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서재 안의 비밀
“형님, 문안 인사 올립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후공이 갸웃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보아하니 너도 잘 잔 모양이구나. 눈이 퉁퉁 부은 걸 보니 말이야.”
“하하! 형님 덕분입니다.”
붓고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해맑기 그지없었다.
‘녀석, 남자네.’
그때 윤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형님, 저와 함께 잠깐 가실 곳이 있습니다.”
“응?”
“아버지께서 형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으응??”
윤의 아버지면 범항에겐 ‘숙부’ 즉 작은아버지다.
후공이 놀란 건 여태 한 번도 숙부라는 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후공 쪽에서 관심이 없기도 해서 묻지도 않았던 것이지만, 상식적으로 숙부라는 이가 먼저 찾아왔어야 맞는 일이었다. 독약 먹고 생사를 오간 조카이거늘.
“그래, 내가 그동안 무심했구나. 가자.”
“네.”
***
“여기 계셨습니까.”
“오냐. 어서 오너라.”
범윤과 함께 방에 들어설 때 먼저 반긴 건 가주였다.
다른 한 사람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중년인은 초췌한 얼굴이었고, 윤이와 판박이처럼 닮아있었다.
후공은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찾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였군.’
몸져 누워 있으니 누가 누구의 병문안을 올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된 게 천화서고에서는 멀쩡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가주는 동반 자살을 시도했고, 작은아버지란 인물은 몸져 누웠고, 사촌 동생 중 하나는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다.
어디 그뿐인가, 시녀며 호위들도 피곤한 기색에 우울한 낯빛이 태반이었다. 송화도 근래에야 밝아진 터였다.
“듣던 대로 네가 많이 달라졌구나. 이야기 들었다. 네가 윤이를 혼내주었다고?”
“…… 네.”
“고맙다. 고마워. 이런 날을 보게 될 줄이야……. 이 숙부는 너무 기쁘구나.”
간단히 인사가 오간 후 후공은 숙부 범강에게 손이 잡혔다.
손은 가느다랗고 힘이 미약했다.
“몸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제가 기억이…….”
“어, 그게…….”
그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숙부 범강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숙부는 멋쩍어하며 고개를 떨궜다.
후공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눈을 피해?’
숙부는 조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숙부가 시선을 애매하게 둔 채로 입을 열었다.
“병이랄 것도 없다. 마음의 병일 뿐이니 곧 나아질 것이야.”
“마음의 병이라면 역시 원인은…….”
범항이겠지.
후공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면 범항에게 마음에 심대한 상처를 받은 것이리라.
천화서고의 모든 병폐는 역시 범항이다.
후공이 분노를 담아 말을 이었다.
“……윤이 때문이겠군요.”
후공이 말을 마치면서 윤을 바라보자, 뒤쪽에 서 있던 윤이 놀라 목발을 짚은 채 부산스럽게 물러났다.
숙부가 옅게 미소지었다.
“맞다. 저 녀석 때문이지.”
“제가 그동안 아우들을 방치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염려 마십시오.”
“허허, 고맙다. 내 눈치 볼 것 없이 틈나는 대로 따끔히 혼내거라. 윤이가 술만 마시지 않아도 내가 이리 누워 있을 리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온건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오갔고, 후공만 방을 나섰다.
가주를 비롯해 방에 남은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숙부 범강의 안색이 변했다.
“아버지, 범항이 맞습니까?”
“맞다마다.”
“다른 사람입니다. 저건…… 범항이 아닙니다.”
가주 범천이 너털거렸다.
“내가 말했지 않더냐. 혈우독 이후에 성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이런 일이…… 저는…… 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들이 눈물을 글썽이자, 가주가 손을 잡았다.
“큰 녀석이 저리 변했으니 이제 너도 훌훌 털고 일어나거라.”
“아버지 이제 숨이 쉬어집니다. 가슴에 돌덩이가 사라진 듯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범윤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큰형님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였다.
