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명문가의 자제들
방금 전 허공을 갈랐던 참격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신속하고 격렬했다. 일직선으로 뻗은 검은 검 끝이 파르르 떨며 세 갈래로 갈라졌다. 송화의 움직임이 어떠하든 검은 변화를 일으켜 따라붙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송화가 허리를 뒤로 젖혀 검을 가슴 위로 흘려보냈다. 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당겨지면서 지체 없이 아래로 베어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송화의 몸이 젖혀진 채로 핑그르르 회전했다.
우측 발을 축으로 삼아 빙글빙글 세 바퀴를 돌며 검세에서 벗어나고는 몸을 일으켰다.
‘제법인걸.’
후공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송화의 기도가 남달라 실력을 기대하긴 했지만, 생각 외로 솜씨가 좋았다. 네 호위도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믿고 있는 모습이었다.
당황한 건 검수였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이토록 쉽게 비껴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얼굴이 뻘게졌다. 그가 당황한 모습을 숨기려 바로 검격을 쏘아갔다.
송화의 반응은 방금 전과 달랐다.
회피 대신 마주 나아가 검격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것은 벗어나기엔 늦어 어쩔 수 없이 함께 죽으려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다.
검 끝이 송화의 심장을 관통해간다.
검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건 찰나였다. 살을 파고드는 감촉이 없었다. 송화가 신형을 옆으로 틀어 겨드랑이 사이로 검을 흘려보냄과 동시에 우수로 검수의 목에 있는 맥문을 움켜쥐었다.
“으윽!”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의 맥문이 틀어 잡혀 기운이 쑥 빠지면서 기의 운용이 불가능해진 검수는 고통에 신음했다.
송화가 검을 떨궈내고 팔목을 잡고는 가차 없이 바깥으로 접어버렸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그래야 했다. 바깥으로 접히면 문제가 생긴다. 바로 문제가 생겼다. 뚜드득 소리와 함께 검수의 뼈가 동강 났다.
“크아아아아악~~~.”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비명이 객잔에 울려 퍼졌다.
검수는 어깨가 축 처지고 팔을 이상한 각도로 흔들어대면서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네년……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넌……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너는 곧……”
“날아가겠지.”
송화가 발을 내질렀다. 복부에 직격당한 검수는 창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끝나기 전 송화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 싶게 미소를 지으며 후공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공자님, 놀라셨죠?”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헤헤…….”
“가자.”
후공이 소매를 털고 먼저 계단을 따라 일 층으로 내려갔다.
송화는 객잔 주인에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던 은전 열 냥으로 기물 파손까지 보상하겠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뒤따랐다.
“공자님, 공자님, 같이 가셔야죠.”
송화가 팔랑팔랑 뒤따라가다 갸웃했다.
그 뒤를 따라내려오던 네 호위도 갸웃한 건 마찬가지였다.
대공자가 객잔 앞에서 ‘으흠?’ 하며 서 있는 것이다.
상황은 바로 드러났다.
객잔 앞으로 열댓 명의 검수들이 부채꼴 형태로 벽을 치고 가로막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 중에 방금 송화에게 박살 나 창문으로 날아간 검수가 무리의 부축을 받고 서 있었다는 점이었다.
검수가 창밖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건 바로 이 패거리인 모양이었다.
이 소란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건 당연했다.
비명과 함께 이 층에서 사람이 날아 떨어지고, 이어 검객들 십여 명이 험악하게 늘어서니 길을 가던 이들은 걸음을 멈췄고, 다른 객잔과 주루에서도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구경 중에 최고는 싸움 구경이 아니던가.
구경꾼들 중에는 건너편 이 층에 있던 네 젊은 남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싸움이 커질 듯 보여 아래로 내려왔는데, 지켜보던 염화각의 이공자 장예가 갸웃했다.
“어…… 저기 저 사람 낯이 익은데……”
“장 형, 누구 말입니까?”
서문세가의 삼공자 서문헌이 말을 받았다.
