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화 (3/460)

3화. 젊어졌다. 살도 빠지고

제갈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두를 건 없었다. 어차피 맛있는 요리를 준비했다고 하면 껄껄 웃으며 일어나실 테니까.

하지만 맹주의 침소 앞에 이르렀을 때 제갈혜는 미간을 찡그렸다. 문을 열기도 전에 혈향이 확 풍긴 것이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실 안 광경은 참혹했다.

엎드려 있는 맹주의 비대한 몸 주변으로 검붉은 핏물이 굳어있었다. 그리고 머리맡에 피 묻은 단검까지. 제갈혜는 방 전체를 천천히 둘러봤다. 창문, 벽면, 천장, 자신이 들어온 문까지 돌아봤다. 외부 침입 흔적은 전무했다.

그제야 제갈혜는 여유를 찾았다.

“시녀가 놀란 것도 이해가 되네요. 귀식대법이라니. 백부님, 오늘은 장난이 지나치세요.”

귀식대법.

호흡과 심장의 박동을 일정 시간 멈추고 체온까지 죽은 것처럼 위장하는 고절한 절학이었다. 고작 죽은 척하는 용도로 귀식대법을 쓴다 싶으니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백부님, 이제 일어나세요.”

제갈혜가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다 봤다.

순간, 제갈혜는 경악하며 뒤로 넘어지고도 연신 뒤로 물러났다. 눈은 화등잔만 해지고 숨이 턱 막힌 그녀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꺼억 꺼억 거렸다.

목의 상처는 깊었고, 칼에 찔려 벌어진 살은 검게 물들었다. 그 틈새로 아직까지 피가 뭉클대고 있었다.

“백부님, 이럴 순 없어요. 이럴 순 없는 거잖아요. 왜요, 왜 이래야 하는데요…….”

울음소리가 어찌나 크고 서글픈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맹은 대혼란에 빠졌다.

맹주가 죽었다.

천하제일인이 죽었다.

고금제일이라 칭해도 모자란 무신(武神)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충격과 혼란은 단지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부 침투 흔적은 전무.

맹에 머물고 있는 외부인사 중 맹주를 시해할 능력을 갖춘 자는 없었다. 아니 이건 말할 계제도 아니었다. 외부든 내부든 누가 맹주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신(神)이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가 맹주였다. 거기에 더해 자결로 위장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살(毒殺)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맹주의 몸에 독성이 발견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사후에 독성이 증발하는 형태의 독이라도 의미 없다.

애초에 맹주는 만독불침의 몸인 것이다.

맛을 낼 수 있다면 독을 넣는 것도 추천하던 맹주였다. 한 방울만으로 천 명을 독살시킬 수 있는 청망사의 독이 조미료로는 최고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톡 쏘는 맛이 일품이라고.

이 죽음에는 증인도 없다.

맹주는 자신의 처소 주변에 호법을 따로 두지 않았다.

누가 누굴 지키냐는 것이 이유였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맹의 수비를 뚫고 접근해오는 상대라면 호법이나 호위가 감당할 수 없을 테고, 보호는커녕 맹주가 그들까지 지켜줘야 한다.

자결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매일 어떤 요리를 먹을까로 설레어하던 맹주가 아닌가.

보름 전에는 녹림 총채에 찾아가, 녹림이 키운 소고기 맛을 보고 왔다.

녹림왕은 맹주의 곁에서 고기를 구웠다.

후공이 감탄하며, 너 이놈 왜 이렇게 고기를 잘 굽냐며 칭찬해 녹림왕이 강아지처럼 좋아 펄쩍거렸다고 했다.

그렇기에 의문만 남았다.

죽을 수 없는 이가 죽었고, 죽을 수 없는 장소에서 천하제일인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것도 자결.

그럼에도 이는 현실이었다.

***

하지만 후공은 살아있었다.

단지 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기쁘게 목을 그어버리던 밤, 후공은 모종의 장소에 누워 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 몸뚱이 대체 뭐지? 하아, 숨을 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침대에 누운 채임에도 여러 가지를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바뀐 몸이 엉망이라는 것, 그리고 이곳은 무림맹이 아니었다.

일단 침대의 푹신함이 달랐다.

이불의 감촉은 낯설고 공기의 흐름은 무거웠다.

몸은 거추장스럽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무림맹이 아닌 낯선 장소, 낯선 육체 속에 자신이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에 비춰보자 쇠약한 청년이 보여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젊어졌구만. 살도 빠지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젊었을 적의 자신의 얼굴이 아닌 것이다.

꿈도 아니었다.

굳이 꼬집어 볼 필요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까지 걸어가는 몇 걸음 만에 숨이 찼다. 아니, 말은 바르게 하자. 한 걸음을 딛자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꿈이라면 그때 이미 깼을 터.

이게 요즘 한참 유행한다는 환생 관련 농담인가?

얼마 전 제갈혜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런 농담을 했었다.

- 환생하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냐고 되묻자, 제갈혜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지 고민하며 눈만 깜박거렸었다. 뭐 어떻든 지금 상황은 환생이 아니다. 몇 번을 봐도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리 살이 빠졌다 해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빙의?

빙의라고 하기엔 몸 안에 누가 같이 머물고 있지 않았다.

환혼?

그것도 아니면 지옥?

지옥은 아니겠지. 침대가 있는 지옥이라니.

다른 세상일까? 아니 그 전에 지금은 어느 시대지?

아직은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났다.

신의 장난, 천지조화일 수도 있었다.

잘했다고 칭찬해줄 수는 없었다.

감히 멋대로 내 삶을 바꾸다니. 원한 적도 없거늘. 내 본래의 몸이 얼마나 매력적…….

