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5화 (15/460)

15화. 백대 영물 중 하나

후공이 너털거렸다.

“천하에 강호 아닌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에 있든 강호에 몸담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네 분처럼 의롭고 아름다운 분들이 있는 곳이 또 강호가 아닐까 싶습니다.”

반교은의 뺨이 이내 발그레해졌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말하는 내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니 어찌 된 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린 것이다.

“이 기회에 범 공자께서도 무공을 익혀보는 건 어때요?”

백화장 장주의 딸 묘가령이었다.

후공은 그저 미소로 화답했다.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다들 꽤 친밀감을 보이는 모습들이어서 이러다 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질 듯했기에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작별을 암시했다.

의미를 알아차린 네 사람이 아쉬워했다.

“벌써 가시려고 하십니까?”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분란도 다 마무리 된 듯하니 이제 돌아가야지요.”

자리를 파하며 인사말들이 오갔다.

초대하겠다, 초대해 달라, 가까운 시일 내에 술 한잔하자 등등의 말들이었다. 서문헌은 묻지도 않았거늘 외가로 내일 떠난다면서 특히 아쉬워했다.

‘허허, 녀석들…….’

원래 이렇게 말하고 다음에 초대도 안 하고 술 한잔도 안 마시는 것인데, 어째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과 헤어져 장소를 옮긴 후공은 바로 송화를 불렀다.

“공자님, 이제 해도 저물어가는데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다.”

후공은 이어 호위 중 하나에게 명했다.

“확인이 먼저다. 너는 본가로 가서 어떤 상황인지 살펴보고 오너라. 아직 악취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오늘 밤은 밖에서 머물 것이다.”

“네.”

현명한 주인을 만나면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어떻게든 끔찍한 악취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위의 얼굴이 환해져 곧장 달려나갔다.

거의 한 시진이 지나 호위가 돌아왔다.

호위가 가져온 소식에 후공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땅 속에서 뭐가 나왔다고? 그게 왜?”

정녕 생각지도 못한 기괴한 상황이었다.

***

그 밤, 천화서고의 악취는 어느덧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가주의 심기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불편한 사람은 또 있었다.

천화서고의 고명한 의원인 편 의원이었다.

마주한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팽팽했다.

노가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일세…….”

가주는 노기를 쏟아내다 못해 욕이 나올 것 같아 애써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것으로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의견을 말할 땐 사람의 성향이나 그동안의 일들을 충분히 고려한 다음 말해야 하지 않나?”

“가주님, 이게 최선입니다.”

편 의원이 지지 않고 항변했다.

눈매를 꿈틀하는 것이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자네 말이 지나치구만.”

“……”

“큰 아이가 보약이든 영약이든 뭐든 좋으니 구해달라고 한 건 알고 있네. 할애비로서 뭐든 안 구해주고 싶겠나?”

“……”

“식성이 크게 달라져 어지간한 건 잘 먹는 것도 알고 있네. 하지만 비위가 약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하지 않나? 당장 오늘만 해도 악취를 못 참고 아침나절에 밖으로 나갈 정도였네. 뭐 그것도 살겠다고 하는 행동이어서 나로선 흐뭇했네만 그건 그거고, 비위는 비위인 걸세.”

“보통 영물이 아니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편 의원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노가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보통 영물이 아니지.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네. 너무 특별한 영물이지 않느냔 말일세. 땅속 진법을 타고 넘으며 서고 전체를 오염시킬 정도로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영물이란 걸 벌써 잊은 것인가?”

가주는 답답하다는 듯 한쪽에 놓인 검은 보자기를 가리켰다.

보자기의 재질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가죽 재질로 검은 광택을 발하는데 그 안에 든 무언가가 요동쳐 보자기가 마구 꿈틀거렸다.

가주가 말을 이었다.