그때 장예가 생각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설마 천화서고 범 형?”
“범 형이라고요? 천화서고 대공자 말입니까?”
“서문 형, 저기 마주 선 공자를 잘 보십시오.”
“헉, 어찌…….”
서문헌도 비로소 알아보고 기함했다.
듣고 있던 두 여인도 눈이 커졌다.
“저 사람이 말인가요?”
“천화서고 대공자라면 그 천재 중의 천재라던……?”
천화서고의 비극은 부근 지역에서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고, 수년간 외부 활동이 없는 천화서고 대공자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그의 천재성과 함께 거론되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지금 눈에 들어온 대공자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듯 하고 준수한 외모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눈빛 또한 당당한 것이 소문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네, 틀림없습니다. 보고도 믿기 힘들군요. 분명 저이는 천화서고 대공자입니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 사이 막아 선 검수 중 중앙에 선 중년인이 한 걸음 나서며 후공을 노려봤다.
그는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찬 애꾸였다.
하나뿐인 그의 오른쪽 눈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번쩍거렸다.
애꾸가 후공을 향해 이죽거렸다.
“네놈 짓이냐?”
후공이 차분히 답했다.
“아니.”
그러곤 뒤에 있는 송화를 가리켰다.
송화가 생각도 못한 지적에 잠시 퀭해지긴 했지만 이내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후공은 그 틈에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이미 송화의 무공을 보았고, 네 명의 호위도 있으니 굳이 자신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송화가 애꾸를 꾸짖었다.
“넌 말을 가려 해라.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그리고 방금 일어난 일은 저자가 먼저 시비를 걸고 공자님께 무례를 범한 결과이니, 너희도 그리 알고 썩 물러가라.”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송화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대장부처럼 당차고 똑 부러졌다. 어찌 보면 상대를 협박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애꾸가 클클거렸다.
“계집년이 제법 기개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수하를 이리 만들었으니, 내 너의 팔 한쪽을 가져가야겠다.”
송화가 고개를 저으며 깊게 탄식했다.
“후우…… 정 벌주를 마시겠다면 어쩔 수 없군.”
“지랄은. 애들아, 쳐라!”
애꾸가 손을 들어 올리며 고전적인 명령을 내리니 검수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즉시 송화를 비롯 네 명의 호위까지 그들을 맞이해갔다.
삽시간에 한데 어우러져 난전이 벌어졌다.
후공은 더 뒤로 물러나 전황을 한 눈에 담았다.
천하제일인의 안목이다. 잠시 잠깐의 격돌만 보고도 결과를 가늠할 수 있었다.
‘시간 문제겠군.’
수적으로는 열세나 송화의 무위가 생각보다 뛰어나고 네 호위가 돕고 있으니 다치는 일도 없이 정리될 터였다.
후공은 바로 몸을 돌렸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네 명의 젊은 남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 형과 서문 형이 아니십니까.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두 사람에게 포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장예와 서문헌이 껄껄 웃었다.
“알아보다 말다요. 천화서고의 불세출의 천재를 몰라볼 만큼 눈이 어둡지 않습니다.”
“범 형이 우릴 알아보는데 우리가 못 알아볼 리가요. 정녕 이게 얼마만입니까.”
후공도 마주 웃어보였다.
“하하하, 제가 무심했습니다.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살도 좀 오르고 건강도 좋아져 오랜만에 나왔는데, 이리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객잔에 올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습니까? 두 분 소저께서도 불편하지 않으시면 함께 가시지요.”
자신들에게 권하는 말이 올 줄 몰랐던지 두 여인이 얼떨떨해하며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예와 서문헌도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어서 멍해졌다가 겨우 동의를 표했다.
천화서고 대공자와의 환담이라면 내심 그들이 바라던 바였다. 천외의 요새라 불리고, 천하삼대서고 중 한 곳인 천화서고다.
