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우예린은 좀 더 생각을 정리하고 연락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으로 입술이 말랐다. 연락하자고 생각하자마자 머릿속에서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
만약 연락했는데 도준희가 반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런 고민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전에는 알아서 떨어져나가길 간절히 원했는데 말이다.
우예린은 주택가 사이를 걸어가며 잠잠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원인은 이것 때문이다.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핸드폰.
도준희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하게 만드는 이 연락 없는 핸드폰.
“하아.”
한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우예린은 문득 주변이 적막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타닥.
귀에 이상한 소음이 잡혔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원래도 사람이 북적이는 곳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도 사람이 없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할아버지를 보며 우예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상한 소리는 할아버지의 걸음 소리였다. 후우, 한숨을 쉰 우예린은 최대한 벽 쪽으로 몸을 붙이면서 걸었다.
탁, 탁.
이윽고 나타난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으며 곁을 지나갔다. 우예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예민했나, 턱을 긁적이고 걸음을 옮겼다.
탁!
미세한 걸음 소리가 귀를 스쳤다. 우뚝, 걸음을 멈춘 우예린은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잠시 후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번에는 틀림없다.
‘누가 있어.’
생각에 잠겨 거북이걸음보다 느리게 걸어온 탓일까. 원래의 퇴근 시간보다 조금 늦은 원룸 거리는 인적이 드물어 스산하게 느껴졌다.
또각또각.
낮은 굽이 내는 소리가 귓가를 콕콕 쑤셨다. 우예린은 혹여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할까 두려워 부러 천천히 걸었다. 구두 소리가 작아지자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따라붙는 소리였다.
오싹.
소름이 돋은 우예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직 자취방까지는 10분을 더 걸어야 했다.
‘택시를 탈걸.’
여성을 상대로 한 흉악 범죄 사례가 머릿속을 점령하자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우예린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아직 주택이 늘어선 거리라 도망갈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울타리가 쳐진 주택을 보자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다.
곧이어 사방에 빽빽한 원룸 건물이 나타나자 우예린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따닥. 따닥. 따닥.
구두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녀가 갑자기 속도를 내자 예상하지 못했는지 뒤가 웅성거렸다.
타닥.
쫓아오는 걸음 소리가 빨라졌다. 작게 욕설이 들린 것도 같았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따라오고 있는 게 확실해지자 우예린은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달리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 원룸 거리에 대해선 잘 알았다. 우예린은 재빨리 어느 원룸 건물의 주차장에 들어가 숨었다. 이 일대 원룸은 공동 현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는 구조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우예린은 핸드폰을 꺼내어 도준희의 번호를 눌렀다. 112라든지 119라든지, 민중의 지팡이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도준희가 생각났다. 도준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뚜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가기 시작했다. 세 번의 신호음이 울릴 때도 도준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예린은 핸드폰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주차장 밖으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어?”
“여기 없는데요?”
“빨리 찾아!”
거칠고 사나운 목소리에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우예린은 주차장 벽에 등을 기댄 채 핸드폰만 생명줄인 양 붙잡았다.
―……어.
신호음이 열 번을 넘어가자, 드디어 기계적인 신호음 대신 도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우예린은 눈물이 왈칵 났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우예린이 전화를 다 하고.
도준희의 느긋한 소리에 반응할 정신도 없었다.
“도준희…….”
우예린이 훌쩍이며 혹여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들었다.
―뭐야, 너 왜 그래?
무섭게 굳어진 도준희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안심이 되어 우예린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설명해 봐.
“누가 쫓아와요.”
우예린은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지고 한 달이 넘어서 하는 대화가 이런 것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숨길 수 없는 불안감에 목소리 끝이 떨렸다.
―감히 어떤 새끼가.
으득. 도준희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한 우예린에게 도준희가 거기가 어딘지 물었다. 더듬더듬 원룸 건물의 이름을 말하자 수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전화 끊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지금 갈 테니까.
사납고 딱딱한 어투에 안심이 됐다. 우예린이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씨발, 누구든지 걸리면 주리를 틀어버린다. 너, 거기서 딱 기다려.
입술에 풀이 붙은 듯 다물렸다. 몸을 묵직하게 했던 두려움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모골이 송연할 만큼 오싹한 목소리에 도리어 안심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아무도 도준희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욕설조차 반갑게 들려왔다.
―지금 차 타고 가고 있다. 그 새끼들 아직 있어?
우예린은 바깥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빠른 발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아직 근처에 있어요. 날 찾는 것 같아요.”
―소리 내지 말고 기다려.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폭 운전을 하고 있는지 간간이 경적 소리가 귀청을 뚫을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찰칵. 탁.
차에서 내리는 소리에 우예린은 귀를 쫑긋하고 수화기를 귀에 더 가까이 댔다. 수화기의 소리가 변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듯했다.
“도준희? 왔어요?”
대꾸 대신 은은한 분노를 담은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이 씹새들이…….
무슨 상황이지? 우예린은 어리둥절하게 눈만 깜박이다가 찢어지는 비명에 핸드폰을 꽉 잡았다.
“으아아악!”
비명은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우예린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눈을 굴리고, 웅크리고 있던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다.
“으악, 으아악!”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점점 더 격해졌다. 우예린은 귀에서 떨어뜨린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화기에서도 비명이 흘러나왔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차장에서 벗어난 우예린은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땅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도준희. 흰 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 평소 집에서 보던 차림과는 사뭇 다른 복장의 도준희가 있었다. 막 길쭉한 다리가 올라가고, 발등이 도망가는 남자의 뒤통수를 찼다.
빡!
소름 끼치는 소리와 달리 다리를 땅에 내려놓는 도준희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우예린은 폭력의 행위를 ‘우아하다’고 느낀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도준희가 넘어진 남자의 뒤통수를 잡아 뒤로 젖혔다. 할짝, 혀로 아랫입술을 핥는 그의 눈이 특유의 광기로 반질거렸다. 우예린은 그제야 도준희가 자신의 부름에 여기 와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누구 짓이냐?”
“무, 무슨…….”
“누구 사주로 여기까지 왔냐고.”
도준희가 남자의 귀에 대고 사근사근하게 속삭였다. 눈은 희번덕거렸다. 마스크를 쓴 사내는 덜덜 떨며 말을 못 했다.
우예린은 여섯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것에 경악했지만 곧 도준희에게 꼼짝도 못 하는 사내들을 보자 넋이 나갔다.
“강단이 있네?”
“…….”
“내 말도 씹고.”
도준희는 불쾌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듯 흥얼거리자 사내가 몸을 더 크게 떨었다. 도준희가 한 손을 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남자의 눈에도 서서히 올라가는 손이 보였을 것이다. 깨진 유리처럼 눈을 굳힌 남자가 재빨리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저, 접니다, 도련님!”
“뭐래, 이 씹새……가?”
흐, 비웃던 도준희가 눈을 움찔했다. 눈썹이 위로 치켜세워졌다.
“……너.”
도준희의 반응에 두려움에 질린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 살려주세요.”
상황을 지켜보던 우예린은 무심코 넘겼던 단어를 되씹었다.
“도련님?”
우예린이 중얼거리자 도준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우예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상황, 뭔가 이상하다.
사내가 먼저 도준희를 도련님이라고 부르자, 땅을 뒹굴고 있던 사내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스크를 벗어젖혔다. 사내들의 면면을 확인한 도준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반응에 우예린은 도준희가 사내들과 아는 사이인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어떻게 된 거냐?”
도준희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내는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놀렸다.
“저희는 도련님을 좀 도와드리려고…….”
“똑바로 말해. 뭘 도와줘?”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눈을 질끈 감은 사내가 우렁우렁 소리쳤다.
“셋 셀 때까지 설명해라. 내가 납득 못 하면…….”
도준희가 눈을 번뜩이자 사내가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하나.”
“도련님이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둘.”
“혀, 형수님 아니, 애인분과 화해시켜 드리려고…….”
“셋.”
“했습니다. 절대 겁먹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앗!”
빠득, 도준희의 손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제 얼굴 바로 옆에 위치한 단단한 주먹에 사내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연신 침을 삼켰다.
도준희는 주먹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사내를 때리지도 그렇다고 놓지도 않은 상태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씨발, 쪽팔리게.”
희미한 중얼거림을 들은 사내가 눈치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죄송합니다.”
“닥치고 가라, 얌전히.”
도준희가 사내의 머리칼을 탁, 놓자 사내는 무릎걸음으로 도준희에게서 멀어져서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동료들 사이에 있자 그나마 안정이 되는 듯 안색이 인간의 피부색으로 돌아왔다.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준희를 향해 절을 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우예린은 막 이 골목으로 들어오려던 아저씨 한 명이 못 본 척하며 방향을 유턴해서 가는 것을 발견했다. 스윽, 목을 돌려 고개 숙인 도준희와 무릎 꿇은 여섯 명의 사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라고 했어.”
도준희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사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이윽고 골목에는 도준희와 우예린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을 하릴없이 얽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공포스럽게 쫓아왔던 사람들이 도준희의 아는 사람? 아니면 부하 직원들? 어쨌든 그렇다는 거지.
상황을 깨달았으니 이제 화가 나야 할 텐데. 어쩐지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도준희를 보고 있자니 손이 움찔거렸다.
‘한 달 만이네.’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을까.
‘얼굴을 보고 싶어.’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까? 도준희는 뒤를 돌아본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큼, 헛기침을 한 우예린이 입을 열었다.
“……다 끝난 거예요?”
“어.”
도준희의 뒷모습에서는 말을 걸기도 꺼려질 만큼 적막한 느낌이 풍겨왔다. 우예린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씨발!”
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우예린은 어깨를 움찔하고 눈을 깜박였다. 도준희가 머리를 거칠게 털더니 빠르게 말했다.
“저 새끼들 백부 밑에서 일하는 놈들인데 쓸데없는 오지랖 부린 거야.”
“…….”
“너 안 위험해.”
“…….”
“나한테 전화할 필요 없었어.”
우예린은 여전히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도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보고 얘기해요.”
“…….”
“오랜만에 대화하는 건데 뒷모습이랑 대화해야 할까요?”
우예린이 조금 퉁명스럽게 말하자 어깨를 굳힌 도준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도준희의 얼굴은 여전히 근사했으나, 흰 피부는 빨갛게 달아올랐고 눈은 미묘하게 축축했다.
“도준희, 설마 울어요?”
“울긴 누가 울어? 어이가 없어서 그래. 그리고…….”
“그리고?”
“씨발, 미안하다고.”
“…….”
“나랑 있으면 좋은 일이 없다는 거 끝까지 증명해 버렸으니까, 씨발, 존나 미안하다.”
도준희의 울적한 목소리에 우예린은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귓가를 긁는 거친 욕설이 반갑게 느껴진다면 정말 자신이 미쳐버린 걸까.
“그러니까 다리 떨지 마.”
“……네?”
도준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자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다리를 떨고 있는 줄도 몰랐던 우예린의 속눈썹이 당황으로 팔랑거렸다.
“이제 위험할 일 없을 거니까.”
“…….”
“겁먹지 말고 들어가.”
“…….”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던 우예린은 순간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다. 바람처럼 뛰어온 도준희가 우예린의 몸을 붙잡았다가, 우예린이 균형을 잡자 퍼뜩 뒤로 물러났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우예린이 도준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짓도 안 해. 데려다주기만 할 테니, 안심해.”
‘힘없는 말투.’
도준희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고 우울했다.
타박타박.
우예린은 한 발짝, 한 발짝 집을 향해 걸어갔다. 온 신경이 안테나를 켠 듯 뒤에 쏠려있었다.
저벅저벅.
