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천하제일인은 뚱뚱해
[서]
바로 알아차렸다.
누워있는 침대의 감촉이 다르다.
잠든 사이 누군가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문제는 그보다 심각했다.
통통한 살덩이가 사라졌다.
내공도 온데간데없어졌다.
몸이…… 통째로 바뀌었다.
거울에 비춰본 얼굴은 우울감이 가득하다.
그나마 생긴 건 봐줄 만하다만, 무슨 놈의 몸이 이리도 풀떼기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정녕 걷는 것조차 힘들다.
아무래도 환혼 당한 듯하다.
잠에서 깨어날 때 희미하게 들려온 소리가 있었는데…….
- …….
사람의 목소리인지, 음률이었는지, 그저 소음이었는지.
환청이었는지 모르겠다.
즐거움 없는 무료한 노년에 선물처럼 젊은 몸을 얻었다지만, 왜 하필 죽을 것 같은 몸뚱이인가. 선물이라기엔 포장지며 내용물까지 엉망진창이다.
그날이 문제였을까.
검성이 비무를 청하던 그날.
그날 검성이 광기 속에 떠들었던 말…….
아니면…….
1화. 천하제일인은 뚱뚱해.
후공은 기분이 좋았다.
식탁 위에 맛있는 요리들이 한 가득이다.
무료한 나날에 유일한 낙이라면 역시 식사시간.
삐그덕, 삐익.
의자에 앉자 의자가 죽는다고 비명을 내질렀다.
“조용, 조용.”
후공은 아기를 어루듯 의자를 달랬다.
의자를 탓할 건 아니었다. 의자가 낡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우 뚱뚱해 허리둘레는 보통 사람 셋을 합친 듯했고, 자칫 방심했다간 어디가 배고 어디가 엉덩이인지 헛갈릴 정도로 비대했기 때문이었다. 4인용 식탁에 앉아있는데도 1인용 같았다.
“자, 무엇부터 먹어볼까.”
의자는 진정되었다.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다.
문 밖에서 냉랭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후공은 허공에 젓가락을 든 채 멈춰야 했다.
“맹주님, 제갈혜입니다.”
“무슨 일이냐?”
“급히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바쁘니 한 시진(2시간) 뒤에 오도록.”
문 밖에서 절도 있는 대답이 들려왔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대답과 달랐다.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선 제갈혜는 하얀 피부에 길게 흑발을 드리운 차가운 인상의 미녀였다.
후공은 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냥 물러날 것이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디 한두 번인가.
“이리 오너라. 같이 먹자.”
“살쪄요.”
문 밖에서 말할 때와 달리 제갈혜의 표정과 목소리는 달라져있었다. 새침한 척 친근했고, 어느샌가 얼굴에도 차가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생글거림이 감돌았다.
차 한 잔을 제 손으로 타고는 제갈혜가 맞은편에 앉았다.
“녀석아, 사람이 통통해야 매력적인 게야.”
“백부님이 매력적이긴 하죠.”
“아니 다행이구나.”
“하하하!”
그녀는 맹의 군사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말수가 극히 적고 일 처리가 철두철미했는데, 표정 없는 얼굴에 늘 냉랭히 한기를 뿜어내는 탓에 사람들은 그녀를 빙화(氷花)라 불렀다. 하지만 젖먹던 시절부터 봐온 후공에겐 귀엽고 투정 많은 손녀나 다름없었다. 귀찮기도 하고.
“그렇게 웃으면…….”
“푼수 같다고요?”
“똑똑해졌구나.”
“굉장한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왔는데, 그냥 갈까 봐요.”
“그래놓고 진짜로 간 적은 없었지.”
“헤헤…….”
“사람들이 뭘 보고 널 얼음꽃이라고 하는지, 원."
후공이 혀를 끌끌 차는데도 제갈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두 가지예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좋은 소식부터.”
“녹림왕이 소 방목에 성공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우왕산의 고기 질이 최고 수준이래요.”
“그래?”
후공은 껄껄 웃었다.
녹림왕에게 산채에서 쓸데없는 짓 말고 소나 키우라고 했는데, 녀석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이다.
웃으면서 턱살이 춤을 추고, 볼살이 밀려 올라가 눈이 감은 것처럼 된 모양이었다. 제갈혜가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녹림왕 녀석, 드디어 적성을 찾은 게로군.”
