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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12화 (12/460)

12화. 호신기 운용

산책을 마친 후공은 가주를 찾아가 뜻을 전했다.

듣자마자 가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약을 말이냐?”

의아함보다 기쁨이 커 가주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일렁거렸기에 후공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몸도 마음도 강건해진 이때 박차를 가하고 싶습니다.”

“오냐 오냐, 아무 걱정 말거라. 내 전력을 다해 구해주도록 하마. 당장은 아쉬운 대로 비고에 보관한 산삼과 하수오를 복용하는 것으로 하자. 연한이 백 년 정도이니 나쁘지 않다.”

“네.”

가주가 아낌없이 재력을 쏟을 태세였기에 후공도 흡족한 상태로 물러났다.

이어 처소로 돌아와서는 윤과 부몽을 불러들였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피폐해졌을 천화서고 정상화 작업에 돌입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윤에게 지시했다.

“윤아.”

“네, 형님.”

“너는 오늘부터 사흘간 본 서고의 현황을 낱낱이 파악해 문서화 하고 내게 보고하거라. 거기엔 내부뿐 아니라 외부 사업체는 물론이고, 부근에 있는 명망 있는 가문들과 문파들도 포함한다.”

윤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쳤다.

“하하, 형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총관이 오면 다 해결될 일입니다.”

“흐음…….”

총관에 대해서는 후공도 인지하고 있었다.

총관 곽도.

알아보니 총관은 가주를 비롯한 직계가 망가져 있는 동안 천화서고를 운영하고 지탱했다고 한다. 또한 범항의 기억 속에 있는 곽 총관은 신뢰할 수 있는 자였다.

‘범항이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는……’

윤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총관이 외부 사업체를 관리하느라 밖에 나가 있으나, 총관이 들어오면 일목요연하게 알게 되실 일입니다. 열흘 뒤에 서고로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

“그보다 형님, 괜찮으시다면 저는 형님과 금나수를 한번 겨뤄보고 싶습니다. 분명 형님께선 심상으로 무공을 연마하신 듯한데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윤아.”

“네, 형님.”

“엎드려라.”

“네?”

그 말만 했을 뿐인데 눈치 빠른 송화가 준비라도 한 듯 몽둥이를 건넸다.

그리고,

빠아아악! 빠악!

이제 좀 운신이 가능해지는가 싶던 윤은 다시 절룩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누가 천화서고의 주인이냐. 너냐, 총관이냐? 그동안 술을 퍼붓다 보니 네가 누구인지 잊은 거냐?”

“제, 제가 직접 보고 드리겠습니다.”

“한심한 놈. 나가 봐.”

다음은 부몽이었다.

부몽은 바짝 긴장해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너는 어릴 때부터 진법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 부몽, 우리 가문에 설치된 진법이 총 몇 개냐?”

“네?”

“몇 개지?”

“그게…… 기관까지 합하면 백 개가 넘었던 것도 같기도 하고요…….”

부몽이 말끝을 흐렸다. 불안한지 동공도 흔들어댔다.

아니나 다를까.

“부몽.”

“네.”

“엎드려라.”

부몽이 엎드리는 대신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형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우리 막내님께서는 쌍절곤 돌리느라 바쁘셨지. 그러니까 엎드려라.”

이어 통렬한 격타음이 연달아 터지고, 부몽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부몽, 총 백이십사 개다.”

“죄, 죄송합니다.”

“네가 막내라 해도 가문에 이리 관심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너의 영특한 머리는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달고 다니는 거지? 너에게도 사흘을 주마. 필요한 인원을 네가 선별해서 본가의 외부와 내부의 모든 진법과 기관들을 점검해라. 보수가 필요하면 즉각 조치하고, 시간이 걸릴 일이라면 보고하도록 해. 또 작동 여부뿐 아니라 변형 여부도 면밀히 살피고.”

“네, 큰형님.”

부몽이 기어나가고 나자, 송화가 씩씩하게 나섰다.