귀를 기울이자 도준희가 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준희의 성격처럼 제멋대로인 데다가 사나운 걸음 소리였다.
우예린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머무는 원룸 건물이 나타났다.
원룸 유리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우예린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선 도준희가 양복바지에 손을 집어넣었다.
“들어가.”
우예린은 문고리를 잡은 채 머뭇거렸다. 도준희는 우예린이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볼 생각인 듯했다.
정말로 그녀가 들어가는 것만 지켜보겠다는 듯,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꼼짝도 안 했다. 우예린은 얌전한 도준희가 낯설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했었네.’
도준희는 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거다, 이미 마음을 다 정리한 거다. 등등. 근거 없는 생각들이 도준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물을 만난 소금처럼 녹아 사라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도준희의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했다. 계곡에서 마주쳤던 도준희의 눈빛처럼. 그때보다 다소 울적하고 축축하기는 해도.
도준희의 초롱초롱한 눈. 그 눈에서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절절히 실감될 만큼 투명하게.
“들어가라니까.”
도준희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예린은 문득 궁금해졌다.
“도준희는 정말로 내가…….”
“…….”
“왜 좋아요?”
지금 묻기에 적절하지 않은 말이란 것은 질문을 하자마자 깨달았다. 헤어진 사이에 할 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사이임에도 물어볼 만큼, 갑자기 강한 궁금증이 치밀었다.
무엇이 안하무인 미친개 도준희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든 건지. 심지어 자신조차도 스스로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갑자기 그게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가기 전에, 대답해 줘요.”
도준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예린은 그게 상황에 자신이 안 맞는 질문을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걸 몰라?”
그러나 도준희는 아직도 그걸 모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우예린은 바보가 된 기분에 미간을 좁혔다. 모른다. 어떻게 알겠는가?
도준희란 사람 자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의 행동이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기에는 그전까지 도준희와 자신이 나누었던 감정의 교류가 너무 희박하지 않았나.
“뻔하잖아.”
도준희가 한 손으로 머리 정중앙을 가르며 중얼거렸다. 낮고 탁한 목소리라 우예린은 귀를 기울였다.
“너밖에 여자로 보이지 않았어.”
“…….”
“인간은 많았어도 여자는 네가 처음이었다고.”
눈이 마주친 순간, 이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날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것도, 지나가는 사람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도준희만 보였다. 자기가 말하고서 뒤늦게 쑥스러운지 콧잔등을 실룩이는 도준희밖에.
“너한테는 내가 얼굴만 잘생긴 미친놈이었겠지만.”
“생각보다 자기 객관화가 정확하네요.”
우예린의 읊조림에 도준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한숨을 쉬었다. 힘 빠진 얼굴로 원룸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래, 자기 객관화 정확히 됐어. 그러니까 들어가.”
“…….”
“오늘 일은 악몽 꿨다고 생각하고.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
“…….”
“누구도 널 건드릴 수 없게 할 테니까…….”
말끝을 흐린 도준희가 얼굴을 구긴 채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우예린은 차가운 철제 문고리를 꼭 잡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문을 열었다가 홱 고개를 돌려 도준희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도준희는 왜 안 물어요?”
“뭘?”
“내가 도준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안 물어보냐고요.”
도준희는 우예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내가 무섭다며.”
“…….”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어. 네가 무서워할 게 뻔해서, 얌전한 척하고 다녔으니.”
“…….”
“씨발, 왜 그런 걸 물어. 내가 싫고, 무섭고, 끔찍하다 했잖아.”
“…….”
“……괜히 기대되게.”
도준희는 새삼 화가 난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우예린은 사나운 도준희의 표정을 보지 않고, 축축해지는 눈동자에 집중했다. 도준희의 눈빛이 슬펐다. 거친 언행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어요.”
“그래?”
헛웃음을 흘리는 도준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도준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우예린은 도준희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은데도, 도준희의 검은 눈이 긴장으로 짙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예린은 그 얼굴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도준희는 나를 전에 봤을지 몰라도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대학교 때였어요.”
“…….”
“첫눈에 반했고요. 계속 짝사랑했어요.”
“…….”
“마사지 샵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설렜어요. 나답지 않게 굴어보자고 결심했는데.”
“…….”
“점점 묘하게 무서워지더니, 도준희가 막무가내로 굴었을 때는 무서웠어요. 그래요. 싫었어요, 도준희가.”
우예린이 차분하게 말을 이을수록 도준희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를 반복했다. 우예린은 미묘하게 달라지는 그의 표정 변화를 눈으로 좇았다.
“도망가고 싶었고, 그게 안 되면 차라리 나한테 질리게 만들겠다고 별짓을 다 했어요.”
“…….”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헤어졌고…….”
“…….”
“지금은 마음이 복잡해요.”
“……뭐가 복잡한데?”
“분명 처음이랑 다른데, 도준희를 짝사랑했었던 그때와는 다른데…….”
우예린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나요.”
“…….”
“도준희가 무섭고 거칠고 무논리 끝판왕에 성격에 결함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
“자꾸만 당신에게 연락하고 싶어져요.”
“…….”
“도준희는 무서운 사람인데, 얼굴을 보면 안심이 돼요.”
저게 무슨 말인가, 미심쩍었던 도준희의 눈이 점점 커졌다.
“힘들었어요.”
“…….”
“헤어져 있는 동안.”
우예린은 왠지 목이 메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도준희.”
“…….”
“이번에는 도준희가 무서운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잘 들어요.”
“…….”
“사랑해요.”
도준희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우예린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이건 내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협박을 당해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말해봐.”
“사랑해요.”
“다시.”
“사랑해요.”
마침내 우예린의 가까이 다가온 도준희가 한 계단 위에 서있던 우예린의 손을 꽉 쥐었다. 우예린은 손이 아팠지만 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초롱초롱한 도준희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축축한 탓이다.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게 뭔데.”
“…….”
“정확히 말해.”
“도준희가 생각하는 사랑은 뭔데요?”
도준희가 우예린을 쏘아보았다. 우예린은 서늘한 눈빛과 달리 도망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힘을 주는 도준희의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도준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곁에 있는 거.”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곁에 있는 거야.”
“…….”
“내 사랑을 받으면서, 나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나를 편안하게 여기는 거야.”
우예린은 그 말에 도준희가 품고 있었던 불안은 무엇인지 그 너머를 엿본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렇다고, 한다면요?”
도준희가 침을 삼켰다.
“네가……, 너랑 많은 부분에서 다르고, 싸움도 좋아하고, 피가 튀어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나를 선택하고, 내 곁에 남아준다면…….”
“…….”
“난 너한테 평생을 바칠 거야.”
“…….”
“너를 위해서 살 거야, 우예린.”
사랑을 주면 인생을 바치겠다고, 호소하는 도준희의 고백이 무거워서 우예린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조바심이 난 듯 도준희가 눈을 깜박였다.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평생 착하게 굴 수도 있단 말이야.”
“이미 도준희의 본성을 아는데 뭐 하러요.”
“아무튼 네가 덜 무섭도록 노력하겠다고.”
“……그럴 필요 없어요.”
우예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과 미소와 표정에서 고백에 대한 답을 읽은 도준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착하지 않은 도준희도 좋아하니까.”
우예린은 속삭임과 동시에 도준희의 가슴에 거칠게 안겼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끌어당겨지자 답답한 한편 마음이 안정되었다. 머리를 콕콕 찔러대던 불안이 사라진다. 마치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처럼.
도준희가 우예린을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격앙된 숨소리가 우예린의 귓가를 간질였다. 한 달 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품에서 놀라울 만큼 안심하는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좋아요, 도준희.”
“…….”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좋다.”
도준희의 허리를 꽉 안고 중얼거리자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상한 기미에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뜬 우예린의 귀에 대고, 도준희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씨발, 모텔 가도 되냐?”
“…….”
“미치겠는데.”
“…….”
“…….”
“도준희는 숨겨봤자 실패했을 거예요.”
“……뭘?”
“본성이요.”
* * *
일주일 후, 우예린은 도준희의 집 소파에 있었다. 그날 이후, 자취방의 짐을 반쯤 옮겨온 후로 우예린은 자취방과 도준희의 집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도준희의 집은 자취방보다 넓고 쾌적했고, 먹을 것도 많았다. 물론 그런 속물적인 이유로 도준희의 집에 머무는 건 아니었다.
그냥 틀어놓은 티브이에서는 여가수의 서정적인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건만, 우예린은 가슴이 편안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불편해졌다. 원인은 당연하게도 도준희였다.
넓은 소파는 성인 남녀 두 명이 누워도 충분했으나 그 충분한 소파의 공간 활용이 잘 안 되고 있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에게 끌어안긴 채 몸을 뒤척였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어깨를 바싹 끌어안았다. 도준희는 티브이를 보면서 한 손은 우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손등으로 볼을 만지작거릴 때도 있고 목덜미를 간질일 때도 있고 또 가슴을 조몰락거릴 때도 있었다. 성적인 의도가 없어도 그렇다.
도준희가 손가락으로 우예린의 코끝을 붙잡고 살짝 흔들자 우예린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인형이에요?”
꼭 인형이 된 기분이다. 우예린이 불퉁하게 말하자 도준희가 느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인형 맞지.”
“…….”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인형.”
도준희가 손바닥으로 우예린의 보송보송한 뺨을 쓰다듬었다. 도준희의 손에서는 시원한 향이 났다. 무심코 코를 킁킁거렸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인형’ 발언에 한발 늦게 발끈했다.
“그럼 도준희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내 인형이겠네요.”
감히 누구를 인형 취급이냐고 비웃는다면 대거리할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돌연 도준희가 우예린의 손을 잡아 그의 머리 위에 올렸다.
“맞아, 그러니까 예뻐해 줘라.”
제 손을 직접 움직여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 흠칫 놀란 우예린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우예린은 손바닥을 쓸어내리는 도준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감촉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티브이를 보고 있던 도준희가 우예린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져?”
“안 빨개졌는데요.”
“우길 걸 우겨라.”
도준희가 검지와 중지로 우예린의 달아오른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아, 알겠다.”
우예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도준희의 눈을 보며 눈도 깜짝하지 못했다. 도준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빙그레 웃었다.
“뽀뽀해 달라는 거네.”
“아니…….”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는 찰나, 도준희의 부드러운 입술이 우예린의 입술에 닿았다. 도준희가 혀를 내밀어 우예린의 분홍색 입술을 가르고 촉촉한 내부로 들어갔다.
“으응…….”
우예린은 소파에 뒤통수를 댄 채 깊어지는 도준희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깐, 잠깐만요.”
우예린이 도준희의 가슴을 밀어내자 도준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이 씨발, 꽃 같은 휴일에 무슨 전화야.”
“지나에게서 전화가 왔나?”
“받지 마라.”
도준희가 투정부리듯 말했다.
“걔 나쁜 친구다.”
“그럼 도준희는 나쁜 남자게요? 지나를 협박한 건 도준희잖아요.”
“…….”
도준희는 아무 말 못 하고 우예린을 뒤에서 꼭 안았다. 우예린은 바닥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막 폴더를 열자 전화가 끊겼다. 전화를 한 사람은 김 대리였다.
“김 대리님이 웬일이지?”
도준희가 우예린의 뒤에서 핸드폰 액정을 보고 말했다.
“너 갈군다는 그놈?”
“요즘은 좀 괜찮아요.”
혹시 회사 일인가. 우예린이 말단으로 들어간 새 프로젝트는 회사에서도 꽤 신경 쓰는 프로젝트라, 적당히 하기를 좋아하는 김 대리도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다시 전화를 하려는 참에, 문자가 연달아 도착했다.
