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저는 사실 천하제일인입니다
후공은 연신 이를 바드득거렸다.
가주 범천이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괜찮다. 애야, 괜찮아. 그저 꿈일 뿐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빠드득.
후공은 이가 더 세게 갈렸다.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다.
이로서 명백해졌다.
자신과 범항은 환혼된 것이다.
환혼은 범항의 짓일까?
그렇든 아니든, 분노에 찬 후공은 결국 폭발해버렸다.
“이 미친 새끼 죽여 버리겠다! 멋대로 죽어버리다니, 죽었어도 널 죽여 버리고 말겠다아아!”
몸부림치며 소리치니 침대가 출렁거렸다.
가주 범천과 의원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후공은 아예 뵈는 게 없었다. 눈을 까뒤집고 발버둥 쳤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내겐 최소한 한마디 상의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 엌!”
폭주하던 후공이 그만 정신을 놓고 혼절해버렸다.
몸이 약한 데다 아직 독소가 다 빠지지 않은 터라, 정신적 충격은 몸에 큰 무리였다.
가주 범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의원도 따라 삼켰다.
“자, 자네 들었나?”
“드, 들었습니다.”
“죽고 싶다가 아니었지?”
“네, 분명히…… 죽여 버리겠다고.”
“대단하지 않나?”
“저 사실 가…… 감동했습니다.”
죽지 못해 살던 손자가,
죽음을 쫓던 대공자가,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니.
가주나 의원에게 이보다 듣기 좋은 말은 없었다.
***
자결 소식을 접한 뒤로부터 닷새.
그 사이 가주 범천은 몸살에 걸려 끙끙 앓았다.
본래 노환이 있던 상태에서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한 탓이었다. 며칠이 지나 몸을 추스른 그는 지난 며칠간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그러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무슨 소리냐? 큰 아이가 팔굽혀펴기를 한다니?”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대공자께선 팔을 부들거리며 무너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랬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놀랍게도 일곱 개까지 해냅니다. 하루 하루가 다릅니다.”
“뭐?”
범 가주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몸살을 심하게 앓은 탓에 헛것이 들리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그뿐 아닙니다. 쪼그려뛰기에 기마자세도 취하며 매일매일 체력단련에 여념이 없습니다. 힘든 내색도 없이 구슬땀을 흘리는데, 오늘은 심지어 다리 찢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리를 왜 찢는단 말이냐!”
그걸 찢어서 뭘 어쩌겠다고!
가주는 머리가 얼얼했다.
큰 손자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녀석은 숨을 쉬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운동이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몸인데 쪼그렸다가 뛰다니. 그건 어떤 식으로든 두 발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보고가 거짓일 리는 없었다.
큰 손자의 호위는 총 다섯.
근접 호위는 송화가 시중을 겸해 지키고, 나머지 넷이 은신해 자살을 방지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손자의 일거수일투족은 호위들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식사를 먼저 청하고, 드시는 양도 많습니다. 물도 하루에 한 동이 넘게 마십니다. 거기에 몸까지 며칠째 단련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설마…….”
범천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호위가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
“네, 이 상황은 1년 전의 재현입니다. 아니, 지금의 모습은 그때보다 한층 불안합니다. 아예 몸을 단련해 신속히 생을 마감하려는 의도가 틀림없습니다. 더 이상 대공자의 체력이 좋아져서는 위험합니다. 막아야 합니다. 혈도를 점해 종일 누워 있게 해야 할 시점입니다.”
“흐음…….”
1년 전 사건을 떠올리며 범천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당시 범항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였다.
새 출발을 하려는 듯 밝은 안색으로 함께 식사하고 미소를 띠며 산책을 하기도 했다. 모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로부터 닷새.
녀석은 방심한 틈을 타 목을 매달았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발견해 목숨을 구했을 때, 눈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광소를 터뜨리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하지만, 얼마 전 분명 내게 살려달라고 말했는데…….’
가주는 그래도 믿어보고 싶었다.
자신이 몸져 누운 사이 체력단련도 칠 일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이번엔 진짜인지도 모른다. 지난번에는 꿈결에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부들거리기도 했으니.
뒤통수를 맞을까 두려워 가능성마저 차단하는 건 섣부른 일이었다.
“직접 보고 이야기를 해보겠다. 녀석을 지금 바로 불러오너라.”
“네.”
부름에 후공은 땀범벅으로 가주와 대면했다.
쪼그려뛰기를 스무 번 정도 했을 뿐인데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종아리 근육은 끊어질 듯 당기는 상태로 씻지도 않고 왔다. 어차피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다시 구슬땀을 흘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억은 어떠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느냐?”
“아직…… 입니다.”
아직 존대가 어색한 후공이 살짝 더듬었다.
“전혀 말이냐?”
“…… 네. 전혀…… 진전이 없습니다.”
더듬는 건 단지 존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공의 숨은 거칠어 중간중간 끊어졌다 이어졌다.
범천이 그 꼴을 보다 못해 못마땅해하며 미간을 좁혔다.
“어수선하구나. 다리를 지금 꼭 찢어야 하느냐.”
가주 앞에 와서도 후공은 힘겹게 다리를 찢어대고 있는 것이다.
“한순간도…… 허투루 쓸 수…… 아악…… 없습니다. 기억이 돌아오든…… 기억이 돌아오지 않든 달라질 건 없습니다. 현재의 몸 상태는…… 풀떼기.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가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리가 안 찢어지네.’
