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9)

08.

“여기서 먹고 있었구나. 하긴 놀다 보니 배가 고프지. 사람 생각 다 똑같네.”

“어어, 일찍 내려왔네. 수영한다고 하지 않았어?”

우예린이 묻자 천지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배고파서 내려왔어. 맛있어 보인다.”

천지혜가 식탁 위 음식을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합석해도 될까?”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도준희가 천지혜가 선 앞자리에 손을 탁 올렸다.

“안 돼.”

“……네?”

“자리 없어. 딴 데 알아봐.”

우예린은 입을 쩍 벌렸다. 계곡에서는 확실히 우예린의 친구라고 예의를 차려준 듯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적나라한 거절에 천지혜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아, 불편하셨어요? 그, 그럼 다른 데 앉아야겠다.”

그러나 하필 남은 자리는 도준희와 우예린 테이블의 근처밖에 없었다. 다른 식당으로 갈 수도 없어서 천지혜 일행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마음을 놓았던 적이 언제였냐는 듯, 우예린은 다시금 자리가 불편해졌다. 부침개를 젓가락으로 찌르며 도준희를 힐끔했다.

“왜 이렇게 깨작대? 팍팍 먹어.”

도준희가 큼지막한 부침개 조각을 우예린의 앞 접시로 옮겨주며 성질을 냈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부침개 한 조각을 서둘러 입에 넣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준희랑 있으면 나만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거 같아요.”

“……왜?”

잠깐 우예린이 한 말을 생각하는 듯했던 도준희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누가 너 눈치 주냐?”

그가 천지혜 일행이 앉은 자리를 곁눈으로 가리켰다.

“쟤들?”

우예린은 엄한 곳에 불똥이 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얘기가 거기로 튀어요?”

“왜긴. 같이 있어봤자 하나도 좋을 거 없어.”

“아깐 얘기도 잘만 하더만.”

“네 친구들인 줄 알고 봐줬던 거지.”

“…….”

“친구도 아니었네.”

“네?”

“네가 뻔히 있는데 나한테 관심 있는 티를 내는 게 정상이냐?”

도준희가 빈정거리자 우예린은 천지혜가 신경 쓰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충격을 받았다가, 툴툴대는 도준희를 보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만 보면 이상하게 눈치가 빠르다니까요.”

“뉘앙스가 영 착하지 않네?”

“칭찬이에요, 칭찬.”

한편 다른 식탁에 자리를 잡은 천지혜 일행은 수다를 나누다가 놀란 얼굴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사람 학주 아냐?”

“학주?”

“나 학교 다닐 때 학주. 소문이 좀 더러웠거든.”

한 단어가 우예린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학주? 학생 주임 선생님?’

자신만큼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였다. 저절로 시선이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거의 다 먹은 부침개와 소주 세 병이 있었다.

불콰하게 취한 듯 얼굴이 빨개진 중년의 남자는 과연 익숙한 얼굴이었다. 주름이 조금 늘고 머리가 하얗게 센 것을 제외하면 기억 속의 그 사람과 똑같다. 우예린의 시간은 순식간에 고등학생 때로 돌아갔다.

“저거, 그 선생 아닌가?”

도준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우예린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진 어깨에 힘을 풀었다.

“미안한데, 남은 것만 먹고 조금 일찍 나갈까요?”

도준희는 우예린이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우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서울로 학교를 간 이유는 개인적으로 서울 생활을 동경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충남을 떠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악몽이었던 학생 주임 선생님은 이 지역 토박이로, 우예린이 학교를 졸업하고 여기서 일한다고 한다면 어떤 경로로든 얼굴을 마주칠 게 뻔했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마음이 불편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속이 메스껍기까지 했다.

학생 주임 선생님은 우예린의 고등학교 시절을 악몽으로 만든 장본인이었으므로 완전히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우예린은 혹여 학생 주임 선생님이 아는 척을 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부침개를 입에 집어넣었다. 이미 입맛은 뚝 떨어진 상태였다.

‘그쪽도 나를 보는 게 싫을 테니 아는 척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알아보는 것조차 싫었다. 눈앞의 부침개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쿠당탕탕!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던 우예린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군가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려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드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멈칫, 굳어졌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었다.

“…….”

살짝 열린 우예린의 입술 사이로 작은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뭐야!”

학생 주임 선생님이 욕설을 지껄이며 몸을 일으키려고 바둥거렸다.

우예린은 상황을 파악하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준희의 다리가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 있었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 도준희의 튀어나온 발에 걸려 넘어진 듯했다.

“이, 이 씨발. 너어, 술 취했으면 조, 조심해야 할 거 아니야!”

“조심?”

도준희가 부침개를 먹다 말고 학생 주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사나운 기세로 반질거렸다.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화를 내려던 학생 주임 선생님이 도준희와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조심은 술 취한 놈이 해야지.”

“아, 아니. 내가 네 다리에…….”

“네 다리?”

“아니, 당신 다리에…….”

“당신 다리? 내가 아저씨 친구야?”

도준희가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한쪽 손을 꽉 쥐자 뼈마디가 접히는 소리가 뚝, 뚝 났다. 다분히 위협적인 소리였다.

“……그쪽이 다리를 그렇게 하니까 내가 걸려 넘어진 것 아니오.”

학생 주임 선생님은 술기운이 조금 날아갔는지 비교적 점잖은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제야 고등학교 선생다운 말투가 되었다.

“내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그래요.”

“혼자 술에 취해 넘어져 놓고서 누구 탓을 하지?”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재밌다는 듯 말했다.

“아니요. 분명 발에 걸려 넘어졌어요. 다들 본 사람이 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학주가 우예린을 보고 멈칫했다.

“너……, 우예린?”

우예린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던 학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너, 너 이 새끼 일행이냐? 이것들이 지금 나한테 일부러!”

“……일부러, 뭐.”

우예린을 볼 때에는 격분해서 벌벌 떨던 학주가 도준희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꼬리 내린 토끼처럼 얌전해졌다. 그러나 우예린이 눈에 들어오자 또 화가 났는지 살쾡이처럼 캉캉거렸다.

“지, 지금 그쪽이 일부러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 아니요?”

“내가 왜 일부러 시비를 걸어?”

도준희가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내, 내가 우예린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학주는 말을 맺지 못했다. 차마 말은 못 하고 씨근덕대던 학주를 빤히 바라보던 도준희가 빙그레 웃었다. 우예린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린 도준희의 눈빛에서 악마를 본 것 같았다.

“아, 알겠군. 왜 갑자기 시비를 거나 했는데.”

어느새 튀어나와 있던 다리는 얌전히 테이블 아래로 들어간 뒤였다.

“합의금을 뜯고 싶은가 보지?”

“무, 무슨 소리요. 내가 왜 합의금 따위를…….”

“추하네.”

더 듣기 싫다는 듯 중얼거린 도준희가 지갑을 꺼내 푸른색 지폐를 학주의 눈앞에 던졌다. 돈을 얼굴에 얻어맞은 학주의 얼굴이 멍해졌다.

몇십 년을 이 지역에서 교사 일을 하며 목에 힘주고 다녔던 그로서 이런 취급은 평생 당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가져가. 귀찮게 하지 말고.”

도준희가 지갑을 다시 닫으며 말했다. 벌레를 쫓아내는 듯한 말투에 멍해졌던 학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게…….”

항의를 하려던 학주는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지역 사람들이 많이 오는 가게라 얼굴이 눈에 익은 사람들도 보였다.

“아이고, 선생님. 이제 그만하고 가. 그러니까 술을 왜 그렇게 많이 자셨어!”

가게 주인까지 튀어나와 학주를 가게 밖으로 내몰았다. 우예린은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학주의 뒷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좀 아쉬운데.”

도준희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중얼거렸다.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투에 우예린의 멍했던 얼굴이 희한하게 변했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럼 뭐, 시비는 괜히 걸었겠어? 내가 건달도 아니고.”

‘그건 동의하지 못하겠는데요.’

떨떠름한 우예린을 보며 도준희가 입꼬리를 올렸다.

“당한 건 갚아줘야지.”

“…….”

“왜? 별로냐?”

말이 없는 우예린을 보며 도준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별론가 보네.”

“…….”

“하여간 답답하게 굴기는.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거든.”

그러면서도 슬쩍, 우예린의 눈치를 보듯 눈을 굴린다. 우예린은 한차례의 소란에 사람들의 시선이 와 닿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몰상식하게 굴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별 트집을 다 잡으며 자신을 괴롭혔던 학주가 허둥지둥 쫓기듯 달아나는 것을 보는 순간 기억 속의 악몽이 모두 풀어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속은 시원했다.

사고를 쳤으니 식당에 오래 있기 힘들었다. 그보다는 소란을 지켜본 사람들이 도준희를 힐끗거리기에, 도준희를 알아보는 사람이 또 나타날까 두려워져 이제 그만 가자고 주장했다.

차에 탄 뒤에도 우예린의 머릿속에 학생 주임 선생님이 아른거렸다. 추했던 뒷모습을 생각하자 힘들었던 학창 시절이 생각나 불쾌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도준희는 선생님들하고 사이가 어땠어요?”

문득 도준희의 학창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도준희는 무심한 표정으로 핸들을 돌렸다.

“선생님? 사이좋았지.”

의외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왜 그렇게 보냐?”

적나라하게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우예린은 도준희가 눈을 가늘게 뜨자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아, 아니요. 선생님이랑 사이좋기 쉽지 않잖아요.”

“그래? 난 선생들이 마음이 넓어서 지내기 괜찮았어.”

“아?”

‘이상한데.’

“물론 처음에는 다들 꼰대처럼 꼬장을 부리긴 했어. 근데 나중에는 잘 대해주던데.”

“어떻게 잘 대해줬는데요?”

“늦어도 별말 안 하고, 담배 피우고 싶을 때는 자기들 흡연실도 비워주고, 잠도 안 깨웠어.”

우예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슨 잘 대해주는 거야.’

도준희의 미친개적인 면모가 일찍부터 드러났던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으면 저렇게 대놓고 피할 리 없으니까.

“학교? 재밌었지. 추억이네.”

흐뭇하게 웃는 도준희를 보자 우예린은 학창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얘기해 보지 않아도, 자신의 학창 시절과 도준희의 학창 시절은 아주 많이 다를 터였다.

그날,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호텔에 하루 묵었다. 다음 날이 되어도 차는 서울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충남 구석으로 들어갔다. 우예린은 놀라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했던 도준희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이제 누굴 만나는 건지 얘기해 줘도 되지 않아요?”

우예린이 궁금한 눈치로 도준희를 곁눈질했다. 짠 음식을 많이 먹어서 갈증이 몰려왔다. 목을 쓰다듬자 도준희가 새로운 이온 음료 캔에 빨대를 꽂아서 건네었다.

“마셔.”

우예린은 자연스럽게 빨대를 물고 음료수를 쭉쭉 빨아올렸다.

“할아버지 보러 가.”

마침내 궁금증이 풀린 우예린은 음료수를 마시다 말고 사레가 들렸다.

콜록콜록!

도준희가 우예린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조심 좀 해라. 괜찮아?”

“아, 안 괜……, 콜록!”

‘병 주고 약 주네.’

간신히 사레를 진정시킨 우예린은 커진 눈으로 도준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왜 갑자기 할아버지를…….”

“오늘내일하는 노인한테 만나는 여자 정도는 보여줘야지.”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 결혼을 앞둔 커플들이 각자의 가족을 뵙는 건 흔한 일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역시 도준희가 그 상대이니만큼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미리 얘기해 주면 좋았잖아요.”

“뭘 그런 걸 미리 얘기해.”

“혹시 원래 만나는 여자는 다 보여드리는 스타일이에요?”

제발 대수롭지 않은 일이길 바라며 질문했다.

“음.”

도준희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말이 없었다.

‘이상한 반응인데.’

우예린은 슬금슬금 불안해졌다. 이윽고 도준희가 대꾸했다.

“모르겠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요?”

“네가 처음이니까.”

“…….”

“네가 처음이야.”

“그러니까, 가족들을 만나는 게 제가 처음이라는 거군요.”

그러니까 더 부담이 된다. 긴장한 우예린의 심장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준희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여자를 만나는 것도 네가 처음. 그러니 할아버지 보여드리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지.”

도준희가 동정임을 알았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머릿속을 탕 치고 지나갔다. 여자를 많이 울리고 다녔을 거라고, 문란한 남자라며 수군거렸던 캠퍼스 내 소문을 떠올린 우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어째 맞는 소문이 하나도 없어.’

돈이 많을 거라는 거. 그거 하나는 맞았다. 우예린은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도준희의 가족과 만나는 자리라니. 저도 모르게 옷차림을 점검하게 되었다. 가족을 만난다고 다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생각하며 부담을 덜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도준희의 가족을 만난다는 거다. 도준희와 비슷할까? 아니면 의외로 완전 딴판일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랑 친해요?”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했으니까.’

지금 만나러 가는 분은 사실상 도준희의 몇 없는 가족일 터였다. 도준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별로.”

“안 친해요?”

“그 양반이 그렇게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라.”

‘동족 혐오?’

진지하게 고민한 우예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지금 만나 뵈러 갈 정도면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요. 도준희 성격상…….”

‘싫은 사람은 얼굴도 안 볼 것 같은데.’

뒷말은 꿀꺽 삼켰다.

“실질적인 내 인생 스승인데 도리는 해야지.”

“스승이요?”

의외의 말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도준희가 무심하게 말했다.

“사람을 효과적으로 패는 방법이나…….”

“…….”

“말 잘 듣게 하는 방법 같은 거.”

“…….”

“영감이 그쪽에 특화된 사람이거든. 살면서 도움되는 기술을 좀 배웠지.”

“…….”

우예린은 자신이 뭘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할아버지에게 뭘 배워? 우예린의 상식상, 보통 사람은 그런 걸 알려주기는커녕 알지도 못한다. 그의 큰아버지가 건달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럼 큰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집안 전체가 건달 집안…….’

