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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8화 (8/460)

8화. 맞았는데 기분이 좋아

‘부몽의 말이 맞았어. 젠장, 기분이 왜 이렇게 좋지.’

윤은 침대에 누워 웃음을 머금었다.

얻어 터졌는데 큰형님의 말이 계속 떠오르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는 점도 있었다.

식물인간급이었던 큰형님에게 두들겨 맞을 줄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게 피할 수가 없었어.’

윤이 익힌 무공은 두 가지였다.

회륜수(回輪手).

파옥권(破玉拳).

회륜수는 금나수법으로 관절기다.

상대의 손, 팔, 그저 옷깃이라도 붙든 순간 꺾고 부러뜨릴 수 있다. 권공인 파옥권은 대부분 일권(一拳)이면 충분했다.

어지간한 건달패는 물론이고 얕은 수준의 강호인도 힘들지 않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린 큰형님의 재능인 건가.’

어릴 적부터 천화서고 역대 최대의 재능이라 불린 큰형님이었다. 책이든 무엇이든 두 번 보는 법이 없었다.

기관, 진식, 시서예화 어느 방면이든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쳐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형님이 아니던가.

그래도 그렇지. 어찌 무공을…….

윤이 경탄과 의문 속을 배회할 때였다.

“형님.”

부몽이 들어왔다.

“어서 와라.”

윤이 갸웃했다.

들어서는 부몽은 울고 있는 것이다.

눈이 퉁퉁 부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야?”

“형님, 죄송합니다. 이 아우를 용서하십시오.”

“왜 네가……. 너는 아무 잘못 없다.”

끙끙거리면서도 윤은 미소 지으며 동생의 손을 잡았다.

“그런 말 마라. 네가 나보다 낫다.”

“아닙니다, 형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철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형님을 원망했습니다. 형님의 속 깊은 뜻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겸손해하지 마십시오. 이 아우는 다 보았습니다.”

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대화가 미묘하게 엇나가고 있었다.

찡그린 탓에 멍든 부위가 당겨, 윤은 다시 한층 인상을 찡그렸다.

부몽이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다 압니다. 형님께선 큰형님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시려 억지로 맞아주셨잖습니까. 큰형님의 몽둥이질은 어린애 장난이었는데 말입니다. 형님이라면 눈 감고도 피할 수준이었거늘, 그걸 다 맞으시다니요.”

“……?”

윤이 바로 이해할 수 없어 뚱하니 쳐다봤다.

부몽의 말이 이어졌다.

“형님께선 몽둥이가 뻗어오는 방향으로 억지로 몸을 던지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맞으시고 또 맞으시고 맞은 자리 또 맞으시고…… 흑흑흑. 그뿐입니까, 마지막에는 큰형님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몽둥이질에 낭심까지 들이미셨습니다. 그 고통은 남자라면 다 알지 않습니까. 그게 깨지면 내시가 되어 버리……. 아무튼 전 그 광경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의 낭심을 때리라고 내민단 말입니까. 그것도 몽둥이에요. 흑흑흑…….”

“…….”

윤은 갸웃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동생이 너무 서글프게 울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기 난처했다.

자신도 아직 다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은 바르게 해야 했다. 맞아준 것이 아니라 맞은 것뿐이었다. 얼마나 피하려고 애썼는지 모른다.

“아니,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억지로 맞아주었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네 눈에 그리 보였단 말이지?”

“형님! 형님은 도대체!”

“도대체는 집어치워라. 대답해봐라. 네 눈에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네, 저뿐만 아닙니다. 호위 단경은 저보다 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형님이 원래 이렇게 속 깊은 분이었냐면서 혀를 내둘렀으니까요.”

“…….”

윤은 제대로 할 말을 잊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머리가 얼얼했다.

정녕 큰형님의 몽둥이질은 장난이 아니었다.

큰형님의 움직임은 어느 하나 절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흘려내고 몸을 비틀어 비껴냈다 싶었는데 그때마다 몽둥이는 홀연히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부터 이 방향이었다는 듯 타격해왔다. 기묘하게 관절만 맞아 시작부터 몸이 삐걱거렸다.

