어째 좋아해도 꼭 찐따 같은 게 취향이야.”

착해 보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착한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만 우예린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도준희가 왜 이러는지 확실히 이해가 되면서도 얼떨떨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한테 화내는 거예요?”

“…….”

“스트레스 안 주려던 거 아닌가…….”

우예린은 도준희를 놀리듯이 구는 스스로에게 놀라버렸다. 말하고 나서 도준희가 화를 낼까 심장이 쿵덕거린다.

도준희를 조심스럽게 살피자 그가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눈썹을 문질렀다. 간을 졸이던 우예린은 눈을 깜박거렸다. 지금의 도준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당당하게 우기던 때와 달리 의기소침한 것처럼 보였다. 아, 그렇다. 전부터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도준희는 자신의 고통에 민감하다.

우예린은 기분이 묘해졌다.

‘답지 않게.’

도준희가 평소와 다르게 구는 탓인가. 용기가 솟았다. 평소에 하기 어려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그럼 나 이제 우리 집에 가면 안 돼요?”

그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

꿀꺽.

무서운 시선에 우예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분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없어, 우예린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도준희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우예린은 재빨리 항복 깃발을 들어 올렸다.

“내가 실언했어요.”

그러나 불행히도 한번 차가워진 공기는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도준희의 숨 막히는 시선을 받자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던 우예린은 쓰러질 것 같았다.

“……윽.”

결국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자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공기가 편해졌다. 도준희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무시무시한 기세가 한풀 꺾인 덕이었다. 우예린은 입술을 질겅이며 표정 없는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무표정한 도준희가 미끈한 입술을 열고 말했다.

“우예린.”

“…….”

“너 나 좋아해?”

단도직입적으로.

우예린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뜬금없는 질문과 예상 못 한 내용이었다. 우예린이 답하지 못하자 도준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기 전에는 너 못 믿어.”

“…….”

“절대 못 믿지. 또 핸드폰으로 헤어지자는 문자를 날리면, 난 네게 했던 모든 행동을 후회하게 될 거야.”

확신하는 어투에 우예린은 침도 삼키지 못했다. 마른 목구멍이 쓰라렸다. 무심코 목을 어루만지자 도준희가 한 손을 그녀의 등 뒤로 넣어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그리고는 물컵을 가져다 댔다.

우예린은 굳은 상태로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도준희가 다시 그녀를 눕혔다.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

“…….”

부드럽고 다정한 손놀림과 담담해서 더 소름 끼치는 목소리. 우예린은 어깨를 떨었다.

“어쨌든.”

“…….”

“나 좋아하게 되기 전엔 꿈도 꾸지 마.”

이건 고백이다. 우예린은 살면서 고백 받아본 적이 몇 번 없기는 하지만 이건 의심의 여지없는 고백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라는, 폭력적이고도 강제적인 고백.

“하지만 나 아픈데…….”

우예린은 그 유치하고도 무시할 수 없는 고백이 황당하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뒤늦게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 아프다니. 아프다는 걸 알아달라고 징징거리는 것 같지 않은가. 엄마에게도 해보지 않은 행동이었다.

도준희가 손등을 우예린의 이마에 얹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열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예린은 숨을 죽이고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도준희가 손을 거두고 빈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않는 그가 답답했다.

“무슨 생각해요?”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봤어.”

“…….”

“이 손에 네가 없는 것보다는…….”

“…….”

“네가 아픈 게 나을 것 같아.”

“…….”

우예린은 갑자기 몸이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대신 스트레스는 안 준다고 약속하지.”

도준희가 결심한 듯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말이 더 스트레스인데요.’

무슨 짓을 해도 도준희를 떼어놓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우예린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에 무력감을 느꼈다.

* * *

잠깐 괜찮아진 것 같았던 건 일시적이었는지 그날 밤, 우예린은 열이 치솟았다.

도준희는 끙끙 앓는 우예린에게 죽과 약을 먹였다. 처음에는 효과가 좋다는 좌약을 넣으려고 했지만 우예린의 격렬한 거부로 먹는 알약으로 협의를 보았다.

잠깐 열이 내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뜬금없이 최강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과장님.”

―목소리가 왜 그렇지?

“조금……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무슨 일이세요?”

―출장 갔던 공장에서 샘플 상품을 보내줬어. 생각 있으면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줘야겠군.

“네, 그래 주세요.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눈을 감았다. 최강현과 개인적으로 통화를 한 건 처음이었지만 처음이라고 놀라워할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잠을 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을 뜰 수밖에 없었는데, 도준희의 시선이 뺨을 뚫을 것처럼 강렬했기 때문이다.

“왜요?”

어리둥절하게 묻자 도준희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의 힘없는 손을 조몰락거리며 마사지를 했다.

“남자야?”

“상사예요.”

“남자잖아.”

‘이 미친개가 정말…….’

자신이 아프든 말든 어느 때나 한결같은 남자다. 우예린이 못 들은 척 신음을 흘리자 도준희가 혀를 찼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아픈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도준희는 우예린이 아프지 않았다면 끝까지 파고들었을 태세였다.

우예린은 씨근덕대는 도준희를 모른 체하며 눈을 감았다. 차가운 수건이 이마에 얹어졌다.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후 도준희가 말했다.

“잘생겼어?”

“누구요?”

누굴 말하는지 한 번에 알았지만 일부러 되물었다.

“네 상사 말이야.”

“……못생겼어요.”

최강현은 회사에서 공인된 공식 미남이었다. 괜히 최강현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금방 털어버렸다. 선의의 거짓말이니 괜찮다.

마사지 샵 때 잘못 찍혔는지, 도준희는 그녀가 잘생긴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고 눈이 돌아간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잘생긴 남자에게 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보통 사람들보다 잘생긴 사람을 조금 더 좋아하는 것뿐이다. 어쨌든 아파서 다행이었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지잉.

도준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도준희는 한 손으로 우예린의 손을 만지며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왜. 아,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은 도준희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요?”

우예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도련님 운운하는 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

“잠깐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일이요?”

“응. 왜?”

도준희가 나간다고 한다. 평소라면 오히려 환영했을 테지만…….

“가지 마요.”

우예린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잘 인식하지 못했다. 반면 몸이 아프다는 것과 누가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생생했다.

“내 곁에 있어요, 도준희.”

그녀는 떼를 쓰고 있었다. 국민학교 때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는데. 바쁜 부모님에겐 떼를 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누구에게도 떼를 쓰지 않았다. 의젓하게 구는 게 더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 아파요.”

부모님에게도 하지 않았던 짓을 도준희에게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도준희라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열이 더 올라 기절하기 전에, 우예린은 도준희가 핸드폰에 대고 못 간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의 열 오른 손가락을 얽어오는 시원하고 단단한 손가락의 감촉. 우예린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 * *

도준희의 대쪽 같은 태도에 무력했던 우예린은 생각을 가볍게 하기로 했다.

내가 뭘 해도 어쩔 수 없다면…….

‘그냥 막 나가지 뭐.’

그렇게 한번 마음을 놓아버린 우예린은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놀랄 만큼 도준희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배고프다, 열이 난다, 머리가 아프다, 과일이 먹고 싶다, 땀이 나서 찝찝하다…….

우예린은 점점 이게 정말 도준희를 질리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프다는 핑계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의외인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짜증스러운 소소한 요구들을 도준희가 다 들어준다는 점이었다.

“과일 먹고 싶어요.”

한 시간 동안 벌써 세 번째 하는 요구였다. 도준희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도준희의 얼굴은 눈썹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확 바뀌었다. 대학생 때는 착한 척하느라 눈썹이 내려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착해 보일 수가 없었다. 눈썹이 일자일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

‘지금은 성질 정말 더러워 보인다.’

“야.”

도준희의 나직한 호명에 우예린은 움찔했다.

‘드디어 폭발인가?’

어째 얌전히 잘 들어준다 싶었다.

“뭐 먹고 싶은데?”

오들오들 떨던 우예린은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도준희가 무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곧 마트 문 닫아서 빨리 갔다 와야 해.”

눈을 굴린 우예린이 작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포도…….”

“포도?”

“청포도.”

비싸서 평소에는 자주 사먹지 못하는 과일이었다. 도준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일어났다.

30분 후, 우예린은 잘 손질된 탱글탱글한 청포도 한 알을 입에 넣어 굴렸다. 옆을 힐끗했다. 도준희가 얇은 과도로 포도 껍질을 얇게 벗겨내고 있었다. 고작 과도일 뿐인데 다루는 솜씨가 퍽 능숙해서, 원래 칼을 저렇게 잘 다루는 것인지 괜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어째 과일보다는 다른 걸 썰었을 것 같다.

‘에비, 궁금해하지 말자.’

한 알을 다 씹자 새로운 포도알이 입 안으로 쏙 들어왔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아직도 열이 떨어지지 않은 몸으로도 단맛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도준희.”

“또 왜?”

도준희가 짜증스럽게 대꾸했지만 이미 그의 반응에 익숙해진 우예린은 이제 움찔하지도 않고 말했다.

“목말라요. 물 먹고 싶어요.”

“……기다려.”

도준희가 문을 열고 나가자 우예린은 천장을 바라봤다가 문을 바라봤다. 이 생활, 의외로 편하다.

‘그나저나 도준희도 슬슬 질리고 있는 것 같은데.’

처음에는 도준희가 자신에게 질려 이 기괴한 집착을 멈춰주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도준희가 언제까지 잠잠할지가 궁금했다. 신경질을 내는 걸 보면 오래가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문이 열리고 도준희가 시원한 물을 갖고 들어왔다. 우예린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물.”

그제야 눈을 뜨고 도준희가 건넨 물컵을 받아들였다. 물을 마시기 시작하자 도준희는 다시 의자에 앉아 포도 껍질을 칼로 도려내기 시작했다.

우예린은 물컵을 이로 문 채 도준희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문득 도준희가 처음처럼 무지막지한 또라이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전처럼 무섭지도 않다.

‘뭔가…… 가슴이 뭉클한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여전히 도준희가 미친놈인 데다가 또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도리어 속이 뜨거워졌다. 좀 더 솔직하자면, 자신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는 도준희가 감동스러웠다.

‘부모님도 이렇게 안 해줬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입.”

도준희가 포도알로 그녀의 입술을 툭툭 쳤다. 입을 벌려 포도알을 받아 우물거리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졸려요.”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우예린은 도망치듯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도준희가 과도와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준희.”

“왜?”

“나 열나는 것 같아요.”

도준희가 투덜대면서 물에 적신 수건을 우예린의 이마에 올렸다. 우예린은 가슴이 떨렸다.

사실 열은 이미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도준희에게 징징거리는 스스로가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다. 요구하는 대로 따라주는 도준희도 이상했다. 마음속이 파도가 치는 듯 더 심하게 울렁거렸다.

‘이번 일로 나한테 질리지 않았을까?’

아무리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지만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니까. 도준희가 점점 더 질리도록 계속 노력을 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그냥 이대로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

우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상식으로, 지금까지 그녀가 한 행동은 사람 하나를 지쳐서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같은 행동을 했다면 진작 한 소리 들었을 테니까. 도준희도 예외가 아닐 터였다.

* * *

충열파. 한때 충남 뒤 세계를 주름잡던 충열파의 역사는 꽤 파란만장했다. 초기 수장 도충열의 장남 도우태가 서울로의 상경을 결심하면서 충열파는 서울로 터전을 옮기게 되었고, 도우태는 무서운 야망과 감 좋은 사업 수완을 활용하여 충열파의 위세를 사방에 떨쳤다. 충남의 공인된 미친개 도준희는 그 도우태의 하나뿐인 조카였다.

서울 봉천동의 한적한 사무실에선 몇 명의 장정들이 나른한 오후의 햇빛에 취해 검은 가죽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검은색 정장 바지는 밑 통이 넓고 하얀색 반팔 셔츠는 단추가 다 풀려있었다. 선풍기가 탈탈탈, 돌아가는 소리가 고롱고롱 코고는 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평화로움을 자아냈다. 자신들을 위협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듯 평온하게.

문 밖에선, 그런 그들의 평화를 박살낼 존재가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쾅!

거칠게 열어젖혀진 문이 벽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뭐, 뭐시여!”

누워있던 장정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튀어 올랐다.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는 도준희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양 굳어졌다.

“습격이냐?!”

문이 보이지 않는 벽 쪽에 기대있어 도준희를 미처 발견 못 한 남자가 사납게 외쳤다.

“이거 문이 왜 이래? 종잇장이야? 열기만 하면 소리가 나, 소리가.”

도준희가 투덜거리며 발로 문을 밀었다.

쾅!

문이 다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도, 도련님?”

습격이냐고 외쳤던 남자는 하얀 셔츠들 가운데서 눈에 띄는 야자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도준희가 나타나자 소파를 차지하고 있던 장정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준희가 소파에 털썩 앉자 야자수 셔츠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다가왔다.

“충남에 있을 때는 일주일에 두 번도 습격을 받았었는데요, 뭐.”

