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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18화 (18/460)

18화. 전혈-교릉

천규인이 껄껄 웃고 다시 금나수와 비수를 전개했다.

후공은 비수가 옆구리로 파고드는 순간, 소매를 휘둘러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천규인의 몸을 스치듯 하며 빙글 돌아 뒤를 잡았다.

툭!

검결지를 맺은 손으로 천규인의 척추 부근을 두드렸다가 뗐다. 위치는 혈도였지만 점혈한 건 아니었다. 그저 경각심을 키우려는 의도였다. 전력을 다해 보라는 뜻의 전달.

“헉!”

화들짝 놀란 천규인이 황급히 돌아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로선 자신이 등을 훤히 드러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한 터라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척추 쪽 대추혈에 손이 닿았다.

진기가 없어서 점혈이 안 된 걸까. 다행스럽게 혈도에는 아무 증상도 없었다. 하지만 그도 아예 바보는 아니었다.

어찌 벗어날 순 있다 해도 우연히 뒤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여태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보법의 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규인의 뇌리로 불쑥 이공자 범윤의 말이 떠올랐다.

대공자가 무공을 익히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천규인은 당시 대공자의 몽둥이질을 지켜보았기에 헛소리라고 치부했거늘.

그런데…….

‘직접 겪은 당사자만 알 수 있다는 건가.’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실력 차가 나야 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아까 보인 멈칫거리던 움직임도 어설픔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뒷골이 서늘해졌다.

“대공자, 자결시켜 드리는 건 어렵겠습니다. 대신 살해당하는 것으로 갑시다.”

“그래, 이제야 말뜻을 알아들었구나. 자, 사십이 초식이 남았다. 나도 몸 좀 풀자꾸나.”

슉!

천규인이 비수를 후공의 이마를 향해 던지며 동시에 장력을 날렸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는 사라졌고, 호적수를 대하듯 자신의 절기인 육양장(六陽掌)을 펼쳐냈다.

이내 사방이 그의 손 그림자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장력이 쏟아졌다.

후공이 바라던 공격이었다.

제법 매서운 탓에 무형보를 딛는 걸음이 아까보다 분주해져,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후공은 한 번씩 풀어야 했다.

그렇게 이십여 초가 지났을 때 천규인의 얼굴은 황토색으로 변해갔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건만, 대공자의 움직임은 거의 산책이었다.

얼마 전까지 다리가 안 찢어져 애를 먹던 대공자였거늘 육양수의 손 그림자에서 번번이 사라진다. 물러나고, 상체를 젖히고, 갑자기 반보 딛고 다시 일보를 딛고 돌면 그때마다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동작은 간결하고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으며 회피 동선도 극도로 짧았다. 경악스럽게도 이제까지 공방을 나눈 서로의 간격이 반장(1.5미터) 안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 간격 안에 있지만, 천규인은 어쩐지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을 느꼈다.

그렇게 천규인의 좌절이 깊어질 때, 변화가 일었다.

“자, 오십 초가 되었으니 이제 굴러보자꾸나.”

후공이 우수를 내밀며 천규인을 향해 파고들었다.

스슥.

천규인의 곁을 스치듯 지나 검결지를 맺은 손으로 허리 쪽을 툭 두드렸다. 천규인이 발작하듯 장력으로 떨쳐내려 할 때는 이미 후공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그러곤 다시 연속해서 어깨와 그 아래 이두근 쪽의 혈도를 스쳤다.

“무슨 짓이냐!”

천규인이 버럭 소리쳤다.

당혹감이 더 큰 외침이었다.

대공자의 손이 닿는 지점은 견우, 협백의 혈점이었다.

빙글 돌아 이어 닿은 지점은 팔꿈치 쪽의 척택혈.

이어지며 배꼽 아래, 손목, 가슴까지 툭툭 친 다음 대공자는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 아무 일 없다는 듯 뒷짐을 졌다.