피하는 건 무리다 싶어 회륜수로 몽둥이를 잡고 떨쳐내려 했을 때는, 아예 닿을 수 없었다.

몽둥이는 스치듯 미끄러져 들어와 손목과 발과 종아리를 휘감았다. 딱딱한 나무가 아닌 미꾸라지처럼 움직였다. 그 와중에 허벅지 안쪽과 겨드랑이 안쪽의 연한 살결이 타격 당해 부어올랐다.

최후의 선택은 한 대 얻어맞고 결정타 한 방으로 끝내자였다.

공격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한 대 얻어 맞아주자는 부위가 매 순간 급소였다.

기겁해 물러나면 따라와 때리고 또 때렸다.

맞은 곳들을 다시 맞을 때가 많았다.

문제는 별것도 아닌 몽둥이에 맞는데도 통점들이어서 힘이 쭉쭉 빠졌다.

그러곤 낭심을 가격당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머리에 종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다른 이들 눈에는 엉터리처럼 보였다고?’

윤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머리가 쭈뼛 섰다.

이는 또 다른 의미였다. 단순한 격차의 문제가 아니라, 큰형님은 다른 차원 수준이란 걸 뜻했다.

그렇게 보이도록 하려면 얼마만큼의 수준 차여야 가능한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뭐지? 추워지는걸.’

윤은 갑자기 한기가 일어 몸을 움츠렸다.

진정 천화서고의 천재가 기지개를 편 것인가.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부몽은 한층 더 울먹였다.

“형님, 낭심입니다, 낭심! 자칫하면 남자를 포기해야 하는 그 위험을 감수하시다니요. 큰형님을 위하는 마음이 그 정도셨던 겁니까. 이쯤 되니 저는 큰형님이 원망스럽습니다. 낭심까지 맞아주었거늘, 엎드리라고 하고 또 때리다니요. 엉덩이를 맞으면서 낭심에까지 충격을 받으셨을 걸 생각하면 저는 눈물이…….”

“부몽.”

“네, 형님.”

“가라.”

“네?”

“나가라고!”

“네?”

“나가라고 이 새끼야! 아주 낭심, 낭심! 밤새 낭심으로 노래 하나 만들 참이냐!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

***

송화는 아침부터 호들갑이었다.

“공자님, 어젯밤에는 정말 굉장했어요.”

“훅훅훅!”

후공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 분은 패고, 한 분은 필사적으로 맞다니.”

“훅훅훅!”

그저 팔굽혀펴기를 열심히 할 뿐이었다.

지난밤 몽둥이질에는 문제가 있었다.

체력은 충분히 올라왔건만, 간단한 몽둥이질임에도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체력 대비 고작 3할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는 아직 범항의 몸과 자신의 의식이 온전히 합일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우선은 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와아, 너무 멋지고 벅차서 감동이 파도처럼 몰려오는데, 감당이 안 될 정도지 뭐겠어요. 특히 이공자님에게 감탄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몽둥이에 기를 쓰고 맞으려고 몸을 들이대는데, 원래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몰라봤구나 싶어서 반성하게 되지 뭐겠어요.”

후공이 그리 보이도록 의도했을 뿐이나, 범윤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송화도 범윤에 대한 찬사를 그칠 줄 몰랐다.

“훅훅, 너 그거로구나.”

“네?”

“윤이를 좋아하나 보지?”

“에헤? 그럴 리가요.”

“그럼 부몽이 좋은 게로군.”

“전혀요.”

“그래? 근데 넌 왜 자꾸 문 쪽을 바라보는 거냐?”

열흘 전쯤부터였다.

부몽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문안 인사를 왔는데, 녀석은 단정하고도 수줍은 얼굴로 예를 취하고는 체력 단련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가곤 했다.

“삼공자님은 왠지 사랑스럽잖아요.”

“사랑?”

“그런 사랑 말구요. 으음…… 말하자면 모성 본능 같은 거죠. 공자님도 아시잖아요. 맑은 눈에 순한 인상, 거기다 수줍게 웃는 삼공자님의 모습이 묘한 중독성이 있는 거요.”