“…….”

“부산에 있을 때는 더 심했고요.”

야자수 셔츠가 씨익 웃자 금니가 번쩍거렸다. 그는 이 사무실에서 사장님의 위치에 있는 사내였다. 부산에서 충열파가 출범할 때 말단 새끼로 시작하여 충남 그리고 서울까지 올라온 이로 지금은 도우태 회장의 손에 익은 칼이자 충열파의 듬직한 심부름꾼이다.

“그리고 저 문은 도련님이 오실 때만 쾅쾅 소리를 냅니다그려.”

흥. 도준희가 코웃음을 치자 야자수 셔츠가 도준희를 지긋하게 지켜보았다.

“요즘 좀 바쁘신가 봅니다. 얼굴 보기 통 힘들어요.”

“종배, 커피.”

“뭐 하냐, 얘들아. 얼른 커피 안 타오고. 빨리빨리 안 움직여?”

“예, 형님!”

야자수 셔츠. 이름 이종배. 도준희가 어렸을 때부터 부렸던 패악질을 지켜봐온 남자는 지금 도준희의 기분이 썩 괜찮다는 것을 눈치챘다. 긴장했던 눈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남자들이 재빨리 움직여 커피 두 잔을 내왔다. 이들 중 대부분은 어린 것이 건방지다고 도준희를 손보려다 뒤통수가 깨진 전적이 있었다. 도준희의 등장만으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건 이유가 있었다.

“근처에서 일 보다가 얼굴 보려고 들렀어.”

“잘하셨습니다. 회장님이 아시면 좋아하시겠어요. 요즘 회장님이 저만 보면 도련님 좀 설득하라고 하셔서 죽겠습니다.”

“뭘 설득해.”

“새로 설립한 샵 있잖아요. 거, 마사지 샵이요. 얼굴 괜찮은 사내놈들 데리고 장사하는 거 말입니다.”

“…….”

“장사가 생각보다 아주 잘 됩니다. 그러다 보니 엔터 쪽에도 큰 관심을 가지셨고요. 도련님이 도와주시면 사업을 더 크게…….”

“됐다고 그래. 말만 그렇지, 내가 진짜 뛰어들기를 바라지는 않을걸.”

도준희가 커피를 홀짝이며 손가락을 꿈틀댔다. 손가락 관절에서 딱, 딱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큰아버지가 나 믿는 거 봤어?”

“그건 그렇지만 도련님 얼굴이 아깝잖아요.”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요즘 바빠서 머리 아프니까.”

“무슨 사업장이라도 넓히고 계십니까? 회장님께 그런 말씀은 듣지 못했는데요.”

“여기가 충남인 줄 알아? 나 손 털었어. 이제 피 보는 거 지겹다.”

이종배는 해탈한 듯한 도준희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불신이 역력하게 어린 얼굴이었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근질근질한 입술을 열었다.

“지난번에 황주오의 아랫놈들을 손봐주셨다고 들었는데요.”

“아, 먼저 덤비는 놈은 제외해야지.”

이종배는 할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손에 피 묻히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 지겹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있나.

“조용히 좀 있으라고 회장님이 황주오에게 알짜 게임방을 맡겼습니다. 도련님과 마주칠 일 없을 테니 신경 안 써도 될 거예요.”

도준희가 시큰둥한 얼굴로 손끝을 후 불었다.

“덤벼도 상관없는데.”

“하하, 황주오도 쓸 데가 있는 놈이니 살살 해주십쇼.”

만약 황주오가 충남에서부터 도준희를 알았다면 절대 먼저 건드릴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씨근덕대던 황주오가 생각나 이종배는 혀를 쯧쯧 찼다.

“근래 들어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도준희가 다방식 커피를 홀짝이며 피식 웃었다.

“아, 요즘 애 하나 키우고 있거든.”

이종배는 도준희의 얼굴이 묘하게 부드럽다는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애요?”

“어, 빌어먹게 예쁜 애새끼.”

이종배는 부하들을 힐끗했다. 도준희의 저 뒤쪽에 옹기종기 모인 부하들이 서로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입 모양으로 보건대 ‘애를 낳았나 봐.’ 하고 있다. 이종배가 쯧쯧 혀를 찼다.

‘눈치 없는 새끼들.’

“아이처럼 손이 많이 가는 귀여운 아가씨인가 봅니다.”

그는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 넉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돌연 도준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벌한 소리가 귀를 울리자 흠칫한 이종배가 도준희의 손을 힐끗했다.

‘또 뭐에 심기가 상해서?’

이종배는 속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기분 좋으라고 말을 얹었던 건데 뭐가 문제인가. 나름 충열파에서 지지 기반이 탄탄하고 잔뼈가 굵은 이종배지만 도준희가 시한폭탄처럼 느껴지는 건 똑같았다.

애초에 회장인 도우태도 어쩌지 못한 사람이다. 도준희가 도우태 회장의 하나뿐인 조카인 것을 제외하고라도 이종배는 도준희를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도준희의 부모가 충남에서 대대로 적대 세력이었던 쌍칼파의 수작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도준희와 도우태는 손을 잡고 1년 만에 쌍칼파를 무너뜨렸다. 그냥 무너뜨린 것도 아니다. 다시 설 수 없도록 완벽하게 박살을 냈다.

도우태가 쌍칼파의 사업장을 빼앗고 몰락시켰다면 도준희는 쌍칼파의 팔다리인 무력 집단을 박살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유혈 사태는 이 바닥에서 별꼴을 다 보았던 이종배조차 소름이 돋을 만큼 폭력적이고 거칠었다.

그 이후 안 그래도 도준희의 지랄맞은 성격에 조심스러웠던 이종배의 태도는 더더욱 공손해졌던 것이다.

이종배는 침을 꿀꺽 삼키고 도준희를 살폈다. 도준희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방 안의 사람들이 눈을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거 설마, 쑥스러워하는 건가?’

“백부에겐 말하지 마.”

“…….”

“귀찮게 할 게 뻔하니까.”

‘기분이 상한 건 아니구나.’

도준희의 말에 이종배는 안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 꽉 닫고 있겠습니다.”

“그래.”

“근데 어떤 아가씨입니까?”

이종배는 다소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꼰지르게?”

자연스러운 얼굴로 툭 뱉는 도준희의 말에 이종배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저 도련님이 누군가를 만나는 게 처음인 것 같아 놀라서 그렇지요.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그건 이종배뿐만 아니라 저 뒤쪽에 쪼그라져 있는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칼 밥을 먹고 산다는 이쪽 바닥에서 여자와 술과 담배는 그림자처럼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뼛속부터 주먹 세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것도 인기 좀 있다 하는 극단 배우의 뺨을 치게 생긴 도준희에게 여자가 없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화젯거리였다.

누군가는 또라이답게 성적 취향도 또라이여서 그런 걸 거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모든 관심이 누군가를 짓뭉개는 데 있어서 그렇다고 추측했다.

이종배가 알기에 지금까지 도준희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라니.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는 얘기다.

“좋아하시는 건…… 맞지요?”

“응. 첫사랑.”

제법 순정적인 그 대꾸에 사무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도준희만 여상한 태도로 커피를 마저 마실 뿐이었다.

“그렇군요. 첫사랑이시군요.”

이종배가 굉장히 난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잘되고 있으십니까?”

“뭐, 그럭저럭…….”

도준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이종배가 싱긋 웃었다.

“심부름꾼에 의하면 도련님이 집에서 돌보고 있는 것 같은데. 벌써 동거까지 하시는 거면 꽤 깊은 사이 아닙니까.”

도준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알고 있었군.”

“도련님 일이니까요.”

도준희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난처해하는 이종배를 흘끗 보더니 툭 뱉었다.

“깊거나 얕거나 뭐, 아직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요?”

“어, 꼬시는 중이니까.”

부하들의 눈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떠올랐다.

‘안 넘어와서 협박하고 있는 건가!’

“도,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성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빈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도준희의 머릿속과 그 성정에 다분히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그의 지나치게 멀쩡한 외양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으므로.

“얼굴로 꼬시면 가능하지요.”

도준희는 눈을 찡그렸다. 짐짓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날 무서워하는 건 안 바뀌던데.”

“아, 그건 해결 방법이 없을 겁니다.”

“…….”

무심코 속내를 그대로 뱉어버린 이종배는 도준희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바싹 얼어붙었다. 굳어버린 혀를 놀려 수습하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뜻이 아니라…… 무서워한다는 게 꼭 나쁜 의미가 아니니까요. 우습게 보지 않고 존중……한다는 말이니 굳이 바꿀 필요가 없지 않겠나, 그런 말입니다.”

더듬거리며 말을 마친 이종배는 부하들의 불쌍해하는 시선을 느끼고 침통한 심정이 되었다.

“지랄.”

도준희가 한 마디로 이종배의 말을 일축했다. 침울해하던 이종배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럼 큰 회장님께는 언제 인사드리러 가시려고요? 회장님은 그렇다 치고, 큰 회장님은 많이 궁금해하실 겁니다.”

“영감?”

“네. 많이 무료해하고 계시니까요.”

고민하는 도준희를 보며 도충열의 오른팔이었던 이종배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공인된 사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준희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효자 납셨군.”

“부모님 속 많이 썩였던 저도 결혼할 때만큼은 부모님께 인사드렸습니다.”

다리를 꼰 채 도준희가 얼굴을 찌푸렸다.

‘공인된 사이라. 하긴…….’

도준희 그 자신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말이었지만 세간의 상식과 절차에 얽매인 우예린에겐 다르리라.

* * *

우예린의 감기는 일주일이나 지속되었다. 그 기간 내내 우예린은 도준희의 껌딱지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징징거렸다.

그러는 한편 도준희가 언제 성질을 부릴지 부지런히 살폈으나 도준희는 투덜거리기만 할 뿐 성질을 내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부모님은 벌써 다섯 번쯤 짜증 냈을 텐데.’

우예린은 도준희의 의외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감기 기운이 거의 떨어졌을 때에도 도준희는 소화하기에 좋은 부드러운 음식들을 준비하여 우예린에게 손수 먹이기까지 했다. 우예린은 그저 도준희에게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부모님보다 낫다.’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신 차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음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다 보니 몸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청소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주기적으로 사람이 찾아와 집을 말끔히 만들고 가니까.

‘돈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우예린은 침대에 누워 돈과 사람이 가져다주는 편의성을 맘 편하게 누렸다.

어찌 됐건 우예린은 자신이 이 편리한 생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식하고 있었다. 스스로 독립적인 편이라 여겨왔던지라 덜컥, 위기의식이 들었다.

‘이러다 도준희랑 계속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들겠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몸이 편해도 마음이 안 편해서야 되겠는가? 우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려 바람피울 거 같다는 이유로 정조대를 채우는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살면 정신이 고달플 터였다. 나중에는 몸에 제 이름을 새기자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내 성격에 도준희가 화를 내면 납작 엎드릴 텐데 그 살얼음판을 어떻게 견뎌.’

다시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우예린은 역시 기회만 된다면 도준희에게서 도망가야겠다고 재차 결심했다.

볕 좋은 오후. 우예린과 도준희는 거실의 널찍한 소파에 자리 잡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요즘 휴가철이라 많이들 피서 가시죠? 집에 계신 분들도 여행 느낌 나시라고 조 가수님의 「여행을 떠나요」 틀어드릴게요.

“자, 입 벌려.”

촉촉한 과일이 입술을 툭 건드렸다. 우예린은 새끼 새처럼 입술을 벌렸다. 달콤한 복숭아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우예린은 부드러운 과육을 오물오물 씹었다.

부모님과 살 때는 검소한 생활로 인해, 자취할 때는 혼자 먹기 많다고 사 먹지 않았던 과일을 이곳에서는 양껏 먹을 수 있었다.

도준희는 뭐 하나 사는 데도 이것저것 생각하는 우예린과 달리 사고 싶다고 생각하면 샀다.

‘회사 급식으로 나오던 것보다 달아.’

평소에는 잘 먹지 못했던 과일을 먹자 소소한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여행을 떠나요. 라라라라라.

라디오에선 흥겨운 음악 소리가, 입 속에는 달콤한 과일이. 피서를 가지 않아도 휴가를 온 것 같았다.

“우예린.”

도준희가 과도로 과일을 깎으며 그녀를 불렀다.

“왜요?”

우예린은 도준희의 허벅지 사이에 앉은 상태로 대꾸했다. 처음에는 민망해 죽을 것 같았던 이 자세도 이제는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다음 주 금요일, 회사 연휴지?”

우예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생활이 편하다고 인식한 것과는 별개로 도준희가 뭘 할지 모르는 미친놈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힐끗했다.

‘왜 묻는 거지?’

불안했지만 말 못 할 것도 없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금, 토, 일이 쉬는 날이군.”

“…….”

쉬는 날이기는 했다. 나름대로 연휴가 삼 일이나 되니 책이라도 왕창 읽어두기 위해 읽을 책 리스트를 짜려던 참이었다. 어차피 그거 말고 다른 건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연휴는 왜 따지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도준희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았다. 미묘하게 찌푸려진 미간이 불안했다.