[우예린 씨, 지금 전화 못 받아?]
[전에 우리가 만들었던 보고서, 수치가 잘못됐어. 파주 공장 조사가 제대로 안 되었었나 봐.]
[주말이라 미안한데 급한 일이라 회사로 나와주면 좋겠어.]
“이 새끼는 뭔데 주말에 사람을 불러내고 난리야?”
도준희가 아니꼬운 듯 말했지만 우예린은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누운 채 우예린의 허리를 껴안은 도준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가려고?”
“가야죠.”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고 부연 설명을 했다.
“이번 프로젝트가 중요해서 그래요. 원래는 이런 일 별로 없어요.”
도준희가 눈을 가늘게 뜨자 우예린이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가야 한다니까요.”
“어쩔 수 없지. 일하는 게 그렇게 좋다는데.”
싫다는 티를 있는 대로 팍팍 내면서, 도준희가 일어났다.
지잉.
우예린은 도준희의 반응에 웃다가, 핸드폰 문자 진동에 폴더를 열었다.
[최 과장님도 계시니까 얼른 와.]
무심코 문자를 읽던 우예린은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바로 뒤에서 문자를 내려다본 도준희의 얼굴이 얼음처럼 싸늘했다.
‘큰일 났다.’
우예린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처럼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최 과장?”
도준희의 목소리는 기분 좋게 나른했으나 왜인지 맹수가 도사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우예린의 마음도 모르고 문자 소리는 연이어 울려댔다.
[월요일까지 넘겨야 하는 거라 빨리 마무리해야 돼. 문자 보자마자 나와! 나 분명히 최 과장님도 계신다고 했다.]
김 대리의 신경질적인 말투가 그대로 묻어나는 문자 내용을 보자 마음은 한층 초조해졌다. 얼른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한편, 도준희가 신경 쓰여 이도 저도 못 한 채 엉거주춤했다.
도준희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우예린은 눈을 굴려 무표정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도준희를 흘끗했다.
“도준희.”
나지막하게 불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부르자 지금 뭘 하고 싶은지가 명확해졌다.
지금 얼른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가야 한다.
그러나 도준희가 신경 쓰일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도준희는 이해할 수 없게도, 이런 문제에는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도준희.”
재차 이름을 부르자 도준희의 무표정한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눈썹을 모은 도준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가려고?”
“도준희…….”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투정 섞인 말투로 그를 불렀다.
“간다 이거지?”
“이건 일이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대꾸에 도준희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 새끼가 사적으로 널 왜 부르는데?”
“말은 바로 해야죠. 사적인 게 아니라 공적인 거고, 최 과장님이 부른 게 아니라 김 대리님이 부른 거예요.”
“말장난하지 마.”
“말장난 아닌데요?”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준희가 코웃음을 쳤다.
“너한테 수작 부린 새끼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거지, 중요한 건. 가면 뒈질 줄 알아.”
우예린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자 도준희가 미간을 좁혔다.
“너 말고 그 새끼.”
“최 과장님만 있는 게 아니라 김 대리님도 있어요.”
“알 게 뭐야. 그 새끼도 남자잖아.”
큰 문제라는 듯한 말에 우예린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도준희는 암컷에게 접근하는 수컷을 경계하는 늑대 같았다.
좋게 말해서 늑대지, 미친개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는 도준희를 보자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김 대리라는 놈도 너한테 수작을 부렸어?”
우예린은 남자 친구가 있는 지수련에게 껄떡대던 김 대리를 생각했다.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지수련과 달리 자신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이 바로 김 대리다.
“절대 아니에요.”
“그래?”
의심스러운 표정에 우예린은 답답하기보다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무슨 팜므 파탈인 줄 알아요?”
“팜므 파탈?”
“다들 날 좋아하는 줄 아냐고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우예린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도준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우예린은 말이 통하지 않는 도준희를 보자 문득 궁금해졌다. 도준희의 눈에 자신은 어떤 모습인 걸까?
“도준희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건지 궁금해요.”
우예린은 턱을 괴며 도준희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도준희의 눈동자는 새카매서 우예린의 모습이 거울처럼 반사되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눈 속에서 턱을 괴고 있는 자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끔 도준희의 미모에 홀려 넋을 잃은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유심히 관찰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도준희의 눈가가 미묘하게 경련했다.
흠칫 놀란 우예린이 눈을 깜박이고 도준희를 살폈다. 도준희의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네가 나였다면…….”
도준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으로 우예린의 얼굴을 훑었다. 느릿하고도 꼼꼼하게, 탐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너는 나를 마트에도 보내지 않았을 거야.”
“…….”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 인내심이 얼마나 넓은지도 알 수 있을 텐데.”
도준희가 인내심이 많다니. 아무도 동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예린은 반박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치 쥐면 깨지는 귀한 보석이라도 보는 듯한 도준희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온몸이 간지러워졌기 때문이다. 도준희의 시선이 제게 머무는 시선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그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네요.”
“…….”
“어디서 배워오기라도 한 거예요?”
우예린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자 도준희가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볼래? 너는 내 눈에 이렇게 보여.”
도준희는 우예린이 작업을 위해 켜둔 노트북을 끌어와 타자를 두드렸다. 곧이어 그가 노트북을 돌리자 궁금해서 화면을 들여다본 우예린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디 가서 이런 말 하지 마요.”
“왜?”
도준희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왜 그래야 하냐며 묻는 얼굴이 조금 멍청하고도 귀여워 보여서, 우예린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화끈거리는 얼굴 때문에 손바닥도 뜨끈했다.
“욕은 내가 먹을 테니까요.”
“욕을 왜 먹어?”
우예린은 손가락 사이로 도준희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응시했다. 장난을 치는 건가 했는데 진심인 얼굴이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시력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대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어쨌든요.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마요.”
“참나, 알았어.”
우예린은 다시 보기도 민망하다는 듯 서둘러 노트북을 닫았다. 여신의 탄생 장면을 그린 유명한 그림도 사라졌다. 우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히 시력에 문제가 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예쁘다고 좋아해 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우예린은 의심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도준희의 불만스러운 얼굴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도준희 눈에만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니까 안심해도 돼요.”
‘전에도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예린은 기시감에 휩싸였다. 뭔 소리를 하냐는 듯한 심드렁한 표정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말해줄까요? 도준희한테만 내가 여자로 보이는 거예요.”
“…….”
“정말이에요.”
“지랄. 딴 놈이 너한테 수작을 건 게 내가 본 것만 해도 두 번인데.”
도준희가 코웃음을 쳤다. 우예린은 어리둥절해졌다. 한 번은 최강현이 호감을 표현했던 일이라고 치고, 다른 한 번은 뭘 말하는 거지?
“언제요?”
“내가 그런 말까지 해야 해?”
도준희가 기분 나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우예린은 다시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고 원래 문제에 집중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 만나도 아무 일 없다니까요. 말했잖아요. 나는 도준희를…….”
답답한 마음에 말을 늘어놓던 우예린이 멈칫했다. 도준희가 눈썹을 꿈틀했다.
“나를 뭐?”
“이런 말까지 해야 해요?”
우예린이 민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도준희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요.”
“모르겠는데.”
도준희가 좀 전보다 다소 능글맞은 얼굴로 우예린을 응시했다. 우예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말하기 민망하긴 하지만, 못 할 말도 아니다.
“사랑한다고요.”
“…….”
“도준희를 사랑하니까, 다른 사람들 만나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도준희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예쁜 말도 할 줄 알고.”
“…….”
“많이 컸어, 우예린.”
기분 좋아 보이는 게 뻔히 보이는데 도준희는 애써 침착한 낯으로 말했다. 도준희의 속내가 훤히 보여서 우예린은 웃음이 나오려던 걸 참았다.
이제 그의 마음이 풀어진 걸까, 우예린이 안도하려는 순간 도준희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너는 그렇다 치고, 그 새끼들 마음은 모르잖아.”
“아이참, 정말 말이 안 통하네!”
우예린이 주먹을 불끈 쥐자, 도준희가 그녀의 작은 주먹을 힐끗하고는 툭 뱉었다.
“뭐.”
도준희가 팔짱을 끼고는 네가 그렇게 보면 어쩔 거냐는 듯한 투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만하고 재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우예린에겐 입을 삐죽대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도준희 혹시 의처증 있어요?”
“그거 찌질한 새끼들이 앓는 병이잖아. 난 그런 거 없어.”
“도준희가 하는 게 그런 거예요. 왜 싫어하는지는 알겠는데 이건 일이란 말이에요. 과장님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어차피 부서 이동도 신청하려고 했으니까, 좀만 봐줘요.”
도준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설득되는 눈치가 아니다.
“가지 마.”
“…….”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면 내 부하 직원을 보낼게. 똑똑한 애들도 있으니까 네가 설명 좀 하면 알아서 잘할 거야.”
“그게 말이 돼요?”
“안 될 건 뭐냐. 건달이라고 다 멍청한 건 아니다? 엘리트도 있어.”
우에린은 도준희가 심통을 부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상식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는 건 암담하니까.
우예린은 근사한 눈매를 반쯤 접으며 딴청을 피우는 도준희를 쏘아보았다. 본의 아니게 도준희와 대치 상황을 이루게 되었다.
도준희의 의견을 꺾어야 한다는 건 자명하다.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므로. 다른 남자들에게 그녀를 도둑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도준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머릿속이 깜깜했다.
‘예전에 했던 거 한번 해봐?’
스스로 고통을 받으면 도준희는 반응할 것이다. 예전에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도 자신이 그렇게 하면 이를 갈며 한발 물러났으니까.
도준희는 그녀가 몸에 해를 끼치는 걸 정말 싫어했다. 그의 몸을 때리는 것보다 더 싫어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화를 일으킬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가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또 의심할지도 몰라.’
도준희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한번 해볼까?’
우예린은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얼른 준비하고 나가봐야 할 시간이다. 마음을 정한 우예린이 슬그머니 손을 올리자, 딴청을 피우고 있던 도준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우예린, 네 몸은 이제 내 거야.”
“…….”
“내 것에 흠집 내면 수리 비용 청구할 줄 알아.”
도준희가 씩, 살벌하게 웃었다. 도준희가 말하는 수리 비용이 단순히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우예린이 손가락을 힘없이 오므렸다.
이러다가 정말 도준희에게 말려 아무것도 못 하겠다. 초조해진 우예린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어차피 내 몸이에요.”
“…….”
“내 영역 존중 안 해주면 나…… 차라리 콱 죽어버릴 거예요!”
우예린이 왁 소리를 지르자 도준희의 잘생긴 얼굴이 충격에 잠겼다.
“씨, 씨발. 이제는 죽는다는 협박까지 해? 네가 죽는다고 내가 뭐……!”
“그래요? 어디 한번 해볼까요?”
우예린이 난간을 향해 뛰어가는 시늉을 하자 도준희가 재빨리 우예린의 팔을 잡아챘다.
“갑자기 또 왜 이래, 씨발!”
화가 가득 난 목소리에 우예린은 고개를 돌린 채 도준희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알았다.”
도준희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기분 잡쳤네. 갔다 와라, 갔다 와. 대신 그 새끼들이랑 2m 거리 유지하고 일 얘기만 하다 와. 갔다 오면 네 몸 구석구석 다 확인할 줄 알아. 이상한 냄새 묻혀오기만 해봐.”
“그럴 일 없거든요!”
도준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우예린이 눈을 반짝이자 도준희가 속았다는 듯 흥,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입맛은 떨어졌는데 배는 고프네. 밥이나 먹을까.”
얘기가 끝났다는 듯 도준희가 몸을 일으켰다.
