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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10화 (10/460)

10화. 정기신 합일

후공이 놀라 피하려 뒷걸음질 치는데, 책장이 덮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젠장!’

겨우 무너지는 책장을 피하지 못하는 몸이라니.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쏟아지던 책과 책장이 조각조각 빛의 파편처럼 흩어지면서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소실되어갔다.

‘환상.’

와장창!

뒤이어 뭔가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번엔 천장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머리로 쏟아져내렸다. 후공은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그저 천장의 잿더미를 무심히 바라만 봤다.

천장의 잔해는 책장이 그랬던 것처럼 빛의 파편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천장의 잔해들이 머리며 몸을 관통하는 허상이 비춘 이후, 딛고 있는 바닥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바닥이 갈라지고 유리 조각처럼 흩어졌다.

순간 주위 풍광이 변했다.

더이상 후공이 선 곳은 서재가 아니었다.

사방이 흰 눈에 덮여 있었다.

함박눈이 천천히 내려온다. 현실인 양 한기도 엄습했다. 어느샌가 발은 발목까지 눈에 파묻혀 있었다.

후공이 빙 둘러보면서 탄성을 터뜨렸다.

“오, 이래서 겨울이로군.”

겨울이란 이름의 서책은 진법을 발동하는 열쇠인 모양이었다. 겨울의 환상진. 그 풍광 속에 들어가게 하는.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실감 나는 환상 속에서, 이곳이 진법 안의 허상임을 알려주는 건 눈앞에 둥실 떠 있는 ‘겨울 책자’뿐이었다.

후공은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을 딛을 때마다 뽀드득 눈밟는 소리가 실감나게 울렸다.

멀리 산이 보이고 나무마다 눈꽃이 피었는데, 작은 언덕을 넘자 후공은 눈사람들과 마주했다.

세 개의 눈사람.

아이 눈사람이 중간에 있고, 좌우로 어른 눈사람이 있었다.

손인 듯 나뭇가지로 눈사람들은 연결된 채였다.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의 손을 양쪽에서 잡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 눈사람의 숱덩이 눈은 아이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아이는 범항일 테고, 양쪽에 있는 건 아버지, 어머니겠군.

이곳에서 가족은 행복해 보였다.

“어……?”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휘청였다. 범항의 모친으로 보이는 눈사람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시야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눈사람이 멀어지는 건가. 아니면 내가 뒤로 하염없이 물러나고 있는 걸까. 분간할 수 없다. 그러다 빛이 폭사했다.

화아악~.

눈앞이 하얘져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는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한번 가봤던 곳이다.

천화서고 서쪽 정원이었다.

그리고 이건 여전히 환상 속.

커다란 매화나무에 눈꽃과 함께 매화꽃이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며 매화꽃 송이가 부서져 아름답게 흩날렸다.

뺨을 스치는 찬바람이 생생했다.

이곳에 눈사람은 없었다. 대신 세 명의 가족이 있었다.

범항과 부모. 후공은 그 환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인은 의자에 앉아 있고, 또 그 옆의 중년 남자는 여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여인의 안색은 병색이 짙고 피폐함이 곳곳에 드러났다.

수척함을 넘어 비쩍 말랐다. 숱은 듬성듬성했지만 머리카락은 곱게 빗었다. 그래서 더 아파 보였다. 뼈가 드러날 듯 앙상한 뺨, 눈은 깊게 파여 그림자가 드리웠다.

범항의 모친, 그녀는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 매화가 핀 것을 보니…… 좋군요. 이제 곧…… 봄이 올 테죠.”

여인의 목소리는 느리게 겨우 이어졌다.

남편이 부인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부인, 봄이 되면 그때 또 만개한 꽃을 봅시다.”

“그래야지요.”

이어 여인은 범항의 손을 잡았다.

“아들…….”

툭.

매화 꽃잎 하나가 날아들어 어린 범항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아들…… 사랑해.”

여인이 소년의 손을 매만졌다.

잠시 후 여인의 손길이 멎었다.

손은 점점 차가워져 갔다. 후공은 지켜보고 있을 뿐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치 범항이 된 것처럼 그녀의 몸이 식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범항이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이 일렁여 눈이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소매로 눈을 훔쳤다. 그래도 어머니의 모습은 번져 보여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떨구어내려 했다. 다시 눈물은 금세 차올라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자 범항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매화처럼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이 어떻게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꽃처럼 아름다웠을 여인은 봄을 보지 못했다.

화아악.

풍경이 회오리처럼 휘말렸다가 다시 펼쳐졌다…….

여전히 환상 속 천화서고의 어느 방 안.

이날은 범항의 모친이 떠난 지 열흘 뒤였다.

먼저 보인 건 가주의 뒷모습이었다.

그는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면서였다.

노인은 가주보다 더 늙었다. 온통 백발에 피부가 거칠고 저승꽃이라 불리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범항의 아버지다.’

어찌된 일인가.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는 열흘 만에 노인이 되어있었다.

하룻밤 만에 백발이 되고, 피부는 생기를 잃고 죽음의 꽃이 피었다.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에 생기가 불타버린 것이다. 그렇게 늙어 붓을 쥔 채로 책상에 앉아 죽음을 맞았다.

그가 화선지 위에 그린 것은 매화꽃이었다.

열흘 전처럼 종이 위에 매화가 흩날렸다.

그 아래 글귀가 남았다.

- 범항…… 미안하구나.

“으아아아아악…….”

노가주가 울부짖었다.

열흘 사이에 며느리와 아들을 떠나보낸 노가주는 울기라도 해서 다행이었다.