천규인도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미 얼굴은 창백함을 넘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은 털끝 하나 닿지 못했거늘 대공자는 마치 자신을 희롱하듯 일곱 번이나 각기 다른 지점의 혈도를 두드리고 여유롭게 물러난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은 아무런 대응도 못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너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는 뜻이요, 실제로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대공자……. 어떻게 된 거요?”

수준차는 극명했다. 천규인은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과는 별개로 울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화를 억누르며 으르렁거렸다.

“사혈(死穴)을 짚을 수도 있었거늘 왜 엉뚱한 일곱 곳의 혈도만 두드린 겁니까.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

“대공자 편에 서라는 뜻이오?”

후공이 씨익 웃었다.

“넌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구나. 너 따위를 내가?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구르며 쪼그라들기나 해라.”

“구르며 쪼그라들다니요?”

천규인이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때 가서 받아들일지 말지 생각해 보겠다는 뜻인가?’

그 정도는 해야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일까? 그런데 구르는 건 그렇다 쳐도, 쪼그라드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이 안 왔다.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목이 확 꺾였다.

귀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였다.

“컥!”

천규인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목이 저절로 움직여 꺽인 것이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목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통제할 수 없었다.

이어 움직인 건 팔이었다.

두득, 두드득.

양팔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뿐인가. 손목이 꺾이고 팔목도 틀어지며 돌아가며 연신 뼈마디 소리가 터졌다. 그걸 목을 옆으로 튼 채로 천규인은 자신의 몸을 바라봐야 했다. 팔이며 손목이 돌아가는 것도 모두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두드득, 두득.

이번엔 다리. 뒤틀리며 꺾여 돌아가 쓰러졌고, 쓰러지고도 전신이 계속 뒤틀리고 축소되어 갔다. 왼팔이 멋대로 움직이며 등 뒤로 돌아가면서 오그라들었다. 그렇게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다가 한쪽 어깨가 탈골되고 팔목이 부러져나갔다.

두드다다닥!

“으가가각…….”

그러면서 손목도 급기야 부러져나가고 팔목의 관절들도 뒤틀림이 거세지면서 부서져 나갔다. 오른쪽 다리도 휘어지기 힘든 모습으로 돌아가며 연신 두드득거렸고, 왼쪽 발은 얼굴 쪽으로 향해 기어 올라와 더 나아가려 멋대로 꿈틀꿈틀했다.

그런 가운데 얼굴이라고 무사한 건 아니었다.

한쪽 입이 틀어져 올라가 잇몸이 훤히 드러났고, 두드득 거리면서 반대편 광대뼈는 돌출되며 살을 뚫고 나올 듯 튀어 올랐다.

“으가가각…… 으으으으…….”

그렇게 여러 뼈가 부러지고 몇 군데는 바스러지면서도 천규인은 널브러져 꿈틀거리며 쪼그라들어갔다. 어떻게 해도 통제할 수 없었고, 몸은 계속해서 멋대로 움직이는데 잠시 쉬는가 싶으면 다시 두득하고 틀어지고 뒤틀리며 작아져가니, 그때마다 천규인은 숨을 꼴깍거리면서 신음다운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쪼그라든다는 뜻이…….’

천규인이 이해했을 때는 뒤틀리고 쪼그라들어 원래 몸에서 삼분의 이 가량으로 뭉쳐져버린 때였다.

후공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러게 건방을 떨더라도 사람을 봐가면서 떨어야지. 이게 무슨 재앙이냐. 내가 누군 줄 알고.”

“으가가각…….”

후공이 펼쳐낸 수법은 교릉.

자신의 축골공인 교릉을 타인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험악해진다. 일곱 혈도를 점하는 것으로 상대는 신체의 통제력을 잃고 규칙 같은 것 없이 멋대로 뒤틀려가면서 뼈가 부러지고 오그라들면서 뭉개져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릉 수준은 후공에게 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뒤틀리는 형태를 보니 갈 길이 멀었다. 역시 아직은 2성 수준에 불과했다.

“사…… 살려……. 으가가각…… 대공자님…….”

천규인이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에 후공은 손을 뻗었다.

“조용.”