거기까지 생각한 우예린은 머리가 띵하게 아파왔다. 뇌에 과부하가 걸린 듯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차는 점점 충남의 도심 지역으로 들어갔다. 방죽사거리를 지나치자 우예린이 낯익은 거리를 눈에 담았다. 근처에 우예린의 부모가 운영하는 교회가 있다. 혹여 부모님 눈에 띌까 봐 슬그머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방죽사거리를 벗어난 차가 곧 외곽 쪽으로 이어진 도로를 타기 시작했다. 도심과 달리 논과 밭이 펼쳐진 시골 풍경이 나타났다.

‘할아버지 집이 이런 구석진 곳에 있는 건가?’

도준희의 재력에 비추어 보아 할아버지 역시 잘살 거라고 추측했던 우예린은 허허벌판인 농촌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에 집이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던 우예린의 눈앞에 커다란 도로 표지판이 나타났다. 우예린은 무심코 눈앞의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충남 교도소]

우예린은 눈을 비볐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충남 교도소]

눈 깜짝할 새, 표지판이 빠르게 뒤로 지나갔다.

“……!”

멍하게 있던 우예린의 눈이 홉떠졌다.

사람을 사귀면서 간혹 그럴 때가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게 확 느껴질 때. 그런 상대와 계속 교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역시 그쯤을 기점으로 정해지기 시작한다. 우예린에겐 지금이 딱 그런 때인 듯했다.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일해요?”

도준희의 차가 향하는 행선지를 봤을 때 우예린이 생각한 것은 고작 그런 것에 불과했다. 직업이 간수인가? 상상력은 거기까지밖에 발휘되지 못했다. 그러나 늘 예상을 뒤엎는 도준희답게 우예린의 예상은 장렬하게 빗나갔다.

수감자와의 관계에 손자라 적는 도준희를 보는 순간부터 우예린은 혼이 반쯤 나가버렸다.

수감된 죄목을 들었을 때는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협박, 폭력, 사기……. 세상에 있는 나쁜 죄란 죄는 모조리 튀어나왔다.

“소싯적엔 부산에서 활동했지. 부하가 저 살자고 찌르지만 않았어도 말년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누명이라면 어떻게든 항소를 하든가 해서…….”

차라리 누명이었으면……. 우예린이 한 줄기 희망을 갖고 말하자 도준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명은 아니지.”

“…….”

“영감도 많이 거칠게 살았으니까.”

도준희는 약간 아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뭐, 돈은 많으니 로펌 하나를 통째로 썼다면 좀 괜찮았을 텐데.”

“그런데요?”

“그때는 경찰이고 검찰이고 할 것 없이 조폭들 잡아들이는 데 혈안이어서 난리가 아니었는데, 그 와중에 할머니가 죽고…….”

우예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어릴 적, 대통령이 범죄 조직을 뿌리 뽑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뉴스 헤드라인을 본 듯도 했다.

“영감이 열이 끝까지 올라서 다 뒤집어엎다가 경찰청장 아구를 털어버리고 나서는 상황이 꽤 힘들어졌지.”

도준희가 혀를 찼다. 우예린은 자신의 뇌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생 오게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 못 했던 교도소를 이렇게 오게 되다니.

처음에는 그런 충격인 줄 알았다. 듣기만 해도 음산하고 스산한 교도소에 왔다는 사실 때문에 얼떨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충격은 가시지 않았고 속상했으며 심지어는 눈앞까지 캄캄해졌다.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도준희.’

묘하게 울적해졌다.

‘나랑은 상관없잖아. 어차피 언젠가는 끝날 관계니까.’

그때가 되면 도준희와도 영영 안녕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왔으니, 이제 와서 도준희의 가족사 때문에 자신이 막막할 이유가 없다.

‘내가 정말 도준희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각이 진 간수복을 입은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는 우예린의 표정이 흐려졌다.

‘괜히 착잡해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억지로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속상하고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접견실 문이 열리기 전, 우예린은 긴장된 심정에 가방을 동아줄인 양 꽉 부여잡았다.

달칵.

문이 열리고 나타난 도준희의 할아버지는 예상한 것과 조금 달랐다. 물론 깊게 생각할 틈이 없기는 했지만 마르고 무서운 분위기의 사람이지 않을까 추측했던 것과 달리, 몸은 후덕했고 입가에도 푸근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누구냐?”

도준희를 만나자마자 그의 조부가 한 첫마디는 그랬다. 조손 관계에서 나눌 법한 흔한 인사 하나 없이 간략하게, 눈은 우예린을 가리키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보자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도준희의 할아버지는 그런 우예린의 반응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킬킬 웃더니 도준희에게 묘하게 눈을 빛냈다.

“네 비서냐?”

도준희는 미간을 좁히고 껄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결혼할 여자.”

다짜고짜 그렇게 얘기할 줄 몰랐던 우예린은 각오를 했음에도 토할 것처럼 놀랐다.

“뭐?”

놀란 건 도준희의 조부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이 몇 배로 커졌다. 우예린은 뜻밖에도 도준희의 할아버지에게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다.

“영감 언제 갈지 모르니까 얼굴이나 보라고 온 거야.”

“……고맙긴 한데 말이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도준희의 조부는 곧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예린을 힐끗했다.

우예린은 딱딱하게 굳어서 눈만 끔벅였다. 툭 밀면 나무토막처럼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모습에 도준희의 조부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협박해서 데려온 건 아니지?”

미심쩍은 질문에 도준희의 목에 불끈, 핏대가 섰다. 기세가 달라진 도준희를 보면서도 도준희의 조부는 끌끌 웃을 뿐이었다.

“잤냐?”

“…….”

우예린은 혈연관계인데도 할아버지가 도준희와 닮은 곳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빠르게 수정했다.

“왜, 너 어릴 때부터 결혼할 여자와만 할 거라고 별 이상한 소리 다 하고 다녔잖아.”

“…….”

“아님 말지 뭘 또 그렇게까지 노려봐. 눈 튀어나오겠다, 자식아.”

도준희의 스산한 표정에 마침내 그의 조부 역시 꼬리를 조금 내렸다. 장난기 가득했던 얼굴이 조금 얌전해지자 도준희가 마뜩잖게 대꾸했다.

“영감, 입조심해.”

“흥, 네 말대로 다 늙었는데 입조심할 게 뭐가 있냐.”

도준희의 조부가 콧방귀를 뀌었다. 조부에게서 온갖 기술을 배웠다고 하더니, 우예린은 눈빛만으로 싸우는 듯한 살벌한 분위기에 오금이 저려왔다.

‘조부 관계……라고?’

누가 보면 평생의 원수를 만났다고 생각할 듯한 분위기다.

“신난 건 알겠는데 적당히 안 하면 국물도 없어.”

“그런 말 하려면 영치금이나 많이 넣어라.”

“더는 돈 필요 없는 양반이 무슨…….”

“돈이 필요 없기는? 저세상에 가서도 필요한 게 돈이야, 자식아. 쯧쯧, 내가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하냐.”

흥흥, 콧방귀를 여러 번 뀐 도준희의 조부가 우예린에게 홱 고개를 돌렸다. 넋을 잃고 있던 우예린의 어깨가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도준희의 조부는 우예린을 빤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주름진 눈매에 잿빛 눈동자가 나이에 맞지 않게 날카롭게 빛났다.

마침내 우예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즈음.

“어라?”

도준희의 조부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희한타.”

‘설마 아들 잡아먹을 상이니 결혼 반대하겠다, 이런 말은 아니겠지.’

“아가씨 혹시 수녀요?”

“……네?”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을 생각하며 긴장하던 우예린은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봐도 저놈과 엮일 타입이 아닌데…….”

“…….”

“아가씨 같은 사람은 서점에서 책 읽다가 데이트 신청을 받고 만나다가 결혼하는 게 어울릴 것 같아. 그래, 딱 그런 상이야.”

‘뭐가 이렇게 구체적이야?’

우예린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어른이 빤히 쳐다보는데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입을 열었다.

“그, 그런가요? 하하…….”

“어이구, 딱이구먼! 내가 여기 들어오기 전만 해도 우리 조직에 머리 잘 굴리던 변호사 놈이 있었는데 차라리 그치와 잘 어울리겠어!”

우예린은 이번에도 어색하게 웃었다.

“관상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봐요.”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렇게만 말했다. 도준희의 조부, 도충열은 눈을 반짝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꼬박꼬박 대답도 잘 하고, 성실한 아가씨일세.”

도준희의 조부가 도준희를 힐끗했다. 무심코 그를 따라 도준희를 곁눈질한 우예린은 심장이 쿵, 떨어질 뻔했다. 도준희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이번만큼은 도준희의 조부도 쉽게 말을 못 꺼내겠는지,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기술을 가르친 스승 관계라면서 관계가 역전이라도 된 걸까? 조부는 쪼그라든 입술을 혀로 몇 번 축이더니 툭 뱉었다.

“왜? 찔리냐?”

분위기는 한층 더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도준희의 조부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자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던 도준희가 피식 웃었다.

“수녀는 무슨…….”

“…….”

“내가 우예린을 어디서 다시 만났는데.”

우예린은 가슴이 뜨끔했다. 도준희와 다시 만난 장소. 이상한 곳인 줄 오해했던 마사지 샵. 그 이후로 도준희에게 잘생긴 남자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는 억울한 오해를 사지 않았는가. 도준희가 여기서 그 말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만 간다.”

도준희가 일어나자 그의 조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어, 벌써 가려고? 삐졌냐?”

우예린도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도준희는 양복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도충열을 응시했다.

“오래 있을 수는 없지. 그래도 진지하게 만나는 여잔데 안 보여줄 수 없어서 온 거야.”

“…….”

“영감 말대로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잖아?”

냉정하게 말한 도준희가 뒤를 돌더니 흥, 코웃음을 쳤다.

“별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하고 있어.”

‘기분 상했네…….’

일찍 일어난 이유가 추측이 되는 혼잣말이었다.

“삐졌구먼. 준희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거짓말을 못…….”

“아, 영치금은 없어. 마침 내가 돈이 없네.”

“준희야!”

애절한 외침이 돌아선 도준희의 꽁무니를 쫓았다.

도준희의 손에 끌려가며 우예린은 뒤를 흘끗 바라보았다. 얄밉게 깐족거릴 때와 달리 도충열의 얼굴에 잔잔하게 떠오른 미소는 어딘지 흡족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했다.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도충열이 눈매를 접어 웃어 보였다.

우예린은 도준희를 따라 접견실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접견실을 나온 도준희는 민원실로 향했다. 우예린은 따라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가 뭘 하러 들어갔는지 추측할 수는 있을 듯했다. 영치금을 넣으러 갔을 것이다.

‘할아버지에겐 말과 행동이 다르네.’

할아버지와 있을 때의 도준희는 뭔가 조금, 새로운 모습이다. 도준희답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어릴 때의 도준희가 상상되는 기분이라 묘했다.

‘도준희와 나는…… 많이 다른 사람들이야.’

정말로 많이 다른 사람. 평범하게 만났더라면 접점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람. 우예린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착잡한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정말 얼굴 하나 잘생기면 대책이 없나 봐.’

장난처럼 생각했지만 입맛이 썼다. 지금까지 살면서 잘생긴 사람을 몇몇 보아왔지만 도준희처럼 강렬하게 오랜 시간 좋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랬던 마음이, 도준희가 약간 보였던 본성에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물어졌다. 도망가고 피하기에 바빴는데 언제 또다시 이런 마음이 싹터버렸을까.

‘도준희가 휴학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같아.’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막막하고 착잡하다.

“가자.”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우예린은 손이 꽉 잡히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민원실을 나온 도준희는 지체 없이 우예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을 잡는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주저함도 없었다. 우예린은 그게 또 묘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차에 탈 때까지 침묵이 감돌았다. 싱숭생숭한 우예린은 무슨 말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교도소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멍하니 길 위의 가로수를 응시하던 우예린은 문득 도준희가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밖을 보던 눈동자를 굴려 도준희를 힐끗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하고 있다.

‘할아버지를 만나서 기분이 조금 그런 걸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녀 역시 교도소에 수감된 가족을 만난다면 태연할 수 없을 듯했다. 주변에 고소를 당한 사람조차 드문 우예린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많이 나쁜 거면, 가만히 있는 게 낫겠지?’

입술을 달싹이던 우예린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위로를 하든 어쭙잖은 오지랖으로 보일 터였다.

“원래는…….”

도준희가 기분이 풀릴 때까지 조용히 있으려던 우예린은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지레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까지 올 생각 없었는데.”

도준희는 담배 하나를 물었다. 늘 그랬다시피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였다.

“근데도 여기 너 데리고 온 건 언제 갈지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한 번은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

“…….”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너한테는.”

우예린은 지포 라이터의 매끄러운 단면을 매만지는 손끝에 시선을 주었다.

“네가 나 같은 부류였다면 고민도 안 했어. 영감 말처럼 넌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을 테니.”

“…….”

“다 숨기고 살다가 알게 되는 것보다는 지금 알게 되는 게 낫잖아.”

“…….”

“나중에 충격받고 도망가는 것보다는…….”

무덤덤하게 하는 말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싫어졌어?”

“…….”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도준희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충분히 느끼지 못한 것 같아.”

말 한번 잘못했다가 생긴 일을 떠올리자 미간이 좁혀졌다.

“조금…… 놀란 건 사실이에요.”

“…….”

“아무래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니까.”

“네가 원하면 앞으로 다시 올 일 없어.”

도준희가 핸들을 꺾었다. 서울로 가는 방향이다.

“도준희는 할아버지랑 친하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 너랑 불편한데.”

“그렇게 말해도 돼요?”

“불편한 사람은 굳이 만날 필요 없잖아.”

우예린은 멈칫했다. 도준희에게서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말이 나올 때면 때때로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별 해괴한 짓을 다 저지르고 다니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구는 도준희를 희한하다는 시선으로 살펴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가 딱 도준희 짝이었다.