송화가 어머니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 녀석이 그렇긴 하지.”

“근데 오늘은 안 오겠죠?”

“늦는 거겠지.”

“아니에요. 분명 어제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게 분명해요. 친형이 그리 맞았으니까요.”

“넌 사람 볼 줄을 모르는구나.”

“그게 아니면 안 오실 이유가 없는걸요.”

“곧 올 거다. 부몽은 성정이 바른 아이다. 내가 여태 만난 수많은 사람 중에 부몽만큼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수많은 사람을 언제 만나셨는데요?”

송화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갸웃했다.

주인은 두문불출 밖을 나간 적이 드문 것이다.

“책에서.”

“하하, 책으로 어떻게 알아요. 이제 허풍도 잘 치셔요.”

“여튼 부몽은 남다르니, 어제 일은 도리어 내게 고마워하고 있을 거다.”

“어?”

송화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바로 웃었다.

“공자님 말씀대로 삼공자께서 오시는 것 같아요. 발걸음 소리가 나요.”

후공이 껄껄 웃었다.

“거 봐라. 내가 뭐라고 했느냐. 부몽은 윤이와는 천성적으로 다르다. 기본 성정이 선한 탓에 어제 일도 기뻐하고…….”

그때였다.

쾅!

문이 박살 날 것처럼 열렸다.

박살낸 건 부몽이었다.

“…….”

“…….”

후공과 송화 공히 멍해졌다.

발길질로 문을 박살내고 나타난 부몽의 안색은 장난이 아니었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양팔을 허리에 척 올리고는 씩씩거렸다. 매섭게 노려보는 눈이 벌겋게 부었는데, 노기가 한 가득이었다.

‘분별력 있고 기본 성정이 선한 부몽이…….’

멍해 있던 후공이 애써 웃어 보였다.

“부몽 왔느냐.”

“그래 왔다.”

부몽이 성큼 큰 보폭으로 걸으며 소리쳤다.

그 기세에 송화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몽이 소리쳤다.

“야, 범항! 니가 사람이냐! 큰형님이란 놈이 어찌 그럴 수 있냐! 딱 보면 윤 형님이 억지로 맞아준 걸 모르겠어? 근데 낭심을 부술 듯 쳐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그것도 몽둥이로. 그러다 알이 깨지기라도 했으면 아기도 못 낳고 어쩔 뻔했냐고 이 나쁜 자식아!”

“부몽, 진정하거라.”

“진정 못 해! 너만 몸을 단련한 게 아니야. 내가 오늘 함부로 까불면 어떻게 되는지 세상 무서운 걸 보여주겠어. 형님이 맞았던 것의 몇 배 몇 갑절로 돌려주겠어.”

부몽이 뒤춤에서 번개같이 무기를 꺼냈다.

사슬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후공이 미간을 찡그렸다.

‘흠, 저게 쌍절곤이란 건가?’

두 개의 짧은 나무 봉이 쇠사슬로 연결되어있어 근접전에 용이한 무기였다.

후공으로선 휘두르는 놈을 본 적조차 없었고 말로만 들었는데, 부몽이 단련하고 있었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휘리릭, 휘리릭, 휘리릭.

부몽이 쌍절곤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돌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맹렬한지 곤의 잔상만 보일 정도였다.

“아오오! 아오아오!”

닭울음소리를 내며 오른쪽 어깨에서 허리, 다시 왼쪽 어깨와 겨드랑이를 수십 차례 들락거렸고, 닭이 계속 울었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했다.

퍼억!

뒤쪽에서 누군가 부몽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는 바람에 부몽은 쌍절곤을 안고 앞으로 처박혔다.

“비켜. 이 멍청아!”

“으어억!”

걷어찬 건 범윤이었다.

범윤이 한심하다는 듯 부몽을 보며 혀를 찼다.

“대체 언제적 쌍절곤이야. 강호에서 쌍절곤 휘두르던 놈들 다 칼 맞아 죽었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범윤은 한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하고 절뚝절뚝 걸어오다, 넘어져 있는 부몽이 발에 걸리자 스윽 밀어내고 다가왔다.

그러곤 후공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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