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회복 속도가 상상초월
가주는 손자와 함께 죽으려 했다.
가족 중 막는 이도 없었다. 독을 복용하는 순간까지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들 정신이 거덜 나버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 몸의 부모는?’
아픈 자식을 보러 오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후공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이미 세상을 떠났겠군.’
어쩌면 부모의 죽음이 범항을 극단적으로 몰아간 것일까?
의문이 떠오른 순간 후공은 생각을 떨쳐냈다.
자신이 그 사정까지 이해해줄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이 몸에 자신이 들어오게 되었느냐였다.
문득 검성의 말이 떠올랐다.
- 후공…… 그대도 영원할 순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난 보았다. 내 망상인지…… 꿈인지…… 그대가 모든 걸 잃는 걸…….
또 뭐라고 했는데…… 맞다.
- 바람에도 흔들리는 연약한 모습이 된 그대를…… 그랬으면 좋겠소. 그것이 그대의 파멸이었으면…….
어째 그 말대로였다.
연약한 모습, 풀떼기같은 몸. 모든 걸 잃는 것.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검성 녀석, 돗자리나 깔았으면 굉장했겠는걸.’
마성에 삼켜진 상태로 미래의 조각을 엿보았던 걸까. 아니면 그저 망상이었을까. 결과적으로 검성 말대로였다. 다 잃었다. 통통한 살까지도…….
‘뭐 다시 시작하면 되지.’
원인이 무엇인지는 곧 알게 될 터.
그동안은 정보를 모으고 몸을 회복하는 데 힘써야 했다.
그러다 문득 후공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여태 아무것도 먹지 않았군.’
먹은 것이라곤 독약과 미량의 물뿐이었다.
밤도 깊었으니 이젠 허기를 채워야 할 때였다. 어찌 힘을 써보면 상체를 일으켜 세울 순 있을 것 같아 눈을 떴다.
“어!”
후공은 눈을 뜨며 움찔했다.
눈앞에 누군가의 얼굴이 가깝게 보인 것이다.
너무 가까웠다. 한 뼘 정도로 가깝게 들이밀고 있던 차였고, 마침 후공이 눈을 뜨는 바람에 서로 놀라고 말았다.
더 크게 놀란 건 상대였다.
“캬아아!”
뾰족한 비명을 내지르며 경기하며 뒷걸음쳤다.
젊은 여인이었다. 작은 체구인데 예쁘장했고,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턱에 뭔가가 묻어서 떼어 내려다……”
여인이 몸을 추스르고 용서를 구했다.
탐탁지 않았다.
후공은 미간을 찡그리며 내심 혀를 찼다.
여인의 행동이나 용서 때문이 아니었다.
현실이 실감난 탓.
어떻게 같은 방 안에, 그것도 눈앞에 사람이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숨결마저 들을 수 있는 간격이었거늘.
과거의 그라면 백여 장 밖 기어 다니는 벌레의 종류가 무엇인지, 그 벌레의 다리가 몇 개인지, 다리 중 하나가 더디게 딛어지면 저린 것인지 다친 건지까지도 구별해낼 수 있었거늘, 지금은 아예 감각 능력이 없는 수준이었다.
“얼굴이 너무 가깝던데, 넌 눈이 안 좋은 모양이지?”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공자님.”
여인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후공은 여인이 시녀 차림임을 감안해 편한 말투를 썼다.
“네 이름이?”
“제 이름요?”
“그래.”
“저기…… 공자님, 역시 독약으로 머리가 이상해지신 건가요?”
“응?”
여인의 언사가 신선했다.
후공은 여인을 자세히 살폈다.
말투만 묘한 것이 아니었다.
시녀 차림인데, 시녀치곤 신체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눈에 신광이 갈무리된 것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흐음, 이상해진 정도가 아니야. 난 아주 엉망이 된 듯하구나. 기억까지도.”
“정말요?”
“넌 이름이 없는 거지?”
“아, 죄송해요. 제 이름은 송화예요.”
후공은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몸 왼쪽이 부분적으로 마비된 상태라 잘 되지 않는다. 낑낑거리자, 송화가 얼른 부축했다.