“그분이 수감자라서 불편한 게 아니에요. 그냥 좀, 놀라서 그렇지.”

“착한 척하지 마.”

‘이 미친개가, 기껏 좋은 말 해줬더니.’

이마에 빠직, 힘줄이 솟았다.

“뭐, 너라면 그렇게 얘기할 것 같긴 했지만.”

“…….”

“영감 말대로 네가 나와 다른 인종이기는 하지.”

도준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분 상한 티를 풀풀 냈던 그때와 달리 무덤덤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고이 지켜봐 온 거 아니야.”

“…….”

“등신처럼 굴었어. 마사지 샵에서 보고 뒷골이 띵하다 못해 터지는 줄 알았다.”

“……놀랐겠네.”

“뭐, 네가 얼굴만 반반하면 헤벌레 하는 줄은 몰랐으니까 그랬지.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얼굴부터 들이밀었지.”

“헤, 헤벌레라뇨!”

“그럼 아니야?”

우예린은 창피했지만 도준희를 만나 정신 못 차렸던 건 사실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첫사랑인 도준희를 만나 설레고 몸이 만져질 때마다 두근두근했던 기억들이 떠오르자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도준희는 그것을 단순히 자신의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여기선 잡아떼야 한다.

“당연히 아니…….”

부정하려던 우예린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준희의 얼굴에 말꼬리를 흐렸다.

투명하면서도 깨끗한 피부. 옆으로 길게 찢어진 큰 눈. 음험하게 반짝여서 시선을 뗄 수 없는 눈동자. 개미가 기어 다니다 미끄러질 듯 오뚝한 코. 얇고 매력적인 입술. 비웃을 때마다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우예린의 눈은 그 짧은 시간 내에 도준희를 구석구석 훑어댔다.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가,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빠아아앙!

우예린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빨개졌다. 말을 하다 마는 우예린을 힐끗한 도준희가 코웃음을 쳤다.

“이러니까.”

“…….”

“하여간 믿을 수가 없어.”

얼굴 반반한 사람에게 눈 돌아간다는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걸 깨달은 우예린이 울상을 지었다.

“그게 아니에요.”

‘얼굴에 약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정신 못 차린 건 네가 처음이라고!’

할 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비웃는 듯한 도준희의 눈동자를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어쨌든 영감을 만나러 온 건 그 이유. 그래서 네 생각은?”

“내 생각, 뭐요?”

“할 말 있으면 해. 들어줄게.”

“…….”

“나중에는 말해도 안 들을지 모르니까 지금이 기회다.”

선심 쓰는 듯한 말에 우예린은 머리를 굴렸다. 다시 한번, 당신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사람과 나는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조금 완곡히 표현해야겠지만…….’

우예린의 고민은 짧았다.

‘아니야. 말하면 또 난리 칠 게 분명해.’

솔직하게 말할 때마다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 과거의 기억을 되짚자 말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차 안에서 망측한 짓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만, 지금도 유도 신문하는 거 아니야?’

머릿속이 의심으로 똘똘 뭉친 우예린은 운전하는 도준희의 옆얼굴을 미심쩍게 살펴보았다. 입술에 걸린 마른 담배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담배 피우는 거 아니에요.”

마사지 샵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그를 봤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당황했나?’

도준희를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된 지금은 알겠다. 그때 그는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긴장이 되어 조심스럽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담배…….”

“…….”

“사실 나 담배 싫어해요. 사람들한테 피우지 말라고는 안 하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왜냐하면…….”

“알아, 너 냄새에 약하잖아.”

도준희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도준희라면 어디서든 담배 연기를 뻑뻑 뿜어댔을 것 같은데 물고만 있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역시.

“……그랬었구나.”

힘없이 중얼거린 우예린은 또 한 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도준희의 마음 씀씀이를 하나씩 깨달을 때마다,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듯했다.

* * *

월요일, 출근한 우예린은 아침부터 멍했다. 짧은 휴가의 여파가 생각보다 큰 탓이었다.

차가운 계곡 물속에서 도준희와 젖은 살을 부딪쳤던 순간이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랜만에 다녀온 고향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와 나가지를 않았다.

‘교회에 한번 다녀올 걸 그랬나?’

내려간 김에 부모님 얼굴을 뵈었다면……. 괜한 죄책감에 부질없는 가정을 떠올린 우예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도준희가 그녀를 혼자 보낼 리 만무했고 행여나 부모님이 도준희를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찔했다.

‘절대 좋아하실 리 없어.’

부모님은 그녀만큼, 혹은 그녀보다 더 암흑세계에 회의적인 분들이었다. 유흥가에 교회를 차린 것치고는 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양친을 떠올리자 우예린은 설득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잠깐, 설득?’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아연해졌다. 요즘 도준희를 생각하면 마음이 참 싱숭생숭하다. 분명 그런 타입의 남자는 싫어하다 못해 두려워했을 텐데. 소위 마초적이고 법보다 주먹이 빠른 것 같은 남자 말이다. 딱 도준희 같은.

‘그런 사람인 줄 모를 때야 얼굴만 보고 착각했지만…….’

싫어했고, 지금도 싫은데 왜 자꾸만 마음이 희한하게 기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몰라, 생각하지 말자.’

우예린은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서 눈을 돌리고 일에 집중하려 했다.

똑똑.

파티션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최강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다가올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우예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거 정리 좀 해줘.”

“알겠습니다.”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바로 갈 줄 알았던 최강현이 움직이지 않는다. 우예린은 의아하게 눈을 끔벅이며 최강현을 올려다보았다.

최강현의 고동색 눈동자가 스륵 움직여 우예린의 얼굴을 훑었다. 특유의 선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장님?”

“어디 놀러 갔었나?”

“네?”

“얼굴이…….”

‘얼굴?’

어리둥절해진 우예린이 한 손을 뺨에 올리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하던 일 해.”

말을 흐린 최강현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뒤를 어디선가 나타난 김 대리가 따라붙었다.

“과장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 잠깐 시간 되세요?”

우예린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뭐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딱딱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한 최강현이 말을 맺지 못하는 건 처음 본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류철에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지수련의 얼굴에 입을 떡 벌렸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고 있던 지수련이 놀란 우예린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뭘 그렇게 놀래?”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움켜쥐는 우예린에게 지수련이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뭔데?”

지수련이 우예린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쿡쿡 가리켰다.

“과장님 어때 보여?”

“뭐가 어때 보여?”

“기분 말이야.”

“평소랑 별다를 것 없어 보이시던데.”

“그래?”

지수련이 아쉽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가 멀뚱하게 쳐다보는 우예린의 시선을 의식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일까지는 아니고.”

지수련이 주변을 슬그머니 살폈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실은 내가 아주 고급 정보를 들었는데. 과장님 말이야, 주말에 선보셨대.”

“선?”

“응, 결혼할 나이 되셨으니까. 사실 좀 늦기는 했지. 뭐, 여자가 아쉽지 않으니까 여유로운 거겠지만.”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소식에 어두운 우예린이 신기해서 묻자 지수련이 피식 웃었다.

“김 대리에게서 들었지. 비슷한 교수 집안에서 소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본격적이면 곧 국수 먹으려나?”

우예린은 흥미로운 눈으로 관자놀이를 괴는 지수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 했다.

“과장님은 그렇다 치고, 그래서 나는 언제 네 국수를 먹을 수 있을까?”

“몰라, 결혼이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더라고.”

언젠가 남자 친구와의 결혼 의사를 살짝 비쳤던 지수련은 예쁘게 웃으면서 한 발짝 물러났다.

“어려운 거 없는 네가 어렵다니까 신기하네.”

“결혼은 집안 문제니까.”

‘결혼은 집안 문제…….’

우예린은 다시 한번 부모님 생각이 났지만 곧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이제 정말 일에 집중하려는 그녀의 귀로 지수련의 놀리는 듯한 말이 흘러 들어왔다.

“근데 예린아, 너 좀 탔다? 남자 친구랑 여행이라도 갔다 왔니?”

휴가에서의 여운을 날려버린 우예린은 퇴근 시간까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먼저 퇴근합니다.”

“들어가세요.”

다들 퇴근하는 와중에도 조금만 일을 더 하고 갈지 말지를 생각했다. 도준희에게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남아있다.

‘이러다가 늦으면 또 어디서 한눈팔다 왔냐고 한 소리 들을 텐데.’

전 같았으면 이런 걸 고민하게 만드는 도준희를 욕했을 듯한데 짧게 고민한 우예린은 평소와 달리 산뜻하게 일어났다.

“에이, 그냥 들어가자.”

도준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켰더니 습관이 됐는지 이제는 퇴근 시간을 넘기면 일할 의욕도 사라져버린다.

짐을 다 챙길 무렵이었다.

지잉.

우예린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문자 발신인, 도준희.

[주차장으로 내려와.]

‘우리 회사 주차장?’

우예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까지 왔다고?’

시한폭탄 같은 도준희와 소중한 일터인 회사를 연결 짓자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다행히 도준희의 차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무채색의 차량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빨간 스포츠카에 가까이 다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스윽.

창문이 내려가고 도준희의 얼굴이 드러났다. 우예린은 그를 의심했던 것도 잊고 갑자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꼭 국민학교 다닐 적 엄마가 말없이 마중 나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뭐, 꼭 일이 있어야 오나?”

“…….”

“심심하기도 하고, 비도 오고 해서 겸사겸사.”

도준희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어쩐지 멋쩍어하는 듯한 얼굴을 보며 우예린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를 흘끗한 도준희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뭘 또 웃어.”

“반가워서요.”

“…….”

도준희의 입꼬리가 웃는 듯 마는 듯 바들거렸다.

“안 그래도 퇴근할 생각하니 다리 아팠는데.”

우예린이 태연히 뒷말을 덧붙이자 정색하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네 기사냐?”

“기사 노릇 해주려고 온 거 아니었어요?”

“……타기나 해.”

키득거린 우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불편한 표정을 짓던 도준희가 차 문을 열었다.

“어디 가요?”

“화장실. 안에 있지?”

“저 문으로 들어가면 돼요.”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도준희가 건물로 들어가고 우예린은 열린 창 너머로 안쪽을 힐끔 들여다보았다. 다 마신 캔 커피가 두 캔이나 되었다. 우예린이 호오,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일찍 와있었나 보네.”

문자가 온 시간은 퇴근 시간과 거의 근접했다. 혹여 자신이 나올 때를 기다려 재빨리 문자를 보낸 걸까?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도준희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생각하니 갑자기 간지러운 웃음이 재채기처럼 튀어나왔다.

우예린은 차 앞에서 도준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퇴근하는 사람들의 차가 하나둘 우예린 앞을 스쳐 지나갔다. 우예린은 한산해지기 시작한 주차장 안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잘빠진 검은 세단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다 말고 우예린의 앞에서 멈추었다.

우예린은 차를 바라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우예린 앞에서 멈칫한 차는 곧 근처에 주차되었다.

‘뭐지?’

선팅한 창문으로 인해 안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우예린은 차 밖으로 드러나는 길쭉한 다리와 탄탄한 실루엣을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과장님?’

차 문을 연 채로 선 최강현이 우예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예린 씨, 퇴근하는 길인가?”

“네, 과장님도 오늘 일찍 퇴근하시네요.”

우예린이 밝게 웃으면서 말하자 최강현이 미간을 좁히며 손가락으로 차 천장을 툭툭 두드렸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

조금 민망했지만 혹시 회사에서 말 못 한 업무 얘기라도 할까 봐 빳빳한 자세를 유지했다. 문득 최강현의 기럭지가 눈에 들어왔다. 우월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몸이다. 여자가 아쉽지 않을 거라는 지수련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집안 좋지, 잘생겼지, 일 잘하지.’

따져보니 최고의 신랑감이기는 했다. 화낼 일 많은 회사에서 감정적으로 굴지 않고 기계처럼 일을 해내는 거의 유일한 사람.

‘갑자기 존경스럽네.’

우예린이 새삼스럽게 최강현의 능력에 대해서 감탄하고 있을 때, 그가 돌연 우예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태워줘?”

우예린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곧 말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 괜찮아요. 같이 갈 사람이 있어서요. 기다리는 중이에요, 지금.”

“……그래.”

‘오늘따라 과장님이 이상하네.’

우예린은 어색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머뭇거리는 최강현을 본 적이 없기에 이질감이 짙게 몰려왔다.

‘혹시 어디 아프신가?’

안부라도 여쭤봐야 하는지 고민하는 순간, 최강현이 입을 열었다.

“우예린 씨.”

“네, 과장님.”

최강현이 또다시 차 천장을 두드렸다.

‘저거, 멋쩍을 때 주로 하는 행동인데.’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애인 있나?”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우예린은 한발 늦게 대꾸했다.

‘응?’

말은 이해했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단순히 화젯거리 삼아 애인 유무를 묻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

이상하게 느껴졌던 분위기의 정체를 깨닫자 우예린의 머릿속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최강현은 아주 담담한 표정이었다. 묻는 것도 담담한 말투였다. ‘아침 먹었나?’라고 물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자의식과잉……도 아니겠지.’

우예린은 자신이 바보같이 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최강현 과장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섣불리 대꾸하기엔 무리가 있다.

“애인이라면…….”

그래서 조심스럽고도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냐고 묻기 위해 어물거리자 최강현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없다면 내일 저녁이나 같이하지.”

우예린은 다시 입을 떡 벌렸다. 이번에야말로 헷갈릴 여지 없는 답변이었다. 출장은 이미 끝났다. 단둘이서 밥을 먹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인생에서 고백받는 일이 드물었던 우예린은 이런 순간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방법 같은 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는 확실했다.

“이, 있…….”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남자 친구?’

머릿속을 스치는 건 도준희의 얼굴이었다.

탁.

수상한 소리에 우예린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의 등장에 우예린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갔다.

도준희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주웠다. 고개를 든 도준희의 드러난 눈빛이 예의 그 광기로 반질거렸다.

“……습니다.”