‘너무 순순한데.’
도준희가 어느 정도로 집요한지 익히 알고 있는 우예린은 미심쩍게 도준희의 널찍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몰래 따라오지 말아요.”
도준희가 움찔했다. 몸을 돌려 우예린을 바라본 도준희가 눈썹을 거만하게 치켜세웠다.
“가만 보니 계속 명령이야?”
“…….”
“내가 네 요구 들어주면 뭐 해줄 건데.”
태도를 보니 따라올 생각이었던 게 확실하다. 우예린이 울상을 짓자 도준희가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올렸다.
“좋아. 나랑 같이 가. 몰래 안 따라갈 테니까.”
“…….”
“그럼 되겠네.”
결코 혼자는 보내주기 싫다는 의지에 우예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쩜 저렇게 제정신이 아닌 말만 하는 걸까. 도준희까지 껴서 넷이서 회의를 하는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아찔했다. 최 과장과 김 대리로부터 무슨 말을 들을지 생각하기도 두렵다.
“나 믿고 보내줘요.”
“널 믿고……?”
도준희가 애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약속 어길 사람은 아니잖아요.”
“네가……?”
이지나와 대면했던 사건 이후로 도준희는 우예린을 아주 발칙한 어떤 것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곤 했다. 우예린은 미심쩍어하는 도준희를 보며 가슴을 탕탕 쳤다.
“아이참, 내가 바람피울 사람처럼 보여요?”
“…….”
도준희는 말이 없었다. 미심쩍은 얼굴은 여전하다. 우예린이 얼굴을 꽤나 밝힌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도준희는 아직도 우예린이 잘생긴 사람을 보면 혹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우예린은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다. 도준희랑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이 꼭 남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팜므 파탈이 된 것 같다.
‘내가 진짜로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잘못한 점이라고는 도준희의 얼굴에 혹한 것밖에 없는데, 도준희는 그 점을 빌미로 단단한 오해를 하고 있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하듯이 이를 갈았다.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다니.”
“…….”
“내 눈에 잘생긴 사람은 도준희밖에 없어요. 도준희가 너무 잘생겨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요!”
홧김에 한 말이었는데 무슨 작용을 했는지 도준희는 우예린의 말이 이해가 간 듯했다. 진지한 눈으로 우예린을 흘끗했다.
“내 눈에 너만 여자로 보이는 것처럼?”
“그래요.”
이런 말이 통하다니. 도준희의 정신세계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쁘게 고개를 끄덕인 우예린은 갑자기 입을 맞춰오는 도준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얇은 입술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진득하게 빨자 입술의 살점이 그에게로 모두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혼몽해질 때까지 키스를 받고 나서야 도준희에게서 해방되었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양 뺨을 잡고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그래도 혼자서는 안 돼.”
우예린은 기대에 찬 표정 그대로 굳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도준희를 노려보았다. 도준희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뺨에 뽀뽀했다.
이대로 두면 도준희가 무슨 해괴망측한 짓을 할지 모른다. 사회생활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우예린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빨아줄게요.”
도준희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슬쩍, 뺨에서 입술을 뗐다.
“뭐?”
반질반질한 눈을 보자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로 심사가 뒤틀렸을 때 으레 보이곤 하던 반질반질한 눈인데 지금은 그거보다 훨씬 반질반질했다. 초롱초롱하면서도 반질거리는 희한한 눈빛이다.
“뭐라고 했냐?”
도준희의 목소리도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빨아준다고요.”
“…….”
“나 일하게 해주면.”
도준희가 멍하게 대꾸했다.
“뭘?”
“그, 그거요. 그거!”
우예린이 말을 더듬으며 눈으로 도준희의 다리 사이를 흘끗했다. 그러고는 민망한지 홱 시선을 피해버리는 우예린을 보는 도준희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도준희의 눈에 고민의 빛이 어렸다.
“씨발, 너 그거 안 지키면 죽을 줄 알아.”
“절대로 지켜요.”
우예린이 단언하자 도준희가 고민하는 기세로 머뭇거리더니 툭 뱉었다.
“알았어, 믿어줄게.”
우예린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준희를 마주 보았다. 눈썹이 격하게 휘어진 걸 보니 못마땅해도 여간 못마땅한 얼굴이 아니다.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자꾸만 툴툴대는 도준희가 눈에 들어왔다.
“일 얼른 끝내고 올게요.”
눈을 축 늘어뜨리고 말하자 도준희는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잊지 마라.”
“무슨 약속이요?”
순간 어리둥절했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반질반질한 눈을 보고서야 “아” 했다. 두툼한 도준희의 분신을 떠올리자 괜한 약속을 한 게 아닌가 덜컥 걱정이 되었다.
‘내 무덤을 판 건 아니겠지?’
우예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하,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
“심부름꾼 뒤에 붙이지도 말고요.”
혹시나 해서 붙인 말이었는데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는지 도준희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런 미친개가! 우예린이 식겁해서 도준희를 쏘아보자 도준희가 멋쩍게 웃었다.
한쪽 뺨에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눈치가 꽤 빨라졌네.”
“진짜 그러지 마요.”
우예린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에 힘을 주자 도준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손을 머리카락 사이에 넣어 쓸어 넘겼다.
“집에 있으면 빨리 올게요.”
“알았어.”
도준희가 야릇하게 웃었다.
“예쁘게 기다리고 있지.”
“…….”
“대신 빨리 와야 해.”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반짝였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늦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 * *
우예린이 나가고, 혼자 남은 도준희는 우예린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흐뭇한 마음으로 거울을 보자,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뚝, 웃음을 그친 도준희가 소파에 앉았다. 우예린이 그 얼굴 반반한 상사를 만나러 간 참인데 웃기는 뭘 웃는다는 말인가. 억지로 얼굴을 구겼던 도준희는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손으로 입매를 어루만졌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때에 비하면야 낫지.’
도준희는 한 손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충격적인 이별 선언 이후의 일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만 좋아하고, 성질이 조금 나타나자 부리나케 도망가던 우예린. 결국엔 친구와 결탁하여 자신을 엿 먹인 우예린. 마침내는 그의 입에서 이별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를 생각하자 지금도 눈앞이 까매지면서 막막해졌다. 대부분의 일을 힘과 돈으로 원활히 해결해 왔던 도준희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조그맣고 겁 많은 여자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서 벌벌 떠는 자신이라니.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는 거센 바람보다 뜨거운 햇볕이 필요함을, 이마에 붙여 되새겼다.
연락을 하고 싶을 때에는 줄담배를 피우며 참았고, 우예린이 보고 싶을 때에는 두 눈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고도 못 참을 때는 부하들을 갈구었으며 정말 못 참을 때는 각목 연장 하나 들고 뒷골목을 돌았다.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우예린이 먼저 연락을 하는 것. 자신이 먼저 하는 연락은 의미가 없다. 전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마침내 우예린에게 전화가 왔을 때는 초조했던 것도 잊고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곧바로 전화를 받으려던 도준희는 우예린의 애를 태워야 함을 가까스로 생각했다. 벨이 열 번 울릴 때까지는 기다리자. 그리고 신호음이 열 번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웬일로 전화를 했냐고, 거만하게 대꾸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우예린의 쩔쩔매는 애원 대신에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가 거꾸로 솟았던 그 순간을 생각하자 다시금 손등에 굵은 핏줄이 튀어나왔다.
오해가 있긴 있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부하 직원들은 도준희로부터 조금의 고통과 두툼한 돈 봉투를 받았다. 정작 그들은 돈 봉투보다 도준희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현실을 훨씬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사랑한다고요.”
우예린의 목소리가 귓가에 왱왱 맴돌자 도준희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도망가는 우예린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었다.
“씨발, 이게 행복해서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건가.”
두 손을 모으고 후우, 숨을 쉰 도준희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드러난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사내새끼들 만나고 다니는 건 영 거슬리는데.”
처음에는 과장이란 놈이 반반하게 생겨서 우예린이 혹한 건 아닌가 했는데, 말하는 걸 보니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예린이 그 얼굴 반반한 과장 놈과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건 참아줄 수 없는 문제였다.
“하필이면 일 욕심이 있어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꼰 도준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일을 하고 싶다면 하게 해주면 되는 일이잖아.”
손가락을 튕긴 도준희가 핸드폰을 꺼내 백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희냐?
“어, 회장님.”
―그래, 무슨 일이야?
백부 도우태의 목소리와 함께 “회장님 나이스 샷!”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또 사업상 인맥 관리를 위해 골프장에 가있는 듯했다.
“뭐야, 거 저기, 좀 수월하게 굴릴 만한 사업, 적당한 거 있어?”
―사업이야 많다만 갑자기 왜 물어? 마사지 샵이 마음에 안 드냐?
“아니, 마사지 샵은 내가 굴려볼 거 맞는데. 그거 말고 다른 적당한 자리 없나 해서.”
―허허, 김 사장님 그거 그렇게 치면 됩니까.
도우태가 너털웃음을 흘리다가 도준희를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세히 말해봐.
“별건 없고,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자리면 돼.”
―그러니까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
“합법적이고, 여자가 많고 아니, 여자밖에 없고, 명함 내밀기 좋은 사업으로.”
―별거 없는 게 아니잖아, 자식아. 여자만 있는 사업? 여자 사업 말이냐?
“합법적으로, 씨발!”
―이게 부탁하는 처지에 웬 욕질이여!
“합법적인 거로요. 회장님이 나한테 이렇게 굴면 안 될 텐데, 어?”
―이 새끼는 하나뿐인 조카라는 놈이 꼭 이런 식으로 지랄이야, 지랄은.
도준희의 자산 중에는 도우태의 회사 지분도 포함되어 있다. 그걸 빌미로 한 협박성 멘트에 도우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내렸다.
―그런 거로는 의류 디자인 쪽으로 생각해 놓은 게 있기는 한데. 아무 자리면 돼?
“되도록이면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걸로. 마케팅 같은 거 말이야.”
―자리야 만들면 있으니까. 근데 무슨 일인데?
“나중에 말해줄게.”
귀찮게 굴 게 분명하여 두루뭉술하게 대꾸했지만.
―야아, 그래그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다. 좋은 식당 예약해 놓으마.
능글맞은 대꾸가 돌아왔다.
뚝.
도준희는 끊긴 핸드폰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모른 척 묻고 있지만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우예린과 함께 도충열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이 도우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자리는 이걸로 됐고.”
마음을 놓은 도준희는 시계를 흘끗했다. 우예린이 나간 지 10분도 되지 않았다.
“시간 더럽게 안 가네.”
도준희는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예린을 잡고 나서부터 다시 금연을 시작한 탓에 이빨로 필터를 잘근잘근 깨물기만 했다.
“언제 돌아오냐, 우예린.”
도준희는 한 손으로 바지춤을 쓸어내렸다. 벌써 팔팔하게 곤두서 있었다. 당장 일어나서 우예린을 찾아오고 싶지만, 우예린이 약속으로 남긴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대신 허벅지를 찌르며 인내했다.
1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 * *
한편 일을 마치고 돌아온 우예린은 벨을 누르지 못하고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괜한 짓을 했나?”
일을 하러 나간 건 좋은데 막상 무사히 끝나자 약속으로 뱉은 말이 마음에 걸린다. 이걸 눌러, 말아? 마음의 준비가 안 된지라 우예린의 손가락은 현관 벨 위를 왔다 갔다 했다. 거의 벨에 닿았던 손가락을 다시 물리는 찰나.
벌컥!