“육각망이 놀라운 영물인 건 두말하면 입 아픈 일이지. 하지만 생혈로 복용해야 한다면 사정이 다르네. 몸에 좋다는 것이라면 쇠라도 씹어먹는 자라 해도 육각망의 고약한 냄새를 참을 순 없지 않겠나.”

악취의 원인은 육각망이라는 이무기 류의 영물이었다.

몇몇 진법을 파헤치기까지 하면서 겨우 환영진으로 몰아 영악스럽고 빠른 육각망을 잡았는데, 잡는 와중에도 악취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몇몇은 기절하고 다수가 토하면서 난리도 아니었다.

육각망은 주로 땅속 깊은 곳에 서식하고 옮겨다니는데, 흙을 뚫고 빠져나가는 재주가 탁월했다. 크기는 성인 어른의 팔 길이 정도. 머리가 육각 형태를 띠어 육각망이라 불리는데, 달리 녹혈망이라고도 칭했다.

뱀의 외피는 머리 쪽이 노랗고, 몸통은 붉은 반면 괴이하게도 피는 녹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서에 따르면 육각망은 천하백대영물에 속한다 하였고, 그 공능도 놀라웠다. 육각망의 녹혈을 무공을 익힌 자가 복용하면 내공이 크게 상승하고, 독에도 면역을 갖게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가 복용한다면 평생 잔병치레에서 벗어난다고도 기록되었다. 하지만 역시 치명적인 곤란함은 냄새였다.

육각망이 땅속에 살아서 그렇지 뿜어내는 악취는 곧바로 호흡 곤란을 불러올 정도였다. 고서의 기록에서는 육각망의 피를 마신 자가 여태 없다고 적혀져 있었으니,

녹색 피에서 나는 냄새가 외피의 냄새 이상으로 지독해서 억지로 마신다고 해도 결국 다 토해내고 말 정도라고 했다.

복용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피를 그릇에 짜 내 마시면 효과가 반감된다.

최대한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육각망의 피가 외부 공기에 노출되기 전에 복용해야 하기에, 육각망이 살아있는 채로 껍질에 입을 대고 빨아 마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 육각망의 생혈을 큰손자가 마셔야 한다고 편 의원이 주장하고 있으니, 무슨 생각인가 싶은 가주였다.

“가주님, 백 대 영물 중 하나입니다. 백년 산삼이고 하수오고 그런 건 육각망에 비하면 도라지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복용만 하면 대공자는 평생 병을 모르고 살게 될 터이니, 천화서고의 후계자가 마셔야 하는 게 마땅합니다.”

편 의원은 여전히 강경했다.

가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진귀한 영약이라도 먹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비록 지금에야 범항이 식탐도 늘고 식성이 다양해졌다지만, 이건 아니네. 억지로 육각망을 복용하라고 강요했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를 일이 아닌가. 부몽, 넌 어떠냐? 넌 마실 수 있겠느냐?”

“저요?”

여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에서 얌전히 듣고 있던 부몽이 치를 떨었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부몽은 육각망을 잡는 와중에 질려버린 터였고, 빨리 없애버렸으면 하는 심정뿐이었다.

“자네 봤나?”

“끄응,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이대로 육각망을 처분하는 건 너무도 아깝습니다. 정녕 돈을 쌓고 있다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영물이 아니겠습니까.”

“좋네. 그럼 이렇게 타협하지. 육각망의 약효가 줄어들더라도 악취 없이 섭취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게.”

“가주님, 일단 대공자에게 권고해보시고, 거부한다면 그때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허, 자네 고집이 늘었군. 될 리가 없다니까. 저 가죽을 열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만단 말일세!”

그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윤이 뛰어들어왔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큰형님께서 지금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가주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불똥은 편 의원에게 튀었다.

“들었나? 그걸 먹이겠다는 건 당사자와 싸우자는 뜻이란 말…….”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요.”

“응?”

“큰형님께서 육각망 언제 먹냐고, 왜 아직 가져오지 않냐면서 성화가 대단합니다.”

“왜에에?”

일각 후.

