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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4화 (4/460)

4화. 생애 처음으로 해 본 말

현실의 무게와 함께 범천의 몸도 무거웠다.

과거의 그라면 점혈이 문제겠는가.

소매를 떨치는 것만으로 범천 따위는 백장 너머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범천이 가슴에 올라타고 무릎으로 팔을 찍어 누르는데 숨도 차고 밀쳐지지도 않았다.

거의 범천은 산악과 같았다.

아니 말은 바르게 하자. 무공을 익히지 않은 노인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몸은 풀떼기였다.

“범천, 당장 비키지 못하겠…… 아가각…….”

분노를 다 토해내기도 전 입이 벌어져갔다.

범천이 양손으로 입을 벌리고 손을 밀어넣었다.

“먹고 죽어라.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 너의 저승길이 외롭진 않을 것이다!”

“아가각…… 당장 멈…… 꺼어억…….”

입을 닫으려 해도 범천의 손은 강철집게였다.

게다가 조금 힘을 썼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기운이 없었다.

그 사이 범천이 독약을 입 안으로 우겨넣었다.

“으으읍!”

방금까지 입을 찢던 범천은 이제 입을 벌리지 못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은 코까지 틀어막아, 후공은 이제 숨이라도 쉬려 발버둥쳐야 했다.

그 와중에 혀에 닿은 독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갑자기 다른 몸으로 들어와서 갑자기 죽는다니.

후공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간식거리에 불과한 독에? 내가?’

뭘 먹고 죽어야 한다 해도 그것이 독일 수는 없었다. 아니, 백번 양보해 죽는다 쳐도 영문도 모르고 가는 건 경우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범천은 동반자살을 각오한 만큼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눈에 핏줄을 있는 대로 터뜨려가면서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독을 뱉어내지 못하게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 이노오옴!”

꿈틀대는 중에 후공은 한 팔을 빼냈다.

탓!

손날로 범천의 목젖을 가격했다.

“큭! 허억, 허억…….”

범천이 목을 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 사이 후공은 황급히 독약을 뱉어냈다.

혀에 조금 녹아내린 것까지 뱉어내야 했기에, 켁켁대면서 최대한 침과 함께 게워냈다.

“케에엑! 켁켁! 어?”

그때 후공은 현기증을 느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바닥이 움직였다.

이건 몸이 도는 건가, 바닥이 도는 건가.

그러다 바닥이 눈과 가까워졌다.

쿵!

후공은 바닥에 얼굴을 대고 쓰러졌다.

독성분이 어찌나 강렬한지, 머금은 상태에서 살짝 녹아내린 미량만으로 독성이 영향을 발휘한 것이다.

‘말도 안돼. 내가 정녕 여기에서…….’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하고 몸 반쪽이 마비되어갔다.

목도 굳어지며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몸을 뒤틀며 목을 움켜쥐고 뜯어봐도 숨통이 열리지 않았다.

“꺼어어억…… 나, 나는…… 나는…….”

너의 손자가 아니다. 나는 무림맹주!

말이 어떻게 해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후공은 목을 부여잡은 채로 당혹감에 젖어 범천을 올려다봤다. 범천의 그늘진 얼굴은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 이제 죽어라. 네가 그토록 원하던 죽음이 아니냐. 죽을 수만 있다면 고통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네가 아니냔 말이다!”

‘무슨 이런 경우가.’

환혼이 되었다 해도 평범한 사람들 많지 않나. 왜 하필 자살충동에 사로잡힌 놈의 몸과 바뀐단 말인가.

이렇게 죽는 건 억울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대로면 죽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최후의 비책을 꺼내야 했다.

순간적으로 후공은 모든 정보를 취합했다. 동시에 낼 수 있는 마지막 한 힘을 끌어모았다. 정녕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후공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될 수 있을지가 문제였지만, 아니 해내야 했다.

부들대며 후공은 손을 뻗었다.

“사…….”

“뭐냐!”

“사, 살…….”

“……?”

“살려…… 주세요. 할아…… 버지……. 꺼어어, 꺼어어억…….”

“……??”

시야가 흐릿해지며 의식이 멀어져간다.

의식의 끝자락에서 후공은 범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천화서고 대공자의 침소.

가주 범천과 의원이 침대 곁에서 한 잠들어 있는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범항의 상세는 어떤가?”

가주가 물었다.

의원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걱정 마십시오. 혈우독(血尤毒)의 독소가 남긴 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수준입니다. 빠르면 한 달, 늦어도 한 달 반이면 독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차츰 줄어들 것이고, 일부 마비된 몸도 본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망할, 혈우독이었다고?’

청년 아니 후공은 깨어났지만 잠든 척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 비책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지긴 했는데, 다행이라고 하기엔 억울한 후공이었다. 한심하게도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게 될 줄은 몰랐던 그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려달라는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태 그런 식의 말은 듣기만 했었다.

자신은 용서하느냐 죽이느냐를 결정하면 그만이었다.

거기에 더해 독약이 혈우독이란 말을 듣자니 기도 안 찼다.

혈우독이라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혈우는 달리 혈고(피버섯)라 칭하는 독버섯이었다.

불에 구우면 버섯 내 독성이 강해지는데, 이때 고소함도 더욱 진해져 강호를 종횡할 때 종종 산과 들에서 간식거리로 애용했다.

찾기 힘들어 자주 못 먹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지, 혈우 버섯은 죽느냐 사느냐와는 무관했다. 그런데 혈고에서 추출해 만든 혈우독환으로 한 달을 몸져누워 있어야 한다니.