“애매하네.”

“뭐가요?”

“그냥 관둬라, 회사.”

“가, 갑자기 왜요.”

‘이럴 줄 알았어.’

도준희가 또 억지를 쓰나 싶어 우예린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뭘 하려고 할 때마다 휴일을 계산해야 하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귀찮게.”

배부른 불만이다.

“원래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휴일을 계산하면서 살아요.”

소심한 우예린은 아주 조금 울컥해서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소심한 반항이었다.

‘일을 한 번이라도 해보고 말하지.’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안 그랬는데.”

우예린은 흥, 코웃음을 쳤다.

“대부분의 ‘직장인’ 말이에요, 직장인. 도준희는 일해본 적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해 못 하죠.”

“내가 일을 왜 안 해?”

“……?”

도준희가 과일을 깎다 말고 우예린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일 안 하면 널 어떻게 먹여 살리냐.”

“……도준희는 부모님 재산 물려받은 거잖아요.”

도준희는 코웃음을 쳤다.

“유산도 있기는 한데, 내가 번 돈도 많아.”

“예에…….”

‘그래봤자 얼마나 되겠어.’

우예린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도준희가 흐응, 야릇한 소리를 냈다.

“이 집도 내가 일해서 받은 거야.”

“아니, 근데 아까부터 무슨 일을 한다고 그래요?”

우예린은 도준희가 하는 말이니 그냥 듣자 싶으면서도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어 그를 돌아보았다. 다시 과일을 깎기 시작한 도준희가 우예린을 힐끗했다.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벌써부터 남편 재산 관리하냐?”

우예린은 고개를 홱 돌렸다.

“질문 안 한 걸로 칠게요.”

“계획적인 거 좋지.”

도준희는 우예린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듣고 싶은 말만 듣네.’

무시당한 우예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준희가 고개를 내밀어 우예린의 얼굴을 보고,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과일 조각을 슥, 넣었다.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입을 닫고 과일 조각을 우물거렸다.

“이 집이랑 부모님 재산은 복수에 대한 보수라고 할 수 있지. 거저 받은 게 아니라 정당하게 일을 해주고 받은 거야.”

“복수?”

“쌍칼파 씹새들이 수작을 부려서 내 부모가 죽었으니까.”

“…….”

“얼마나 한이 맺혔겠냐.”

우예린은 우뚝 얼어붙었다. 귀를 의심했다.

‘쌍칼파? 죽어?’

평범한 소시민인 우예린에게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단어였다. 도준희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우예린은 부모가 죽었다는 사람 앞에서 태연하기엔 낯짝이 지나치게 얇았다.

듣고 싶어서 들은 얘기도 아니건만 우예린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도준희의 어깨를 어색하게 쓰담쓰담했다. 도준희가 그녀의 손을 곁눈질했다.

“뭐 하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충격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해서요…….”

우예린이 우물쭈물 말하자 도준희가 픽, 웃었다.

“괜찮아, 복수해줬으니까. 받으면 꼭 되갚아 줘야 하는 게 그 양반들 신조였으니까 무덤 안에서도 만족하겠지.”

“……아, 복수?”

“쌍칼파를 망하게 했지. 사업채는 싹 다 뺏어서 백부가 흡수했고.”

“…….”

“부모님 재산은 유산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보수인 거지.”

‘그래서 일을 하고 받았다는 거구나.’

그나저나 그런 일이 있었다니. 무슨 일이든 자기 손으로 해결하는 도준희다웠다. 자신이라면 분이 풀릴 때까지 경찰서에 매달렸을 것이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방식을 알지만, 이해는 할 수 없기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다면 일이란 게…….”

“뭐, 싸움이 나면 조정하고 돕고, 사업체를 관리할 때도 있지. 말 안 들으면 뺏고.”

“…….”

“인수 합병을 하는 거다.”

‘그게 무슨 인수 합병이야!’

우예린은 입이 근질근질해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도준희의 재산에 대한 의문은 풀렸지만 두려움은 증가했다.

도준희가 짐짓 고민스러운 듯 말했다.

“일을 할 필요가 없는데 딸린 식구가 생겼으니까 생각을 좀 해봐야지.”

‘그 딸린 식구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도준희는 그 말만 하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서걱 서걱.

복숭아 껍질이 벗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예린은 제 살이 바싹바싹 깎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냥 못 들은 척하면 될 텐데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딸린 식구란 말이.

“저기, 누가 딸린 식구…….”

혹여 도준희의 화를 북돋을까 무서워 어물어물 말하자 도준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손에 들린 과도의 날이 한순간 번쩍였다. 우예린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너지, 무슨 멍청한 소리야.”

우예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사각 사각. 과일 깎는 소리가 귓가를 서늘하게 울렸다.

“그렇다고 맞벌이를 해야 한다는 부담은 갖지 마라. 지금도 너 하나는 일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우예린이 걱정하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나중에 애도 태어날 걸 생각하면 가볍게라도 일을 계속 해둬야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백수 아빠보다는 일하는 아빠가 나을 거 아냐.”

“…….”

도준희는 계속 핀트를 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조…… 아니, 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아이 정서에는 안 좋을 거예요. 어찌 보면 백수보다 나쁠 수도 있다고요.”

뒷말은 개미 똥구멍 기어들어 가듯 했다. 도준희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은 그러냐?”

“이전 정권에서 대대적으로 소탕을 하기도 했잖아요? 그게 조금,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요. 그러니까 사람들 인식이 안 좋죠.”

그 나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우예린이다. 우예린은 유흥 거리 교회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만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수금하러 다니는 모습과 말을 안 듣는 사람을 처리하는 모습들을 모두 지켜보았다.

각이 진 검은 양복에 하얀 셔츠, 거칠고 험악한 인상, 시끄러운 고함 소리와 소란. 그때를 떠올린 우예린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도준희에게 생각이 미쳐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엮이기 싫다고 생각했던 부류의 사람과 엮여도 아주 단단히 엮여버렸다.

다소 곤란한 것처럼 표정을 구겼던 도준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뭐, 큰아버지에게 사업 하나 떼어달라고 하지.”

“…….”

“양지로 나가고 싶어 하니까 합법적인 업체들도 몇 될 거다.”

“…….”

“이런 게 가장의 고충이란 건가.”

천사처럼 잘생긴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에 우예린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쨌든 아직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거지?”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끄덕인 걸로는 모자라 보여 여러 번 거세게 끄덕였다.

“그럼 연휴 끼고 금, 토, 일로 해야겠네.”

“뭘 해요?”

“여행.”

도준희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여……행이요?”

“응, 휴가잖아.”

그렇게 해서 우예린은 황금 같은 휴일, 뜬금없는 여행을 가게 되었다.

* * *

도준희가 말한 금요일 아침.

‘그냥 해본 말은 아닌가 보네.’

비몽사몽 중에 우예린은 나갈 준비를 하는 도준희를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아무 말이 없기에 그냥 꺼낸 말인가 싶었는데 아침이 되자 도준희는 평소보다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온 도준희가 가볍게 머리를 털며 방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어났으면 옷 입어.”

우예린은 어기적거리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까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못 들었네.’

여름 여행,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에 따라 하얀색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우예린이 먼저 거실로 나왔다.

“밥 먹고 있어.”

도준희가 주방에서 나오며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다. 우예린은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문이 닫힌 드레스 룸을 힐끗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의자에 앉으면서 찜찜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사람이 여행 가자고 하면 그저 신나서 기대하겠지만 여행 얘기를 꺼낸 사람이 도준희이기에 의심부터 되었다.

‘갑자기 웬 여행?’

“집에만 있는 게 좀이 쑤셨나?”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우예린은 생각을 접고 수저를 들었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오므라이스였다.

집안일에 사람을 쓰기는 하지만 도준희는 요리를 꽤 자주 하는 편이었고 그의 요리는 우예린의 입맛에 잘 맞는 편이었다. 부드러운 계란과 탱글탱글한 밥알을 한꺼번에 퍼 넣은 우예린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오물거렸다.

이곳에 온 초반, 이 미친놈을 어떻게 떼어내야 하나 고민했던 때와 달리 요즘은 입맛이 잘 돌았다. 자취방에서는 간단히 차려 먹거나 심지어 종종 끼니를 거르기도 했는데, 여기선 평소에 먹지 못한 종류의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었다.

‘이것도 맛있다.’

우예린은 감탄하며 오므라이스를 착실히 해치워갔다. 반쯤 먹었을 무렵, 도준희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다 먹었어?”

우예린은 입에 밥을 한가득 머금은 채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도준희를 확인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쿨럭. 음식을 뿜을 뻔하여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잘 먹다 말고 뭐 하냐?”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우예린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우예린은 입 안에 가득한 음식물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입 안에 있는 걸 먹어치워야겠다 싶어 입술을 빠르게 오물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넋이 나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는 도준희만 쳐다보았다.

보통 도준희의 평소 차림은 흰 티에 청바지다. 그것만으로도 모델처럼 눈이 부셨다. 도준희가 미친놈임을 깨달은 우예린도 부정하지 못한 사실.

도준희의 겉껍데기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티브이에서도 도준희보다 근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도준희는 양복 차림이었다. 도준희가 흰 와이셔츠 소매를 살짝 걷은 채, 물컵에 물을 따랐다.

‘손목.’

우예린은 물을 따르는 손목에 시선을 빼앗겼다. 푸른 핏줄이 길게 불거진 손등과 손목이 무척이나 섹시해서 당황스러웠다.

긴 손가락이 차가운 물컵을 쥐고 붉은 입술이 물컵에 닿는다. 물이 넘어가자 움직이는 목울대는 남자답게 단단한 느낌이었다.

긴 다리를 감싸는 검은 양복바지가 도준희의 흰 피부를 부각시켰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양복바지가 무표정한 도준희의 얼굴과 함께 어우러져 왠지 모를 서늘함을 풍겼다. 간단한 차림으로도 시선을 끌었던 도준희가 지금은 그야말로 자체 발광을 하고 있었다.

‘와아…….’

우예린은 입맛도 떨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탓이다. 시선을 눈치챈 도준희가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

“뭐 묻었냐?”

우예린의 진득한 시선에 도준희가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큰 손이 마른 얼굴을 쓸자 별거 아닌 행동인데도 가슴이 시끄럽게 두근거렸다. 얼굴이 빨개진 우예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므라이스 어때?”

“맛있어요.”

우예린은 도준희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도준희에 대한 찬양과 감탄의 시간이 지나가자 자괴감이 찾아왔다.

‘또 얼굴에 홀려버리다니.’

얼굴 밝히다가 인생 말아먹을 수 있다고 충고한 이지나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우예린은 오므라이스 한 숟갈을 입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기분 탓인지 맛도 덜 느껴지는 것 같다.

“근데 웬 여행이에요?”

“쉬는 날에 남들 다 가는 여행 간다는데, 뭐가 이상해?”

“그건 아니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처럼 굴었다고.’

“계곡도 갔다 오고, 놀다 오지 뭐. 너 요즘 많이 답답해했잖아.”

“…….”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한 건 맞다. 근데 그게 누구 때문이더라?

“집 가고 싶다며. 그냥 한 말이야?”

도준희가 눈썹을 치켜떴다.

우예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마, 맞아요.”

“답답하고 놀고 싶으니까 그런 말을 한 거 아니야. 재밌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우예린은 이 상황에 딱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 냈다.

아, 그래.

‘고양이 쥐 생각해 준다.’

“예에, 고마워요. 어디 가려는 건데요?”

“천안.”

“예?”

뜬금없이 고향이 언급되자 놀란 우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 도준희는 소매를 좀 더 걷으며 말했다.

“만날 사람도 있고, 간 김에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는 거지. 기대돼?”

“…….”

우예린은 말이 없었다. 도준희의 길쭉한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기대 안 되냐?”

“기, 기대돼요. 너무 돼요. 하하.”

도준희의 눈매가 유순해지자 우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만날 사람이 누군데요?”

“가서 보면 알아.”

도준희가 씨익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 미소였지만, 우예린은 불길하기만 했다.

도준희는 새빨간 외제차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곧이어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갔다.

“타.”

우예린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차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틀림없이 비쌀 거야.’

20억 펜트하우스의 위엄에 놀란 우예린은 위축되어서, 차 문을 닫을 때도 조심스러웠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우예린이 학창 시절 종종 얻어 타곤 했던 아버지의 낡은 차와는 확실히 승차감부터가 다른 듯했다.

빨간 차는 빠르게 움직여 곧 고속도로에 올라갔다. 우예린은 삭막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도준희를 곁눈질했다.

‘이렇게 천안에 가게 되다니.’

고향에 내려간 지 1년이 넘은 우예린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큼, 헛기침을 했다.

“도준희는 그럼, 나에 대해 웬만한 건 다 알겠네요?”

“어. 모르는 거 빼고 다 알아.”