“공자님! 저는 잘할 자신 있습니다. 뭐든 분부하십시오!”

“송화 너는.”

“넵!”

“차를 내오도록 해. 용정차로.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자.”

“넵!”

잠시 후 송화가 차를 내오자 후공은 한 모금 음미하며 붓을 가리켰다.

“붓을 들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라.”

“제가요?”

“그래.”

“왜요?”

“엎드……, 크흠…… 뭐든 분부하라고 한 것 같다만.”

“아, 맞다.”

송화가 헤헤거리고는 붓을 들었다.

“네가 예쁘니 네 필체도 너만큼 예쁜지 보자.”

“예쁜 필체 나갑니다요, 공자님.”

“후후, 시작하마. 첫 문장은 주양에게, 라고 적어라.”

“네? 주 공자님요?”

송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주 공자님께 보내는 서신이라면 공자님께서 직접 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필체가 다르면 무슨 말을 적어도 믿지 않으실 텐데요.”

‘나도 필체가 달라.’

후공은 이미 시험 삼아 써보았는데, 어떻게 해도 범항의 필체를 낼 수가 없었다. 비슷하게는 나오는데 면밀히 보면 달랐다. 필체는 지문과 같아서 흉내 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받아보게 될 주양도 주양이지만, 서신을 보내기 전 송화는 가주에게 보고할 것이고 그러면 내용을 점검 당할 터라, 필체를 해명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아예 대필이 나은 것이다.

“말했지 않느냐. 네 필체를 보고 싶다고.”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서신의 내용은 주양을 천화서고로 초대한다는 것이니.”

“저, 정말요? 와아, 주 공자님을 다시 보게 된다니 꿈만 같아요.”

“너 주양을 좋아하는구나?”

“그럼요. 공자님의 친구여서가 아니라, 주 공자님은 남자답고 의리 있고 뭐 이것저것 최고로 멋진 분이니까요.”

“하긴 남아일언 중천금은 주양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맞아요. 딱 그거예요. 공자님, 어서 불러주세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적을 테니까요.”

서신 작성을 마친 송화가 콧노래를 부르며 나가자, 후공은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주양이 멋져?’

외모만을 따지자면 멋지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항과 주양 사이에 오간 서신에서 드러난 주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황당하고 끔찍한 미치광이들의 비밀을 안다면 결코 멋지다는 말은 못 할 것이다.

‘그나저나 총관이 열흘 뒤에 온다라……. 웃기는 놈이로군.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

모처.

창가에 놓인 난초가 곱다.

반듯하고 정감 어린 눈매의 중년 사내는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어루만지듯 물수건으로 조심스레 난을 닦아갔다.

그의 뒤쪽에 두 명의 중년 무인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보고했다.

“대공자가 달라졌습니다. 혈우독 이후 기억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후에는 직접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갔고, 천화서고는 활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잘되었군요. 잘된 일이에요.”

“총관께선 이대로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총관 곽도가 난을 향한 채로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곽 총관의 목소리는 굵고 또렷해 듣기 좋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찌…….”

“두 분은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대공자의 지독함은 말로 할 수 없지요. 허허, 세상 모두가 바뀐다 해도 대공자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공자를 지지하는 입장이지요.”

“그럼 현재의 변화조차 대공자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대공자는 그런 사람이지요.”

껄껄 웃는 총관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났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대공자가 혈우독을 거부한 것은 어찌 이해해야 합니까?”

“그 심오한 뜻을 하찮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만.”

“…….”

“…….”

“어쩌면 저승행에 가주 한 명만 데려가기엔 아쉬웠을지도요.”

곽 총관이 난을 보며 뿌듯해하고는 돌아섰다.

“그래서 제가 보기엔 잘된 일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공자가 죽어버린다면 천화서고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그건.”

“네, 나락입니다.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질 테죠. 후후후!”

“그럼 대공자가 결행할 때까지 기다리실 생각이십니까?”