가주는 멍해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보고 있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광경이라 눈에 초점도 완전히 사라졌다.

“쯥쯥, 쭈우우우웁, 쭈우우우웁!”

성화를 부렸다 해도 안 믿었는데,

절대로 이럴 리 없는데,

못 먹겠다고 방을 뛰쳐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큰 손자가 아주 환장을 하고 육각망의 피를 빨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악취에 서 있기도 힘든데, 가히 젖먹던 힘까지 내며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목젖을 마구 일렁거린다. 얼마나 힘을 주는지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아주 무서울 지경이었다.

놀란 건 가주뿐만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권했던 편 의원도 완전히 넋이 나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큰형님이 발작하면 붙잡으려고 곁에 있던 윤과 부몽도 육각망이 제대로 천적을 만났다 싶을 정도였다.

잠시 후 통통하던 육각망은 한껏 쪼그라들었다.

“이제 됐…….”

가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큰 손자가 입을 떼지 않는다.

쪽쪽 거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마시기 좋게 육각망의 머리와 꼬리를 접어 두 손으로 붙잡고 있던 송화가 오만상을 찡그리고 물러났는데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무서운 집념이었다.

피를 온전히 빨린 육각망은 눈이 풀리며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입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이쯤이면 다 마셨다고 봐도 무방했다.

편 의원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전 이만 급한 볼일이 있어서…….”

“어디 가나?”

편 의원은 말을 다 끝내지도 않고 대답도 없이 문을 부술 듯 박차며 나가버렸다. 이미 방 안에 가득한 악취는 지옥이나 다름없어서 그저 살길을 찾아 떠난 것이었다.

그 뒤를 송화가 이었다.

“가, 가주님, 저도…….”

송화는 ‘가’라는 말을 뱉어내자마자 눈앞에서 휑하니 사라졌다. 뒷말은 흐릿하게 밖에서 들려왔다. 윤과 부몽도 이놈들이 원래 이렇게 빨랐나 싶을 정도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가주만은 자리를 지켰다.

그는 근심에 찬 얼굴이었다.

잠시도 견디기 힘든 악취인데 큰 손자가 태평히 아직 껍질을 물고 있으니 혹시 후각과 미각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싶어 걱정되었다.

“애야, 냄새가 고약하지 않느냐?”

“고약합니다. 정녕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괜찮은 것이냐?”

“네, 저는 괜찮…….”

“그럼 됐다!”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가주도 바로 줄행랑쳤다.

덩그러니 악취 속에 남겨진 후공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웃었다.

자신이라고 냄새가 왜 고약하지 않겠는가.

‘죽을 것 같구나.’

참기 힘든 건 같았다.

하지만 이건 냄새가 나는 보물이었다.

육각망은 그도 알고 있었다.

무엇이건 서열을 정하기 좋아하는 무림에서 육각망은 영물 순위로는 이십 위 언저리에 위치했다.

먹기가 난해해 서열이 뒤로 밀려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육각망의 효능은 공청석유와 비견할 정도요, 또 다른 효용으로는 만독이 해를 끼치지 못하는 만독불침에 이르게 되니 십 대 영물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이제 호신기 중 전혈에 이은 허운과 통격에 빠르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형건곤심결을 2성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대로면 12성의 본래의 경지까지 5년 이내에 도달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때 불현듯 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삼악(三惡)이라고?’

범항의 지식, 기억이었다.

삼악이란, 육각망과 더불어 일명 삼대악취라 불리는 것으로 영사, 영초, 영충이었다.

육각망.

영악초.

독양충.

영사는 방금 섭취한 육각망이요, 영악초는 식물, 독양충은 벌레의 일종이었다. 영악초와 독양충은 후공으로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범항의 기억에 따르면, 이 삼악을 전부 복용할 시에는 하나하나를 복용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효능에 이른다고 했다.

‘공능이 거의 오대영물 수준에 육박한다니.’

고약스럽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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