당당한 대꾸에 우예린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아는데요?”

“방죽사거리 유흥 거리에 교회가 하나뿐이라 아는 놈들이 많던데. 그땐 네가 고등학생이라 가는 곳이 거기가 거기이기도 했고.”

뒷조사와 스토킹을 했단 소리다. 우예린은 재차 말문이 막혔다.

“나를 왜 좋아하게 된 거예요?”

“…….”

도준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쳐다보자 우예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 도준희였잖아요!”

도준희는 습관적으로 입술 사이로 담배를 문 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앞으로 쭉 뻗어나가자 기겁한 우예린이 안전벨트를 꼭 붙들었다.

생각에 잠긴 듯했던 도준희가 돌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냥, 배때기가 뒈질듯이 아팠는데 그 와중에 쌍화탕은 따뜻하고 맛있어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가 사다준 쌍화탕이 맛있었단 소리야.”

‘모든 건 쌍화탕에서 시작되었다는 건가?’

쌍화탕 대신에 우유를 사줄 걸 그랬다. 우예린이 한숨을 푹 쉬자 도준희가 말했다.

“한숨 쉬지 마.”

“…….”

“복 날아간다.”

‘가끔 저렇게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한단 말이야.’

우예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고 도준희를 살펴보았다. 운전을 하는 도준희의 눈동자는 나른하면서도 섹시해 보였다. 길고 깊게 빠진 눈매에선 서늘함이 뚝뚝 떨어졌다. 입꼬리가 올라갈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인상이 좋아 보인다.

‘웃을 때만.’

이렇게 다시 보니 험상궂고 성질 더러워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어째서 대학생 때는 마냥 착하게 보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보다 보니 빠져든다. 깔끔한 양복을 입어서일까. 여유로우면서도 섹시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만은 정말로, 완벽한 그녀의 취향이다.

우예린은 자괴감을 느꼈던 것도 잊고 또 한 번 도준희에게 넋을 잃었다.

빠앙!

격렬한 경적 소리에 놀란 우예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옆 차선에서 이탈한 차가 도준희의 앞을 아슬아슬하게 끼어들었다. 도준희가 핸들을 꽉 붙잡았다. 살짝 위로 올라가 있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

“저 씨발 새끼가 미쳤나.”

우예린은 깊고 섹시하다고 감탄했던 도준희의 눈동자가 반질거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건 도준희의 스위치가 딸깍, 켜졌다는 의미였다. 우예린은 본능적으로 안전벨트를 꽉 붙잡았다.

부아앙!

차가 빠르게 달려나가자 겁먹은 우예린이 눈을 꽉 감았다.

‘이런 미친놈!’

도준희를 보며 감탄했던 자신을 향한 원망이 치솟았다. 도준희의 스포츠카는 그야말로 미친 경주마처럼 달려나갔다. 예의 없고 무례했던 자동차 주인은 결국 도준희에게 붙들려 다섯 번이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차 주인도 만만찮게 성격이 더러워 보였지만 도준희가 뭐라고 했는지 백팔십도로 태도를 바꾸어 연신 사과를 해대었다.

조수석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우예린은 이미 탈진한 상태였던지라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잔뜩 긴장한 탓에 진이 빠진 눈으로 도준희가 하는 양을 보기만 했다.

짐마차에 실린 짐처럼 이동된 우예린은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바깥에 있는 테이블 하나를 잡고 그 위에 널브러졌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우, 우우…….”

신음만 흘리자 도준희가 이온 음료를 사왔다.

딸칵.

“마셔.”

도준희가 캔 뚜껑을 따고 우예린에게 건네었다. 녹초가 된 우예린은 생명수처럼 음료수를 홀짝였다.

‘도준희는 집념의 미친놈이다.’

우예린은 도준희에 대해 알면 알수록 혀가 내둘러졌다.

‘같이 있으면 수명이 줄어들 거야.’

얼른 도준희와 헤어지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문제는 도준희가 이 관계를 자신의 생각보다 깊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이별 통보에 화가 나서 집착하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버려지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지 않았던가. 도준희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결혼이나 아이 얘기까지 꺼내고 있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도준희라 그런지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요즘은 심지어 신체 포기 계약서 사건 때 쓸 뻔했던 막도장을 매일같이 살피고 있다.

‘나도 모르게 혼인 신고가 되어있으면 어떡해.’

다행히 아직 도준희가 멋대로 판 막도장에 인주가 묻어있는 건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 탄식이 나온 우예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우예린은 차가운 음료수 캔을 꼭 붙든 채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가 큼, 헛기침을 했다.

‘왜 저러지?’

평소와 같은데, 묘하게 다르다. 고개가 빳빳했던 보리가 가을이 되어 고개를 슬쩍 숙이는 것처럼 턱이 약 45도 각도로 꺾여있다.

우예린이 동그란 눈을 끔벅이며 쳐다보자 도준희가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슥슥 쓸어 넘겼다.

“속은 괜찮아?”

“……음료수 마시니까 좀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

“고맙기는…….”

도준희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우예린을 힐끔거렸다. 우예린은 순간적으로 발끝부터 목덜미까지 긴장이 확 되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평소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도준희라니, 어마어마한 일이 터질지도 몰랐다. 우예린이 긴장하며 도준희를 주시하는 사이, 도준희가 입을 열었다.

“그 뭐……, 많이 힘들어?”

“성질 좀 죽여요, 도준희. 그러다 큰일 나면 어떡해요.”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푸념조로 말했다. 말은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도준희가 어디 이렇게 말한다고 말을 들어먹을 사람인가. 콧방귀나 안 뀌면 다행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런데 표정과 달리 흘러나오는 말은 퍽 얌전했다.

“앞으로 안 그럴게.”

“……?”

이해하지 못한 우예린이 눈을 끔벅였다.

“앞으론 좀 더 조심하겠다고.”

“네?”

우예린이 눈을 크게 뜨자 도준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네가 빌어먹게 연약하다는 걸 깜박했어.”

“…….”

“또 몸이 아플 것 같으면 말해라. 바로 병원 갈 테니까.”

우예린은 입을 딱 벌렸다.

‘물론 도준희에 비해 내가 연약하기는 하지만…….’

도준희가 이런 식으로 눈치를 본 적은 처음이다. 며칠 전, 자신이 일주일이나 앓아누웠던 것이 그에게는 꽤 충격이었던 듯했다.

‘그걸 아직도 신경 쓰네.’

예전에 비해서 묘하게 더 다정한 것 같다고 느끼기는 했으나 착각으로 치부했다. 아팠던 걸 신경 쓰고 다정했다는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오늘은 놀라서 심장이 찌부라지는 것 같았다.

눈치의 ‘눈’ 자도 모를 것 같던 도준희가 눈치를 보는 모습이라니. 우예린은 또 다른 의미로 두려워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괘, 괜찮아요. 앞으로 운전 천천히만 한다면…….”

“천천히 할게.”

도준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예린은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아 음료수 캔을 입술로 물다가 도준희를 힐끗했다. 도준희는 음료수와 함께 사온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자, 젓가락.”

그가 건네는 젓가락을 받아들여 감자를 쪼개 먹었다.

‘이제 도준희가 바뀌려는 걸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혹시…….’

우예린은 감자를 우물거리며 도준희를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친 도준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정해졌다고 인식하니 눈빛까지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우예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소와 달리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이어지려는 참이었다.

“아이 씹, 어떤 새끼가 주차를 이딴 식으로 해놨어.”

갑작스러운 욕설이 귓가에 꽂혔다. 우예린은 감자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자리 잡은 테이블 근처 주차장에 주차를 한 덩치 큰 남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걸어오고 있었다. 두꺼운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까지. 면상부터 참 거친, 우예린이 제일 무서워하는 타입의 남자였다.

남자가 욕설을 뱉는 곳에는 도준희의 스포츠카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태양보다 더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도 살피지 않고 걸어오는 남자를 보자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함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 상관 없는 척 고개를 돌린 우예린은 남자가 걸어오는 방향에 의자가 살짝 빠져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서둘러 의자를 집어넣으려는 참이었다.

콰당!

손을 뻗었던 우예린이 어깨를 움찔했다. 의자에 부딪친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씨발. 일진 더럽네. 차는 거지같이 세워놓지 않나 이제는 의자까지 지랄이야.”

“…….”

“어떤 새낀지 걸리기만 해봐라.”

쯧, 혀를 차고 지나가려던 남자가 도준희와 맞은편의 우예린을 흘끗했다.

“참나,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도 애인이 있어?”

혼잣말이지만 목소리가 커서 다 들렸다. 우예린은 못 들은 척하며 감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남자의 눈길이 우예린에게 머물렀다.

“귀엽네.”

우예린의 어깨가 좀 더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남자는 생각나는 대로 뱉는 것뿐이었는지 그냥 지나가려는 듯했다.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순간.

“내 찬데.”

“…….”

“내 여자고.”

고개를 들자 도준희가 비딱한 자세로 남자를 향해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려는데 왜!’

우예린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뭐라고?”

팔뚝이 일반적인 어른 팔뚝의 두 배는 됨직한 남자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물었다. 우예린은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반면 도준희는 태연한 낯으로 주차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의 시선이 도준희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네가 욕한 저 차는 내 차고.”

이번에는 손가락이 우예린을 가리켰다.

“네가 눈독 들인 이 여자는 내 여자라고.”

우예린은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도준희는 ‘그래서 어쩔 건데?’ 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침묵하다가 한숨을 흘렸다.

“무슨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하는 듯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표정을 살폈다. 콧잔등이 실룩거리는 것이 여기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경보, 유혈 사태 발발 일보 직전.

“도준희!”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도준희와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달아올랐다.

“나 야, 약국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왜? 많이 안 좋아?”

도준희는 금세 누그러진 표정으로 물어왔다. 우예린은 안도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멀미가 심하게 왔나 봐요. 속이 계속 울렁거려요.”

“기다려 봐. 약 사올게.”

우예린은 도준희의 순순한 대꾸에 안심하면서 남자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말이 거칠었던 남자는 다행히 싸움을 걸고 싶은 건 아닌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아가씨, 저런 것도 남친이라고 둬?”

우예린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다행히 남자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말을 듣자 멈칫했던 도준희도 남자와는 반대 방향인 약국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약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물과 함께 약을 넘긴 우예린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한숨을 쉬었다.

“하아. 도준희, 성질 좀 죽이라고 했잖아요. 원래 세상에는 마음에 화가 많은 사람이 많아요. 그때마다 싸울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그래도 조용히 지나가서 다행이지만…….”

진심을 가득 담아 투덜거렸지만 도준희는 말이 없었다. 우예린은 의아하게 그를 응시했다.

“도준희?”

도준희는 무표정했다. 우예린이 재차 부르자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속은 괜찮아?”

“약 먹으니까 나아지겠죠.”

“…….”

“……도준희?”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도준희가 고개를 돌려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생각해요?”

“아무 생각도 안 해.”

‘아무 생각 안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안 먹어요?”

“맛이 별로야.”

막 감자를 또 집어 먹던 우예린이 눈을 굴렸다.

“난 괜찮은 것 같은데…….”

도준희가 이쑤시개로 감자를 뒤적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봐, 감자를 샀는데 소금도 안 주고. 기다리고 있어. 소금 갖고 올게.”

도준희가 몸을 일으키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우예린은 감자 반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간 되어있는 감자라 소금 필요 없는데?”

도준희에겐 심심하게 느껴졌나 보다. 우예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감자를 먹고 음료수를 홀짝였다.

5분이 지났지만 도준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금 하나 가지고 오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나?”

우예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식을 더 사 오려고 늦나.”

문득 우예린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벌떡 일어난 건 본능이었다. 도준희는 메뉴를 시키는 데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성격도 급한 편이다.

‘설마.’

우예린은 가방을 손에 쥔 채 화장실이 있는 쪽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막상 남자 화장실 앞에 서자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되었다. 도준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 화장실 앞에 오도카니 서있으려니 어색해서 가방 끈만 만지작거렸다.

“여기가 아닌가?”

안쪽을 기웃대자 화장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우예린은 얼굴을 붉히며 화장실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도준희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크흑, 흐흐흐윽…….”

뚜르르, 뚜르르르.

핸드폰 벨 소리를 들으며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장실 입구에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덩치 큰 남자가 흐느끼며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남자가 저렇게 큰 소리로 우는 건 처음 보는 우예린은 얼이 빠져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저 사람 아까 그 사람인데?”

별것도 아닌 일로 성질을 부리던 거친 말씨의 남자였다.

달칵.

―어, 왜?

수화기 너머에서 도준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가 이상하게 들리네.’

우예린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대꾸했다.

“어디예요?”

―중간에 일이 생겨서. 금방 갈게.

아무래도 오해했나 보다, 다시 돌아가야지 했던 우예린은 문득 도준희의 목소리가 이중으로 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화장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을 쥔 도준희가 휘파람을 불며 나오고 있었다. 상쾌한 얼굴이다.