뒤늦게 말을 이은 우예린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빠져나갈 차는 웬만큼 빠져나갔는지 주차장 안은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도준희가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구겼다.

“씹.”

“…….”

“깨졌네. 라이터.”

별거 아닌 말인데 목덜미가 오싹해진 우예린이 몸을 떨었다. 머릿속에는 도준희가 난동을 부리다가 최강현의 팔목을 물어뜯는 상상이 떠올랐다. 주먹을 날린다면 모를까, 팔목을 물어뜯다니. 왜 그런 장면을 상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끔찍한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끼는 건데 말이야.”

“…….”

“깨져버렸네?”

도준희가 라이터의 불을 탁, 탁 키며 다가왔다. 느릿느릿, 그러나 성큼성큼 걷는 보폭이 꼭 맹수가 걸어오는 듯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

“내가 놀랐나 보다.”

피부가 찌릿찌릿할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서늘한 주차장에 퍼져나갔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장이 짜부라지는 것 같았던 우예린은 길게 생각할 틈이 없이 손가락으로 도준희를 가리켰다.

“저, 저 사람이……!”

비명처럼 흘러나간 목소리에 최강현은 물론이고 도준희의 시선까지 우예린에게 꽂혔다. 우예린은 갑작스러운 도준희의 등장을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미간을 좁히고 있는 최강현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사람이에요, 과장님.”

“…….”

“제 남자 친구요.”

눈을 크게 뜨는 최강현을 향해 어색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애인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저 사람이에요. 지금 막, 같이 저녁 먹으러 가던 길이었거든요.”

잠시 침묵하던 최강현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아.”

도준희의 살기가 가라앉고, 얼어붙은 뇌가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자 우예린은 뒤늦게 이 상황이 얼마나 최악인지를 깨달았다. 사실 우예린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상황은 도준희가 최강현을 물어뜯거나, 혹은 주먹질을 하는 것이었으나 도준희에 대해서 모르는 최강현은 우예린이 뭘 걱정하는지 전혀 모를 터였다.

그러니 객관적인 상황만 따져보자면 지금 상황은 부하 여직원에게 호감을 표시했다가 남자 친구가 있다며 거절당한 상황인 것이다.

‘무슨 이런 상황이 다 있어…….’

회사의 인기인이란 걸 떠나 하늘 같은 상사인 최강현을 이런 식으로 대하게 되다니. 우예린은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최강현은 우예린에게서 시선을 떼고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곤혹스러웠던 표정은 평상시의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기분 탓인지 약간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실례했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한 최강현이 다시 우예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예린 씨도……. 저녁 맛있게 먹고.”

“…….”

“먼저 가봐야겠군.”

최강현은 이 상황에서 이상하지 않을 적당한 인사말을 남기고 차에 탔다. 검은색의 세단이 빠져나가자 차 뒤꽁무니를 보며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이렇게 깔끔하게 곤란한 상황에서 빠질 수도 있구나.

갑자기 뺨이 따끔거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넋 놓고 감탄할 때가 아니다. 긴장한 우예린이 슬그머니 도준희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앞으로 과장님 얼굴을 어떻게 보냐는 것도 걱정이기는 한데, 일단 그보다는 당장 당면한 문제가 더 급하다. 다행히도 도준희의 비뚜름했던 눈썹은 한쪽이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간신히 위기를 넘겼음을 깨달은 우예린이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어떻게 할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 아무 일 없었던 척이라도 하자.

“도준희, 거기서 뭐 해요? 집 안 가요?”

‘뒤늦게 왔으니까,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모를 수도 있어.’

그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시침을 뚝 떼자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도준희가 건들건들 말했다.

“이럴 줄 알았지.”

허스키한 목소리가 차가운 바닥에 낮게 깔렸다.

“이 회사에 사내새끼들이 한둘이 아니더라고.”

서슬 퍼렇게 새어 나온 이 가는 소리에 우예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쩐지 요즘 점점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 같더라니…….”

도준희의 까만 눈동자에 떠오른 건 선명한 의심이었다. 우예린은 혀가 바싹 말랐다.

“무슨 소리예요. 통금 시간 안 지킨 적 없었잖아요.”

“있어.”

“언제요?”

“이번 달만 해도 3일, 8일 그리고 11일.”

“…….”

“벌써 세 번이나 넘겼거든.”

우예린은 당황과 황당함이 혼재해서 입만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도준희의 까만 눈이 점점 더 반질거린다 싶더니 마침내는 광이 나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 했어.”

“…….”

“앞에서는 얌전하더니 뒤로는 남자를 만나고 다녀?”

도준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크고 매끈한 눈매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스산하게 번뜩였다.

“내가 이래서 회사 가지 말라고 그런 거야.”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완전히 오해예요.”

우예린은 혼이 빠져나갈 뻔했다가 여기서 밀리면 회사를 강제로 그만두고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착하게 흩어져 가는 연약한 영혼을 끌어모았다.

도준희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활화산처럼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누군데?”

“네?”

우예린이 눈을 깜박였다.

“무슨 사이냐고.”

침을 꿀꺽 삼키고 재빨리 말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회사 상사예요, 상사. 인기도 엄청 많은 분이고, 아, 어제는 선도 보셨다고 했어요. 나랑은 그냥 상사, 부하 관계예요”

도준희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진짜?”

“진짜, 진짜로.”

우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에 열 번은 끄덕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단순히 상사, 부하 관계일 뿐이다?”

“응응, 과장님이에요.”

진정성 있는 눈빛이 통했을까? 의심스러워하던 도준희가 이해한 듯 눈썹이 유순한 모양으로 내려갔다. 우예린이 희망에 찬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도준희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좋아하던 모습 그대로 굳어졌다.

“저 나이에 과장이라. 돈은 꽤 있겠네? 같은 회사라 매일 얼굴 보겠다, 밥도 사주겠다, 게다가 얼굴도 반반하네?”

“…….”

“바람피우기 딱 좋은 조건이군.”

말하다 보니 더 열이 받은 듯 도준희의 목소리에 분기가 들어찼다. 우예린의 표정이 싹 식었다. 무슨 말을 해도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미친놈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미친놈도 아니라 미친개다. 말이 안 통하니 미친놈이란 말도 아까웠다.

“와 나, 이걸 어떻게 하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죽하니 웃는 도준희를 보자 기가 막혔다.

‘그 대사는 내가 쳐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 생각은 그랬지만 튀어나온 말은 달랐다.

“도준희가 어떻게 할 필요 없어요.”

“……뭐?”

도준희가 귀를 의심하는 듯 눈을 꿈틀했다. 짝눈이 되어버린 도준희를 바라보며 우예린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말아요.”

우예린은 뒤늦게 그녀의 말이 차갑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준희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하, 이젠 막나가겠다? 네가 이렇게 대놓고 나를 놀린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애먼 사람을 의심해요.”

“가만두지 않을 줄……, 뭐라고 했냐?”

도준희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숱하게 받아왔던 우예린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대였다. 쯧쯧 혀를 차는 다소 불손한 태도에도 도준희는 얼빠진 얼굴로 우예린의 답을 기다렸다.

“좋아한다고요.”

“네가 지금 말하는 놈이 저 과장 놈이라면 둘 다 죽여버린…….”

“도준희를요.”

“…….”

“좋아해요.”

“어?”

분기탱천해서 빠득, 이를 갈았던 도준희가 눈을 깜박였다. 우예린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도준희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었다.

“도준희를 좋아한다고요. 저분은 그냥 상사고요! 도준희 표현대로라면, 한 번도 반반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렇지는 않았다. 가끔 최강현의 외모에 감탄사를 날리는 여직원들에게 동의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도준희 앞에서는 무조건 깎아내리는 게 살길이었다.

“……흠.”

약간 유순해진 도준희가 그래도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니야?”

뜨끔.

‘하여간 이럴 때는 눈치가 짐승같이 빨라서는…….’

“아니에요. 애초에 과장님이랑 바람을 피웠으면 도준희랑 어제 그렇게 했겠어요? 뽀뽀도 안 했을 거예요.”

침대에서 뒹굴었던 어젯밤을 꼬집자 도준희가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

의심을 거둔 듯한 도준희를 보며 우예린은 뜬금없이 그가 은근히 순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바보 같아.’

도준희가 알았다면 욕을 얻어먹을 생각을 이어가며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나 배고픈데.”

“……타.”

도준희는 아직 뭐가 못마땅한지 비뚜름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차를 향해 턱짓을 했다.

우예린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하기 위해 끙끙거렸다. 불안한 마음에 행동이 급해져서인지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쯧, 혀를 찬 도준희가 팔을 쑥 뻗어 안전벨트를 끌어주었다. 우예린은 바로 앞으로 다가온 도준희의 얼굴을 보고 숨을 죽였다. 안전벨트를 해준 도준희가 우예린을 힐끗했다.

“이런데도 회사는 안 그만둔다는 거지?”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던 우예린은 바싹 긴장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준희가 오해한 건데 뭘 그만둬요.”

흥, 코웃음을 친 도준희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이다.

‘저러다가 또 회사 관두는 거에 꽂히면 큰일이다.’

우예린은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격하게 느꼈다. 침을 꼴깍 삼키고 태연한 척 말을 늘어놓았다.

“뭘 그렇게 의심을 해요.”

“…….”

“도준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들은 저한테 관심 없어요. 도준희가 이상한 거라니까요.”

하는 수 없이 자기 비하까지 섞어가며 도준희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도준희 같은 미친놈이 아니면 누가 자신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살면서 호감을 표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 좋은 감정으로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온건한 감정이었지, 도준희처럼 난리 법석을 피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있었으면 또라이지.’

도준희 같은 또라이가 세상에 둘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무슨 소리야. 사내새끼들이 너한테 관심이 없을 리가 없잖아.”

도준희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나 싶어 그를 흘낏했다.

“내 눈엔 네가…….”

정면을 바라보며 운전하던 도준희가 우예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예린에게 머무는 시선이 점점 더 짙어졌다. 평소의 광기 어린 반질거리는 눈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계곡에서 보았던 반짝이는 눈이다.

야릇하면서도 반짝이는 눈. 우예린은 도준희의 눈에 어린 관능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렇게 보이는데.”

말을 마친 도준희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보이는데?’

생략된 말이 많아 이해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우예린은 입을 열어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 못했다. 우예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도준희에게 샅샅이 핥아진 기분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우예린은 출근 준비를 하며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묘하게 평소보다 조용한 도준희를 보자 속이 바싹바싹 탔다. 어제는 어찌어찌 잘 해결했지만…….

‘이러고 막 출근할 때 막는 거 아니야?’

불안한 우예린은 출근용 옷을 입으면서도 집안 구석구석을 티 안 나게 살폈다.

‘문 잠금 상태는…… 평소와 다를 거 없는 거 같은데.’

문득 혼자서는 이 집에서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이런 씨, 문 안 열어주려는 거구나!’

아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괜히 추측성 말을 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봐 잔뜩 불안한 상태였지만 태연한 척을 했다.

“나 출근할게요, 도준희.”

목소리에 긴장한 티가 났다. 우예린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도준희?”

소파에 앉아있던 도준희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이러다가 ‘회사 가지 마.’하고 폭탄선언을 할까 봐 마음이 졸인 간장처럼 졸아들었다.

카드 키를 들고 키패드에 대려던 도준희가 멈칫했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던 우예린이 불안해서 눈을 깜박였다.

“왜, 왜요?”

“……아니야.”

띠리릭.

키패드가 카드 키를 인식하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자 우예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근데…….”

도준희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우예린을 힐끗했다.

“정말 회사 꼭 가야 해?”

‘역시 아직 안 끝났군.’

긴장한 우예린이 다부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가야 해요.”

“왜 그렇게 회사에 집착해?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도준희의 눈이 반들거리자 우예린은 한숨을 참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집착이 아니에요. 힘들게 들어간 곳이니까 잘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하는 게 당연하죠.”

“그래, 네가 학교생활 빌어먹게 열심히 하긴 했지. 볼 때마다 강의실이나 도서관이었으니.”

도준희가 똥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일찍 와.”

탁.

문이 닫혔다. 터덜터덜, 문밖으로 걸어 나온 우예린은 홱 뒤를 돌아 닫힌 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쉽게?’

다행이기는 한데……. 우예린은 버스를 타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를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왜 이렇게 어색한 기분을 느끼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도준희가 너무 순순하다. 외간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는데도 회사를 고이 보내주다니. 완전히 말이 통하지 않았던 처음에 비하면 지금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완전 돌아버린 미친개에서 그냥 개가 되어가는 과정인 걸까? 어찌 됐건 한시름 놓은 우예린의 표정이 다소 편안해졌다.

* * *

일주일 후.

“예린아, 카페 갈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온 뒤 지수련의 제안에 우예린은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도 우예린은 도준희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요즘 도준희가 이상하다. 변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변화가 너무 극심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그럴 위인이 아닌데. 얌전해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은근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겠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눈치를 보는 게 억울하기는 했지만 그럼으로써 심신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면 눈치 정도는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사사건건 그날 일로 트집을 잡으며 퇴사를 권유할 줄 알았던 도준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심지어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했다.

‘조용하니까 좋기는 한데.’

최강현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도준희는 아예 머릿속 한 칸을 차지하고 발을 쾅쾅 굴러대는 듯했다.

‘과장님 문제도…….’

우예린은 복잡한 심경에 검지로 미간을 긁었다. 그날 이후, 최강현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최강현은 평소와 똑같았다. 무뚝뚝하게 명령하고 일하고, 말한다. 마주치는 빈도와 말을 섞는 시간이 줄어든 것 같기는 했다. 함께 출장에 다녀온 후에는 알게 모르게 대화를 하는 횟수가 늘었으니까.

늘어났던 대화. 그게 혹시 최강현 나름의 호감의 표현이었나, 잠깐 생각해 봤지만 평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최강현의 속내를 알 길은 만무했다. 설사 그랬다고 할지라도 지금에 와서는 의미가 없다.