어떻게든 큰형님의 마음을 고쳐보려고 설득하다 저주처럼 마음의 병을 얻었다.
큰형님과 마주하면 누구든 그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생기가 빨린 것처럼 축 처져 도무지 기운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범윤도 비난을 핑계로 도망다니기 바빴다.
“아버지, 분명 큰형님이 저를 패면서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그늘을 드리우던 예전의 형님이 아닙니다.”
“오냐, 그래. 너도 이제 도망 다니지 말거라. 맞는 게 대수냐. 맞을 수 있으면 맞고, 가까이 다가가거라.”
“네.”
방 안의 삼대가 서로를 끌어안고 흐느끼니 눈물바다였다.
하지만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윤이 흐느끼며 꺼낸 말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 가문은 번영하겠죠. 천재 중의 천재인 큰형님이 기지개를 켜셨으니까요. 전 정말이지 이대로 큰형님의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얼마나…….”
범윤이 말을 맺지 못하고 흠칫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굳은 채로 시선을 쏘아보내고 있는 것이다. 방금까지 감격으로 물들었던 두 사람의 동공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윤도 이내 깨닫고 흠칫했다.
생각해 보니, 큰형님의 기억이 돌아오면 다시 파국인 것이다.
숙부 범강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 숨이 갑자기…….”
“애야, 숨 쉬어라. 숨 쉬어!”
가주가 놀라 소리쳤다.
***
기억에 관해 후공의 생각은 달랐다.
‘범항 녀석의 기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후공은 범항의 기억이 온전히 흡수되길 바랐다.
어느덧 살도 오르고 기력도 찾아가고 있다.
풀떼기에서 벗어난 건 확실했다. 하지만 어디 후공의 목표가 그저 일반인의 범주인가.
문제는 심법의 정진이었다.
우선 정기신이 합일되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단전이 열리고 심법이 가속화될 터인데, 각각 다른 육체와 정신이 결합된 탓에 물과 기름처럼 의식과 혼과 몸이 겉돌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무공 회복은 요원하다.
하지만 범항의 기억을 흡수한다면 사정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라야 정기신이 융화 합일되고, 비로소 이 몸이 자신의 것이 된다 할 수 있었다.
늦은 밤, 한 잔의 차를 앞에 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으려니 송화가 쓸데없이 들락거리고 왔다 갔다 했다.
‘정신 사납구만.’
이유를 짐작 못할 후공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 있으니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읽고 송화가 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차마 무슨 일이냐고 말을 걸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송화야.”
“네, 공자님.”
기다렸다는 듯 송화가 쪼르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걱정이 많다.”
“네? 무, 무슨 걱정이 드시는데요?”
송화가 더듬거렸다. 안 그래도 주인의 안색이 좋지 않아 불안해하고 있던 터라, 벌써부터 심장이 움츠러드는 그녀였다.
“곰곰히 생각해봤거든.”
“새,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 생각. 그랬더니 알아버렸다.”
“설마……”
송화는 ‘기억을……’이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짐작이 맞다.”
“헉!”
“오늘은 저녁 식사량이 평소보다 적었던 것이다. 아마 세 그릇이었지?”
“아!”
하얗게 질렸던 송화의 얼굴이 한순간에 활짝 피었다.
그러곤 이내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공자님! 야식 출동할까요?”
“아직 안 간 거냐?”
송화가 쐥하니 사라졌다.
잠시 후 후공은 두 아우까지 불러내 전각의 뒤뜰에서 불판까지 갖다놓고 고기를 뜯었다.
역시 심란할 땐 먹는 것이 최고였다.
배부르게 먹고나자 후공은 기억이고 뭐고 기분이 좋아져 퉁퉁 배를 두드렸다. 그러자 윤과 부몽이 웃음을 터뜨리며 따라서 배를 두드렸다.
“형님, 제 뱃소리가 더 크지 않습니까?”