‘망할…….’

거울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치밀었다.

이 새로운 몸은 얼굴이 해골이었다.

일 년 내내 물만 마시고 살았겠다 싶은 몰골.

살은 뼈에 살짝 발라놓은 정도에 불과했다.

탱탱함이나 근육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퀭한 눈동자에 움푹 팬 뺨도 뺨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손목이었다. 물잔만 들어도 부러질 것 같이 여리고 가느다란 손목에는 칼이 지나간 흉터들이 많았다.

칼자국은 목에도 있었다.

방 안의 가구는 고급스럽고 단아한 것이 꽤 사는 집 같은데, 몰골은 왜 모양이고 수많은 자해 흔적은 뭐란 말인가.

‘응?’

후공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짧은 순간 후공은 고민했다.

‘자는 척해야 하나? 아니면 마주해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는 척하려면 침대까지 재빠르게 가서 누워야 하는데, 현재 다리 상태로는 서두르다 중간에 넘어질 게 뻔했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이어 문이 열렸다.

들어선 건 백발노인이었다.

비쩍 마른 몸에 큰 키,

흰 수염이 가슴께까지 드리웠다.

안색은 어둡고 병든 듯 수척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마에 난 두 개의 사마귀였다.

‘사마귀?’

사마귀가 왜 두 개씩이나 이마에 있느냐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다. 후공은 이 노인을 알고 있었다.

천화서고(天華書庫) 가주 범천이었다.

4, 5년 전쯤 후공은 노인과 마주했었다.

혈색 좋던 그때 모습과는 달랐지만 노인은 가주 범천이 틀림없다. 그는 사마귀가 묘하게 멋들어져 보이는 외모였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같은 시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다.

‘천화서고의 소행이란 말인가.’

천화서고.

천재 가문이자, 중원 삼대 서고 중 한 곳이다.

고대 문서와 기물들에 정통하며 가주 범천의 학식은 당대 석학들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뛰어났다.

“애야, 깨어있었구나. 잘됐다.”

“…….”

후공은 놀라 눈을 부릅뜰 뻔했다.

원래대로라면,

- 맹주, 놀라셨소이까?

이렇게 묻고,

대답은,

- 별로.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군.

이 정도 수순이어야 했다.

하지만 애야, 라니.

범천은 환혼을 모른다. 손자로 알고 있었다.

슬픔에 젖은 그의 눈에 꾸밈은 없었다. 방 안의 공기도 그가 들어서면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새벽에 슬픈 눈빛이라…….’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후공은 잘 알고 있었다.

후공은 가만히 있었다.

“너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었다. 이쪽으로 오거라.”

범천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손짓했다.

후공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걸음을 뗐다.

훅, 한 걸음을 떼면서 무릎이 꺾여 꼴사납게 비틀거렸고 몇 걸음 만에 숨이 찼다. 그렇게 범천의 곁에 앉았다.

“이것을 삼키거라.”

작은 환약이었다.

후공은 약을 쳐다보고 이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손목이었다. 칼로 그어 생긴 상처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떤 약일까?

비루한 몸을 생각하면 몸을 보하는 영약일 것이다.

하지만 아니겠지.

몸에 난 자해흔적과 범천의 슬픈 눈빛, 거기에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보면 독약일 것이다.

독약 쪽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독약이냐?”

물음에 대답이 없었다.

대신 범천은 미간을 좁혔다.

“…….”

“…….”

서로 눈빛만 오갔다.

후공은 쓰게 입을 다셨다.

‘난감하군.’

독약이냐 아니냐보다 방금 생긴 문제는 다른 쪽이었다.

말투. 방금 말은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건넬 만한 말투가 아닌 것이다.

“허험…… 그러니까.”

독약인가요? 정도의 말투여야겠지. 하지만 후공은 차마 존댓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독약?”

나름 타협점을 찾아 그렇게 물었다.

말이 짧아서인가, 대답도 짧아졌다.

“먹거라.”

아니 이제 범천은 말투 따윈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부인하지 않는 걸 보면 독약이었다.

범천이 무심하게 독약을 건넸다.

후공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 있습니다만.”

“바로 죽게 되냐고 묻는 거라면, 염려하지 말거라.”

그건 알고 있다. 맹독일 테지.

“지금 무림맹의 맹주가 누구입니까?”

후공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범천이 혹여 환혼에 관여된 건지, 시대는 동일한지.

“무슨 말이냐.”

범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중요한 사안입니다.”

“닥쳐라!”

“……??”

“죽으려 발버둥치고 죽게 해달라고 매일 소원을 빌던 놈이 난데없이 무림맹주가 누구냐 물어! 죽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냐! 넌 어디까지 이 할애비를 능욕하려는 것이냐!”

범천의 눈이 타올랐다.

후공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대화는 무리였다. 우선은 진정시켜야 했다.

“그동안 이 몸이 어떠했는지 모르나, 흐음……. 저는 죽을 생각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날이 밝거든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십시다. 크흠.”

후공은 걸터앉은 몸을 일으켰다.

그만 나가 달라는 의미로 시선을 문 쪽으로 주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가.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손자 녀석은 왜 죽으려고 발버둥쳤고, 노인은 손자를 포기하기에 이른 것인가. 당장 이해하는 건 무리였다.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알아갈 수밖…….’

후공의 상념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이놈이!”

범천이 득달같이 덤벼들었다.

후공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지풍을 날렸다.

마혈만 점혈한다. 그 정도는 쉬운 일.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지풍 같은 건 나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지풍이고 뭐고 팔이 들리지조차 않았다.

걷는 것으로 헐떡이는 몸임을 후공이 상기했을 때는 범천의 몸에 깔린 뒤였다.

“으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