우예린은 사납게 열린 문에 고개를 홱 돌렸다. 도준희가 문고리를 쥔 채 현관문에 머리를 기댔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 끝이 살짝 젖어있었다. 차분한 도준희의 머리를 보며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 들어오는지 기다리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
우예린이 서성이는 걸 다 보고 있었다는 소리다. 속내를 들킨 우예린이 하하, 억지로 웃음소리를 냈다.
“너 기다리느라 온몸에 힘이 다 빠졌어.”
‘엄살은…….’
우예린은 참 대견하다고 어색하게 칭찬했다.
“아무튼, 이제 왔군.”
나른한 목소리에 우예린이 쑥스럽게 웃었다.
“갔다 왔어요.”
도준희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우예린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우예린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일 잘하고 온 사람을 왜 그렇게 봐요?”
“무슨 사고가 있지 않을까 해서.”
“보통 사람은 도준희처럼 사고를 몰고 다니지는 않거든요.”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사고를 몰고 다닌다는 소리냐?”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우예린은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켰다. 도준희가 예전보다 덜 무섭다고는 하지만 본래 자신은 이런 말을 쉬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 다녀왔다니까요. 일 열심히 하고 왔다고요. 도준희 먹여 살리려고요!”
이건 듣기 좋으라고 그냥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몇 달, 몇 년을 모아도 도준희의 펜트하우스 매매가의 반의반도 안 될 게 뻔했으니까.
과연 도준희는 우예린의 대답이 황당했는지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가?”
그런데 또 무슨 조화인지 입꼬리는 실룩 올라갔다. 가소로운데 기분은 좋은 눈치다.
“왜, 뭔가 이상해요?”
김 대리가 부른 일은 무사히, 수월히 끝냈다. 도준희가 하도 유난을 떨기에 괜히 걱정했던 최강현도 일적으로만 집중해서, 사적인 문제에 정신이 팔렸던 자신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렇게 짧고 굵게 일에 집중했더니 성취감이 느껴졌다. 뿌듯한 상태로 도준희의 얼굴을 보자 기분까지 좋아졌다.
헤실헤실 웃는 우예린을 비뚜름한 시선으로 쳐다본 도준희가 돌연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안 이상해.”
“……근데 왜 그렇게 봐요?”
“왜 그렇게 보냐니.”
“…….”
“나 예쁘게 기다렸는데.”
도준희가 머리로 현관문을 가볍게 툭 쳤다.
“그래서요?”
‘어쩌라고요?’라는 말은 꿀꺽 삼켰다. 빤히 쳐다보는 야릇한 시선에 우예린이 불길함을 느낄 무렵 도준희가 와락 인상을 썼다.
“오리발을 내밀겠다?”
“…….”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고 했지? 이런 식으로 굴면 나도 해결 방법이 있어.”
“…….”
“변호사 번호가 어떻게 되더라…….”
“잠깐! 나 기억났어요, 기억나요!”
우예린은 머릿속을 스치는 신체 포기 계약서의 존재에 다급하게 외쳤다. 도준희가 씩 웃으며 우예린을 안아들었다. 우예린은 놀라서 도준희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약속 빨리 이행해야지.”
“내 발로 갈게요.”
“넌 느려터져서 안 돼.”
도준희는 몸이 달은 듯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침대에 던져진 우예린은 홱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가 반팔을 벗어던지며 다가왔다.
“약속을 지킬 시간이네.”
흥분에 찬, 실로 위협적인 표정이다. 우예린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처, 천천히 해요, 우리.”
“안 되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도준희가 진지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너 건강히 잘 갔다 왔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지도 봐야 하니까.”
“…….”
“어디 우예린 입놀림 실력 좀 볼까.”
건강히 잘 갔다 왔는지를 확인한다는 말은 즉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일만 하고 왔는지를 확인한다는 뜻이다. 우예린은 이제 도준희의 말뜻을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도준희가 청바지의 버클을 풀며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우예린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도준희의 천사 같은 얼굴과 다리 사이의 흉악한 것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입 터지는 거 아니야?’
“자, 어디 한번 해봐.”
도준희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며 반질반질한 눈을 번뜩였다.
꿀꺽.
우예린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읍…….”
두툼한 귀두가 볼 안쪽 여린 살을 쿵 찔렀다. 우예린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깜박였다. 입 속을 채우는 부피감에 고개를 바로 했다. 반대쪽 볼을 향해 귀두를 옮기자 이빨에 귀두가 스치고 지나갔다.
도준희가 읏, 신음을 냈다.
“제대로 안 해? 이빨 닿으니까 소름 돋잖아.”
투덜거리는 내용과 달리 흥분한 목소리였다.
“…….”
“조심해.”
이걸 고개를 끄덕여야 해 말아야 해? 우예린은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귀두를 빨았다. 귀두를 반대쪽으로 옮겼더니 반대쪽 살도 쿡쿡 찔러댄다.
성기가 워낙 흉악하게 크니 어느 볼에 둬도 여린 살을 괴롭혔다. 우예린은 차라리 그냥 쪽 빠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볼이 움푹 패게 힘을 주고 성기를 빨아들였다.
“흐으…….”
도준희가 짙고 무서운 신음을 흘렸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신음이 귓가를 간질이는 것 같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꼭 영혼을 유혹하는 악마의 음성 같은 신음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은가?’
도준희가 자신을 빨아주었을 때는 혀가 어디에 닿든 상관없이 허리가 휘어졌는데 말이다. 도준희는 이런 게 좋은가 보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성기를 쭉쭉 빨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두툼한 귀두가 이번에는 목젖을 찔렀다.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적당히 목젖에 닿지 않게 물러나 혀로 귀두를 날름거렸다.
“후…….”
도준희가 우예린의 머리를 위쪽으로 쓸어넘기고 얼굴을 드러내게 했다. 눈가에 눈물방울을 단 채 성기를 물고 있는 우예린의 입술은 붉어진 채 도톰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도준희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너 이러고 있으니까 꼭.”
“…….”
“내 거 같다.”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오싹오싹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성기 밑동을 손으로 잡은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원래도, 도준희 거라고 했자나여.”
성기를 물고 있는 탓에 소리가 뭉개져 흘러나왔다. 도준희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정정했다.
“그래. 그렇지.”
도준희는 말로는 내 거다, 내 거다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자기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라도 했던 걸까? 우예린은 도준희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며 의심스럽게 눈가를 접었다.
“그렇게 보지 마라.”
“…….”
“야해 빠져서는.”
도준희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튀어나온 우예린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우예린이 화답하듯 성기를 빨자 도준희의 뺨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우예린은 눈을 위로 굴려 도준희의 굳어진 뺨에 생긴 보조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다 있을까. 비록 속은 썩은 사과처럼 괴팍하지만.
우예린은 도준희의 보조개 어린 얼굴이 좋았으므로 혀로 귀두를 쿡 찌르며 양 볼에 힘을 주어 성기 기둥을 압박했다.
“헉…….”
도준희가 우예린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거친 한숨을 쉬었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우예린을 정확히 직시했다.
“이리 올라와.”
나직한 속삭임에 우예린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도준희가 우예린을 번쩍 들어 침대 위로 옮겼다. 우예린은 순식간에 옷이 벗겨졌다. 거의 찢어질 듯 늘어난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도준희는 엄지에 침을 묻히고 우예린의 아래를 어루만졌다.
도준희의 성기를 빨며 야릇한 분위기에 취했던 우예린은 약간의 애무만으로도 흠뻑 젖었다. 도준희가 부드러워진 우예린의 내부로 달아오른 성기를 꽂아 넣었다.
“헉!”
빠듯한 감각에 우예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뺨에 입을 맞추고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충격에 굳어 있는 우예린을 달래듯 얼굴 여기저기에 입은 맞춘 도준희가 또 한 번 불시에 콱, 성기를 꽂아 넣었다. 우예린이 몸을 바르르 떨자 도준희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안은 채로 허릿짓을 한 도준희가 이내 몸을 일으켜 그녀를 뒤집었다. 도준희는 지체 없이 우예린의 허벅지를 벌리고 성기를 박아 넣었다.
뒤에서 들어오자 더 깊이 박혀오는 기분에 우예린은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엉금엉금 기어가자 도준희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어디 가.”
“천천히요, 천천히!”
“이렇게 만들어놓고서 무슨 천천히야. 우예린 이기적이네.”
‘이기적인 건 너고요!’
우예린은 입술을 깨물며 넘실넘실 다가오는 쾌감에 허리에 힘을 빳빳하게 주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그대로 엎어질 것 같았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골반을 움켜쥔 채 성기를 박았다가 뺐다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띠리리, 띠리리.
우예린은 옷이 벗겨질 때 놓쳤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화 받을 정신이 있어?”
도준희의 목소리 끝이 기묘하게 올라갔다. 그의 속도가 더 빨라지기 전, 우예린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덕분에 핸드폰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잠깐, 잠깐, 잠깐!”
우예린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핸드폰에서는 벨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모님의 전화였다.
“잠깐만요, 부모님이에요!”
우예린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녀의 외침에 도준희가 잠깐 멈춘 사이 얼른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그래, 예린아.
엄마의 목소리였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성기를 아래에 꽂은 상태로 부모님의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죄악감을 느꼈다.
“무, 무슨 일이세요?”
―별건 아니고, 너 얼마 전에 여기 내려왔었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대답하려던 우예린이 헉, 입을 크게 벌렸다. 우예린의 질 내부를 퍽! 찧은 도준희가 그녀의 골반을 그러쥐었다.
‘무슨 짓이에요?’
우예린은 입술을 꽉 문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도준희가 전화를 받으라는 듯 턱짓을 하며 허리를 슬금슬금 움직였다.
이 미친개가 또 미친 짓을 하려나 보다. 우예린은 얼른 전화를 끊어야겠다 싶어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자매 중의 하나가 너를 계곡에서 봤다는데?
“저, 저를요?”
―그래, 웬 남자랑. 차 타고 와서 놀다 가는 것 같다고. 너 맞니?
“…….”
도준희가 손을 뻗어 우예린의 가슴을 꽉 쥐고 허리를 팍팍 처넣었다. 머릿속이 아찔해서 우예린은 입술을 깨물고 도준희를 쏘아보았다.
‘인사드릴까?’
도준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우예린은 기함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그게…….”
―예린아, 솔직하게 얘기하렴. 남자 친구가 생기면 엄마한테 꼭 먼저 얘기하라고 했잖아.
작위적으로 온화한 말투.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거나 안심시키려고 할 때 내는 엄마 특유의 화술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예린은 마음이 흔들렸다.
‘어차피 도준희에 대해 말씀드리긴 드려야 하니까.’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만나는 사람.”
팍!
도준희가 페니스를 처박았다.
우예린은 신음이 흘러나올까 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성기를 박아 넣은 채 도준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말이 궁금한 듯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우예린은 마음이 놓였다. 안 그래도 부모님 전화를 받느라 정신없는데 도준희까지 미친 짓을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우리 예린이가 벌써 그런 때가 됐구나. 어떤 사람이니?
“지금은 좀 그렇고요, 다시 연락드려서 말씀드릴게요.”
―일하느라 바쁜 거야? 그래, 알았다. 기다리고 있을게.
배려하는 말투에 우예린은 착한 딸로서 죄책감을 느꼈지만 일단 전화를 끊는 게 먼저였다. 핸드폰을 내팽개친 우예린이 홱 도준희를 노려보았다.
“이 미, 미친 도준희!”
“왜?”
“부모님이랑 통화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힘 뺐잖아.”
“그게 무슨 힘을 뺀 거……!”
우예린은 실실 웃는 도준희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도준희랑은 말이 안 통해요.”
“말은 안 통하지만 마음은 통하잖아.”
“하아?”
“사랑한다며.”