“송화야.”
“네, 공자님,”
“속이 허하구나. 빈속이니 죽을 끓여오도록 해라. 먹으면서 너와 이야기를 나눠…….”
“네?”
송화가 눈을 크게 떴다.
반응이 극렬해 후공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뭘 먹는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하지만 바로 이해했다.
‘하긴 범항이 스스로 뭘 먹겠다고 했을 리 없겠지. 제대로 먹었다면 몸 상태가 이럴 리가.’
후공은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랄 것 없다. 이제부터는…….”
“공자님 왜 그러셔요?”
“허허, 놀랄 것 없대도.”
“이러시면 안 되죠!”
송화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응?”
“식사를 왜 하시려는 건데요?”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송화의 눈이 표독스러워지는 것이 제대로 들은 모양이었다.
“드시고 힘을 내시려고요?”
“그렇지.”
“힘내서 뭐 하시려고요?”
“그냥 뭐…… 살려고.”
“아니죠. 힘내서 죽으려는 거잖아요. 죽을힘을 회복해서 또 죽으시려는 거잖아요. 죽을힘이 없으셔서 지금 불안하신 거죠. 그쵸?”
송화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계속 먹겠다고 하면 주인이고 뭐고 한 대 칠 기세였다.
‘범항 너 이 녀석, 이 정도였냐.’
시녀가 이 지경이라니.
물론 시녀도 정상인은 아닌 듯하다.
안 먹어도 죽는 건 생각에 없는 것인가. 시녀든 호위든 일단 식사는 하게 하고 지켰으면 좋겠거늘.
“혹시 너 내 약혼자 같은 거냐?”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약혼자면 파혼하려고 했지. 요즘 추세더라.”
“농담을 다 하시네요. 모두 공자님 때문에 지쳤어요. 가주님도, 작은 주인님, 그리고 저희 모두가요. 차라리 다 죽자는 말을 할 정도예요. 그런데 또 식사를 하시겠다고요?”
후공은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느냐?”
“열심히 사셔야죠. 삶의 열정을 갖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 웃으시고 감동하고 희망을 보고요.”
“그래 맞는 말이다. 난 그중에서 우선 잘 먹는 것부터 할 생각이다만.”
“안 돼요. 저는 못 믿겠어요.”
“그럼 굶어야겠구나.”
“잘 드셔야지 굶으면 어떡해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
후공은 멍해졌다.
먹는다고 해도 난리, 굶는다고 해도 난리다.
이 정도면 천화서고는 일가친지뿐 아니라 호위나 시녀들도 미쳐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요 녀석은 범항이 자결하려는 것을 몇 번이나 지켜본 걸까.’
송화가 무공을 익힌 걸 보면 시녀 겸 자살방지책일 터.
그렇다면 이 시녀는 제정신이 아닐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먹느냐 마느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었다.
후공은 빠르게 포기했다.
“송화야,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 무림맹주가 누구냐?”
“맹주는 왜요?”
다시 뾰족.
뭘 물어도 다 날카롭다.
“맹주는 왜 갑자기 궁금해하시는 건데요.”
“말해 보아라. 네 예쁜 입으로.”
“예…… 예쁜…… 흠…….”
송화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감췄다.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하더니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맹주 이야기는 재밌는 이야기니까 그 정도는 설명해드릴게요.”
“오호, 재밌어?”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지라 후공은 전직 무림맹주로서 귀를 쫑긋 세웠다.
“재밌다마다요. 무림맹주는요. 돼지예요, 돼지. 엄청 뚱뚱보예요.”
“어……”
“얼마나 뚱뚱한지 걸을 때면 뒤뚱뒤뚱 걷는대요. 살이 너무 쪄서 볼살이 밀려 올라와 눈도 늘 감고 있는 것 같대요. 하하, 그러면서 자신이 천하제일인이라고 떠들고 다닌다는데, 기도 안 차죠.”
“…….”
“반년 전인가는 그 몸으로 검성을 죽였대나 뭐래나. 지나던 개가 웃을 말을 지어 퍼뜨리기나 하고. 내내 먹기만 하면서 무슨 천하제일 타령인지. 분명 무공이 아닌 권세로 그 자리에 앉은 것이겠죠. 그 뚱뚱이 맹주 이름은요…….”