그중 천재 중의 천재로 어릴 적부터 이름을 날린 천화서고 대공자와의 교류는 가문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젊은 기재들에겐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하나 천화서고를 어둠으로 몰고 간 비극의 주인공이 먼저 호기롭게 자리를 청할 줄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었다.
움직이기 전 장예가 급히 말을 꺼냈다.
“범 형,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나서서 먼저 이 분란부터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선심 쓰는 표정이 아닌 호의가 그대로 전해졌다.
장예 자신의 무력이든 염화각의 명성이든 내세워 정리할 모양이었다.
‘제법 잘 컸구나. 눈빛도 좋고.’
후공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장 형,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본래 강호의 시비란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는 것이 좋지요. 제 호위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너무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자, 가십시다.”
호의는 기꺼이 받아야 할 때가 있고, 적당히 거절해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은 전자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표정을 보니 멍해져 있었다.
소문으로 알려진 천화서고 대공자는 음울한 폐인일 뿐인데 자력으로 당당함을 드러내니 당연했다.
“…….”
“…….”
“……”
“……”
심지어 두 여인은 놀란 마음을 전음으로 교환하기까지 했다.
- 이 여유는 뭐죠? 죽지 못해 살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요?
- 그러니까요. 성격이 좋아 보여요.
그런 그들을 향해 후공이 웃어주었다.
“하하, 왜 다들 쳐다보기만 하십니까. 올라가십시다.”
옮긴 자리는 굳이 먼 곳을 찾진 않았다. 바로 위 객잔의 이 층. 시야가 탁 트여 싸우는 광경도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후공은 두 여인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여인들은 청월문 문주의 딸 반교인과 백화장주의 딸 묘가령이었다. 안휘 북부에서 제법 명망 있는 문파와 가문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환담이 오가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후공은 넌지시 강호 사정을 돌려물었다.
주로 대답한 건 서문헌과 장예였고, 두 여인은 한 번씩 추임새를 넣었는데 후공은 대강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별한 건 없군.’
큰 분란은 아직이었다. 여기 저기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긴해도 강호를 뒤흔드는 사안은 아니었다. 마교나 귀운종, 서장의 극연탑 정도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면 문제랄 것이 없었다. 흑도나 각 지역의 분쟁은 언제나 있어 온 일들이었다.
“분란은 여기저기 발생해 사건 소식이 끊임이 없지만 묘하게도 노골적이진 않습니다. 조심스러운 모습이랄까요. 아무래도 맹주의 죽음이 공표되었어도 긴가민가 믿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후공이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라면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서문헌의 말을 장예가 이어받았다.
“후공의 죽음을 믿지 않는 건 솔직히 저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범 형은 맹주 후공에 대해 잘 모르시겠지만, 후공은 뚱뚱해서 오해를 사지만 실은 그 능력이 하늘에 닿았다고 일컬어지는 분이랍니다. 강호에서는 후공에게 맞설 적수로 마교나 귀운종의 몇몇을 거론하지만 제가 보기엔 가당치도 않습니다. 후공에게 있어 유일하게 흠이라면 뚱뚱하다는 것인데, 되레 멋있어 보인다는 사람도 많지요. 저도 물론 그중 한명입니다.”
“크흠, 장 형은 안목이 높으시군요.”
후공은 장예가 기특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믿지 못하는 분위기라……’
후공도 공감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농담으로 여길 일이긴 했다. 자결은 무슨, 지금쯤 맹주는 천하를 유람하고 있을걸. 이런 말을 나눌 테지.
이 정도면 충분히 현 강호의 상황을 인지했기에 자리를 정리해야 할 때였다.
어느샌가 바깥 상황도 마무리 중으로 애꾸 무리는 모두 널브러졌고, 송화가 쓰러진 애꾸에게 일장 훈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별의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하더니 오늘 범 공자를 보니 확실히 알겠군요. 성격도 대범하시고, 심지어 강호 사정까지 궁금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청월문 문주의 딸이라는 반교은이었다.
그녀는 아담한 체형에 붉은 비단옷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