어찌 됐건 그가 자신에게 가졌던 호감을 지운 건 분명한 듯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싫다는데도 좋아하게 만들겠다며 이를 드러내는 도준희 같은 사람이 미친놈인 것이다.

하여간 도준희가 조용한 게 제일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옥상에 도착했다. 며칠 전에 비해 선선한 바람이 밀려왔다. 우예린은 고민도 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람을 즐겼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지수련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혀 차는 소리에 그녀를 따라 주변을 훑어본 우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커피 잔을 든 직원들이 있다. 옥상 정원 카페는 원래 뙤약볕의 물 한 잔처럼 휴식이 고픈 직장인들에게 필수적인 휴식처였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처음 보는 듯했다.

“어떡해, 진짜 잘생겼어.”

다른 부서 사람이라 얼굴만 눈에 익었던 여직원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지나갔다. 우예린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가만 보니 옥상에 모인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여성이다.

“연예인이라도 왔나?”

혹시 드라마 촬영이라도 하는 걸까. 그렇다면 모를 리가 없는데. 지수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아니고 아마 카페 사장이 바뀌어서 그럴 거야.”

“응? 주인 아주머니 딴 데 가셨어?”

입사하면서부터 얼굴을 봤던 카페 사장을 떠올리며 묻자 지수련이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겼다면서 가셨다네? 나도 떠나실 때 어떻게 잠깐 만난 거라 자세한 얘기는 몰라.”

“그렇구나.”

“가게 자체는 똑같고 일하는 사람만 바뀐 것 같아. 어제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벌써 소문이 쫙 퍼졌네.”

우예린은 역시 사람은 다 똑같구나 싶은 마음에 웃음을 흘렸다.

“진짜 잘생긴 사람인가 봐. 개안할 정도의 외모라면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도 이해가 되네.”

우예린은 매일 집에서 봐도 순간순간 눈이 트이는 듯한 도준희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지수련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우예린을 응시했다.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본다.”

얼굴 밝히다가 인생이 이렇게 됐다는 말을 삼킨 우예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가서 시원한 거 시키자.”

가게로 다가간 우예린은 주문을 받는 사람을 보고 우뚝 굳어졌다.

‘이 사람이 새로운 카페 사장……?’

조심스럽게 옆을 흘끗하니 지수련도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주문하시겠어?”

존대와 반말이 섞인 애매한 말투의 남자는 꽤 특이한 외양이었다. 30대 중반 즈음 됐을 듯한 얼굴인데 머리는 반쯤 벗겨졌고, 목소리는 우렁우렁한 데다가 눈두덩이 툭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한마디로 밤에 만나면 조금 위협을 느낄 듯한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남자답게 매력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너무 잘생겼어.’ 하고 감탄할 외모는 아니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우예린은 음료를 주문하고 옆으로 물러났다.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좌석이 꽉 차있어서 여의치 않았다.

“커피 나오면 그냥 내려갈까?”

지수련이 멋쩍은 얼굴로 제안하자 우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사람이 바글바글한 옥상 정원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음료 두 잔 나왔습니다.”

“어, 우리 음료 나왔다.”

그렇게 말한 지수련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예린은 우예린대로, 귀에 철썩 달라붙는 익숙한 목소리에 빳빳하게 굳어졌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할 리가…….’

일말의 불길한 의심을 품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주문한 음료 두 잔을 든 채, 입꼬리를 올리는 도준희가 있었다.

“……뭐야, 저 사람!”

“…….”

“저 사람이네! 잘생긴 카페 사장! 저 사람이야!”

흥분한 지수련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예린은 멀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손님?”

도준희가 음료를 든 채 해사하게 웃었다.

‘돈이 많으면 이런 미친 짓도 할 수 있구나.’

우예린은 경탄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뱉었다.

소문이 과장되지 않았다고, 들뜬 지수련의 수다를 참으며 일과를 마친 우예린은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나 옥상으로 달려갔다.

옥상 정원으로 향하는 유리문을 열어젖히자 도준희가 바로 보였다. 그는 삭막한 빌딩 숲을 배경으로 한 채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삭막한 빌딩 숲이 생기를 얻는 것 같았다. 이대로 사진을 찍어도 화보가 될 듯하다.

그러나 우예린은 그 멋들어진 풍경에 속지 않고 전투적으로 걸어갔다. 그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자 도준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도대체 뭐 한 거예요?”

“뭐 하긴, 커피 마시잖아. 너도 줘?”

태연한 대꾸에 기가 막혀 뒤통수가 뚫릴 것 같다.

“내 말은, 여기서 뭐 하냐는 거예요.”

“사업.”

“갑자기요? 그것도 관심도 없던 카페 사업?”

“어, 관심이야 없다가도 생기는 거고.”

말을 마친 도준희가 눈을 크게 뜨며 커피를 쭉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얄미워 보여 말문이 막혔다.

흘끗, 카운터를 보자 아까 주문을 받았던 그 개성 있는 남자가 마감 표지판을 걸어두고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저분은 누구예요?”

우예린이 가리킨 사람을 확인한 도준희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부하 직원.”

길게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건달이니 심부름센터니 부리는 사람이 많았던 도준희이니 저 사람도 그중 하나이리라.

도준희가 빨대 껍데기를 벗기더니 커피에 톡 꽂았다. 쪼록, 쪼록. 빨대로 음료를 빨아먹는 소리가 났다. 도준희는 아직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우예린을 향해 말했다.

“커피 한 잔 줘?”

“됐어요.”

“회사라는 곳이 연애질하는 놈들 천지라며? 나도 이제 여기 들어왔으니 이렇게 되면 사내 연애가 되는 건가.”

짐짓 진지하게 중얼거리던 도준희가 우예린을 힐끗했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다.

“우예린, 바람은 못 피우겠네?”

결국 이런 거였다. 조용하다 했더니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우예린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가 무슨 말을 하랴 싶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안 피운다니까요. 아니, 못 피워요, 못 피워.”

“그래, 믿어.”

‘이 또라이가 믿기는 뭘 믿어.’

믿는다는 사람은 이런 짓은 안 한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피식피식 헛웃음이 샜다.

“이런 짓 할 돈 있으면 나나 줘요.”

“돈 필요해?”

“…….”

“공짜는 없는 거 알지?”

우예린은 가상의 빚과 교환할 뻔했던 신체 포기 계약서를 생각하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 참, 너 그 빚은 어떻게 됐냐. 네 친구한테 빌렸다는 돈.”

“아, 그거는…….”

도준희의 지적에 찔끔한 우예린이 머리를 굴렸다.

지잉, 지잉.

마침 전화가 와서 헐레벌떡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확인하니 양반은 아닌지 이지나의 이름이 떠있다.

“전화 좀 받을게요.”

도준희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나의 용건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는 거였다. 보통 휴가철에는 한 번 정도 만나서 수다를 떨고는 했으니까 궁금해서 전화한 듯했다.

“지나가 얼굴 좀 보자는데, 갔다 와도 돼요?”

묻기는 했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도준희는 흔쾌히 대꾸했다.

“어, 가.”

“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원래 안 보내주잖아요.”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생사람 잡는다는 듯 도준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예린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분명 약속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건 남자에 한해서고. 여자 만나는 건 상관없지.”

나는 관대하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도준희를 보며 우예린은 체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약속 당일, 도준희가 일이 있다고 먼저 나가고 우예린은 밖에 나와 이지나와 통화를 했다. 우예린이 도준희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얘기하니 이지나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너 그거 좀 이상한 거 아니야?

“뭐가?”

―무슨 약속 같은 걸 허락을 받아. 그걸 또 당연한 듯이 얘기하고. 너 상태가 조금 이상한데. 길들여진 여자 같잖아.

길들여진 여자라니. 기이하게 들리는 어감에 우예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아, 버스 왔다. 이따가 만나서 얘기해.”

전화를 끊고 버스에 올라타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확실히 처음 덜덜 떨던 거에 비해서 지금은 아무렇지 않기는 하지.’

도준희가 무슨 미친 짓을 할까 겁먹기는 해도 처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이게 길들여진 걸까? 스톡홀름 증후군, 뭐 그런 것처럼?’

우예린은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도준희가 무섭지는 않지만…… 이런 상태로 만나는 게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어.’

연애는 처음이지만 이게 보통의 연애와 사뭇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우예린은 심란한 얼굴로 버스 밖의 가로수와 건물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이상한 또라이다. 또라이, 미친놈, 미친개. 다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별칭이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문제는…….

‘예전만큼 피하고 싶지는 않아.’

도준희가 변한 건가.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툭, 창문에 머리를 기댄 우예린의 입술 사이로 복잡한 한숨이 새어나갔다.

길들여진 여자.

이상하게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 * *

꽃미남 마사지 샵. 우예린과 만나기 전 남자 친구를 만나러 온 이지나는 핸드폰 폴더를 접으며 인상을 팍 썼다. 작업복을 꺼내어 마사지대 위에 올려두던 그녀의 남자 친구, 이영훈이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 이제 나가봐야 해.”

“나가보는 건 나가보는 건데 표정이 왜 그래? 친구랑 싸웠어?”

이지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남자 친구를 보자 갑자기 마음이 북받쳤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가 얼마나 근면 성실하고 정직한지 알고 있었다.

이지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하던 이영훈도 곧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참 후, 입술을 뗀 이지나가 중얼거렸다.

“자고로 애인은 너처럼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어야지.”

이영훈은 이지나의 안색을 살피며 찌푸려진 미간을 주물주물 만져주었다.

“왜? 누구 생각하고 하는 말이야?”

“내 친구.”

“네 친구?”

“응, 전에 말한 적 있잖아.”

그 말 한마디로 이영훈은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아, 도련님 여자 친구?”

“그래! 걔랑 통화했는데 속 터지는 말을 하더라니까.”

“뭐라고 했는데?”

“도준희가 나랑 만나도 된다고 했다는 거야. 그게 뭐야. 애인한테 뭐 그런 걸 허락받고 있냐고. 걔는 또 그게 이상한지 모르더라니까?”

“자기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영훈은 곤란한 얼굴로 이지나와 눈을 맞췄다.

“내가 그 두 사람에겐 상관하지 말자고 했잖아.”

“자기가 그렇게 말하니까 신경 안 쓰려고 했어. 예린이가 하는 거 보니까 알아서 헤어질 것 같았고. 근데 영 상황이 이상해.”

이지나는 우예린의 밝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뭔 바람이 들었는지, 전이랑 다르게 헤어지려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니까.”

“…….”

“당연히 헤어져야지. 걔는 그런 사람이랑 엮일 타입이 아니야. 순진하고 공부밖에 모르는 애라고. 하여간 얼굴 밝힐 때부터 불길했어, 내가.”

“다시 좋아진 걸 수도 있지. 도련님이 성격이 좀, 그래서 위험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돈은 많아!”

“돈이 많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잖아.”

“그 친구가 도련님 원래 짝사랑했었다며.”

이지나는 신경 쓰지 말았으면, 하는 이영훈의 꺼림칙한 기색을 눈치챘지만 우예린이 마음에 걸려서 그만하지 못했다.

“그거야 도준희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때고. 나랑 우예린, 무려 10년 친구야. 도준희가 조폭 집안에 알 만한 싸움꾼들은 다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좋아할 리 없어. 실제로도 아주 학을 뗐었고. 걔가 헤어지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데.”

이지나는 핸드폰 문자 내역을 보여주며 울상을 짓던 우예린을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다.

“그 친구가 그런 성향이라면 자기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그래 봬도 도련님 인기는 엄청 많아. 물론 대부분 얼굴 보고 홀린 거였겠지만.”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말에도 이지나의 기분이 풀어지지 않자 이영훈은 표정을 흐렸다.

“우예린이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놔주는 걸 보면 분명해. 변태거나, 사이코거나.”

“뭘 어떻게 했는데 그렇게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야?”

어리둥절한 이영훈의 질문에 이지나는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걔 성격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들.”

* * *

“도련님?”

본격적인 운영 전, 바닥을 쓸고 있던 지배인은 입구로 호랑이 움직이듯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오는 도준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준희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가게 안을 쭉 둘러보았다.

이 미친놈이 갑자기 또 무슨 일일까. 지배인은 도준희의 그림자만 보고도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가장 최근만 해도 멀쩡히 일하던 애 대가리를 깨놓고 간 장본인이 아니던가.

신세진에 의하면 도준희의 손님을 희롱해서 그랬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할 사람을 그렇게 박살을 내버리면 가게 운영은 어떻게 하냔 말인가.

‘아무튼 남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지.’

그러나 과거 일은 잊어줄 수 있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니.

‘제발 조용히 가라, 조용히.’

“장사는 잘돼?”

“장사야 뭐, 아직까진 잘되는 편이지.”

지배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적막한 가게를 둘러본 도준희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 눈이 잘못됐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데?”

“영업시간 아니라 직원 몇 명만 출근한 상태야. 곧 영업할 시간이네.”

지배인은 시계를 흘끗하며 손님 오기 전에 가달라는 말은 꿀꺽 삼켰다.

“폐장 시간까지 예약이 풀타임으로 꽉 찼어. 조만간 2호점을 낼지도 몰라.”

“큰아버지가 좋아할 만하네.”

“회장님이 뭐라고 하셨어?”

“어.”

“뭐라고 하셨는데?”

가게에서 일해보라는 말이라도 들었겠지. 그거야 뭐 나도 들은 말이니까.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지배인은 도준희의 반짝반짝한 얼굴과 늘씬한 몸을 훑었다. 자신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이니,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 회장이 그를 보며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얼굴만 비쳐도 바로 간판 직원이 될 텐데.’

하지만 돈이 썩어 넘친다는 귀하신 몸이 이런 데서 일할 리가 있나. 얼굴이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포장지 예쁜 시한폭탄을 껴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준희는 한 마디로 그거였다. 시한폭탄.

“여기 맡아보라고 해서.”

“…….”

그러니까 시한폭탄인데…….

‘시한폭탄을 상사로?’