우예린은 흐느끼며 도망가던 덩치 큰 사내를 떠올리고 해쓱해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핸드폰 폴더를 닫던 도준희가 우두커니 선 우예린을 발견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의아한 시선이 닿자 움찔하고 손을 내렸다.

“화장실 앞에서 뭐 해?”

그가 우예린이 꼭 붙들고 있는 가방을 발견했다. 입술 한쪽이 호선을 그렸다.

“나 기다렸어?”

좋아하는 도준희를 보니 할 말이 궁했다.

“왜, 혼자 있으려니 무서웠냐?”

“…….”

“귀엽기는. 가자.”

우예린은 도준희에게 손이 잡힌 채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도준희의 얇은 입술 사이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우예린은 아이처럼 울면서 뛰쳐나가던 남자를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측은하게 느껴졌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도준희를 이곳저곳 살폈다. 깔끔하고 세련된 양복은 구겨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자 오해했는지 도준희가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직 힘드냐?”

“그, 그런 것 같아요.”

“좀 더 쉬고 갈까?”

“아니에요, 그냥 가요. 얼른.”

‘만약 그 남자가 경찰에 신고하기라도 하면…….’

창백해진 우예린이 걸음을 재촉했다. 스포츠카를 향해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도 경찰이 출동한 기색은 없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기, 도준희. 근데 소금은 어딨어요?”

“응?”

“소금 갖고 온다면서요.”

잠깐 움찔한 도준희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 그거? 말았어. 짜게 먹으면 안 좋겠더라고.”

“……그러셨구나. 소금 대신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으셨구나.”

당장 경찰이 보이지 않아도 불안하다. 도준희에게 된통 당한 남자가 패거리를 끌고 오면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니까.

‘하여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긴장한 우예린이 미간을 좁히자 도준희가 의아하게 물었다.

“너 좀 이상한데, 차 타도 괜찮겠어?”

“괜찮아요.”

우예린은 빠르게 대꾸했다.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고 싶다고요.’

우예린의 마음은 까맣게 모르는 도준희는 신선인 양 유유자적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서 바싹바싹 속을 태우는 우예린은 괜히 억울해졌다.

‘일을 저지른 건 도준희인데 왜 내가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는 다시 충남을 향해 달려나갔다.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지쳐버린 우예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하게 묻은 채 도준희를 곁눈질했다. 한 손으로만 핸들을 잡고 능숙하게 운전하는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불안하게 왜 저러지.’

차라리 무표정한 도준희가 낫지 괜히 저러니까 안심이 안 되었다. 우예린이 자꾸만 흘끔거리자 도준희가 시선을 눈치챘다.

“왜.”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안 좋은데?”

말은 안 좋다는데 얼굴은 여전히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입술이 살짝 올라가고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진 것이, 눈을 떼지 못하게 반짝여서 우예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쳤어, 우예린…….’

아무래도 이제는 정말 자신이 남자 얼굴 때문에 인생을 말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잘 어울린다는데.”

갑자기 도준희가 툭 뱉었다. 자괴감에 괴로워하던 우예린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뭐가요?”

“너랑 나.”

숨을 덜컥 멈추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무서운’이란 단어는 목으로 삼켰다.

“아까 시비 걸었던 놈이 말이야.”

우예린은 아이처럼 뛰쳐나가던 남자를 떠올렸다. 이미 우예린의 머릿속에 남자는 시비를 걸던 모습이 아니라 울며 달려나가는 뒷모습으로 남아있었다.

화장실에서 역사가 이뤄졌다는 걸 알지만 모르는 척 뚝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대화를 할 틈이 없었을 텐데 언제 만났어요?”

“우연히, 화장실에서 봤어.”

‘우연히? 억지로 만든 우연이겠지.’

우예린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렇게…… 좋은 말을 해줄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대체할 말이 없어 좋은 말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자 기분 탓인지 도준희의 미소가 짙어지는 것 같았다.

“어, 그냥 그렇게 말하던데?”

‘말을 둘러대도 저렇게 대충 둘러대냐.’

“분위기가 좋았나 봐요?”

“처음에는 별로. 나중에는 괜찮았어.”

“…….”

“우리 사이를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거 보니까 불쌍해서 봐주기로 했다.”

“……아하.”

“애인 만들고 싶으면 개눈깔부터 갈아 끼우라 했더니 울던데.”

우예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뭘 어떻게 했으면 울기까지 해.’

그나저나 애인 사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거지.

“그 말이 기분 좋았어요?”

“아니.”

도준희가 정색하고 말했다.

“…….”

“기분 좋을 게 뭐가 있어?”

우예린은 무표정하게 도준희의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보았다.

‘입이나 좀 가리고 말하지.’

도준희는 그 말의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우예린이 기억하기로 두 사람 사이에 관계를 규정한 말은 그녀가 뱉은 ‘헤어지자’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그 어떤 사이도 아니었다.

‘우리가 무슨 사인데?’

모르긴 몰라도 이 질문이 폭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말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그런데도 모른 척하기에는 신경이 쓰이고 거슬렸다. 삼킨 말이 뾰족한 창처럼 속을 쿡쿡 찔러댔다. 결국 우예린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애인 사이인가요?”

“…….”

끼이익!

브레이크를 밟은 차가 급격하게 속도를 늦추자 우예린은 기겁했다. 도로가 텅텅 빈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속 도로였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다행히 뒤따라오던 차는 없었다.

“위험하게 무슨 짓…….”

화를 내려던 우예린은 도준희로부터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슬쩍 입을 다물었다. 조심스럽게 도준희를 바라보자 도준희가 핸들을 움켜쥔 채 우예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어컨을 켠 것도 아닌데 온도가 10도는 내려간 듯했다.

“그럼 뭔데.”

고저가 없는 목소리. 우예린은 눈앞이 아찔했다. 폭탄도 보통 폭탄이 아니다.

“할 거 다 했는데 우리 사이가 애인 사이가 아니면 뭔데.”

“…….”

“아, 그거야? 내 동정 가지고 갔으면서 이대로 튀겠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이기적이고 뻔뻔한…….”

말이 이어질수록 이 가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우예린은 땀을 삐질 흘리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했다.

“애, 애인 사이가 아니라…….”

“아니라?”

도준희의 반질거리는 눈이 자신의 입술에 못 박히자 우예린은 침이 바짝 말랐다. 아니, 피가 마르는 것 같다.

“아니라…….”

“…….”

“…….”

“아니라, 뭐.”

“겨, 결…….”

“뭐?”

“그러니까 아, 결혼! 결혼할 사이라는 거죠.”

“…….”

“잠자리도 했는데 결혼해야죠, 당연히…….”

우예린은 자기 입에서 흘러나가는 말이 말 같지가 않았다.

‘미쳤니, 우예린.’

흘끔 도준희를 보자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결혼…….”

불안할 정도로 얌전히 중얼거린 도준희가 다시 차를 몰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부드럽고 빠르게 달려나가는 차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라리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고 해줬으면…….’

우예린은 도준희의 침묵이 부담스러웠다. 10분이 지나도록 차 안에선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역시.”

마침내 도준희가 입을 열자 긴장으로 말라가던 우예린은 물을 기다리는 식물처럼 귀를 쫑긋했다. 도준희가 진중한 목소리로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목사 딸이라 생각이 다르네.”

“……네?”

‘갑자기 목사 딸인 게 여기서 왜 나오지?’

도준희가 아까의 무시무시한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잤으니까 결혼도 하는 게 당연하지.”

“…….”

“역시 우예린, 똑똑해서 그런지 나보다 한발 앞서나가.”

‘아니야, 그런 거 전혀 아니야.’

우예린은 정정하고 싶었지만 뱉은 말이 있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결혼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색하게 웃는 수밖에.

‘그러다 보면 흐지부지되겠지.’

그러나 도준희는 우예린의 생각보다 빠르고 본격적이었다.

“그럼 식은 언제쯤 올릴까.”

“……네?”

“뭐, 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 식만 올리고 도장 찍으면 될 것 같은데. 결혼식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까, 웨딩플래너에게 말해놓고.”

눈앞이 아찔했다.

‘뭔 플래너?’

도준희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제 입술을 툭툭 쳤다.

“지금 사는 곳이 높고 깔끔하기는 해도 영 삭막해서 말이야. 애가 태어날 거 생각하면 마당이 딸린 주택도 괜찮을 거 같네.”

“…….”

“뭐, 애가 없어도 마당 있는 집이 화단이나 이것저것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으니 취향 따라 골라. 이거 외에도 따로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 양키 놈들 사는 곳만 아니라면 어디든지 집 구할 수 있으니까.”

“…….”

“식장은 되도록 빨리 잡아야겠어.”

“…….”

“식도 안 올리고 같이 살고 있는 거 회사에 알려지면 안 좋을 거 아니야, 여자한테.”

우예린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네가 언제부터 내 평판을 그렇게 생각해 줬다고.’

후퇴가 없는 직진 인생 도준희. 그 앞에서는 그 어떤 생각 없는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우예린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직 좀 이르니까 같이 생각을…… 좀 해봐요.”

사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아니,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는 판국에 그녀의 나이는 이른 것도 아니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어 그렇게 얘기했다. 도준희가 또 딴죽을 걸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도준희는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우예린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췌해졌다. 충남에 가는 내내 도준희가 혼잣말을 하듯 말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빨리할수록 좋아.”

“하하.”

“기억해. 결혼은 빨리할수록 좋다는 거.”

“……하하, 하…….”

피가 마른다, 말라.

차가 충남 표지판을 지나쳤다. 우예린은 창밖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감회가 새로웠다. 차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계곡.”

우예린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자 도준희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우리 휴가 온 거잖아.”

무심코 여행은 핑계고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우예린은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반응이 떨떠름하네. 그냥 경마장이나 갈까? 돈 좀 잃으면 열받아서 저절로 이열치열 될 텐데.”

“아, 아뇨!”

우예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전 계곡이 좋아요.”

“그래?”

“그래요, 여름엔 계곡이 최고죠.”

우예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고개를 돌린 도준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오케이, 계곡.”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도 흘러나온다. 신난 건 도준희만이 아니었다. 몇 년간 논 것이라고는 이지나와 노래방이나 술집에 간 게 다였던 우예린은 갑자기 마음이 설렜다.

산을 오르고도 한참을 가던 차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우예린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계곡의 물은커녕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산 속에 무슨 계곡? 의아한 우예린과 달리 도준희는 나무와 풀을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나무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계곡의 시원한 풍광이 펼쳐졌다. 스아아아아, 물소리도 났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랑 두어 번 와봤던 게 다였던지라, 깨끗한 계곡물을 보자 우예린은 탄성을 뱉었다.

“와아…….”

“근처에 다른 계곡이 있기는 한데 거긴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좀 좁긴 하지만 여기가 더 깨끗하고 좋아.”

“어디 말하는지 알 것 같아요. 거기는 나 어릴 때도 사람이 많았어요.”

우예린은 옛 기억을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지로 적절한 계곡은 몇 없어서 꽤 알려진 그곳은 여름이면 사람으로 미어터졌다.

같은 학교 친구는 물론이고 이웃사촌에 동네 친구까지 만난 적 있던 우예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갔던 계곡보다는 좁지만 이곳도 두 사람이 놀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수박 먹어.”

도준희는 트렁크에서 돗자리를 꺼내 와 평평한 바닥에 깔고 먹을거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우예린은 수박 외에도 다양하게 준비된 과일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먹기 좋게 잘라놓은 게 먹음직스러웠다.

“……직접 준비했어요?”

그 말에 도준희가 우예린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샀지.”

“……아, 네.”

도준희가 웬만한 건 주먹, 또는 돈으로 해결하자는 주의라는 걸 깜박했다.

우예린은 돗자리에 앉아 계곡에 발목을 넣었다. 계곡물은 맑고 시원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차가운 기운이 올라오는 듯했다. 우예린은 아이처럼 물을 찰박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없어 온통 나무고 풀이다. 적막한 산에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마우스 클릭질에 절여진 귀를 깨끗이 씻어내는 것 같았다.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진 우예린이 그리움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릴 때 부모님과 계곡에 놀러 갔을 때가 생각나요. 그때는 사람이 많아서 물놀이라고는 거의 잠수밖에 못 하는 바람에 아쉬웠지만, 그래도 재밌었어요.”

“…….”

“지금이 낫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

살짝 소리 내어 웃은 우예린이 손으로 물을 휘저었다. 몇 마리의 송사리가 물속을 유유히 유영하는 게 보였다. 반짝이는 계곡물에 눈이 부셨다. 지상 낙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차피 수영도 못해서 이런 식으로 발을 담그는 것밖에 못 하지만…….”

무심코 도준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우예린은 튜브에 바람을 넣고 있는 도준희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게 뭐예요?”

펌프질을 하던 도준희가 튜브를 눈짓했다.

“튜브.”

보면 모르냐는 뉘앙스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왜 그게 여기서 튀어나오냐는 뜻인데.