눈웃음을 친 도준희가 말을 잃은 우예린의 가슴을 조몰락거렸다.
“그래. 몸도, 마음도 통했으니까 슬슬 상견례를 할 때가 됐네.”
우예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상견례를 하기는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우선이다. 도준희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부모님은 폭력이라면 치를 떠는 분들이었다.
“양복 새로 맞춰야겠지?”
도준희가 고개를 숙여 우예린의 어깨를 핥아 올렸다. 안 그래도 심란한 와중에 도준희의 진지한 목소리까지 듣자 머리가 아파왔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걸 어떻게 하지?’
* * *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예린아, 너 제정신이니?
우예린은 냉랭한 목소리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 막 만나는 사람에 대해 얘기한 참이었다. 좋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도 차가웠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틈타 전화한 터라 시간이 많지가 않다. 이 짧은 시간 내에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네 말대로라면, 그 ‘도준희’를 말하는 거잖아?
“엄마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요?”
―도우태 회장의 조카잖아, 조카! 도우태 조카 도준희. 내가 여기서 너희 아빠와 교회 운영하면서 얼마나 듣는 얘기가 많은 줄 알아? 그 사람은 절대 안 돼. 엄마 아빠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안 돼!
“엄마, 곧 인사드리러 간다니까요.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에요.”
상투적인 말이었고, 자신에겐 좋은 사람이지만 부모님께는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우예린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의 무력함에 맥이 빠졌다.
―절대 안 된다고 했어, 예린아. 얘기 듣고 네 아버지는 팔짝 뛰고 계신다. 우리 두 사람 눈에 흙 뿌릴 생각 아니라면 그 생각 접어. 설마, 하면 안 되는 짓까지 한 건 아니지?
하면 안 되는 짓이란 건 잠자리를 말하는 것일 거다. 그 잠자리는 물론 입으로 하는 잠자리도 해버렸는데요. 우예린은 솔직하게 얘기하면 부모님이 뒤로 넘어갈까 봐 입을 걸어 잠갔다.
―조만간 내려오렴. 같이 말씀 좀 읽자꾸나. 요즘 교회는 나가고 있니?
“어어어, 엄마, 나 지금 일하러 가봐야 해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폴더를 탁, 접은 우예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교회 얘기가 나오니 더는 할 말이 없다.
우예린은 옥상 난간에 기댄 채 한숨을 푹 쉬다가 카페 의자에 앉아 있는 도준희와 눈이 마주쳤다. 도준희는 다리를 꼰 채 손을 까딱였다.
우예린이 다가가자 도준희가 물었다.
“뭐라고 하시냐?”
“그게요, 도준희…….”
거짓말을 해봤자 어차피 부모님을 만나면 다 들킬 일이라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서 도준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우예린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도준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부모님이 말이에요. 정말 정말 엄하신 분이거든요. 결혼하기 전에 남자랑 뽀뽀하는 것도 이해 못 하시는 분이에요.”
“아직까지는 잠자리를 하면 결혼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럴 수 있지.”
웬일로 관대한 소리를 한다. 우예린이 눈을 끔벅거리자 도준희가 그녀의 둥그런 콧방울을 검지로 쓰다듬었다.
“걱정 마. 나 싫어하는 어른 없다.”
“…….”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도 내 말이라면 껌뻑 죽었다고 말해줬잖아.”
우예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른들의 예쁨을 받는 학생과 도준희의 학생 시절은 하나부터 열까지 비슷한 점이 없을 게 분명하다.
“우리 부모님은 좀 특이하신 편이라서…….”
“걱정 말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도준희의 태평한 말에 우예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리 부모님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야.’
부모님의 성격도, 도준희의 성격도 모두 아는 우예린으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도준희라니. 극과 극이 아닌가. 두 조합이 어떤 파국을 맺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암전이 되었다.
상상 불가다.
“언제 내려갈래.”
“다, 당분간은 회사 일이 바빠서요. 프로젝트 마무리되면 가죠, 뭐. 하하.”
어쩔 수 없지.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미뤄보자.
* * *
우예린이 미룰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은 딱 한 달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는 우예린의 손을 붙들고 차에 태운 도준희는 곧장 충남으로 향했다. 뒤늦게 스포츠카의 행선지를 알게 된 우예린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바깥 풍경과 태연하게 운전하는 도준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갑자기 가면 어떡해요!”
“뭘 갑자기야. 한 달이나 지났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내가 됐으니 됐어.”
“이기적이에요!”
“이제 알았냐?”
우예린은 힘이 빠져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도준희는 특유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저 표정이 부모님을 만나 무섭게 굳어질 생각을 하니 다시금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그래. 어차피 부딪힐 일이니까 더는 미뤄봤자야.’
마음을 고쳐먹어도 부모님이랑 싸울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우예린은 한 손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순간 다른 손이 따뜻해져서 고개를 들자 도준희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멀미 나?”
태연한 질문에 갑자기 긴장이 풀어진다. 우예린은 숨을 길게 쉬고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됐으니 물릴 수도 없는 일이고.
마음의 준비나 해놔야겠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부터 전화가 없으시네.’
도준희와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말한 다음 날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오던 부모님의 전화가 일주일 전부터는 뚝 끊겼다.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어느 부모보다도 집요한 부모님답지 않은 일이었다. 전화가 안 오니 마냥 좋다고만 생각했던 우예린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지만, 긴장과 불안과 초조함이 더 커서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도준희의 차가 우예린의 교회 앞에 멈추어 섰다. 우예린의 부모님은 교회 건물의 옥탑에서 지내고 있었다. 우예린은 교회를 올려다보고 핸드폰을 꺼냈다.
“뭐 해?”
“들어가기 전에 연락은 드려야죠. 갑작스럽게 찾아가면 놀라실 거예요.”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혔는데 조금이라도 좋게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우예린이 그 생각으로 전화를 하자 도준희가 핸드폰을 가져가 폴더를 닫았다.
“도준희?”
“전화할 필요 없어.”
도준희가 우예린의 손을 붙잡고 교회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연락했으니까.”
우예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준희가 어떻게요? 어떻게 전화를 했어요? 도준희!”
“아, 좀 조용히 해라. 우리 결혼 허락 받으러 가는 건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우예린은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입장이 바뀐 거 아닌가?
건물에 들어서서 기도관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자마자 우예린은 긴장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부모님이 주로 손님을 만나는 곳은 2층이었다. 과연 2층 응접실의 문을 열자 부모님이 앉아있었다.
‘정말 연락을 했었나 보네.’
도준희의 말대로 부모님은 차를 내어놓고 손님맞이를 하려는 듯했다. 그 건달 집안 아들의 날라리 아들은 절대로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었던 유선상의 부모님 목소리를 떠올렸던 우예린은 차분해 보이는 부모님을 보자 일단 안심했다.
‘얘기는 들어보실 생각이신가 봐.’
이제는 자신과 도준희의 역할이 중요하다. 부모님이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굴어야지. 내심 결심하고 평소보다도 침착한 표정을 지었던 우예린은 곧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한데?’
“얼른 앉아요, 도…….”
“도 서방이라고 부르시죠.”
“그, 그래요. 도 서방.”
우 목사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억지로 짓는 미소긴 했지만 확실히 미소다. 그건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그런 태도가 아니었다.
“아이구, 오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예린아, 괜찮았니?”
모친인 권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안 된다, 절대 안 돼! 거듭해서 말했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달리 교회 신도들을 토닥이는 것처럼 온화하고 따뜻한 목소리다.
‘?’
우예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증식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부모님이 너무 순순하다.
“그래요. 그래서 우리 예린이랑 진지하게 교제 중이라고요?”
“네, 말씀드렸다시피 결혼하려고 합니다.”
“아, 어흠. 결혼은…… 좀 이르지 않을지.”
우 목사가 헛기침을 하자 우예린은 긴장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부모님이 너무 순순한 게 이상했던 우예린은 두 분이 겉으로는 온화하게, 그러나 결혼 승낙은 끝끝내 안 할 거라고 예상했다. 혹여 도준희가 대화 도중 성질을 낼까 걱정되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뇨. 딱히 이를 것도 없죠. 타지에서 예린이 혼자 지내는 것도 마음이 안 놓이고요. 눈 뜨면 코 베인다는 서울 바닥 아닙니까.”
“그건…… 그렇기는 한데 예린이가 대학생 때부터 서울에서 혼자 잘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랬어도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외로워서 이상한 데 들어갈 수도 있고, 엄한 놈한테 코를 꿰일 수도 있는 일이죠.”
도준희가 찻잔 고리에 손가락을 걸며 능란하게 얘기했다. 우예린은 우 목사와 권 집사가 서로를 향해 곤란한 기색으로 눈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뭐지?’
“그리고 이제 예린이도 결혼해서 두 분 걱정을 덜어드릴 때가 됐으니까요.”
“아직 우리 두 사람, 정정해요. 예린이 한 명쯤은 충분히 품에 끼고 살 수 있으니까 벌써 이렇게 품에서 보낸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말이에요. 그, 도 서방……이 못마땅하다는 게 아니라…….”
우 목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예린은 우 목사의 위로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제야 무엇이 이상한지 알아챘다. 도준희는 분명 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으러 왔는데, 어쩐지 갑과 을의 대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애초에 도준희에게 상냥한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그녀에겐 그렇게 안 된다고 펄펄 뛰던 분들인데.
“두 분의 부담이 크지 않습니까.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
“부담이 안 크다는 겁니까?”
“크, 크지. 부담이 적지는 않지. 교회 운영도 요즘 힘들고 그래서…….”
우 목사가 고개를 젓자 눈을 희번덕거리던 도준희가 이내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름이 끼칠 만큼 빠른 표정 변화였다.
“역시 그렇군요. 제가 그 부담 덜어드리겠습니다.”
“…….”
“그럼 결혼 문제는 이걸로 해결이 된 거라 봐도 되겠습니까?”
우 목사의 얼굴은 푸르죽죽했다. 그가 답이 없자 도준희가 눈을 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장인어른?”
“그래요. 결혼은 그러면…….”
“잠깐만요.”
그때 침을 꿀꺽 삼킨 권 집사가 우 목사의 손등을 손으로 짚었다.
“돈도 돈이지만 그것보다 예린이 의사가 중요해요. 예린이는 결혼에 동의한 건가요?”
‘돈?’
조용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우예린은 귀에 탁 꽂힌 단어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권 집사의 시선이 자신에게 딱 닿자 더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권 집사가 간절한 눈으로 말했다.
“예린아, 말해 보렴. 너, 이 결혼 정말 원하는 거니?”
우예린은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도준희를 좋아하긴 하지만 결혼은 약간 끌려가듯이 결정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도준희가 눈짓했다.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눈이다.
반면 우 목사와 권 집사는 두 눈 가득 간절함을 담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싫다고 말하라는 뜻 같다.
우예린은 대답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이 결혼을, 진정으로 하길 원하는가?
우예린의 눈빛이 흔들리자 도준희의 입술 끝이 점차 내려갔다. 자신만만했던 표정이 흐려지는 순간, 따뜻한 손이 그의 찬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우예린은 눈을 크게 뜨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엄마 아빠, 저요……. 도준희, 아니,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사람은 학생 주임 선생님과 도준희였다. 그런데 이제 학생 주임 선생님을 생각하면 도준희의 발에 걸려 추하게 넘어졌던 장면만 떠오른다. 그리고 누구보다 무시무시했던 도준희는…….
우예린은 안 그런 척하지만 자신이 손을 잡은 게 좋은 듯 입술을 실룩이는 도준희의 보조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과 결혼할래요. 하고 싶어요.”