아니 안 찢어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째 사람의 다리가 저 정도밖에 안 벌어지는지,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건 찢고 있는 게 아니라 어깨너비보다 조금 더 벌려 서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얼굴이 벌겋게 된 것을 보면 온 힘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어쩔 셈이냐?”
“한 가지씩 해 나갈 생각입니다. 일단은 몸을 단련하는 것이 우선입니다만, 으윽……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할 일이 많아?”
가주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녀석의 할 일은 죽는 것뿐인데.’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훅, 훅, 훅!”
어느새 후공은 다리 찢기에서 팔굽혀펴기로 전환한 채로 말했다.
가주는 그 광경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팔굽혀펴기가 다섯 개가 넘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옳지! 옳지! 오오! 열한 개…… 놀랍구나.”
가주가 급기야 응원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큰 손자의 단련은 끝이 아니었다.
“어허, 좀 쉬면서 하거라. 벌써 쪼그려뛰기를 하면 어쩌자는 거냐. 그래선 몸이 견뎌내지 못할 게야. 셋, 넷, 다섯!”
염려하다가 큰 손자가 생각보다 잘 뛰어서 가주는 또 숫자를 세고 말았다. 놀랍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쪼그려뛰기가 될까 싶었는데, 진짜 눈앞에서 두 발이 떠오르고 있었다. 놀라운 마음이야 이루 말로 할 수 없지만 왜 굳이 자신 앞에서 이러는지 의도가 미심쩍었다.
대화는 대화대로 차분히 끝내고, 돌아간 다음 몸을 단련해도 될 터인데 지금 모습은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것이다.
“훅훅……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범항은…… 죽었습니다.”
가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쪼그려뛰기를 마친 후공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어깨를 곧게 펴고 가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부고는 알려야 한다.
가주는, 가족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죽음에 대해.
“후우……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천화서고의 대공자 범항은 죽었습니다. 죽었으니 더 이상 죽을 수도 없고, 죽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이야깁니다.”
가주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그럼 너는 누구냐?”
“저는…….”
큰손자의 입술을 바라보는 가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작스레 낯선 눈빛과 행동을 보인 큰 손자다.
가주는 손을 매만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후공이 씨익 미소 지었다.
“……천하제일인입니다.”
후공은 말을 끝맺고는 기합과 함께 곧바로 다리를 굽혔다.
“허업!”
진실은 알렸고, 마음의 상처는 보듬어야 한다.
모든 진실이 행복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
그 순간 가주의 심장은 빠르게 요동쳤다.
천하제일인이라니. 그런 것치곤 큰 손자의 다리가 장난 아니게 부들거리고 있다. 방금 시작했는데…….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죽었다고 하는 건 새롭게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뜻일까. 하지만 난데없이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복잡한 심경이 그의 눈동자로 나타나 흔들렸다.
‘설마…… 돌아버린 건가…….’
***
늦은 밤,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진다.
주루의 이 층 창가.
두 청년이 자리했다.
범항의 사촌 아우들.
천화서고 이 공자 범윤과 삼공자 범부몽이었다.
윤이 연거푸 술을 퍼부었고, 그의 동생은 잔이 비면 술을 따랐다. 다섯 병째가 되자, 취기가 오른 윤의 몸이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빈 잔을 내밀었다.
“형님,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그만 드시고 일어나시죠.”
“이러려고 따라온 거냐. 술맛 떨어지게 말고 잔이나 채워라.”
“이 잔까지만 드십시오.”
“이 병까지다.”
윤이 술병을 가리키자 부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공손히 잔을 채웠다.
“그런데 아우야, 이 형이 궁금한 게 있다만.”
“말씀하십시오.”
“너 요즘 아침마다 부지런히 어딘가 다녀오더구나.”
“네?”
부몽이 당황하며 안색이 변했다.
윤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짓 마라. 그 짐승새끼가 진짜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건강을 위해서 몸을 단련한다고? 넌 벌써 그날의 미소를 잊은 거냐? 아버지는 어떻고? 다 부질없다. 이러다 놈에게 뒤통수만 거하게 맞을 뿐이야.”
“형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이번에는 왠지 기대가 됩니다. 할아버지도 이번엔 좀 다른 것 같다고 하셨고, 아버지를 위해서도…….”
“오호, 그래서 아우님께서는 매일 아침 그 미친놈에게 아부를 떠시려고 문안 인사를 다니시나 봅니다요.”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하아…….”
윤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부몽, 잘 들어라. 놈은 악마가 된 지 오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놈이 바뀌는 일은 없어. 놈이 죽어야 비로소 모두가 평안해지는 거야. 할아버지를 잃을 뻔했다는 걸 잊지 마라.”
범윤이 부드러운 어조로 타일렀다.
하지만 동생이 여전히 시무룩해하자, 분위기를 바꾸려 호기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아, 표정 좀 풀어라. 자, 기분도 꿀꿀한데 자리를 옮겨 마시도록 하자. 기녀도 없이 마시려니 술맛이 나지 않는구나.”
“형님.”
“안 일어나고 뭐 해. 어서 일어나라. 나가서 제대로 즐겨보자. 너도 여자를 알아가야지.”
팔을 잡는데 부몽은 미동도 없었다.
“나가자니까.”
“형님, 큰형님과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십시오. 정녕 예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최근 큰형님과 같이 있을 때면 왜인지 저는 즐겁습니다. 기분이 좋아집…….”
“닥쳐라!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리고 뭐? 큰형님? 그렇게 부르면 너라도 죽여버린다고 했을 텐데.”
범윤의 눈빛이 포악해졌다.
쨍!
술병을 잡아 탁자에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