“아직 기뻐하시긴 일러요.”
“아, 나쁜 소식이 있었지. 크흠.”
“현암지부에서 전서가 도착했어요. 검성의 경로와 이동시간을 볼 때, 내일 정오쯤 맹에 당도할 것 같아요.”
“벌써? 흐음, 검성이 꽤 서두르는군.”
후공이 갸웃했다.
보름 전쯤.
서신 한 통이 맹에 도착했다.
뜻밖에도 그것은 검성이 자신에게 보내온 비무 서신이었다.
검성은 과거 천하제일검으로 불렸던 자.
그의 무위는 실로 놀라워 하늘에 닿았고,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그런 검성은 십 년 전 돌연 종적을 감춰 두문불출하여 그래서 아예 강호와 인연을 끊었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결투를 신청해온 것이다.
하지만 후공은 비무 따위 응해줄 마음이 없었다.
조용히 떠나면 된다.
검성이라면 다음 맹주로 적합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의로우며 겸손한 자였다.
십 년간 무공의 경지도 올랐을 테니,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잘 대처해 나갈 것이다.
예상보다 서두르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별일이야 있겠는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도망쳐야지.”
“말도 안 돼요.”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반대로 후공은 뚱해졌다.
“백부는 진지하다. 검성의 칼을 맞을 바에야 맹주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치는 게 백번 나아. 검성의 고고한 인품이라면 훌륭한 맹주가 될 테고, 또 천하제일인, 천하제일검으로 불리게 되겠지. 나도 삼십 년 가까이 해 먹었으면 많이 해먹은 셈이고.”
“그냥 비무하시면 안 돼요? 백부님이 무공을 펼치시는 걸 한 번은 꼭 보고 싶단 말이에요.”
“내 장례 치르게?”
“그럼 마교의 광마혈성, 유령곡의 유령대제, 서장의 마령사왕 등 그 주옥같은 이들은 도대체 누가 저승으로 보낸 거예요?”
“쯧쯧, 그건 운이 좋았던 게지.”
“그러니까 운으로 저승으로 마구 보냈단 말이죠?”
제갈혜는 하나도 재미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후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니까. 게다가 지금 내 몸을 봐라. 요즘엔 걷는 것도 쉽지 않아. 아주 숨이 차. 어쨌든 난 오늘 밤 꽁지빠지게 도망칠 테니 뒷수습은 네가 잘하거라.”
제갈혜가 실망스러운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 어릴 때부터 어째 맨날 식사하는 모습만 보는 건데요.”
오 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곁에는 늘 맹주가 있었다. 아버지는 맹주의 의동생이었고, 한편으론 친구이기도 했다. 맹주의 식탐이 급격이 늘어났던 때가 그때였다.
제갈헤는 괜스레 다시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맹을 떠나시면 어디로 가실 거예요?”
“글쎄……. 녹림왕이 있는 우왕산 방목장으로 가든지, 북해로 가든지 해야겠다. 북해의 현음신녀가 북해 빙어가 그렇게 맛이 좋다며 꼭 와달라고 했거든.”
“어디로 가시든 반년 뒤에는 저도 백부님이 계신 곳에 갈 거예요.”
“아…… 귀찮구만. 내게 왜 그러느냐, 도대체.”
“아, 몰라요. 인수인계가 반년이 안 걸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 아세요.”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니, 제갈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부는 언제나 유쾌하고 여유가 넘쳐 주위를 밝게 하는 존재였다. 그런 백부를 따라 천하 곳곳을 유람하는 것보다 더 기대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소한 자신에게만은.
그때였다.
후공의 얼굴이 굳었다.
제갈혜는 귀엽게 울상을 지었다.
“피이…… 그렇게 싫으신 거예요?”
“…….”
“어……, 백부…… 님?”
제갈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잠깐 사이에 공기가 달라졌다.
평소 백부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진지한 말조차 농담으로 받고, 책망도 우스갯소리에 담아내던 백부가 아니던가.
이런 모습은 어린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조용.”
놀란 제갈혜의 눈이 커졌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안색으로 기다렸다.