팟!

아혈을 점해 신음소리를 막았다. 이제 뼈마디 소리만 작게 흘러나왔다.

후공은 문쪽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지? 흠, 둘?’

이내 더 근접해오면서 한 명이 아니라 둘임을 감지했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서 온전히 누구인지를 구분해낸 후공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교인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문을 열며 소리쳤다.

“윤, 부몽. 뛰어와라.”

저만치 휘파람까지 불며 느긋하게 걸어오던 윤과 부몽이 활짝 웃으면서 달려왔다.

“하하, 형님! 저희가 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큰형님, 설마 기다리셨던가요?”

그러나 안으로 들어온 둘은 동시에 와다닷, 놀라 뒷걸음질 쳤다.

“혀, 형님……. 이게 뭡니까?”

“괴, 괴물이 왜…….”

이미 천규인은 본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요, 여전히 기괴하게 꿈틀대며 뼈가 꺾여가는 중이라 윤과 부몽이 몰라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규인이다.”

“네? 천규인이라면 호위대주 말입니까? 그, 그게 무슨?”

윤이 그럴 리 있냐는 듯 눈만 깜박였지만, 부몽은 큰형님이 틀린 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큰형님……. 이거 그거죠!”

“응?”

이놈이 알 리 없는데 뭔 소린가 싶어 후공이 뚱해졌다.

부몽이 확신에 차 소리쳤다.

“풍이 와버린 거죠! 대주가 풍을 맞아버린 것이죠? 와아, 풍이 이렇게 무서운가요?”

그러면서 당장 편 의원에게 데려가자며 난리였다.

윤도 그런 것 같다면서 부산을 떨었다.

세상 정신 사나워진 후공이 손을 내저었다.

“조용히 좀 해라. 누가 올 수도 있으니 여기에서 설명할 순 없다. 우선 장소를 옮기자. 너흰 이놈을 들고 날 따라오너라.”

후공은 서재로 앞장섰다.

책장에서 뒤집혀 꽂힌 겨울 서책 앞에 서자 윤과 부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겨울 속으로 가시려고요?”

“그래.”

후공이 책을 들어 다시 똑바로 꽂아넣자 천장이며 바닥이며 사방이 붕괴되었다. 주변 풍광이 순식간에 새하얀 눈밭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있으면 고함을 질러도 밖으로 소리가 나갈 일이 없고, 또 밖에서 볼 수도 없었다.

후공이 방금 전 일을 설명했다.

윤과 부몽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굳이 윽박지르진 않았다.

확인은 천규인의 몫이다.

천규인의 아혈을 풀고 후공이 물었다.

“자, 이제부터 말해봐라. 어떻게 이 일이 시작되었으며, 누가 최초로 주도했는지, 연루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지 말해라.”

“으으으……. 제가 잘못…… 용서…… 으가가…….”

그렇게 천규인이 돌아가버린 입을 더듬대며 그동안의 경과를 말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관련자들을 술술 불었다.

주도자는 총관.

가담자는 호위대 32명 중에서는 8명.

대주 부대주와 수비대 6명이었다.

학사 쪽은 1명.

또 관리 인원과 회계처리 쪽에 5명인데, 그들은 모두 총관이 데리고 온 자들이었다.

듣는 중에 윤과 부몽은 의문이 놀람이 되었다가, 다시 놀람은 분노로 타올라 울화를 터뜨렸다.

“곽 총관 그놈이 감히!”

“어찌 사람이 이리 못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둘을 향해 후공이 버럭 소리쳤다.

“총관을 탓할 일이냐. 너흰 그동안 뭘 한 거냐? 집안 꼴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했느냔 말이다. 나는 어차피 맛이 갔다지만, 너희는 도대체 뭘 한 거야!”

“형님, 그게…… 저희도 맛이 갔는걸요?”

“……크흠.”

부몽이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후공은 더 추궁할 수 없었다. 기억 속에 이 두 놈은 누구보다 범항을 잘 따르고 좋아했기에 그만큼 좌절과 상처도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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