지배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도준희는 가게를 둘러보는 것을 멈추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제대로 살펴봐도 되지?”

“시한……. 아니, 잠깐잠깐, 뭘 살펴봐?”

“내 사업이 될지도 모르는데 잘되어 있나 봐야지.”

‘무슨 네 사업!’

지배인은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잠깐 나와서 일하는 것도 싫어하는 도준희니까, 회장이 미친 소리를 했어도 ‘미쳤구나.’ 하고 반응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왜 이런가. 지배인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래서 여기 맡아보려고? 정말로?”

“어, 뭐…….”

“너 이런 거 흥미 없어 했잖아. 안 해도 돈 많은데 뭐 하러 힘들게 머리 쓰고 몸 쓰냐면서.”

지배인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말렸다.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가 들으면 놀고먹으면서 돈만 쓰는 놈인 줄 알겠다?”

“전혀 그런 의도는 아니야.”

혹시라도 도준희의 핀트가 나갈까 봐 정색하고 부정한 지배인의 매끈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도준희가 일을 하기는 한다. 사납거나 폭력적인 적대 세력이 생겼을 경우 앞장서서 깨부수는 데 많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배인이 보기에 그 일은 도준희에게 일이 아니라 취미였다. 돈 받고 하는 취미. 기가 막히게 적성 잘 맞는 취미 말이다.

“여기도 굴리려면 나름대로 힘드니까 하는 말이지. 난 다 널 생각해서…….”

“그래,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도준희가 마사지 방을 하나씩 열어보며 말했다. 지배인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무슨 생각?”

“수건이나 침구류는 매일매일 빨고 있는 거야?”

“매일은 아니고 이삼일에 한 번씩……. 아니, 무슨 생각이 바뀐 건데?”

“적당한 사업 하나는 굴려봐야지. 가장이 되어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면 안 되잖아. 으, 씨발, 이 방은 왜 이렇게 더러워?”

지배인의 얼굴이 멍해졌다.

“……가장? 너 결혼하냐?”

“때 되면 하겠지.”

때 되면 하는, 그런 막막한 일로 갑자기 이런 식으로 굴 도준희가 아니다.

지배인은 확신했다.

‘여자가 생겼구나.’

그것도 결혼할 여자가 생긴 것이다. 충청남도 천안시의 공인된 미친개에게, 여자 친구가.

‘말세로군.’

지배인은 진지하게 한탄했다. 도준희가 사장이 되면 옷을 벗어야 하나? 매일같이 가슴을 졸이며 사는 건 스트레스성 탈모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졸지에 안정적이었던 일자리의 미래를 걱정하게 된 지배인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도준희는 설렁설렁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아 참, 내가 여기 맡으면 전체적으로 보수 좀 해야겠어. 전에 보니까 방음이 잘 안 되던데.”

“마사지하는데 무슨 방음이 필요해…….”

넋이 빠진 지배인이 힘없이 중얼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막 방문 하나를 연 도준희가 문을 열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어리둥절한 지배인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도준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심상찮은 기색에 지배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뭐 있어?”

“지금 손님 없다며.”

“없는데?”

“근데 왜 여자 목소리가 들려?”

“응?”

“일 제대로 안 하지?”

한심하다는 눈빛에 속을 탁탁 치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벌써부터 주인 행세를 하다니, 눈앞이 노래진다.

“근데 이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인데…….”

미간을 좁힌 도준희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조금 열었다. 지배인이 방을 확인했다.

‘여긴 영훈이 방인데?’

지배인도 도준희를 따라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그다지 크지 않은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짓까지 했단 말이야?”

“그런 짓까지라니.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심정을 생각해야지. 오죽 떨쳐내고 싶었으면 그랬겠어? 그리고 실제로 돈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

“거짓말할 필요 없이 헤어지자고 하면 되는 문제니까.”

“자기야, 그게 가능하면 그러겠어? 집착하고 안 헤어져 주고, 무서우니까 알아서 떨어져 나가란 거지.”

지배인은 눈을 깜박였다. 이영훈의 목소리가 맞았다. 여자는 누구지?

“내가 들어가 볼게. 아무래도 여자 친구를 데려왔나 본데 내가 요즘 너무 물렀나.”

행여나 이런 일 가지고 도준희가 꼬투리를 잡으면 어쩌나 싶어 서둘러 말했다. 그러나 도준희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어.”

“응?”

“아무래도 흥미로운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얘기하는 도준희의 눈동자가 불길할 정도로 반질거려서 지배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와중에도 복장 터지는 커플의 해맑은 대화 소리가 두런두런 이어졌다.

“돈 빌려달라고 하기, 더러운 척하기, 못생겨지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굴어보기 등등, 엄청 많이 시도했을걸.”

“어쨌든 결국은 다 실패했다는 거 아니야. 싸우다가 정든다는 말 몰라, 자기야? 다시 도련님이 좋아졌나 보지.”

“그게 말이 돼? 그렇게까지 하면서 헤어지고 싶었던 사람을? 내 친구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건 찝찝하다고.”

“흥분하지 마. 자기 지금 상태로 그 친구 만나면 싸울 것 같다.”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줘야지.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정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에 없어.”

“…….”

“그러니까 자꾸 좋게만 생각해 보라고 하지 마. 자기는 듣기만 해서 잘 모르나 본데, 곁에서 봐온 내가 더 잘 알아. 걔는 도준희 진짜 끔찍하게 여겨.”

‘도준희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며 대화를 듣고 있던 지배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도준희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헉, 그럼 지금까지 한 얘기가 도준희와 그 애인의 얘기야?’

도준희의 결혼이라니, 이런 속사정이 있었구나. 놀랍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한편 도준희가 가만히 있으라 한 이유를 깨닫자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늦겠다. 이제 나가봐야겠…….”

쾅!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 이지나와 이영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를 발견한 눈이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굳어졌다.

뒤에서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있던 지배인은 도준희의 얼굴이 어떻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곤 침묵했다. 얼굴을 보자마자 단박에 이해가 됐다.

악마처럼 까만 눈동자가 노란빛으로 반질거렸다. 지배인은 슬그머니 한 걸음, 아니 두 걸음 물러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말해봐.”

도준희가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홀리는 악마의 음성처럼 오싹한 소름이 돋아, 굳어진 이지나는 이영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준희를 목도한 이영훈의 상태는 그녀보다 더 심했다. 눈을 홉뜬 채 침을 꿀꺽 삼키자 울대가 거칠게 울렁였다.

이지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지나는 이영훈을 사귄 뒤로, 그가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도준희의 소문을 말해줄 때도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직접 보자 반응이 상상 이상이다. 이지나는 괜히 긴장이 되는 한편, 남자 친구가 이렇게 반응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하자 울컥 화가 났다.

‘도준희가 뭔데 그래.’

이지나는 갑자기 상황이 기묘해졌다 생각하며 도준희를 흘끗했다.

우예린이 만나고 있는 도준희. 대학 시절 강력한 이슈 메이커였던 남자답게, 여전히 근사하고 멋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겉모습 하나만큼은 누구도 홀릴 수 있겠다고 생각할 만큼.

“오랜만이네요, 도준희…… 씨.”

이지나는 방금까지 당황했던 모습을 지우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건 도준희와는 같은 대학 동문이다. 제대로 대화는 해본 적 없기에 호칭이 애매하긴 하지만.

‘호칭 같은 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

“어디까지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못 들은 척해줄 수 있을까요? 도준희 씨 들으라고 한 얘기가…….”

“야.”

‘야……?’

이지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학 때처럼 근사하다고 생각했던 도준희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고 있었다. 이지나는 눈을 깜박였다. 기억 속과 비슷한데 어딘가 다르다. 마치 익히 알고 있던 사진에 검은색 칠을 한 것처럼, 새카맣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말해.”

“…….”

“네 애인이랑 한 얘기,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말해보라고.”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 미소인 건 확실한데 왜 이렇게 한기가 드는 것일까.

“말, 해.”

이지나는 직감이 뛰어난 편이었다. 우예린이 언젠가는 그 얼굴 밝힘증으로 인생 말아먹을 거라고 충고했던 때처럼, 지금도 도준희의 말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대로 순순히 얘기를 하기에는 거부감이 컸다. 우예린에게 얘기를 들으며 생겼던 편견이 도준희를 흰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이지나는 애인의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콰직.

이지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준희의 손을 응시했다. 도준희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투둑, 툭. 핸드폰을 이루고 있던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자 공포가 물밀 듯 몰려왔다.

‘저게 사람이야, 맹수야?’

“사실 도련님은 사람이 아니고 미친개야, 미친개.”

전에 이영훈이 도준희를 가리키며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 해라.”

“그, 그렇게 협박한다고…….”

“말.”

“…….”

“해.”

“…….”

“마지막이다.”

시퍼렇게 빛나는 눈을 보는 순간, 결국 이지나의 고집은 마른 장작처럼 꺾였다. 도준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지나가 늘어놓는 얘기를 들었다.

“……그게 다예요.”

순식간에 지쳐버린 이지나가 말을 마치자 도준희는 딱 한마디를 했다.

“우예린 불러.”

“네?”

“부르라고.”

어느새 극진하게 존대하게 된 이지나는 도준희의 눈이 번뜩이자 더는 묻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찾았다.

* * *

약속 장소에서 이지나를 기다리던 우예린은 이지나가 보낸 한 통의 문자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정이 생겨서 약속 장소를 바꿔야겠다니. 거기다가 바뀐 약속 장소는 마사지 샵이었다.

‘여기서?’

우예린은 뭔가 꺼림칙했지만 이지나가 전화를 받지 않기에 하는 수가 없었다. 마사지 샵에 도착하자 오랜만에 보는 지배인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를 발견한 지배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예린 씨!”

“아, 안녕하세요. 친구 보러 왔는데, 혹시…….”

“이쪽으로 가면 돼요.”

‘왜 이렇게 환대를 해주지?’

우예린은 어리둥절했지만 뭐라고 물을 수도 없어 얌전히 지배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가자 이지나가 있었다.

“예린아.”

“영업하는 곳인데 여기서 대화해도 돼? 나가자.”

“괜찮아. 여기 남자 친구 방이라서.”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엄연히 영업장인데, 나가는 게 좋지 않아? 사정이 생겼다는 건 무슨 일이야?”

“남자 친구 만나러 왔다가, 그게, 저…… 배가 아파가지고 못 나가겠더라고. 여기 좀만 있다가 괜찮아지면 나가자.”

그제야 우예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지나를 살폈다.

“많이 아픈 거야? 병원 갈까?”

다정한 우예린의 목소리에 이지나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그 정돈 아니야. 이대로 좀만 앉아있으면 될 것 같아.”

우예린은 걱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지나의 웃는 표정이 어색한 걸 보면 어디가 아프기는 아픈 모양이었다.

“걱정 마. 조금 쉬면 나을 거야.”

“그러면 다행이고.”

이지나의 손을 잡은 채 우예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에 도준희에게 마사지를 받았던 일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멀쩡한 마사지 샵을 이상한 곳으로 오해하고, 도준희를 만나서 설레고, 갑자기 용감해져서는 이거, 저거 민망한 요구를 했던 기억도 함께 스쳤다.

도준희가 그런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끄응, 신음을 흘리자 이지나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왜? 너도 어디 아파?”

“응? 아니, 괜찮아.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예린아, 아까 말 함부로 한 거 미안해.”

우예린은 갑작스러운 이지나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

“길들여진 여자 같다고 한 거 말이야. 생각해 보니 네가 기분 나빴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아, 그거. 괜찮아.”

기분이 좀 그렇긴 했지만 사과를 받았으니 됐다. 우예린이 살짝 웃자 이지나가 머뭇거렸다.

“왜? 뭐 할 말 있어?”

“도준희랑은……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어?”

“헤어지려고 했잖아.”

“아, 그랬지.”

“마음이 바뀐 거야?”

길들여진 여자라고 말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이지나의 태도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평소보다 차분한 게 그녀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음이 바뀌었냐고?’

가끔, 도준희와 있는 순간이 좋을 때도 있지만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도준희는 여전히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남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이지나의 얼굴이 흐려졌다.

“근데 왜 계속 같이 있어?”

“…….”

“궁금하고, 이해가 안 가기도 해서 그래.”

이지나를 쳐다보자 그녀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우예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계속 같이 있냐는 질문에 떠오르는 답은 하나였다.

“도준희가 떠나지 못하게 해서…….”

맞는 말을 하는 건데 왠지 양심이 콕콕 찔렸다. 100퍼센트 진실을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날 거라는 거네?”

“…….”

“헤어지고 싶어 하는 거잖아.”

이지나가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묘하게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우예린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지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예린은 조금 늦게 대꾸했다.

“그래야지.”

대답은 했지만 이것 역시 꺼림칙했다. 100퍼센트 진심은 아닌 탓이다.

‘그래, 인정하자.’

솔직히 얘기하자면 도준희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싫지는 않았다. 부모님과 있을 때보다 더 안정감을 느꼈던 때도 있었고, 이런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즐거웠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그렇다고 얘기하기가 꺼려졌다. 도준희는 나쁜 사람이다. 멀리해야 할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서일까? 도준희와 함께 있는 게 즐겁다고, 좋다고 솔직하게 얘기하기가 힘들었다.

시무룩하게 입술을 달싹이던 우예린이 마침내 결심하고 이지나를 바라보았다.

“지나야, 실은…….”

그때였다. 갑자기 이지나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우예린의 손을 잡았다.

“지나야?”

“예린아, 미안해.”

“…….”

“내가 협박에 못 이겨서 그만. 끝까지 거부하려고 했는데 너무 무서워서…….”

눈가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예린은 손등에 닿는 뜨거운 눈물에 불에 덴 듯 놀랐다. 훌쩍이는 이지나를 보자 뒷골이 띵했다.

‘협박?’

이지나가 우예린의 뒤를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고개를 돌려 이지나의 시선을 좇았다. 문이 열리고 도준희가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우예린은 이곳까지 오면서 느꼈던 이상함의 정체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도준희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미안해, 예린아.”