이때 후공은 먼 곳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맹의 초입,
산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거리가 멀었지만, 그에겐 곁에서 속삭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무연객 님, 무슨 일입니까?
- 급전이다. 현암지부가 당했다. 검성에게 당했어. 민가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검성의 검날에 모두가 죽었다!
-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이럴 때가 아니다. 부근의 소림과 무당이 나섰지만, 그들도 어찌 될 지 알 수 없다. 당장 맹주께 알려야 해!
‘미쳐?’
후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성은 정파의 명숙이자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이었다.
그의 검은 활검이요, 의로운 검이거늘 살인마가 되어 피바람을 일으키다니. 그렇다면 한 가지뿐이다.
‘입마(入魔)!’
위치부터 파악해야 했다.
미쳐 날뛰고 있다면 어디로 이동했을지 모르는 일.
후공은 내력을 미간에 응축해 한순간 의식과 함께 기감을 퍼뜨렸다.
파앙!
공간에 파동이 일며 방원 오백여 장까지 확장되었다. 그 범위 내 수천 명에 달하는 이들의 숨결, 대화, 내력의 발산 여부까지 엄청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없다.
후공은 기를 증폭시켰다.
그의 안광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대한 의식이 뻗어나갔다.
파아앙!
형체 없는 의식이었지만, 기운이 폭발하자 제갈혜가 그 충격에 서너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뭔가 몸을 관통해가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미 식탁이 밀려나고 그 위 요리들도 바닥에 떨어졌다.
- 크하하하하! 소림의 백팔나한진이라니. 좋다. 진을 부수고 소림을 피로 물들여주마!
후공은 아련히 검성의 음성을 잡아냈다. 아직 하북 현암지부 부근이었다.
“백부님!”
제갈혜가 벽까지 밀려난 채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단 한 차례도 백부의 무공을 본 적이 없었다.
천하제일인으로 불리고 모두들 백부를 두려워한다는 건 전부 말로만 전해 들었던 터였다. 심지어 평소 빨리 걷는 법조차 없어, 경공을 펼칠 수는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백부의 기세는 그야말로 경천동지였다.
안광이 형형히 빛나고 정기가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끌어올려진 기세에 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들끓는 기운에 옷자락이 미칠 듯이 펄럭였다.
“검성이 마화(魔化)했다.”
“네?”
“시간이 많지 않아! 너는…….”
후공이 신형을 솟구쳤다.
제갈혜가 본 것은 뭔가 번뜩였다 정도였다.
천장이 뚫려 부서져내리고, 그 사이로 빛이 된 후공의 신형이 까마득하게 사라져갔다.
‘마, 말도 안 돼…….’
제갈혜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놀라움은 이어졌다.
거의 동시에 맞은편 벽에 구멍이 뚫리며 세 줄기 자줏빛이 폭사한 것이다.
세 자루의 검이었다.
자줏빛으로 화한 검들은 맹주가 사라진 길을 따라 빛무리를 남기며 사라져갔다.
멍해진 채 제갈혜가 마른침을 삼켰다.
‘백부님……’
천하제일인, 천하제일검으로 불리는 이의 진면목 앞에 제갈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두 격동치 말라. 맹주님이시다!”
“맹주께서 출도하셨으니 맹주님의 명을 기다린다!”
굉음을 발하며 사라져가는 빛줄기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고, 그 소란을 맹의 수뇌부가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제야 제갈혜도 정신을 차렸다.
귓가로 백부의 전음도 전해져오고 있었다. 전음을 다 듣고 나서야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
자줏빛 광채가 빛의 여운을 남기며 창공을 질주했다.
지상에 있는 이들이 자줏빛을 보았다 싶을 때는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 뒤늦은 탄성과 의문만 남았다.
그렇게 빛과 같이 질주해 순식간에 현암지부 위 창공에 선 후공은 분노로 눈이 이글거렸다.
전각의 잔해 속에 주검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너진 담과 바닥에 선혈이 낭자했다.
몇몇이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잔해 속에서 생존자를 살피고 있었다.
그곳을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공은 더 참혹한 광경과 마주했다.
마을 하나가 피바다였다.
백여 명에 이르는 남녀노소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찢겨 흩어져 있었다. 의식을 발산해 훑어보았지만, 생존자는 없었다.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