고작 간식이거늘!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가주,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만…….”

의원이 말을 흐렸다.

새벽녘 손자와 동반자살을 기도한 가주에게 탄식과 원망을 한참동안 늘어놓다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 울먹인 다음 상황이었다.

“말해보게.”

“천운입니다만…… 그러니까, 대공자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의원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의아함이 묻어났다.

“말 그대로일세.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까? 하지만.”

“나도 직접 듣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테지.”

비정상적인 대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졌다.

죽어가는 이가 살려달라고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건만,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희한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기쁜 소식입니다만 어찌 전조도 없이…….”

“흠, 평소와 느낌이 다르긴 했네. 말투도.”

“설마 삶의 열정이 보였습니까?”

“그건 아니었네. 그런 류였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테지. 그것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범 가주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었네. 관조(觀照).”

“네?”

“절망 속에서 나오는 무심함과는 달라보였네. 정중(正中)의 무심함이었어. 기이한 건, 나를 몰라보더군. 존대도 없이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뭔가.”

“못 알아봤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혈우독의 영향이 뇌에 미쳤다고 봐야겠군요.”

“독의 영향?”

“네, 혈우독은 독성이 강력하기 이를 데 없어, 미량이라도 뇌로 침투할 시에는 포악해진다든지 반대로 온순한 양이 되기도 하는 등 여러 변수가 발생합니다. 심지어는 기억을 잃는 일도 있으니, 말투가 거칠어지는 정도는 흔한 일이지요.”

“그럴지도.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아닐세.”

가주 범천은 말을 아꼈다.

손자의 태도가 낯설고, 말투가 거칠어진 건 혈우독을 입 안에 넣기 전에 일어난 일인 것이다.

범천이 말을 아끼는 모습에서 후공은 범천의 의중을 이해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것이겠지.’

일말의 가능성에 불과해도 희망을 잃어버릴까 두려운 것이리라. 칼로 목과 손목을 자해하며 죽음을 소망하던 손자가 살려달라고 말했으니, 혹시나 하는 기대가 그의 마음에 피어난 것이리라.

“이번 일이 전화위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원이 없겠네.”

“솔직히 저는 가주님이 더 걱정입니다.”

“허허, 나 말인가? 난 전혀 염려할 것 없네.”

“가주님께 크게 바라는 것 없습니다. 앞으로 삼십 년만 사십시오.”

“고작……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둘은 웃으며 방을 나섰다.

오후에는 다른 이들이 병문안을 왔다.

두 청년이었다.

한 청년이 술에 취해 방에 들어서자마자 휘청여 쓰러질 듯하자, 곁의 청년이 얼른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괜찮다며 손을 쳐내고는 그만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아우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곱상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괜찮다마다. 야, 부몽! 착각하지 마라. 난 넘어진 거 아니야. 이 형은 처음부터 바닥에 앉으려고 했었거든.”

술 취한 청년은 넘어진 김에 태연히 바닥에 앉았다.

“네,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저 짐승같은 새끼, 살아 있는 거 맞냐?”

“잠든 것으로 보입니다.”

“잔다고? 하하, 미친 새끼, 잠이 오나? 아우야, 이러다 저놈이 우리보다 더 오래 살겠다. 아주 장수하겠어. 죽는다 죽는다 말만 하지, 이러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기세 아니냐?”

“할아버지께 살려달라고 말했다 하니, 어쩌면 큰형님 마음이 바뀐 것일지도요.”

동생의 부드러운 어조는 화를 불렀다.

술 취한 청년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큰형님? 그 입 처 다물어라. 너부터 죽여 버리기 전에!”

“죄송합니다.”

“너에게 형은 한 사람뿐이야. 저건 짐승이지, 사람 새끼 아니란 말이다! 알겠냐?”

“…….”

“알겠냐고!”

“네.”

“염병할, 기분 더럽네. 저 미친 낯짝을 보러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미쳤지. 가자.”

“…….”

“가자고!”

“네.”

두 청년이 나가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 몸에게 아우들이 있는 모양이군.’

후공은 대화를 듣는 내내 술 취한 놈의 면상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아직은 아는 것이 부족해 때가 아니라 판단했다.

저녁에는 다시금 가주 범천이 잠시 들러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갔다. 또 의원이 진맥을 위해 찾았고, 그 외 다른 병문안은 없었다.

후공은 그렇게 내내 잠든 척하며 동태만 살폈다.

몸은 풀떼기고, 아는 것도 없는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건 괜히 피곤함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서 최소한의 정보라도 확보해두는 것이 우선이었다.

소소하지만 소득은 있었다.

이 몸의 이름은 범항.

죽음을 갈망해온 놈.

그리고, 천화서고의 대공자.

두 아우.

더불어 천화서고는 망해가는 듯하다.

분위기는 어째 피폐하고 병문안을 오는 이가 너무 적었다.

한 가문의 대공자가 죽다 살아났는데, 가족이라곤 단 세 명만 병문안을 왔을 뿐이었다.

두 아우가 사촌인지 친동생인지는 몰라도 그중 하나가 술에 취한 중에도 온 걸 감안하면, 버르장머리를 떠나서 올 만한 사람은 다 왔다고 봐야 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분위기가 암울해지기 마련.

심지어 범항은 목 긋고 손목 긋고 죽는 게 소원이었으니, 일가친지들의 정신도 피폐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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