우예린과 도준희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손을 꽉 잡고 있는 것과 달리 우 목사와 권 집사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경건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우 목사가 고개를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직업과 사람은 귀천이 없는 법이다. 도 서방에게 너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래, 그런 거다.”
흔한 덕담이었지만 어쩐지, 꼭 도준희에게 우예린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우예린은 화장실을 핑계로 도준희와 응접실에서 나왔다. 기도관으로 내려간 후에야 도준희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여기도 오랜만이네, 하며 기도관을 둘러보던 도준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 소리야?”
꼭 엄한 사람을 잡는다는 얼굴이다. 억울해하는 듯, 왜 날 그렇게 보냐는 듯 불쾌해하는 기색에 우예린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잘못 짚은 건가?’
“부모님이 이렇게 도준희를…….”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얘기하려던 우예린은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제 남자 친구를 반길 분들이 아니세요. 보수적인 분들이 도준희를 반기니까 이상하잖아요.”
“저게 반긴 거야?”
도준희는 내가 언제 반김을 받았나 하는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저 정도면 많이 반기신 거죠.”
반면 아예 문전 박대까지 각오했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떨떠름한 표정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너처럼 얼굴을 밝히나 보지.”
도준희가 픽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언뜻 느끼하고 거만한 표정임에도 우예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한 기도실에 도준희가 서 있자 꼭 천국에 와 있는 것 같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환하게 빛나는 도준희의 얼굴에 다시 한번 반할 뻔한 우예린은 간신히 그게 말이나 되냐며 눈에 힘을 주었다.
도준희는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쨌든 결혼 승낙 받았잖아. 잘 됐지?”
“으음.”
아직 마음 한편이 찝찝한 우예린이 신음을 흘리자 도준희는 널찍한 기도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우예린의 손을 잡아당겨 옆에 앉혔다.
“다음 순서는 상견례인데. 영감을 어떻게 꺼내 오지?”
우예린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부모님께 도준희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해야 돼요.”
“얘기했어.”
“……네?”
“얘기했다고.”
우예린은 당당한 도준희의 표정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언제요?”
“전에.”
“전에 언제요?”
“아, 그게 중요해? 전에 얘기했다고. 네 부모님이 아신다는 게 중요하지.”
자신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적반하장으로 당당하게 구는 도준희를 곱지 않은 눈으로 훑어보던 우예린이 다시금 중얼거렸다.
“우리 부모님이 아신다고요?”
“어.”
그런데도 이 결혼을 승낙하셨다고?
‘잘못 짚은 게 아냐. 이건 확실히 이상해.’
“혹시 무슨 약 탔어요?”
“뭔 약.”
“마음을 반대로 말하게 하는 약이라든가…….”
부모님의 반응이 믿기지 않은 우예린이 미심쩍게 눈을 빛내자 도준희가 입꼬리를 올려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혼날래?”
우예린은 입을 합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준희는 결혼 승낙을 받은 게 기분 좋은지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우예린은 시간을 확인했다.
“올라가기 전에 밥 맛있는 거 먹고 가요. 난 부모님 데리고 내려올게요.”
“그래. 난 식당 예약한다.”
도준희가 핸드폰을 꺼내고, 우예린은 다시 응접실로 올라갔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우예린은 달려드는 부모님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예린의 손을 꼭 쥔 권 집사가 눈물을 글썽였다.
“예린아, 미안하다!”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을 보자 우예린은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지나가 미안하다고 손을 잡아왔던 순간을 떠올린 우예린은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이 결혼을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그게 죄다, 죄야.”
훌쩍이는 권 집사를 보자 안그래도 내내 어리둥절했던 우예린은 슬슬 감이 왔다.
“말씀해보세요. 도준희가 뭐라고 한 거예요?”
“그게 말이다.”
권 집사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 찍으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에게서 전해 들은 바, 실상은 이랬다.
일주일 전, 부모님을 먼저 찾아온 도준희는 우 목사와 권 집사의 냉랭한 태도를 직면했다.
“다짜고짜 찾아오다니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도준희는 반기지 않는 태도에도 여유롭게 한 장의 서류를 건넸다. 이게 뭔가 싶어 서류를 받아 든 우 목사의 눈이 홉뜨였다.
“보시다시피 두 분 채무는 제가 받았습니다. 지금 채무 변제 능력이 없어서 곤란해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이, 이런 걸로 협박을…….”
도준희가 서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며 나른하게 말했다.
“채무 기간을 꽤 길게 이어오셨던데요. 명시된 채무 변제 기간은 이번 연도까지인데, 작년에도 또 빚을 지셨네요?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교회도 영 예전 같지 않으실 텐데.”
“이보게, 도 사장.”
“도 서방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우 목사와 권 집사에게 도준희는 사르르 웃어 보였다.
“장인어른, 장모님. 이제 우리는 한집안 식구지 않습니까. 저만 믿으세요. 제가 집안 식구는 확실하게 챙기거든요.”
진상을 파악한 우예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역시 도준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서 그렇게 억울한 척을 해?’
헛웃음을 흘리는 우예린이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권 집사와 우 목사가 안절부절못했다.
“내 평생 웃는 얼굴이 그렇게 살벌한 작자는 처음 본다, 예린아!”
권 집사는 딸을 팔아넘겼다는 죄스러움에 훌쩍이고, 우 목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당장은 교회를 넘길 수 없어 결혼을 승낙했지만 아빠 아는 사람에게 여기저기 연락하면 수가 생길 수도 있어. 너를 불구덩이에 던질 마음은 없다.”
“아버지 친구들은 절대 돈 안 빌려주는 사람들이잖아요.”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사는 우 목사처럼 그의 지인들 또한 돈은 빌려주지도 말고 빌리지도 말자는 주의였다. 우 목사의 낯빛이 한층 더 침울해졌다.
“그래도 네가 싫다면…….”
“괜찮아요, 저는.”
우 목사와 권 집사가 흔들리는 눈으로 우예린을 바라보자, 우예린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분 마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감동한 듯 우 목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흑, 울음소리를 뱉은 권 집사가 우예린의 손등을 연신 쓸어댔다.
“예린아, 미안하고 고맙다.”
“…….”
“우리를 위해 네가…….”
자신들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른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감격을 마주하며 난장판을 생각했던 우예린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넘어가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돈으로 부모님을 설득하다니, 과연 도준희답다고 해야 할까.
‘도준희랑 있으면 걱정이 되다가도 안 돼.’
도준희는 늘 자신은 긴장하며 벌벌 떠는 문제를 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여유롭게 해결하니까.
도준희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다니.
우예린은 자신의 반응을 깨닫고 얼떨떨해졌다. 살짝, 웃음이 흘러나왔다. 부모님은 울고 있는 와중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침울한 부모님을 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걱정 마세요.”
“…….”
“저 그 사람이랑, 잘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 *
달그락.
우예린은 수저가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에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놀리며 식탁 위를 살폈다. 원래는 식당을 가려고 했으나, 권 집사가 무슨 식당이냐고 하는 통에 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급하게 음식을 준비한 것치고는 식탁 위는 각종 요리로 꽉 찬 상태였다.
‘으음.’
우예린은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부모님을 힐끗했다. 부모님은 아까보다는 좀 더 나아진 얼굴로 차분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원래도 식사 자리에서는 조용한 분들인 탓에 평소와 크게 다를 점은 없었지만 한 가지 특이점은 그들의 시선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도준희를 흘끔거리는 시선.
‘도준희를 불편해하는 건 나이가 많든 적든 다를 바가 없나 봐.’
도준희는 이 불편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얼굴로 갈비찜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이 자리에 그의 성질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젓가락질하는 모습은 우아하기 짝이 없어 자칫하면 속을 것 같았다.
그가 고기 조각을 우물우물 씹었다. 우예린은 부모님, 특히 권 집사가 젓가락질까지 멈추고 도준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
“…….”
“맛있네요.”
권 집사가 다행이라는 듯 미약한 한숨을 쉬는 걸 보자, 우예린은 도준희가 예비 사위인지 채권자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둘 다 맞기는 한데…….’
부모님이 지나치게 도준희를 의식하고 있는 탓에 어째 채권자를 집에 불러들인 불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양념한 고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장모님 음식 솜씨가 좋으시네요.”
‘장모님’이란 단어에 흠칫한 권 집사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으니 내가 다 고맙네요.”
“말 놓으십쇼, 장모님.”
도준희가 짐짓 다정하고도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한 가족 아닙니까. 아들처럼 편히 대하십시오.”
“아, 아들…….”
권 집사가 듣지 말아야 할 단어를 들었다는 듯 더듬었다. 그 옆에서 밥을 먹던 우 목사가 숟가락을 멈칫했다.
“아들…….”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연약하게 흔들렸다.
우예린은 역시 내가 뭔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다고, 불편함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초식 동물 셋이 모인 것처럼 연약한 세 사람과 달리 도준희는 밀림을 유유히 횡단하는 사자처럼 여유롭게 식사를 마쳤다.
불편했던 식사 자리와 달리 다과 시간은 좀 더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결혼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는데, 아무래도 평소에 생각해둔 게 있는지 이야기에 집중한 권 집사가 도준희를 덜 신경 썼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어디에서 여는 게 좋을까.”
“제 직장을 생각하면 서울이 나을 것 같기는 한데, 엄마 아빠 손님을 생각하면 여기서 여는 게 낫겠죠?”
우예린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권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도 서방……은 어떻게 생각해요? 도 서방 아는 사람이 서울에 많으면 서울에 여는 게 맞겠지만, 아무래도 우리 측 손님들은 다 충남에 있어서 다 서울로 가는 게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해서…….”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는 권 집사는 천안에서 결혼식을 열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도준희의 의중을 모르니 조심하는 듯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권 집사는 혼자 도준희를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우 목사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차를 마시고 있던 우 목사가 헛기침을 했다.
“나도 이 사람 의견에 동의해요. 우리 측을 생각하면 여기서 여는 게 나은데, 도 서방 손님이 많다면야 서울에서 해야겠지.”
“저는.”
도준희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도준희의 입에 닿았다. 도준희가 입술을 올려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제 고향이기도 하니, 여기서 여는 것도 의미가 있죠. 서울에 있는 사람들한텐 차를 보내면 되니까요.”
결혼식을 어디서 여느냐가 결정이 되자 권 집사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예물은 시계와 옷으로 하는 게 어떻겠니?”
권 집사의 시선이 우예린에게 향했다. 결혼에 대해 아직 잘 알아보지도 못했던 우예린은 의견을 낼 생각도 못 하고 권 집사의 말을 듣기만 했다.
“제가 따로 알아볼게요, 엄마.”
“음, 도 서방이 원하는 걸 예린이에게 말해봐요. 그럼 우리도 거기 맞출 테니까.”
권 집사의 말에 도준희가 눈썹을 찌푸렸다. 차를 마시면서 시종 그의 표정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 우 목사가 찻잔을 쥐며 입을 열었다.
“혹시 뭐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도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도준희가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자, 권 집사와 우 목사가 긴장하며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원래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익숙했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의견이 최우선이 된 지금 분위기가 어색하여 볼을 긁적였다.
“예물, 예단은 신경 쓰지 마세요.”
마침내 도준희가 말하자 권 집사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제가 다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하는데…….”
권 집사와 우 목사가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도준희는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제 쪽엔 부모님이 없으니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정 그러시면 제 할아버지에게 음식이나 해서 보내주세요. 그거면 될 겁니다.”
말을 마친 도준희가 아, 탄식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원하는 예물이 있으시다면 예린이 통해서 말씀하십시오. 돈은 생각하지 마시고요.”