“언제 챙긴 거예요?”

“전날에 샀어.”

도준희가 우예린에게 바람 넣은 튜브를 건넸다. 우예린은 바람이 많이 들어가 빵빵해진 튜브를 품에 안고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걸 나한테 왜 줘?’

그런 의미로 도준희를 쳐다보자 도준희가 턱을 까딱였다.

“자, 이제 들어가.”

“예?”

“수영하고 싶댔잖아.”

“아니, 내가 언제…….”

부정하려던 우예린은 언젠가 도준희와 티브이에서 휴가철 관련 뉴스를 보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수영장에 가서 수영하고 싶다고 했던가?

‘별다른 고민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 수영장?”

고개를 갸웃하자 도준희가 해사하게 웃었다.

“수영장은 사내새끼들 많아서 안 돼. 물도 더러우니 여기서 놀아.”

“옷 입고 어떻게 물에 들어가요? 수영복도 없…….”

도준희가 가방에서 수영복을 쑥 꺼냈다.

“……어요.”

우예린은 황당해졌다.

“그건 또 어디서 났어요?”

“샀다니까.”

“사이즈는…….”

“안 맞을 것 같아?”

도준희가 눈으로 우예린을 훑어보며 말했다. 비웃음이 어린 눈을 보자 우예린은 할 말이 없어졌다. 도준희가 그녀의 체형이나 옷 사이즈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 많다.”

도준희가 슬슬 지루한지 눈썹을 꿈틀했다. 수영복은 이미 우예린에게 건네진 뒤였다.

우예린은 결국 수영복을 입었다. 뭐 이렇게까지 하냐고, 수영은 수영장에서 하고 싶었다고 중얼거리던 우예린이었지만 막상 수영복을 입고 시원한 계곡물에 들어가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옛날 생각나네.”

첨벙거리는 우예린의 위로 튜브가 날아왔다. 튜브의 구멍 사이에 쏙 들어간 우예린이 눈을 깜박였다. 귀신같은 도준희의 솜씨였다.

계곡 물살은 적당히 느린 편이었다. 시원한 물이 물고기가 움직이듯 다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 안에서는 에어컨 때문에 덥지 않았지만 날씨 자체는 햇빛 쨍쨍하고 더워서 몸이 지치는 감이 있었는데, 더운 느낌이 한 번에 가시는 듯하다.

“재밌지?”

돗자리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턱을 괸 도준희가 피식 웃었다. 계곡 안에서 슬금슬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던 우예린은 싫은 티를 냈던 만큼 조금 멋쩍었지만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잠깐.”

도준희가 일어나서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더 깊이 들어가려던 참이었던 우예린은 튜브가 잡혀 끌어당겨지자 “어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우예린은 튜브를 잡고 물 위에 둥둥 뜬 채로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도준희가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우예린의 다리를 수면 밖으로 꺼내었다.

“아, 깜짝이야!”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맨발에 어디서 준비했는지 물놀이용 샌들을 신겨주었다.

“맨발로 이런 데 다니면 발에 상처 나.”

세심하게 발에 샌들을 신겨준 도준희가 우예린의 튜브를 계곡 안으로 밀어주었다. 우예린은 도준희를 곁눈질하며 계곡 안쪽으로 들어갔다. 물은 생각보다 깊었지만 튜브가 있어 불안하지는 않았다.

‘옛날엔 튜브 같은 거 없어서 얕은 데서만 놀았는데.’

고향에 와서 그런가. 자꾸만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사람이 많은데도 마냥 즐거워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그렇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도 좋았다.

‘……오히려 지금이 더 좋은 것도 같고.’

우예린은 다리를 첨벙거리며 도준희가 있는 쪽을 흘끗했다. 도준희는 턱을 괸 채 우예린을 보고 있었다. 우예린이 자꾸만 힐끗거리자 도준희가 눈썹을 휘었다.

“왜?”

“도준희는 안 들어와요?”

“…….”

“시원한데.”

혼자 노는 것이 약간 민망하기도 해서, 우예린은 하릴없이 손으로 물을 휘저었다. 뒤를 안 보고 움직이다가 이끼가 끼어 매끄러운 돌을 밟자 쑥 미끄러졌다.

“앗!”

휘청인 우예린은 튜브를 붙잡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눈이 동그랗게 돼서 반사적으로 도준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혼자 잘 노네.”

얼굴이 붉어진 우예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준희도 들어오라니까요.”

“내가 애냐.”

우예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도 애 아닌데요.”

“놀아달라는 거지?”

자신에게는 튜브도 주고 샌들도 신겨주며 계곡으로 밀어 넣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애 타령인가 하는 생각에 투덜거렸던 우예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건 아니에요.”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은 우예린이 재빨리 말했지만 도준희는 또 그녀의 말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 듯했다.

“너무 빼지 마. 난 솔직한 여자가 더 좋거든?”

“…….”

“그냥 솔직하게 놀아달라고 해.”

도준희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자, 우예린은 기가 막혔다.

‘솔직한 여자가 예쁘기는 뭐가?’

우예린은 자신이 솔직하게 말했을 때 도준희가 얼마나 귀를 기울여 주었나를 떠올려보았다. 귓등으로 들은 경우가 대부분인 듯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들었지.’

황당해진 우예린이 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무렵, 도준희는 정말 ‘놀아주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옷을 벗고 있었다. 뒤늦게 그 모습을 확인한 우에린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놀아달라는 거 아니라니까요.”

도준희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옷을 벗었다. 양복 셔츠를 훌러덩 벗고 뒤로 던졌다. 햇빛 아래 하얀 피부가 훤하게 드러났다. 가슴에서부터 시작해서 배꼽 아래까지 근육이 선명하게 짜인 몸이었다. 군데군데 옅은 흉터가 있었지만 흉하기보다는 위협적으로 보였다.

단단하고 큰 가슴이 눈에 들어오자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도준희의 비웃음을 듣고 한쪽 눈을 살그머니 떴다.

도준희는 바지까지 벗은 상태였다. 검은색 드로어즈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더니 그것까지 쑥 내렸다.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감은 눈 위에 손도 올렸다.

“뭐 하냐?”

잠시 후, 도준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눈을 떴다. 흉악한 것이 덜렁거리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준희는 남색의 수영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멍한 얼굴의 우예린을 보고 도준희의 입술이 비뚤게 올라갔다.

“반응 봐라. 누가 보면 처녀인 줄 알겠어?”

“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시원한 계곡이 무색하게 우예린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준희가 계곡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왔다. 우예린이 살금살금 들어갔던 것과 달리 도준희는 성큼성큼 걸었다. 마치 물속이 아니라 평지를 걷는 것처럼 속도가 꽤 빨랐다.

우예린은 금세 다가와 튜브를 잡는 그를 멀뚱하게 올려다보았다.

“뭐, 뭐 하려고요?”

“뭐 하긴. 놀아주려고 하지.”

“그럴 필요 없……, 꺄악!”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는 튜브로 인해 우예린이 비명을 질렀다. 튜브를 더 꽉 잡을 새도 없었다. 손이 튜브에서 미끄러지자 우예린은 튜브의 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물속에 빠진 우예린이 허우적대려는 찰나 홱, 수면 밖으로 끌어 올려졌다. 눈을 뜨자 도준희의 가슴이 바로 보였다. 저도 모르게 꽉 붙잡은 도준희의 어깨가 무척이나 단단했다. 놀란 우예린이 도준희를 끌어안은 채 눈을 깜박였다.

“튜브.”

“…….”

“꽉 붙잡아야지.”

도준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예린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준희의 턱에 맺힌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예린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물에 젖은 피부끼리 맞닿으니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젖은 피부끼리 닿아 찰박거리는 소리도 귀를 자극했다. 도준희가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예?”

우예린은 서둘러 도준희에게서 떨어졌다가 다시 물에 빠질 뻔했다.

“바보냐?”

도준희가 혀를 차며 튜브를 우예린의 위로 끌어왔다.

“꽉 잡아.”

다시 튜브의 구멍 안에 자리를 잡은 우예린이 엉겁결에 튜브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튜브를 잡은 채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물이 도준희의 목까지 올 정도로 깊은 곳에 닿자 도준희도 걷는 대신 수영을 시작했다.

우예린은 이미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튜브를 구명줄 잡듯 꼭 붙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그렇게 쩔쩔매냐. 제대로 놀아봐. 이러니까 더 재밌지?”

도준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우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보니 자신이 참방거리는 건 도준희에게 노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니요, 무서운데요!”

“재미없어?”

공포에 질렸던 우예린은 튜브를 붙잡은 채 눈을 끔벅였다. 다리를 허우적대지 않아도 튜브가 있으니 빠지지 않았고, 도준희가 능숙하게 튜브를 끌어주어 정신을 차려보니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우예린이 말이 없자 도준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바보야,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이상하게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분명 도준희는 공포의 대명사였는데. 언제부턴가 도준희가 있으면 무섭다기보다는 마음이 놓였다. 언제부터였더라.

‘아팠던 날부터……?’

귓가에 흘러드는 낮은 웃음소리에 우예린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힐끗, 도준희를 돌아보았다. 도준희의 까만 눈과 눈이 마주쳤다.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매끄러웠다.

“왜?”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우예린은 대답 없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다음부터 우예린은 도준희가 끌어주는 대로 물 위에 둥둥 떠다니기만 했다. 깊은 곳도 익숙해지자 무섭지 않고 재밌어졌다.

두 사람은 한참을 계곡에서 참방거리다가 배가 고플 즈음 물에서 빠져나왔다. 먼저 물 밖으로 나온 도준희가 우예린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미리 꺼내놓은 수건을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우예린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도준희를 응시했다. 도준희는 수건을 목에 걸친 뒤 돗자리에 앉아 옆자리를 탁탁 쳤다.

“여기 앉아.”

몸의 물기를 대강 닦은 우예린은 머리의 물기를 짜내며 도준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참 물놀이를 했더니 힘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입에 수박을 넣어주었다. 우예린은 달콤한 과육을 오물거렸다. 먼저 입으로 들어온 걸 다 먹으면 도준희가 새로운 과일을 입 안으로 옮겨주었다.

우예린은 아기처럼 과일을 받아먹다가 적당히 배가 찼을 때 말했다.

“이제 배불러요.”

“얼마 못 먹네. 샌드위치도 있으니까 말해.”

우예린은 눈을 끔벅였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여행인 줄 알았는데 도준희가 어지간한 건 다 준비해 놓은 모양이라 놀라웠다.

도준희는 돌돌 뭉쳐놓은 수건을 베개 삼아 돗자리에 누웠다. 우예린은 편한 자세로 앉은 채 계곡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계곡에서 참방거리며 노는 것도 재밌었지만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았다.

“계곡에 온 건 엄청 오랜만이에요.”

“…….”

“이번 휴가는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즐거워요.”

“…….”

우예린은 부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만약 도준희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휴가 때 이지나와 만나거나 이지나가 애인이 있는 경우에는 평소 하고 싶었던 소일거리를 하며 지냈을 것이다.

꽃을 키운다든가, 혼자 노래방을 간다든가. 아니면 학창 시절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든가.

‘이번에는 그냥 집에만 있을 줄 알았어.’

도준희가 회사 가는 것도 싫어했기에 당연히 집안에 박혀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계곡의 물비린내를 맡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도준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다니.’

도준희가 부드러워진 걸까, 아니면 드디어 자신도 이상해진 걸까?

“회사 관두면 매일 휴가일 수 있는데.”

감상에 빠졌던 우예린은 흠칫하고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는 채였다. 우예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는데, 갑자기 도준희가 눈을 번쩍 떴다. 헉, 숨을 들이마신 우예린이 반사적으로 얼굴을 활짝 폈다. 도준희가 크게 뜬 눈으로 우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또 시작인가.’

바짝 긴장한 우예린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휴가는 가끔 가야 휴가인 거죠.”

우예린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말도 맞긴 하네.”

중얼거린 도준희가 다시 눈을 감았다. 도준희가 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이밀까 봐 긴장했던 우예린은 뜻밖의 온건한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귀로 작은 목소리가 꽂혔다.

“쳇.”

우예린이 조심스럽게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쳇?’

우예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도준희의 입꼬리가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우예린은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눈을 반쯤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새소리가 아름답고, 물소리가 시원하며, 풀냄새는 향긋하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가끔 도준희에게 대들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던 우예린은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우예린이 고개를 돌렸다. 도준희가 옆으로 누워 관자놀이를 괸 채 우예린을 보고 있었다.

“그냥…….”

지금이 좋다고 대꾸하려던 우예린은 평화로운 지금, 자유를 부탁하기 딱 좋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많이도 안 바란다. 통금만 없애줘도 감사하다. 어차피 요즘은 예전처럼 도준희가 무섭지 않은 데다가 생각해 보면 아주 당연한 요구가 아닌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내 발로 가지 못하는 곳이 군사 기밀 지역 같은 특수 지역을 제외하고 어디 있다고!