뭔가 집요하다고 느꼈던 이지나의 질문도 도준희의 입김이 닿았을 게 분명했다. 친구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는 이지나를 보자 한숨이 푹 나왔다.

놀라움이 가시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예린은 이 불쾌한 분노가 생소했다. 이지나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자신도 처음에 도준희의 본성을 알았을 때 제대로 대거리 한 번 하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는가. 도준희의 정체를 아는 사람 중에 도준희를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괜찮아.”

“…….”

지금 화가 나는 대상은, 이지나가 아니라 도준희다.

이지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뒤를 돌아보자 도준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지나에게 말했다.

“야, 넌 이제 나가.”

이지나가 눈물을 뽑으며 도준희와 우예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매사 당당하던 이지나가 쪼그라든 모습에 우예린은 기가 막혔다.

“나가 봐. 나 도준희랑 얘기할 거 있어.”

“괜찮아?”

이지나가 우예린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도준희와 한 방에 둬도 되는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우예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나는 방을 나가기 직전까지 우예린을 힐끗거렸다. 이지나가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도준희가 문에 등을 기대고 우예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가게 해달라고 하더니, 뒤에서 내 욕을 하려고 그랬어?”

도준희가 생각보다는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예린은 마사지대에 앉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도준희가 목을 좌우로 돌리며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의 눈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뒤통수가 얼얼하네.”

우예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도준희의 눈치를 보며 짓던 어색한 미소조차도 없었다. 무덤덤하고 불길하게 침착한 태도에 도준희가 이죽거리다 말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입이 붙었어?”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생각하는 중이에요.”

우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준희는 과장된 몸짓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던 것을 관두고, 여분의 마사지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래서 생각은 끝났어?”

“네.”

어두운 목소리에 도준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떤데?”

“화가 나는 것 같네요.”

도준희는 우예린의 얼굴을 살폈다. 언뜻 고요한 것 같은 우예린은 평소보다도 표정이 없어 무덤덤해 보였다.

“왜 화가 나는데.”

“도준희가 내 친구까지 이용했으니까요.”

“…….”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괜찮아요. 그렇지만 아무 상관 없는 지나에게는 이러면 안 되는 거죠.”

“…….”

“뭐라고 했기에 지나가 도준희를 그렇게 무서워해요?”

도준희는 우예린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지금 화를 낼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 아닌가?”

“…….”

“이지나에게 돈을 빚졌다고 했던 것도 다 거짓말이었다는데. 그게 진짜인지부터 말해야지.”

“……맞아요. 내가 거짓말한 거.”

순순한 수긍을 예상 못 했는지 도준희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우예린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도준희가 말로 해서는 내 의견을 안 들어주니까요.”

“…….”

“그렇게라도 정을 떨어뜨리고 싶었어요.”

“……왜?”

“도준희에게서 벗어나려고요.”

우예린의 진심이 투명하게 느껴지는 담담하고도 직설적인 말에 도준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 질문밖에 모르는 것처럼 도준희는 재차 이유를 물었다. 우예린은 잠깐 생각에 잠겨 침묵하다가 말했다.

“내가 도준희를 알았던 것보다, 도준희가 나를 알아온 시간이 길다고 했죠.”

“…….”

“그러면 알 것 아니에요.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얼마나 무서워하고…….”

“…….”

“싫어하는지.”

도준희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때까지 착한 사람인 척했던 거잖아요.”

도준희는 팔짱을 낀 채 우예린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한 방 먹었네.”

“…….”

“맞아, 그랬던 거.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아서 다 때려치우기로 했고.”

“…….”

“그래서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싫고 피하고 싶다?”

도준희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우예린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도 나한테 끌려왔잖아. 내가 무서워서든, 내 얼굴에 홀려서이든 내게 말렸잖아.”

“…….”

“근데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런다고.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래서 내가 지금, 이해가 안 가는데.”

“상황이 이상하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어요. 얼떨결에 끌려가는 것도 그만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도준희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번에야말로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거다?”

“…….”

“지금까지 나와 있던 게 끔찍해서?”

“…….”

“내가 무서운데도 결국 헤어지자고 말할 만큼?”

도준희는 그의 성격대로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담담함을 유지했던 우예린이 움찔했다. 그녀의 유순한 눈매가 아래로 처졌다. 그러자 꼭 우는 것처럼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헷갈려서 그랬어요.”

“…….”

“도준희가 무서웠지만 싫기만 했던 건 아니니까요. 도준희를 좋아했던 것도 맞고, 도준희의 본성을 무서워했던 것도 맞고, 같이 있을 때 당황하고 황당했던 적도 많지만 즐거운 때도 있었으니까.”

“…….”

“나도 내 마음이 혼란스러웠어요.”

우예린이 침착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도준희는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그래, 네 말대로 즐거운 적이 많았잖아. 됐네, 그러면. 나가자. 밥 먹어야지.”

급하게 대화를 끝내려고 하는 도준희의 말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갑자기 화가 나요.”

우예린이 고개를 들어 도준희와 눈을 맞추었다. 일그러진 눈을 보며 도준희는 달싹였던 입술을 다물었다.

“즐거웠던 적이 있어도 도준희가 내 의사를 무시하고 함부로 한 게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

“지금도 봐요. 지나를 협박하고, 나를 불러내고.”

“…….”

“내가 나와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건 도준희의 이런 방식이에요.”

“…….”

“깨닫게 된다고요. 도준희와 내가 정말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거.”

우예린은 입 밖으로 흘러나가는 목소리가 자기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순간이 좋아도, 아닌 건 아닌 거잖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화목했던 도준희와 자신인데 어째서 이런 무거운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나중에 치우겠다고 상한 음식에 올려두었던 덮개를 비로소 열고 문제를 확인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들춰봤어야 할 문제를, 우예린은 지금에서야 도망치지 않고 대면했다.

도준희가 사납게 눈매를 접었다. 미간에 진 주름은 깊었고 웃을 때마다 볼 한쪽에 패던 보조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라면 무서워서 눈치를 보았을 분위기인데도 우예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준희가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고,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과연, 거친 분위기를 뿜어내면서도 도준희는 화를 참고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나 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우예린이 놀란 눈으로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도준희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최근 며칠간은 헷갈렸지만.”

“…….”

“근데 넌 여전히 내가 싫다는 거네.”

우예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도준희는 화를 참는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우예린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날 싫어하는 이유가…….”

한쪽 눈을 찡그린 도준희가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하네, 머리가.”

손으로 머리를 받친 도준희가 우예린을 노려보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그냥 나 좋아하면 안 되냐?”

“…….”

“이거, 저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나 좋아하면 안 되는 거냐고.”

우예린은 대답하지 않은 채 도준희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던 도준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가 거친 목소리로 씩씩거렸다.

“무슨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씹, 다른 사람이니 뭐니 그런 건 내 귀에 개소리로밖에 안 들려. 네 친구도 내 앞에서 개소리를 지껄이기에 널 불러내라고 한 것뿐이야. 손도 댄 적 없어.”

“…….”

“그래도 그런 것들이 너한텐 중요하겠지. 내가 아무리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해도, 너는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잖아. 너에게 난 이미 그런 사람이니까.”

“…….”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 안 하고 내 곁에 있을래.”

도준희가 사나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긍정적으로 답변하는 건 주저했다.

도준희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도저히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똑똑한 네가 말해봐. 어떻게 하면 네가 나를 안 무서워하고, 다른 놈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할 수 있는 건데.”

“……모르겠어요.”

“…….”

“내가 우예린이 아니고 도준희가 도준희가 아니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씨발.”

도준희가 짧게 뱉었다. 분노가 응축된 목소리였다.

“결국 안 된다는 말을 복잡하게도 하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준희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우예린은 솔직하게 말했다. 도준희와 있는 게 즐겁다가도, 이렇게 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와 자신의 다른 점을 목격하면 언제 그런 생각이 들었냐는 듯 자신이 없어졌다.

침묵이 감돌았다. 화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도준희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없으면 너, 잘 살 것 같아?”

우예린은 도준희가 노려보는 시선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전에는 그가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는데 말이다.

“나를 떼어내려고 온갖 이상한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잘 살 것 같아?”

비웃는 것 같은데도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 이상하고 희한한 일이다. 우예린은 멍하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희가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래, 그만하자.”

“…….”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도준희를 가만히 살폈던 우예린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날이 새파랗게 선 검은 눈동자에 맺힌 습윤한 막 때문이었다.

“헤어져, 씨발.”

욕설도 투정처럼 느껴졌다.

“이제야 너와 헤어지는 것 같네. 네가 문자로 일방적으로 통보했던 그때보다는.”

도준희가 우예린을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홱 몸을 돌렸다.

쾅!

문이 부서질 것처럼 굉음을 내며 닫혔다. 도준희의 거친 걸음 소리가 문 너머로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자신은 내내 도준희와 헤어진 건 그때라고 생각했다. 연애를 해본 적 없는 자신으로서는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모든 관계가 깔끔하게 끊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 보니 헤어진 게 아니라 싸우고 있었던 듯했다. 이미 헤어진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헤어지는 순간은 지금인 것 같은 걸 보면.

그렇게 도준희와 헤어지고 싶어서 난리를 쳤는데 이렇게 쉽게 해결이 되다니, 지금 이게 현실이 맞을까?

“뭐야, 도준희랑 끝내는 것도 별거 아니잖아.”

목소리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생각보다 후련하지 않았다. 도준희와의 관계가 이상해서였을까. 그 괴롭다는 이별이 생각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심장이 바람으로 되어있는 것처럼 공허하고 허탈했다.

끝났다. 끝이다. 끝을 되뇌는데도,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왠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도준희는 진작 방을 나갔지만 아직 그와 연결된 듯한 기분이었다.

“예린아, 괜찮아?”

고개를 들자 언제 들어왔는지 이지나가 와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던 우예린은 갑자기 튀어나온 듯한 이지나의 존재에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디 맞았어? 맞은 거 맞지?”

확신에 찬 이지나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얘기만 들었지 정말 또라이 아니야! 핸드폰을 손으로 쥐기만 했는데 그걸 완전히 바스러뜨렸다니까.”

이지나가 훌쩍이며 말했다.

“남자 친구한테 더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러잖아. 조금만 더 늦었으면 경찰에 신고할 뻔했어!”

“…….”

“정말 어디 안 다친 거 맞아? 네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난…….”

얼이 빠진 우예린의 상태가 이상했는지 이지나가 재차 물었다.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희는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조차 대지 않았다. 도리어 축축했던 도준희의 눈을 떠올리자 가슴이 불에 덴 듯 지끈거렸다. 토해내듯 말했다.

“도준희랑 헤어졌어.”

“잘했어. 같이 있으면 심장이 떨려서 어디 살겠니?”

기뻐하는 이지나의 목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나야, 이런 게 이별이야?”

“…….”

“느낌이 이상해.”

우예린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이지나는 그제야 그녀의 상태를 깨달았다.

“당분간은 그래.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거야.”

자신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능숙한 이지나의 충고다. 부정적인 마음 상태와 달리 우예린은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 * *

그날 이후, 우예린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도준희와 만난 때부터 3개월이 넘은 시점이었다. 오랜만에 방을 청소한 우예린이 창문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찌는 듯이 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덧 선선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평일 동안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던 우예린의 주말은 폭풍 같았던 평일과 달리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달그락.

우예린은 홀로 밥을 차려 먹었다.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자 이빨 사이로 하얀 쌀알이 으깨졌다. 왜인지 밥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단 지금만이 아니라, 회사에서도 밥맛을 느껴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너무 정신없이 일해서인가. 우예린은 미뢰가 사라진 것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음식을 의무적으로 씹다가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었다. 일을 많이 해서 정신이 없는 것과 입맛이 없는 것은 큰 상관관계가 있지 않았다. 그녀는 공부가 더 잘될수록, 일을 많이 할수록 입맛이 도는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도준희의 집에서 밥은 맛있게 먹었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이지나의 충고를 곱씹으며 밥을 비워갔다. 반 공기밖에 되지 않는 밥을 먹어치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이 막혀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밥 한술을 뜨는 순간, 밥알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특별히 슬픈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먹먹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우예린은 숟가락을 쥔 채 굳어졌다. 눈물은 조용히 떨어졌다. 쉼 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우예린은 결국 식탁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겪는 괴로움이었다. 이별의 고통은 이별을 한 직후에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진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고 가슴은 쓰라리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데, 언제 괜찮아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구나?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그 시간이 아득할 만큼 현재가 괴로웠다.

우예린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고통이 자신이 그를 좋아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좋든 싫든 간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인지.

‘도준희는 뭘 하고 있을까.’

이제는 그의 일상마저 궁금했다.

‘나처럼 힘든 걸까.’

헤어지기를 그렇게 싫어했던 사람이니까. 당연히 더 힘들겠지 생각해도, 도준희는 도준희이니만큼 자신이 없어졌다. 한참 자신을 욕하고 휙 잊어버리지는 않았을지. 그 생각을 하자 속이 턱 막힐 만큼 억울해졌다.

우예린은 더는 먹기 싫은 밥그릇은 치우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 건 본인이면서도 도준희가 자신을 쉽게 잊었다면 화가 날 것 같았다.

* * *

그 시각, 도준희는 우예린의 예상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충열파의 중간 아지트에서 검은색 가죽 소파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도준희는 인상을 쓴 채 담배를 뻑뻑 피웠다.

트레이드 마크인 야자수 셔츠를 걸친 이종배가 부하에게 눈짓하자 눈치 빠른 부하가 재빨리 움직여 창문을 열었다. 너구리 굴처럼 방안을 가득 채웠던 하얀 연기가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종배는 양손을 깍지 낀 채 도준희를 살폈다. 그건 이종배만이 아니었다. 뒤쪽에 시립한 부하들도 손을 얌전히 모은 채 도준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도준희가 오기 전까지는 카드놀이를 하면서 낄낄댔던 자유분방한 부하들이 얼차려를 시킨 것도 아닌데 각이 빳빳하게 섰다.