우예린은 생각한 바와는 다른지 당황하며 말을 못 하는 권 집사와 우 목사를 흘끗했다. 당혹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다.
우예린이 내심 웃음을 흘리려는데 도준희가 품에서 흰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우 목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봉투를 응시했다.
“이게 뭔가?”
도준희가 빙그레 웃었다.
“상품권입니다. 바쁘셔서 휴식도 제대로 못 하고 계시다던데, 오랜만에 여유롭게 나갔다 오세요.”
우예린의 부모가 여행을 가지 못했던 건 바빠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예물과 예단 역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내심 머리를 싸매었던 우 목사와 권 집사는 필요 없다는 말로도 모자라 선물까지 받게 되어 어쩔 줄 몰랐다.
우예린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도준희의 의외의 선물에 눈을 크게 떴다. 권 집사와 우 목사는 이럴 수는 없단 생각에 난색을 표했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받나.”
“부담 갖지 말고 얼마든지 받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러십니까. 아직 두 분께 반도 드리지 못했는데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넋을 놓고 있던 우예린은 도준희가 손을 잡아오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가 권 집사와 우 목사를 보며 말했다.
“전 우예린을 받았지 않습니까.”
충남의 미친개가 이렇게 넉살이 좋았나? 편견에 사로잡혔었던 권 집사와 우 목사는 얼빠진 얼굴로 여유롭게 웃는 도준희와 얼굴이 빨개진 우예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준희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행동이 유효했는지, 우예린은 어쩐지 안심하는 것 같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빨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 * *
예식장 예약을 하고 청첩장도 뽑고, 결혼까지 두 달 남짓 남은 시점.
겨울이 되기 전, 우예린은 결혼 전 여행으로 유람선에 올랐다. 날이 좀 추워서인지 유람선을 탄 사람들은 다 긴팔을 입고 있었다. 우예린은 카디건을 여미며 아까부터 말이 없는 도준희를 힐끗했다.
“춥네요.”
도준희는 우예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움직여 갑판장으로 향했다. 바람이 부는 탓에 갑판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람선이 한강을 유유히 떠다녔다. 한강 다리는 하나둘 들어오는 불로 반짝였고, 한강 물에 반짝이는 불빛은 강물에 또 다른 촛불을 켜 놓은 듯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빛이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문득 도준희가 입을 열었다.
“신혼여행은 따뜻한 곳으로 갈까?”
“어디든 좋아요.”
“그럼 세계 일주?”
“세계 일주?”
“한 달은 유럽에서 보내고, 다음 한 달은 동남아에서 열대 과일 따 먹고, 다음 한 달은 남미 쪽에서 살 좀 태우고 그러는 거지. 좋지?”
“회사 그만둬야 할 수 있는 거네요.”
“……쳇.”
들켰다는 듯 도준희가 얼굴을 구겼다. 피식, 웃은 우예린이 손가락으로 도준희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나중에요.”
“나중에, 뭐.”
“나중에 그렇게 해요. 내가 평생 회사에 있을 것도 아닌데.”
“10년, 20년 후라고 얘기할 거면 아예 말을 꺼내지 마라.”
“설마 그렇게 길게 다니겠어요?”
우예린은 도준희가 추천해준 일자리를 생각하며 말했다.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자리면 굳이 지금의 회사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우예린의 말뜻을 이해한 도준희의 입술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예린.”
“네?”
“내가 얘기했나?”
“뭘요?”
도준희가 우예린을 잡지 않은 손으로 확성기 모양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우예린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말리려는 찰나.
“씨발, 존나게 사랑한다고!”
소리가 강을 향해 널리 퍼져나갔다.
‘내가 미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우예린이 도준희를 곁눈질했다. 바람에 도준희의 곱슬머리가 휘날렸다. 오늘따라 차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도준희가 지금 매우 기분이 좋다는 것을, 우예린은 뒤늦게 깨달았다.
도준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하아, 숨을 쉬었다.
“칼빵에는 전혀 효과가 없는 것들이나 주고 가서 웬 미친 여자인가 싶었는데.”
“…….”
“그날 칼 휘두른 새끼한테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야.”
“…….”
“전에 왜 널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물었지?”
도준희가 고개를 돌려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인 건 난 몰라. 너랑 내가 얼마나 다르든, 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그냥 나한테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너 하나라는 것뿐이야.”
“…….”
“나 이제 너 없으면 재미없어서 못 산다, 이 세상.”
우예린은 한강 불빛을 받은 도준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준희에 대해 많은 것을 오해했고, 아직도 그에 대해 다 안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도준희는 자신에게만은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보다도 내 편인 사람. 우예린에겐 그게 도준희였다. 괜히 코끝이 찡해서, 콧잔등을 실룩였다.
“나도 그날 도준희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도준희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가,
“도준희와 만나서, 내 인생이 좀 더 스펙터클해진 것 같거든요.”
멈칫 굳어졌다.
“……좋은 의미야?”
“지금은 좋은 의미죠.”
우예린이 뻔뻔한 표정을 짓자 도준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돌연 그가 우예린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손끝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산뜻하기보다는 농밀한 접촉이었다.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았다가 긴장한 눈으로 도준희를 지켜보았다. 도준희가 그녀의 손가락에 입술을 꾹 눌렀다. 우예린이 당황하며 주변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돼.”
“안 된다니까요?”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도준희가 나른하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손가락을 훑었다.
우예린은 눈을 움찔 떨었다. 도준희의 입술이 닿는 곳이 찌릿찌릿했다. 찬 공기에 식은 손이 도준희의 입술에서 온기를 얻었다. 도준희가 입을 살짝 벌려 우예린의 넷째 손가락 하나를 삼켰다. 뜨거운 곳으로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자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가늘게 신음을 내었다.
“도, 도준희…….”
뜨거운 혀가 우예린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그 사이에 매끄럽고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쩔쩔매던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혀를 굴렸다.
그가 손가락을 빼자, 혀가 쓰다듬었던 곳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우예린은 커다래진 눈으로 은빛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거…….”
“계속 입에 품고 있느라 아구가 나갈 뻔했어.”
도준희가 투덜거리며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던 이유였다. 말문이 막힌 우예린을 바라보는 그의 큰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 테니까. 결혼해 줘, 우예린.”
“…….”
“이거 꼈으니 이제 빼지 못하고 나랑 결혼하는 거다.”
예식장도 예약했고 청첩장도 나왔는데 도준희는 아직도 그녀에게 결혼을 확인받으려 한다. 꼭 우예린이 저를 좋아하는 게 믿어지지 않는 사람처럼.
“프로포즈 하는 거예요?”
“그걸 말로 해야 알아듣냐?”
뒤늦게 민망한지 도준희가 미간을 구겼다. 우예린은 손가락의 반지를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다가 도준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좋아요. 결혼해요, 우리.”
이제 식만 올리면 되는 상황에서 새삼스러운 말이었지만, 도준희는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술을 실룩였다. 우예린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떨려.’
왠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잔잔한 수면을 보자 생각나는 게 있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아 참, 나 유람선 타면 꼭 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해도 돼요?”
“뭔데?”
우예린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도준희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해줄 건지부터 말해요.”
“뭐, 프로포즈도 했겠다.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주지.”
“약속한 거예요?”
“……?”
우예린이 재차 묻자 도준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우예린의 요구를 들은 도준희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씨발, 쪽팔리게 그런 걸 어떻게 해!”
우예린이 도준희를 찌릿 노려보았다.
“날 위해서 그런 것도 못 해요?”
“쪽팔리잖아!”
“내 로망이라고 했잖아요!”
도준희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안 하면 결혼 안 해줄 거예요.”
우예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도준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우예린의 얼굴을 살폈다.
“아주 손에 쥐고 흔드는구만.”
허탈한 목소리에 우예린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래서 싫어요?”
“씨발, 좋아서 죽을 것 같다.”
체념 섞인 투로 뱉으며 도준희는 결국 우예린이 원하는 것을 해주었다. 갑판 끝에 서서 양팔을 올린 우예린이 고개를 젖히며 차가운 강바람을 만끽했다. 일명 타이타닉 자세였다.
“허리 제대로 잡아요, 도준희.”
우예린의 뒤에서 허리를 붙잡은 도준희가 나직하게 욕설을 뱉었다. 두 사람의 기행에 유람선에 탄 사람들이 흘낏흘낏 시선을 보내었다.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야?”
“영화 찍나?”
도준희는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중얼거렸다.
“씨발, 쪽팔린다.”
우예린은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싫어하는 건 하나님이 시켜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도준희가 자신의 말이라면 들어준다. 비록 불평은 많이 할지라도.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라서 우예린은 작은 웃음을 계속해서 뱉어낸다.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도준희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쓰잖아요.”
“그거랑 이거는 다른 문제지. 안 쪽팔리냐? 키스하는 건 쪽팔려 하는 애가 이런 건 안 창피해?”
“남들 앞에서 키스하는 건 당연히 창피하죠.”
“차라리 그게 덜 창피하겠다, 씨발. 다음에 또 이런 거 시키기만 해 봐. 죽여버린다.”
우예린은 킥킥 웃으면서 몸에 힘을 빼고 도준희에게 기대었다. 도준희가 우예린의 허리를 좀 더 세게 껴안았다.
“만날 씨발이래. 씨발맨이에요?”
“뭐라고 했어? 죽을래?”
도준희가 기가 막히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우예린은 몸을 움츠리는 대신에 입을 삐죽거렸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가요.”
“…….”
“왜 아무것도 안 해요?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라니까요?”
뒤에서 씩씩대는 기색이 느껴지자 우예린은 후후, 웃었다. 그것도 잠시, 몸이 홱 돌려진 우예린의 눈에 휘둥그레졌다. 반질반질한 눈을 한 도준희가 우예린을 거세게 잡아당겨 키스했다. 뜨겁고 강한 키스였다.
“죽일 거라면서요.”
입술을 뗀 우예린이 도준희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키스로 죽일 거라고.”
뻔뻔한 얼굴로 말한 도준희가 다시 우예린에게 키스했다.
날은 추운데, 도준희의 품에선 뜨거운 열기만 느껴졌다. 그의 품이 간질간질하고 뜨겁다는 걸 언제부터 깨달았을까?
잠시 생각하던 우예린은 도준희의 키스로 뇌가 녹는 듯하여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도준희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본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인생이 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함정에 빠진 건 맞지만 곳곳에 행복이 숨겨져 있는 함정이었던 듯하다.
첫사랑이었다가, 감옥 같은 펜트하우스의 간수였다가,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된 나의 미친개.
도준희가 우예린을 꽉 끌어안았다.
“숨 막히게 해서 죽여버리기로 한 거예요?”
도준희가 어이없다는 듯 우예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너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냐?”
“오래 알았다고 날 다 안다고 생각하진 말아요.”
“얼씨구?”
우예린은 도준희를 마주 끌어안으며 물었다.
“도준희, 나랑 결혼하게 된 기분이 어때요?”
“내가 모르는 모습도 있는 우예린이라서, 행복해 죽을 것 같다.”
“목소리는 안 행복한데요?”
“기어오르지?”
“하하. 프로포즈 받아서 기분이 좋은가 보죠.”
“너는?”
도준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는 기분이 어떤데?”
“나는…….”
우예린은 도준희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요.
“뭐라고 했어? 들리게 얘기해야지, 꿍얼꿍얼 뭐냐 그게.”
“못 들었으면 됐어요.”
“어쭈? 좋은 말로 할 때 리플레이 해라.”
“몰라요, 몰라.”
“하하? 많이 컸다, 우예린.”
“잠깐만, 나 떨어져요, 떨어져! 꺄아아악!”
(첫사랑과 미친개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