도준희의 기분을 살피며 우예린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지금이 너무 좋아서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 도준희.”

말해보라는 듯 도준희가 턱을 까딱였다.

“나 이제 좀 자유롭게 다녀도 돼요?”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우예린은 순간 도준희를 설득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울컥했다.

“그러고 있긴요! 회사 끝나면 바로 와야 하지, 어디 가려면 허락받아야 하지, 이게 무슨 자유예요!”

버럭 내질렀다가 도준희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었다. 어깨와 목이 하나가 된 듯한 우예린의 자세를 기이하게 바라보던 도준희가 말했다.

“그건 네가 다른 얼굴 반반한 놈한테…….”

“그럴 일 없다니까요.”

우예린은 도준희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즉답했다.

“도준희가 우리나라 아니, 이 세상에서 제일 반반한데 다른 사람에게 눈이 돌아갈 이유가 어디 있어요?”

답답한 듯이 말하자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그래?”

은근한 말투에 우예린이 움찔했다.

도준희는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느릿하게 혀를 굴렸다.

“하지만 사람이 취향이란 게 있잖아. 네가 갑자기 취향에 맞는 놈을 만났다고 날 버릴 수도 있는 일이고.”

우예린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또 시작이네.’

저 얼굴로 ‘버린다’고 표현하는 것도 기가 막힌데 설사 그런 상황이 와도 아무렇지 않게 정조대를 들고 쫓아올 도준희라 그런지 헛웃음만 나왔다.

‘원하는 게 있는 눈치인데.’

이런 식으로 몇 번 당한 적이 있었던 우예린은 경계하는 눈으로 이 상황에서 할 만한 가장 적절한 말을 떠올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도준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참을성도 더럽게 없다. 우예린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럴 일이 없어요.”

“…….”

“도준희가 더…… 잘생겼으니까요.”

과연 정답이었을까. 우예린은 무표정한 도준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처럼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는 웃음도 없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

“취향에 맞는 놈이 한 트럭 와도 나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지?”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

도준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날 좋아한다는 거잖아.”

“…….”

“넌 성격처럼 고백도 우유부단하게 하네.”

‘고백은 아닌데.’

게다가 우유부단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안 그래도 그 점이 은근히 콤플렉스였던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도준희와 눈이 마주치고 합, 다물었다.

웃고 있는 도준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전처럼 반질거리는 게 아니라, 반짝거린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별 같네요, 눈이.”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굳어진 공기처럼 딱딱해진 우예린은 할 수만 있다면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별 같다니. 바보같이 무슨 소리야?’

미친놈인 도준희와 밤하늘의 예쁜 별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계, 계곡 좀 다시 다녀올게요.”

아무래도 더워서 정신이 가출했나 보다. 우예린이 빨개진 얼굴을 돌리려는 순간, 확 손목이 잡혀 몸이 돌려졌다. 우예린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도준희가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얇고 집요한 입술이 우예린의 입술을 잡아먹었다. 우예린은 입술에 닿는 뜨거운 온기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도준희가 바싹 따라붙어 소용이 없었다.

뜨거운 혀가 우예린의 안으로 진입했다. 혀가 거세게 빨리자 우예린의 치켜 올라간 턱이 바르르 떨렸다. 어느새 그녀는 돗자리 위에 등을 대고 누운 채였다. 도준희가 잠깐 입술을 뗐다.

“학!”

부족했던 숨을 몰아쉰 우예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준희는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우예린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우예린은 뒤늦게 제 손이 도준희의 벗은 가슴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을 그러모으자 탄탄하고 매끄러운 피부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후다닥, 손을 떼자 도준희가 그 손을 다시 제 가슴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야릇한 미소를 띠었다.

“왜, 더 만져.”

“괘, 괜찮아요.”

우예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숨길 수 없이 쿵쾅대고 있었다.

“해도 돼?”

“안 되는데요.”

즉답에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가릴 곳은 가려야 한다는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우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뭘 말하는 줄 알고?”

“야한 짓이요.”

“……흠.”

틀리지 않았나 보다! 이걸 어떻게 설득하지, 하는 눈치라 우예린은 눈에 힘을 빡 주었다.

“여기서 말고 집에서 실컷 해요.”

“실컷?”

도준희가 혹하는 표정을 짓자 우예린이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도준희는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실컷?”

“…….”

“기절하는 건 무효인데.”

“기절할 때까지 하는 건 이상한 거예요. 그건 건강에도 나쁘다고요.”

“운동은 건강에 좋아.”

“…….”

“기절하는 건 무효다?”

우예린은 울상을 지었지만 현재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희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럼 키스만 해야겠네.”

키스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투였다. 뭔가 또 도준희에게 당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도준희가 자연스럽게 키스를 해와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키스가 깊어졌다. 도준희가 길고 뜨거운 혀로 우예린의 혀를 야릇하게 쓸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양어깨를 잡고 몸을 떨었다.

느낌을 참느라 몸에 힘을 꽉 주면 도준희가 웃음을 흘렸다. 우예린은 그의 웃음까지 모조리 먹어치웠고, 정신은 온전히 도준희와의 키스에 집중되었다.

혼몽한 상태가 된 그녀의 귀로 이질적인 소리가 흘러들었다.

“여기가 맞아?”

“맞다니까. 물소리 들리잖아. 내가 저번에 길 잃어서 우연히 발견한 곳이야. 좀 깊숙한 곳에 있지만 여기도 계곡이 있……!”

우예린은 눈을 번쩍 떴다. 수풀을 해치고 모습을 드러낸 다섯 명의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준희! 비켜요, 비켜.”

도준희의 아래에 깔려있던 우예린이 몸을 파닥거렸다. 도준희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씨발.”

30분 후. 우예린은 수박을 하나 집어먹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자 상대도 어색하게 웃는다.

‘내 눈에만 어색하게 보이는 걸지도 몰라.’

고개를 돌린 우예린은 우울한 얼굴로 수박을 씹었다. 휴가지에서 스킨십을 하다가 사람을 만날 경우는 몇 퍼센트나 될까? 그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일 경우는 또 몇 퍼센트고?

다섯 명의 청년들은 비딱한 표정의 도준희에게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찾아왔다고 설명했다가, 우리가 왜 이런 걸 설명해야 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예린은 그중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어, 혹시 우예린?” 하는 순간 우예린도 기억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아냈다.

“아는 사람이야?”

도준희가 묻자 우예린이 대답하기에 앞서 우예린을 알아봤던 여자가 먼저 대꾸했다.

“고등학교 친구였어요.”

알고 보니까 다섯 명은 우예린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그중 세 명이 우예린과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다. 우예린은 그들을 떠올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다섯 명은 공부와는 크게 인연이 없지만 사람을 잘 사귀고 각자만의 특기가 있어 학교에서 주목받았던 이들이었다. 성실하게 공부를 파던 우예린과는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던 점을 제외하고는 접점이 없었다.

“이런 데서 친구를 만날 줄은 몰랐네.”

우예린은 별일이라는 표정의 도준희를 힐끗했다.

“친구…….”

우예린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냥 모르는 사람이든, 조금 아는 사람이든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우예린은 도준희를 흘끗했다.

“왜?”

시선을 눈치챈 도준희가 물었다. 현재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키스하는 걸 들켰는데도 멀쩡하다.

‘와, 얼굴 가죽이 사람 피부가 아니라 철판으로 되어 있나 봐.’

우예린이 감탄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짐승 같은 감각으로 썩 좋은 의미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듯 도준희의 눈썹이 비뚜름해졌다.

그는 키스를 방해받은 이후부터 계속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만약 무리 중 하나가 우예린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면 쫓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준희라면 그럴 수 있지.’

이제는 그가 뭔 짓을 해도 안 놀랄 수 있을 것 같다.

바스락.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든 우예린은 천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이상하게 시선이 맞부딪쳤던 여자였다.

“저기, 예린아. 이것 좀 먹어볼래?”

‘천지혜.’

우예린은 동창이었던 그녀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린 후 그녀가 내미는 도시락 통을 바라보았다. 샌드위치가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다.

“어어, 고마워. 과일 좀 챙겨줄까?”

먼저 그녀가 다가올 줄 몰랐던 우예린이 허둥지둥하자 천지혜가 살짝 웃었다.

“천천히 해.”

천지혜는 고등학교 때 미녀 삼총사 중 하나로 유명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보다 성숙한 미인이 된 듯했다.

우예린은 고등학생 시절이 새록새록 기억나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우예린이 일회용 용기에 각종 과일 등을 담는 사이 도준희를 관심 있게 살펴보던 천지혜가 물었다.

“아까부터 눈에 익은데, 혹시…… 청풍고등학교 나오지 않으셨어요?”

‘청풍고?’

“맞아……요.”

도준희는 우예린을 힐끗하더니 존댓말을 붙였다.

“아, 혹시나 했는데 맞았네요!”

천지혜가 도시락 통을 내려놓고는 손뼉을 짝 쳤다. 반가워하는 기색이다. 도준희가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자 조금 민망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아는 척을 했네요. 실은 저희 오빠도 청풍고 출신이라서요.”

그 말을 들으니 우예린도 생각나는 게 있었다. 천지혜의 오빠가 알아주는 양아치였다고 했나? 지금은 어디 조직에 들어가 건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지나가 말했던 게 기억난다.

“오빠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오빠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우예린은 손가락으로 귀를 긁적였다.

‘존경? 경계가 아니고?’

이 세상에 도준희를 무려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니. 도준희는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 힐끗 보자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즐거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얼핏 천지혜의 말에 반응을 하는 것 같지만…….

저 처진 눈꼬리.

‘귀찮아하고 있네.’

우예린으로서는 아는 얘기도 아니라 딱히 할 말도 없어 수박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듣던 대로 엄청 미남이세요. 첫눈에 알아봤는데 역시 맞다니까 신기해요.”

천지혜의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멀리 퍼지자 이쪽을 흘끔거리던 천지혜의 일행도 슬그머니 우예린과 도준희 쪽으로 다가왔다.

“지혜야, 아는 분이셔?”

천지혜가 즐거운 얼굴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는 분은 아닌데 멀리서 몇 번 본 적은 있는 분이야. 우리 오빠랑 같은 고등학교 다녔거든.”

“아, 그래?”

천지혜의 친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도준희를 응시했다. 도준희의 눈썹이 조금씩 비뚜름해졌다.

“누군데?”

“네?”

“네……, 그쪽 오빠.”

도준희의 말투는 반말도 아니고 존대도 아니게 애매했지만 천지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천진철이에요.”

“아.”

도준희가 짧게 뱉은 말에 천지혜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기억나세요?”

“아니.”

당황한 듯 얼굴이 흐려진 천지혜는 쪼그려 앉은 종아리가 아픈지 주먹으로 툭툭 치다가 돗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돗자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자리가 좁아진 느낌에 수박을 집어 먹던 우예린이 눈을 깜박였다.

“우와, 형님도 아시는군요. 거기 고기 맛이 아주 죽여줬는데요. 아직도 거기에 그대로 있어요.”

“그럼 지금은 서울에 사시는 거예요? 저도 대학은 서울로 가고 싶었는데 집에 일할 사람이 필요해서……. 오빠는 맛있는 거 매일매일 먹을 수 있겠어요. 부럽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돗자리 위에는 천지혜의 일행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성인들이 뒹굴어도 넓은 돗자리라 문제는 없었으나, 우예린은 어쩌다가 이 자리가 충남인들의 모임이 되었는지 어리둥절해졌다.

음식 종류도 늘었다. 과일뿐만 아니라 천지혜가 가져온 샌드위치에 김밥에, 단체 피크닉 느낌이 물씬 났다.

“지혜, 네가 평소에 만나 뵙고 싶었던 분이라고?”

여자가 천지혜를 보며 흥미롭게 말했다. 우예린은 중앙에 있는 남자가 천지혜를 흘낏하는 것을 보았다. 여자의 말에 불편한 표정이 된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우리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데 존칭은 무슨…….”

처음에 일행을 이끌고 이곳을 찾아왔던 남자였다. 현재 상황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 있을 게 뭐야.”

꿍얼대는 소리를 들은 우예린이 귀를 쫑긋했다. 남자는 인적 드문 곳에서 자기들끼리 재밌는 시간을 보내려다가, 갑자기 나타난 도준희로 인해 기분이 나쁜 기색이었다.

우예린은 문득 사람들의 관심이 도준희에게 쏠려 있음을 깨달았다. 반면 그들이 그러든 말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도준희를 흘끗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대학교 때도 원래 인기가 많았지.’

남자가 자신과 도준희를 귀찮은 방해꾼 보듯이 하는 것도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인사치레를 하는 줄 알았던 천지혜가 정말로 도준희를 존경하는 듯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끄러운 아이들과 몰려다니는 것에 비하면 말수가 적고 조용한 여자애였다고 기억했는데, 도준희를 향한 천지혜의 눈은 그때가 생각 안 날 만큼 반짝거렸다.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 원래 그녀와 친한 일행들이 느끼는 것은 더할 터였다.