‘아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군.’

이종배는 신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불안하게 꼼지락댔다.

일주일 전, 문을 부서뜨릴 듯 열고 들어온 도준희의 사납다 못해 폭풍우 치는 바다 같은 기세는 배불리 먹고 나른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던 이종배를 비롯한 부하 직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씨발!”

거친 욕설에 부하들의 머리가 꼿꼿이 섰다.

“어쩐지 이상하게 군다 싶었어.”

겁을 먹은 부하 직원들을 대표해 나선 이종배는 도준희에게서 진상을 듣고 섣불리 앞으로 나선 스스로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도준희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 같았고, 이때 잘못 나섰다가는 이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씨발. 깜찍하다 깜찍해.”

도준희는 담배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까딱했다. 부하 직원이 후다닥 달려와 라이터를 켰다. 몇 년간 담배를 물고만 있지 피우지는 않았던 도준희가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는 상황에, 이종배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경고의 봉화같이 느껴졌다.

뿌연 연기 사이로 도준희의 살벌한 표정이 드러났다.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저 표정이었다. 집에 가지도 않고, 툭하면 사무실에 찾아와서 사무실을 너구리 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종배와 부하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폐암에 걸리기 전에 도준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럴 거면 화해하세요.”

“화해? 하, 화해는 무슨.”

거세게 코웃음을 친 도준희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뺨 한쪽에 보조개가 생겼다. 천사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얼굴로 한이 서린 코웃음을 쳤다.

“난 이대로 기다리면 돼. 아무렴 씨발, 걔가 나 같은 사람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어?”

‘만나기 쉽지 않기는 하지.’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사형수의 목을 치는 망나니, 혹은 오랑캐를 치고 다니는 대장군 등, 수없이 피를 묻히는 일이 어울렸을 사람이다. 이토록 광기가 어울리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는 없을 터.

도준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씨발, 처음에는 얼굴에 혹하고 내 몸에도 혹했던 애가!”

큰소리가 나자 자기들에게 불똥이 튈 것 같았는지 부하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성격, 그거 좀 안 맞는다고 이런 식으로 깜찍하게 굴어?”

이종배의 오지랖이 개구리처럼 튀어 나갔다.

“예전이야 성격도 잘 모르고 선봐서 결혼했다고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좀 많이 바뀌었지 않습니까. 성격이 중요하긴 하죠.”

“……내 성격이 별로라는 거냐?”

도준희가 필터를 쭉 빨았다. 담배 연기가 화산 연기처럼 뭉게뭉게 올라왔다. 그 연기 너머 검은 눈동자가 짐승처럼 반질거렸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종배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도련님이야말로 요즘 같은 시대에 최고로 치는 성격 아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아부를 떨자 도준희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근사하고 매끄러운 눈꼬리였지만 이종배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

“합법적으로 먹여 살리겠다고 일도 구하고 있는데, 어? 뭐가 부족해서…….”

이종배는 도준희가 성질을 부릴 때를 대비하여 근처에 깨부술 수 있는 조직이 있나 머릿속을 뒤적였다.

도준희가 부르라 하면 당장 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도준희는 시간이 지나도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침묵을 지키는 도준희의 어깨가 슬며시 아래로 처졌다.

긴장하고 있던 이종배는 도준희의 안색을 살폈다. 도준희가 꽁초에 가까워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툭 꺼냈다. 긴 손가락이 연필을 굴리듯 담배를 굴렸다.

“……종배야.”

“네.”

“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냐?”

“예?”

성질을 내는 대신 축 처진 목소리에 이종배는 귀를 의심했다. 도준희가 눈을 내리깔았다. 짐승의 것처럼 노랗게 반질거렸던 눈동자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착한 척을 해도 안 되는 거면, 원래 나대로 굴자 싶었는데 그게 잘못된 거냐?”

“…….”

“익숙해지면 싫은 것도 좋다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

“네?”

“처음엔 확고하게 싫었던 것도 익숙해지면 좋은 거라고 착각하게 되잖아.”

그런 마음에 무대포로 여자를 곁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않을 논리에 이종배는 말을 잃었다.

“그래도 안 되네.”

도준희가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약간 침울한 얼굴을 보니 지금까지 했던 일을 후회하는 것도 같았다. 다소 슬퍼 보이는 기색에 이종배는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지만, 어릴 때부터 봐왔던 도준희가 힘들어하자 미워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안하무인에 모두를 발밑에 두고 보았던 도준희도, 사람 마음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한 여자를 몇 년이나 그냥 두고 지켜보았는지 전해 들었던지라 괜히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 이제는 포기할 만도 하지.’

“도련님은 할 만큼 하셨습니다.”

이종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도준희가 담배를 피우며 이종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들었으면 재떨이부터 날아왔을 텐데.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에 와닿는 바가 있나 보다, 생각한 이종배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여서 되는 게 아니더라는 걸, 저도 살아보니까 알게 됐어요.”

“…….”

“아닐 인연은 그냥 놓아주는 게 깔끔하죠. 뒤탈도 없고요.”

그러니까 애꿎은 여자 괴롭히지 말고 놓아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는 속내를 삼킨 이종배에게 도준희가 눈을 내리깔며 툭 말했다.

“뭔 개소리냐?”

“네?”

“무슨 개소리를 하냐고.”

“놓아주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뭐? 내가 왜?”

도준희가 한 팔을 소파 등받이에 올리며 다리를 꼬았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자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퍼져나갔다.

“놓아줄 생각 없어.”

이종배가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헤어지셨다면서요?”

“잠깐 시간을 두는 거야.”

“…….”

“떨어져 있으면 내 소중함을 알게 되겠지.”

‘그럴 리 없을 것 같은데요.’

이종배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정말 재떨이로 머리가 깨질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우예린이 먼저 연락하도록 기다릴 거야.”

“끝까지 연락이 없으면 어떡하시려고요?”

도준희는 잠깐 고민하는 듯 눈을 깜박였다.

“종배야.”

“네, 도련님.”

“섬.”

“…….”

“얼마면 살 수 있겠냐?”

이종배는 섣불러 입을 열지 않았다.

“한집에 사는 걸로 안 되면 아예 사람을 못 만나게 해야지.”

“…….”

“무인도면 되지 않겠어?”

이종배는 음식물이 얹힌 것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도준희보다 여자를 많이 만나본 만큼, 여자의 심리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다. 도준희의 외모와 재력, 아주 가끔 그의 미친 성격에 반한 여자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도준희가 홀딱 반한 여자에게 그런 것들이 효과가 있느냐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도준희가 이렇게 답지 않은 행동을 했음에도 끝까지 그를 거부하는 여자라면, 연락을 하지도 않을 게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별짓을 다 했는데도 안 됐는데 갑자기 사랑을 깨달아 연락을 해올 리가…….

‘없지.’

그렇게 되면 도준희가 어떻게 굴지 눈앞이 노래졌다.

“그래도 끝까지 여자가 도망가면요?”

여자가 도준희에게 마음을 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단언한 이종배의 마음이 목소리에 스며들었을까. 도준희가 두 손가락으로 담배를 쥐었다. 후우, 입김을 불자 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재수 없는 소리 하네?”

너무 나섰구나. 얼굴이 파랗게 질린 이종배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통수로 도준희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걸 바라나 보지?”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걸 보기 싫다?”

‘이 미친개가 또!’

이종배는 탁자에 두 손을 올리고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쿵쿵 이마로 탁자를 찧었다.

“절대 아닙니다!”

후우, 도준희가 연기를 뿜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분간은 나랑 같이 훈련 좀 하자.”

“후, 훈련 말입니까?”

이종배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물었다.

“어, 세상이 평화롭다 보니 다들 빠졌어. 나사 좀 바싹 조이자.”

이종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목을 좌우로 굴리는 도준희의 관절에서 뚝, 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도준희가 말하는 훈련이라면, 이 일대의 온갖 위험한 시궁창을 돌자는 말일 거다. 아주아주 소수의 인원으로, 위험한 여정을 하자는 말이다. 그게 도준희식 훈련의 정체다. 몸 성하게 빠져나오면 천지신명의 천운이 따르는 거라는 그 지옥의 훈련!

“댁에는 안 들어가시고요?”

도준희가 마음을 돌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돌려 묻자, 도준희가 태연하게 말했다.

“우예린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면 화나. 우예린이 연락해 올 때까지는 여기 있을 거다.”

얼굴이 푸르죽죽해진 부하들이 제발 어떻게 좀 말려보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이종배로서도 방안이 없었다. 이종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부하들은 아찔한 듯 한숨을 길게 쉬었다.

“차라리 먼저 연락해서 도련님의 마음을 사실대로 전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지랄. 내가 먼저 연락할 일은 절대 없어.”

도준희가 담배 필터를 살벌하게 깨물며 중얼거렸다.

결국 이 살얼음판에서 벗어날 방법은 도준희가 그 여자와 잘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일단 두 달만 참아봐라.

도준희와 헤어진 후 우예린이 이지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이별에 대해 묻는 사람은 많지만, 답은 대체로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우예린은 요 며칠간 절절히 깨달았다.

이별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명쾌한 답은 시간이었다. 2개월이라는 구체적인 시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예린은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백기를 들었다.

그만하자는 말을 나눴던 당일 멀쩡했던 게 신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우예린은 하루하루 말라가는 식물처럼 힘들어했다. 왜 이렇게 힘든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매일같이 함께 밥을 먹고 살을 맞대고 대화를 하고 얼굴을 보면서 쌓였던 시간이 피부 아래에, 혈액에, 세포에 단단히 자리 잡은 게 분명했다.

‘이건 억울해.’

우예린은 자신이 느끼는 이 모든 고통과 잘못을 도준희에게 넘기고 싶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신이 잘못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잘못이라면 천사의 거죽 아래 숨겨진 도준희의 본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설렜다는 죄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잘못에 비해 고통은 너무나도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를 좋아할 리 없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그렇게 되뇌었던 것 자체가 그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임을 모르지 않았다. 단순히 마음이 흔들린 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침대에 누워 훌쩍이면서 깨달았다.

‘내가 먼저 연락할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놀라울 만큼, 연락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났다. 우예린은 제 속에 악마가 들어앉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도준희의 사주를 받은 악마가 이 안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도준희의 소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우예린은 침울했다. 내심 도준희가 연락을 하며 억지를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도준희에게선 단 한 통의 문자도 전화도 오지 않았다. 우예린은 점차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함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컨디션 난조는 회사에서도 계속되었다. 우예린의 눈은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집중을 할 때처럼 초롱초롱하지는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우예린이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두 손으로 책상을 쾅 쳤다.

“어린 왕자의 길들여진 장미!”

“깜짝이야!”

눈을 크게 뜬 우예린은 커피 잔을 쥔 채 놀란 얼굴을 한 지수련을 보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 뭐 할 말 있어?”

“할 말은 네가 있는 거 아니니? 고민이라도 있어?”

지수련이 일부러 우예린을 위해 가져온 커피를 건네었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야.”

우예린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상황이 왜 억울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는가 하니 딱 어린 왕자의 장미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경계했건만 결국 도준희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지수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최강현과 김 대리를 보고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아아, 나 일이 아직 남아있어서 이만 내 자리로 가볼게.”

갑작스러운 데가 있는 지수련의 등장과 퇴장에 눈을 끔벅이던 우예린은 뒤늦게 가까이 다가온 최강현의 존재를 눈치챘다. 얼빠진 얼굴로 한발 늦게 반응하자 최강현이 미간을 좁혔다.

“오늘 좀 이상하군.”

“아,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자잘하게 실수를 했던 일이 생각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전에는 전 임원이 참여하는 회의가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회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은 것을 보니 그때 상태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공사는 구분했어야 했는데.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일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최강현이 살짝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우예린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복잡한 눈으로 한숨을 쉬듯 말했다.

“남자 친구 문제야?”

“예?”

신경이 곤두섰다.

“애인이 있는 거, 몰랐어.”

“…….”

“나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신경이 쓰이는군.”

‘아, 전의 그 일 말하는 거구나.’

최강현은 주변을 신경 쓰는 듯 목소리가 낮았다. 그러면서도 따로 자리를 청하지 않는 걸 보면 같이 있는 걸 피하는 듯도 했다.

우예린이 동그랗게 떴던 눈에서 슬며시 힘을 뺐다.

“아닙니다. 제 문제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과장님.”

신경 쓰는 게 더 불편하다. 우예린이 어색하게 대꾸하자 최강현은 잠깐 침묵했다.

“……헤어졌나?”

마음을 놓았던 우예린의 눈꼬리가 움찔 떨렸다. 왜 이런 것까지 물어보지. 달갑지 않게도 아픈 곳을 찔린 것 같았다. 우예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강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괜한 걸 물었나 보네.”

우예린은 아직도 연애 문제에 있어 능숙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벼락같이 깨달았다. 질문에 섞여있던 최강현의 마음을. 미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 터였다.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단호해져야 한다.

“화해할 거예요.”

“…….”

“이번에는 제가 먼저요.”

이제까지 애매모호했던 문제를 최강현 앞에서 단언했다. 최강현에게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 뱉은 말이었는데 머릿속이 맑게 개는 듯했다.

맞는 말이다. 화해든 정말 끝이든, 분명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찝찝한 마음 상태로는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지나도 만족스럽지 못할 거다.

“……그래.”

“…….”

“잘되길 바라지.”

스스로의 상태에 집중했던 우예린이 아차, 하고 최강현을 올려다보았다. 의외로 개운한 표정이다. 최강현 또한 자신과 같은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최강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일에만 집중하지.”

“네, 알겠습니다.”

어쨌든 최강현의 시원한 표정에 우예린도 마음이 편해졌다. 명료하게 대꾸하자 최강현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최강현이 돌아간 후, 우예린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연락해 보자.’

우예린은 핸드폰을 흘끗했다. 갑자기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이따가, 퇴근하고 나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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