“됐다.”
후공은 나직이 말을 막았다.
“공자님 갑자기 안색이 안 좋으세요?”
“원래 난 안 좋아.”
“아니 방금 전과 달라요. 왜 그러세요?”
“너 때문이다.”
“저요?”
“넌 정말 못된 아이로구나.”
“제가 뭘요?”
“사람을 면전에 두고…… 아니 당사자가 앞에 없기로서니 그렇게 타인에 대한 험담을 한단 말이냐.”
“아니어요. 진짜 뚱뚱하대요.”
“어허! 자꾸 왜 뚱뚱하다고 그래!”
후공이 발끈하며 말을 덧붙였다.
“풍채가 좋은 것이겠지.”
“그 정도가 아니라던걸요.”
“그렇지 않아. 아무튼 풍채다! 또 무림맹주라면 응당 강호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훌륭하고 멋진 사람일 텐데, 넌 네가 예쁘다고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니 실망스럽구나.”
“죄송해요.”
“듣기 싫다. 통통한 사람이 얼마나 멋있고 매력적인데 그것도 모르고…….”
“네? 통통한 사람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한 것 아니냐.”
단호한 대답에 송화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멍해졌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니까 공자님도 통통해지고 싶으신 거예요?”
“물론이지.”
“제가요, 바로 식사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서둘러야 할 것이야!”
송화가 나가자 후공은 고개를 저어댔다.
‘흐음……. 역시 시간대는 같다는 건데, 그럼 범항과 내가 서로 환혼된 것인가.’
그렇다면 맹에 있는 자신의 몸을 범항이 가지게 된 것을 의미했다.
‘범항 녀석…… 어안이 벙벙해져 있으려나. 아니지……. 아…….’
어안이 벙벙이고 뭐고, 후공은 손을 들어 쳐다봤다.
손목에 그어진 수많은 흉터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허……. 설마 내 몸을 하고 죽어버렸을지도…….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
열흘이 빠르게 지났다.
후공은 침대에 누워 심결을 운용해갔다.
단기간에 어떤 성취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이 몸의 허약함과 비루함은 말로 할 수 없어, 그저 혈맥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경혈의 흐름을 터 가는 정도에 불과했다. 식물 상태에서 일반적인 사람 수준까지는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몸의 회복은 빨랐다.
의원이 처방한 약도 꾸준히 복용했고, 식사도 죽에 불과했지만 두 그릇은 기본이었다. 그 결과 몸의 마비는 거의 풀렸고 진통도 잔잔해졌다.
그러던 중에 듣고 싶었던 맹의 소식이 전해졌다.
늦은 밤이었다.
“사람 일은 모르겠군요. 범 공자의 회복 속도가 이리 빠르다니요.”
“기이하군. 이럴 리가 없는데…….”
침대 곁에서 의원과 가주가 놀라워했다.
기쁨 반 우려 반이었다.
후공은 잠든 척하며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미리 염려하실 것 있겠습니까. 대공자가 식사도 잘하고 보약도 마다하지 않는 걸 보면, 혈우독이 전화위복이 된 것 같습니다.”
“희망을 품는 것이 두렵네. 지금은 잠시 기억을 잃어서 이러는 것일 테니. 그래도 자네 말대로라면 좋겠군. 사람 일이란 것이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물론입니다.”
“솔직히 상상이나 했겠나. 맹주 후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마교나 귀운종의 손속도 아니고 자결이라니. 천하제일인도 그 나름의 고뇌가 있었나 봅니다. 역시 겉만 봐선 사람은 알 수 없나 봅니…… 응?”
의원이 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침상을 바라봤다.
가주 범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들어 있던 큰 손자가 갑자기 몸을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입에서 빠드득 소리도 났다.
“가주님, 대공자 이 가는데요?”
“허어…… 나쁜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구만.”
하지만 두 사람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후공인걸.
후공으로선 범항이 환혼된 후 자결할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어도, 사실로 확인하고 보니 허탈함이 말로 할 수 없었다. 분노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