“응, 오빠 때문에 내 이상형이…… 꺄악!”

말을 하다 말고 천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우예린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다가왔는지 몸통이 손목만 한 뱀이 천지혜에게 바싹 다가와 있었다.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굳어버린 천지혜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지혜야, 가만있어! 내가 떼어줄게.”

아까부터 불평을 늘어놓던 남자가 이때다, 하는 얼굴로 바닥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예린은 따분한 눈을 하고 있는 도준희를 흘끗했다. 뱀이 나타나든 뭘 하든 관심이 없는 얼굴이다.

돌연 도준희가 고개를 돌려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다들 뱀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고개를 숙여 우예린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야, 우예린. 너 얘네랑 친하냐?”

“…….”

“언제 가냐, 이것들?”

우예린은 눈을 끔벅거렸다. 도준희가 귀찮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친구라니까 쫓아버리지도 못하겠잖아.”

시종 시큰둥했던 도준희가 용케 거친 말은 하지 않는다 했더니, 그래서였나. 우예린이 웃음을 참자 도준희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편 뱀 때문에 사람들의 긴장은 고조되어 있었다. 남자가 긴장한 기색으로 나뭇가지를 뱀에게 가져다 대고 휘둘렀다. 뱀을 나뭇가지에 걸쳐서 떨쳐내려는 의도인 듯했지만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비해 뱀의 몸통이 너무 두꺼웠다.

나뭇가지를 타고 오른 뱀의 대가리가 순식간에 남자의 손과 가까워졌다.

“으, 으아아악!”

깜짝 놀란 남자가 나뭇가지를 던졌다.

툭.

나뭇가지와 뱀이 돗자리 위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우예린의 앞이었다.

“꺄아악!”

꼬리가 무릎에 닿자 천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이미 뱀과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우예린의 귀로 천지혜의 째질 듯한 비명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파충류의 반질거리는 눈과 마주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움직이면 그대로 물릴 것 같아 몸이 꼿꼿하게 굳어졌다.

뱀이 우예린을 향해 스륵, 다가왔다. 우예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뱀이 한층 가까워지자 눈앞이 까맣게 변한 우예린이 그대로 졸도하려는 순간이었다.

확!

길고 하얀 손이 우예린 앞으로 튀어나와 입을 쩌억 벌린 뱀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손가락이 뱀의 주둥이를 가볍게 눌렀다.

“허, 허억!”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던 우예린은 눈도 깜박하지 못했다.

뱀 대가리를 틀어쥔 사람은 도준희였다. 성이 난 뱀이 도준희의 손목과 팔목을 칭칭 감았다. “꺄악.” 천지혜의 입에서 약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다른 사람의 경악에 비해 도준희의 얼굴은 태연자약했다. 그가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다.

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도준희의 팔뚝에 힘줄이 솟았다. 상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탓에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상하게 야릇한 광경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팔뚝에 쏠렸다.

도준희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도준희의 팔을 잘라버릴 듯 힘을 주던 뱀이 기절한 듯 추욱 늘어졌다.

“주, 죽었어요?”

“아니, 기절했어.”

무심하게 대꾸한 도준희가 벌떡 일어나더니 수풀에 뱀을 던졌다. 우예린은 긴장한 채 수풀 사이에 떨어진 뱀 꼬리를 응시했다. 곧이어 뱀 꼬리가 꾸물꾸물 움직이며 수풀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도준희가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얼빠진 시선이 그를 쫓았다.

“대, 대범하시네요.”

제일 먼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던 천지혜의 친구가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모르게 뱀에게서 몸을 물렸던 남자들은 상황이 정리되자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나뭇가지를 들고 설쳤던 남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형님, 아니었으면 지혜가 큰일 날 뻔했네요.”

개중 점잖은 인상의 남자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도준희의 호칭도 어느새 형님이 되어있었다.

‘근데 날 왜 저렇게 보지?’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영문을 모르는 우예린은 눈을 깜박이다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도준희가 어느새 우예린의 손을 가지고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도준희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많이 놀랐냐? 손이 차가워.”

“괘, 괜찮아요.”

사람들 앞에서 손을 만져지는 게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고 손을 빼내었지만 도준희가 다시 가져가서 손을 주물렀다. 차갑게 질렸던 손가락에 온기가 돌았다. 뱀 때문에 놀라서인지 도준희가 손을 놓지 않아서인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되게 다정하시다.”

여자가 천지혜를 향해 소곤거렸다. 딴에는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가까운 거리인지라 뭐라고 하는지 어렴풋이 들렸다. 다들 감탄하는 눈으로 도준희를 보자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게.”

천지혜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오빠한테 들을 때는 터프한 줄만 알았는데 이런 모습도 있는 줄 몰랐어요.”

우예린은 천지혜가 오빠에게 들은 도준희의 모습이 단순히 ‘터프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새삼스러운 의문에 빠졌다. 터프하다는 건 도준희를 표현하기에 2% 부족하다.

‘미친놈 같다고 하면 백 프로 완벽할 것 같은데.’

우예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천지혜는 공포에서 벗어났는지 잔잔한 미소를 띠고 도준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고 다들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천지혜의 초롱초롱한 시선은 도준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빠는 보면 볼수록 참, 멋지네요. 오빠 같은 사람을 소개받고 싶은데…… 쉽지 않겠죠?”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오빠 같은 사람은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요?”

천지혜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천지혜는 우예린이 있는데도 도준희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런 모습이 의외인지 그녀의 일행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넌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

도준희는 이제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런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을 천지혜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궁금해서요. 말씀해 주시면 좋겠는데.”

우예린이 듣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은 제안이었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손을 조몰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정한 사람.”

“네?”

“다정한 사람이 좋아. 겁이 많아도 좋고, 마음이 약해도 좋고, 우유부단해도 좋고.”

저도 모르게 도준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던 우예린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도준희의 말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도준희가 열거한 특징이 딱히 장점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특이하네요. 그런 여자가 좋다고요?”

“그냥 생각난 대로 얘기한 거야. 그 모든 게 아주 깜찍할 정도로 귀엽거든.”

도준희가 살짝 웃었다. 비웃는 기색 없이,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간 미소는 가슴이 떨릴 만큼 근사해서 도준희를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넋을 잃었다.

도준희의 말이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던 우예린은 갑자기 도준희가 손에 힘을 주자 흠칫했다. 도준희가 우예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이해 안 갈 만큼 좋던데.”

“…….”

도준희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울렸다. 잠시의 정적 후 천지혜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의 특징인 것 같은데요?”

“…….”

“이미 좋아하니까 단점까지 다 좋아 보이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가? 글쎄, 모르겠군.”

도준희가 느릿하게 대꾸하며 우예린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내 스타일이라 부를 만한 여자가 얘밖에 없어서.”

“…….”

“얘 특징을 말하는 수밖에 없잖아.”

도준희의 덤덤한 말투에 좌중이 일순간 침묵에 잠겼다.

“어머.”

여자가 눈을 빛내며 도준희와 우예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빨개진 우예린은 어버버버,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천지혜는 묘하게 어두워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었다.

“슬슬 일어날까? 이제 본격적으로 수영해 봐야지.”

수다는 충분히 떨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 둘이 몸을 일으켰다.

“아, 수영복 깜박 잊고 안 갖고 왔다.”

“차에 있으니까 가져올게.”

슬리퍼를 신은 채 갈려던 남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예린아, 너도 갈래?”

‘갑자기 나?’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뜬금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남자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안 그래도 너 서울에 좋은 직장 취직했다는 소리 듣고 궁금했는데. 그 얘기 좀 해주라.”

우예린이 기억하기로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동창이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고3이 되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학생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했다.

남자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실은 나도 공부 다시 해보려고 하거든.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 막막하네. 너 공부 잘했잖아. 혹시 괜찮으면 좀 알려줄 수 있을까 하고.”

“아아, 그런 거면…….”

도준희가 따라가기 위해 일어나던 우예린의 손목을 탁, 잡았다.

“어딜 가?”

도준희를 돌아본 우예린은 그의 눈빛을 보고 흠칫했다. 아까 별처럼 반짝이던 눈은 어디로 가고 뱀의 눈알처럼 반질거리는 눈이었다. 우예린은 뱀을 발견한 개구리처럼 굳어졌다. 고질적인 의심병이 또 도졌는가!

“잠깐 얘기 좀 하려고요.”

긴장했지만 도준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부드럽게 얘기했다. 도준희의 눈이 의심스럽게 가늘어졌다. 그가 우예린 뒤로 엉거주춤 서있는 남자들을 훑어보았다. 둘 중 더 잘생긴, 우예린과 동창인 남자를 좀 더 오래 바라보았다. 미심쩍었던 눈빛이 이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럴 만한 상판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지만 단번에 의미를 깨달은 우예린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우예린이 잘생긴 남자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고 ‘오해’하는 도준희다.

“그런 거 아니에요.”

“설마 너 또 새로운 남자를 봐서 흔들…….”

도준희가 어떤 폭탄 발언을 할지 모르기에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도준희의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을 흘끔거리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예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될까?”

“어, 어. 그래.”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했던 동창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만 우리 자리로 가봐야겠다.”

천지혜 일행은 못마땅한 기색을 풀풀 풍기는 도준희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그들의 돗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우예린은 속으로 땀을 흘렸다. 당장 도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이 나가긴 했지만.

‘도준희의 입, 입을 막다니.’

도준희가 성질을 부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했다. 흘끗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도준희는 성질을 부리지 않고 얌전했다.

도준희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뗀 우예린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도준희가 혀로 입술을 핥더니 얼굴을 구겼다.

“짜.”

우예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그러니까 왜 이상한 얘기를 하려고 해요?”

“무슨 이상한 얘기? 사실이잖아. 네가 얼굴 좀 반반한 놈만 보면…….”

“아아, 여기 과일 좀 먹어요!”

식겁한 우예린이 도준희의 입에 과일을 집어넣었다. 잘생긴 얼굴에 약한 건 맞지만 흔들렸던 건 도준희밖에 없다. 도준희의 의심병이 억울했지만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예린은 저쪽에서 흘끗대는 천지혜 일행의 시선을 의식하며 빠른 손놀림으로 도준희의 입에 과일을 날랐다. 순식간에 과일로 입이 꽉 찬 도준희가 우예린을 노려보았다.

“마, 맛있죠?”

우예린은 모른 척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을 가늘게 뜬 도준희가 천천히 입 안의 과일을 씹었다. 조마조마하게 도준희를 바라보았던 우예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지혜 일행을 두고 먼저 산을 내려온 우예린은 부침개 전문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야 마음을 온전히 놓았다.

“부침개가 뭐냐, 부침개가. 몸을 움직였으니 고기를 먹어야지.”

도준희가 투덜거렸다. 이 시간에 운영하는 식당이 여기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왔지만 꽤 인기가 있는 식당인지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우예린은 아쉬운 대로 고기 부침개를 주문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먹어요. 식당이 열려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잖아요.”

“그냥 먹으라고?”

“그럼 안 먹을 거예요? 샌드위치라도 먹을래요? 안 먹은 거 남아있어요.”

도준희가 무슨 폭탄을 터뜨릴지 몰라 마음을 졸였던 우예린이 눈에 힘을 팍 주자 투덜거리던 도준희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누가 안 먹는대?”

“그럼 먹을 거예요?”

“……먹긴 먹어야지.”

부침개는 빠르게 나왔다. 고기가 아니라며 입맛 까다롭게 굴던 도준희는 부침개를 조각내서 잘도 먹었다.

샌드위치와 과일을 주워 먹었던 우예린은 입맛이 없었지만 도준희가 자기 몫을 먹다 말고 끊임없이 부침개를 나르는 탓에 한 점, 두 점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이것만 먹고 서울 올라가요.”

“시간 남았는데 더 안 놀고?”

“올라가서 쉬고 싶어요.”

서울에 있을 때는 어디든지 나다니고 싶었는데 막상 고향에 내려와서 휴가를 보내니 서둘러 올라가고 싶었다. 우예린이 아련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리자 도준희가 뚱하게 말했다.

“하여간 변덕은…….”

“…….”

우예린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뭐라고?”

“덕분에 재밌게 놀았다고요.”

도준희가 의심스럽게 우예린을 훑어보며 부침개를 먹기 좋게 찢어 앞 접시에 놔주었다. 우예린은 자연스럽게 도준희가 날라준 부침개를 입에 넣어 씹었다. 한참 먹는 데 집중하는 우예린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좀 이른데. 너무 빨리 내려온 거 아니야?”

“배도 고프고, 우리밖에 없으니까 별로 재미없잖아. 그 두 사람 내려갈 때 같이 내려갈 걸 그랬어.”

“그나저나 식당은 여기밖에 없나?”

아무 생각 없이 부침개를 먹던 우예린이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설마 해서 고개를 드는 그녀의 눈에 식당 입구로 들어오는 천지혜 일행이 보였다.

“어, 예린아?”

눈이 마주친 천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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