범항은 노가주의 뒤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주검과 할아버지를 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눈은 텅 빈 채였다.

그때 서재로 몇이 다급히 들어왔다.

숙부 범강과 숙모, 그리고 윤과 부몽.

범항이 네 사람을 반긴다.

네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린다.

범항의 너무도 해맑은 미소에 어린 부몽은 영문을 몰라 그저 눈을 연신 깜박였지만, 그보다 머리가 큰 윤은 공포에 질려 몸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범항의 미소는 결코 이 순간 지어야 할 사람의 미소가 아닌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서 빛이 터지며 후공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보이던 모든 것이 조각나면서 흩어져가고, 주변은 온통 백색 광채로 채워져 있다.

그러는 사이 주마등처럼 수많은 광경이 머리를 스쳤다.

그것들은 떠올랐다 사라지고, 또 목소리들이 가까이 들렸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가슴이 뛰었다가 차분해졌고, 놀랐다가 슬펐다가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후공은 내심 환호했다.

‘아! 기억의 전이……’

이 모든 것은 범항의 것이었다.

범항의 기억.

범항이 보고 느끼고 배우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인 채로 무섭게 머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공자님!”

“어?”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후공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샌가 현실의 서재였다.

눈앞에 송화가 있었다.

송화는 손에 겨울 책자를 들고 있는데, 안색이 창백했다. 눈물도 글썽이는 것이,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었다.

후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비밀스러운 진법의 공간을 찾아 들어갔으니, 송화로서는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가 싶어 겁먹었으리라.

후공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송화, 너로구나.”

“…….”

“무슨 일이냐? 왜 울려고 해?”

“네?”

퉁명스러운 물음에 송화의 눈이 커졌다.

“넌 하품이라도 한 모양이지?”

“네? 아…… 네, 맞아요. 제가 피곤해서 하품을 계속하다 보니……. 으아함~.”

송화가 하품하는 척하며 눈가를 손으로 찍으며 웃었다.

‘애쓴다.’

후공은 내심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겉으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쯧쯧…… 다 큰 처녀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이라니……. 하여튼 넌 예쁘기만 하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구나.”

“죄송해요.”

그러면서도 송화의 표정이 밝았기에 후공은 다시 혀를 차 주었다.

송화는 주인이 겨울의 진법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도 최근의 말투나 태도를 보이자 안심이 되었지만 불안은 남았다.

“공자님, 괜찮으신 거죠?”

“괜찮다마다. 진법이 발동해 눈밭에 다녀왔을 뿐이야.”

“어…… 그러니까…… 그래도…… 괜찮으신 거죠?”

“뭐가 말이냐?”

“혹시 잃었던 기억이…….”

“기억이 돌아왔냐고?”

“……네.”

“글쎄.”

후공은 갸웃했다.

글쎄는 뭔가 싶어 송화가 불안하게 바라볼 때였다.

후공이 휘청이더니 머리를 움켜쥐며 몸부림쳤다.

“으으으윽, 갑자기 머리가…… 으으으윽…… 송화야.”

“고, 공자님!”

송화가 놀라 어찌할 바 몰라할 때, 후공이 언제 그랬냐 싶게 몸을 바로 하고 껄껄 웃었다.

“송화야, 어떠냐? 기억이 돌아온다면 분명 이런 식이 될 것 같지 않느냐?”

“네?”

어이가 없는지 송화가 멍하니 쳐다봤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이 새끼가 사람 새끼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은 뭐냐?”

“하아…… 놀랐잖아요. 오늘은 장난이 지나치셨어요. 정말이지, 수명이 깎여 나가는 것 같아요.”

“미안하구나.”

껄껄 웃으며 후공은 침소로 향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방식이 다를 뿐, 지금 범항의 기억이 전이되고 있었다.

혹시 범항의 기억을 흡수하게 된다면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 같은 걸 내뱉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몸이 붕 뜬 느낌.

발을 디딜 때마다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만이 아니다.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파문이 이는 환상이 보였다.

“공자님, 안녕히 주무세요.”

“…….”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송화의 인사에 답을 하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후공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무겁다.

눈이 감겨온다.

후공은 그저 송화를 한번 쳐다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눈을 감았다.

침대가 바다로 변한 건가.

바다로 침대가 옮겨진 건가.

서서히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아간다.

깊이.

숨은 쉴 수 있겠지?

***

동이 틀 무렵, 후공은 일찍 일어났다.

몇 시진 자지도 않았는데, 며칠은 잔 것처럼 개운했다.

머리는 맑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되었구나.’

기억의 전이로 정(精), 기(氣), 신(神)이 합일했다.

각각이던 혼과 몸이 비로소 융화한 것이다.

겉돌던 새로운 육체가 딱 맞는 옷처럼 의식과 일체를 이루니, 그의 높은 의식과 깊고 지고한 깨달음이 육체에 녹아들며 단전이 개방되고 기경팔맥에 내력이 자리잡을 틀이 깃들었다.

본디 심법은 의식과 깨달음이 근본이 되어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 점에서 후공의 의식과 일체화된 이 새로운 몸은 시작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 시작이 문제였을 뿐 본래의 경지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후공은 이미 가보았고 이루어 본 길인 것이다.

그렇기에 시작은 곧 끝이라 할 만했다.

앞으로 빠르면 5년.

늦어도 십 년. 그 안쪽으로 본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만약 영약과 영초, 영물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시간은 훨씬 앞당겨진다.

그런 점에서 천화서고는 최적지였다.

망해가는 것이 아직은 마음이지, 천화서고의 재산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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