“큰형님, 제가 배가 제일 많이 나온 탓에 소리가 곱습니다.”
후공이 너털거렸다.
“웃기는 놈들 같으니. 별 희한한 경쟁심을 다 부리는구나.”
“하하, 이렇게라도 이겨야죠.”
윤이 웃음 끝에 자못 진지하게 감사를 전했다.
“형님, 고맙습니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부몽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요. 어릴 때부터 큰형님을 뵈려면 서재로 가야 했는데, 오늘처럼 달빛 아래 함께 시간을 보내니 너무 좋습니다.”
후공이 넉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너희 두 놈이 사람 같이 보이는구나. 그런 의미에서 고기 한 판 더 굽는 건 어떠냐?”
***
깊은 밤, 후공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싱숭생숭한 건 역시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단지 범항과는 몸이 바뀌었을 뿐인가.’
이대로는 곤란했다. 이 몸은 범항의 의식 아래 놓여 있어, 정기신의 합일이 없다면 무공 수준은 고작 이류 삼류에 맴돌다 허덕이며 끝맺게 될 터였다.
하지만 원하는 바가 ‘기억의 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잃었던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시간이 해결책이 될 테고 단순히 마음을 편안히 가지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테지만, 기억의 전이라면 뭔가 더욱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만약 일평생이 다할 때까지 정기신의 합일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건 안 될 말이지.’
후공은 침상에서 빠져나왔다.
뭐라도 해야 했다. 되든 안 되든.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범항이 보았을, 체취가 묻어있는 공간이니. 천천히 걸으며 벽을 만지고, 벽에 걸린 풍경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탁자 쪽에 앉아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했다.
변화랄 것도 없고, 떠오르는 것도 전무했다.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그때 문득 부몽의 말이 떠올랐다.
- 어릴 때 큰형님을 뵈려면 서재로 가야 했는데
그래, 범항에게 있어 가장 친밀한 곳.
가장 많은 흔적이 남겨진 곳.
범항이 서재에서 살다시피했다면 방보다는 가능성이 클 것이다.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침소에서 짧은 복도를 지나 바로 오른편 방이 범항의 개인 서재였다.
다른 한편으로 범항이 환혼을 시전했는지에 대한 여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불을 밝히고 들어서자, 서재는 벽의 삼면이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까운 곳부터 천천히 살펴가던 후공은 이내 실망했다.
‘도대체 얼마나 방치한 건가.’
어느 때부터인지 몰라도, 꽤 오래 드나들지 않았는지 책마다 먼지가 수북했다. 그렇게 책장을 살피던 한 순간, 후공이 걸음을 멈췄다.
“응?”
서재의 책마다 먼지가 가득한데 단 하나의 책자만 말끔했다.
왼쪽 벽면의 잡서들 칸에 놓인 책.
겨울(冬)이란 제목의 책자였다.
먼지가 없을 뿐 아니라 책이 거꾸로 뒤집힌 채로 꽂혀 있었다. 범항이 최근까지 보았을 뿐 아니라 뒤집혀 있다는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어 보였다.
후공은 책자를 빼냈다.
서책 중간에 뭔가 끼워져있는지 볼록했다.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의구심 아래 먼저 책 내용을 살폈다. 수필집이었다. 지은이가 여럿인 산문들, 훑어본 바 내용은 특이할 것이 없었다. 서책에 끼워진 볼록한 부분을 펼쳤다.
그건 서신 뭉치였다.
다섯 장이고, 서신마다 아래쪽에 명기된 날짜가 달랐다.
보낸 이는 한 사람이었다.
- 주양.
‘주양이라. 흠, 범항이 외부와 소통하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외부의 조력자를 통해 범항이 환혼을 완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신이 중요해졌다.
후공은 서신만 빼내고 책을 제자리에 올바르게 꽂아 넣었다.
그 순간, 책장이 앞으로 와르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