곽 총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간을 너무 끌었습니다. 내일이면 죽겠지 모레면 죽겠지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또 기다리는 건 지루하군요. 가주가 동반 자살을 결심한 날 그 앞에서 제가 눈물을 흘리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하하, 여태 두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매우 화가 나기도 하고, 좀 더 기다려주면 대공자가 알아서 할 텐데 조급하게 굴어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군요. 하지만.”

곽 총관이 정성스럽게 매만지던 난초 화분을 들어올렸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두 무인이 화분을 바라볼 때 곽 총관이 화분을 떨어뜨리니 파삭, 하고 깨져 난초가 흉한 모습이 되었다.

“죽여야지요. 대공자를 도와줘야지요.”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많군요.”

곽 총관의 눈이 사이하게 빛나자, 두 무인이 움찔했다.

곽 총관이 히죽 웃었다.

“말씀해보세요.”

“이 공자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맞아준 것이 아니라 대공자가 무공을 익힌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곽 총관이 갸웃했다.

“이상한 말이로군요.”

“네, 참으로 묘한 말이었습니다.”

“아니, 제가 이상하다고 한 건 두 분께 드린 이야기입니다.”

“네?”

“대공자가 무공을 익혔다 한들 두 분 호위대주와 부대주에게 걸림돌이 됩니까?”

무공의 격차에 대한 지적이었다. 천화서고 호위대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대주와 부대주가 멋쩍게 웃었다.

“아, 아닙니다.”

“좋아요, 좋습니다. 두 분은 대공자가 달라졌다고 믿는 듯하군요. 이보다 좋을 수 없군요. 두 분이 믿을 정도라면 대공자 호위들의 경계도 느슨해졌을 테지요. 물론 송화 그년이 좀 걸립니다만, 하하하!”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워어워어…… 반드시 유념해야 할 건 대공자는 자살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명심하세요. 대놓고 죽이면 곤란합니다. 두 분 중에 한 분만 따로 대공자와 마주하는 자리를 마련하세요. 먼저 칼을 건네 보세요. 알아서 죽을 겁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반발한다면 목을 그어주면 됩니다. 그러고 나선?”

“자결이라고 알린다.”

“맞아요. 참 쉽죠?”

총관 곽도가 히죽 웃었다.

***

후공은 아침나절 미간을 찡그렸다.

‘으으…… 이 악취는 도대체.’

난데없는 악취였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째.

할 일을 받은 아우들이 분주히 움직이니 덩달아 천화서고는 활기가 돌고 있던 터였다.

그 사이 산삼과 하수오를 시간을 맞춰 복용해가며 연공에 매진하고 있었거늘, 이 아침 차분히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로 역한 냄새가 풍겨온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참을 만했는데 어째 점점 심해지더니 이젠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로 지독해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악독한 향취는 오랜만이었다.

개방의 장로 중 하나인 구취신개와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악취였다. 구취신개는 입 냄새가 타의 추종을 불허해 구취만으로 상대를 기절시킬 정도였고, 과거 후공은 신개의 냄새를 맡자마자 그 자리에서 하마터면 때려죽일 뻔했다.

아니, 아니다.

이건 사람 하나 죽이겠다고 똥통에 사흘간 잠복해 있다가 똥독에 절임 당해 죽은 흑살문 7호의 주검에서 나던 악취를 넘어선다. 아니, 왜 하필 거길 기어들어가서는.

더 이상의 좌정하고 있는 건 무리였다.

후공은 자신의 삼대 호신기 중 하나인 전혈(轉穴)의 성취에 만족하며 행공을 거둬들였다.

전혈의 성취 여부만 일단 확인했다.

전혈은 말 그대로 혈도의 이동.

호신기를 운용하자 눈에 변화가 나타났다.

흰자위가 사라지고 눈 전체가 먹물에 잠식당한 듯 검게 물들었다.

이는 전혈의 전조.

동시에 내부 경맥이 휘돌았고 혈도의 위치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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