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0화 (20/460)

20화. 어쩐지 대공자가 마교 소교주 같아 보이는 건

총관은 머리가 어질거렸다.

어떻게 하면 죽을까만 고민하던 대공자가 가주의 만류에도 미동조차 없는 것이다. 마도라는 곳도 아닌 게 아니라, 대공자는 무슨 마교의 소교주 같은 모습이 아닌가.

“할아버지, 들어가 계십시오. 저를 죽이려 한 놈입니다. 하마터면 제가 죽을 뻔했는데 이 정도는 많이 배려해주고 있는 겁니다.”

“어어……. 그, 그렇지.”

가주가 놀라 눈이 커졌다가 잠깐 웃다가 더듬거렸다.

단호함에 놀라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말에 기뻤다가, 피 칠갑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총관을 다시 쳐다보고는 더듬거린 터.

“그래도 죽이지는…… 흠흠, 말거라.”

가주는 총관의 배신과 드러난 음모가 왜인지 큰일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도리어 큰손자가 누굴 죽이네 마네 하는 날이 온 것만이 실감이 나지 않을 뿐.

그렇게 가주가 밖으로 나가니, 송화가 가주를 배웅하고는 들어와 물었다.

“공자님, 가주님도 나가셨는데 더 팰까요?”

후공이 미간을 찡그렸다.

“넌 아까부터 나가 있으라 했거늘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냐! 알몸에 피범벅인데!”

송화가 배시시 웃었다.

“저는 공자님의 그림자잖아요. 물 좀 드릴까요?”

“그래.”

“헤헤.”

물로 목을 축인 후공이 총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곽도.”

“……네.”

대답하며 입을 벌리는 바람에 총관의 터진 입에서 핏물이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본좌……. 크흠…….”

말이 헛나온 탓에 송화와 세 호위가 뭔 갑자기 본좌인가 싶어 돌아봤기에, 후공은 연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본 공자가 볼 때 네 뒤에 누군가 있지 않고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한번 들어보자꾸나.”

“영명……하십니다. 그들은…… 흑단(黑團)입니다.”

“흑단? 강호에 그런 게 있었던가. 처음 들어보는데?”

새로 생겼나?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떠오르지 않아 후공은 연신 갸웃거렸다.

냉큼 송화가 귀에 속삭였다.

“공자님, 왜 갑자기 아는 척하세요?”

“크흠, 저리 떨어져라. 내가 모르는 게 어디에 있다고.”

그때 곽도가 끼어들었다.

“처음…… 들어보시는 게…… 당연합니다.”

“당연하지. 그럴 줄 알았다.”

“흑단은…… 서문세가와 청월문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입니다.”

“응?”

후공뿐 아니라 그 자리의 모두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문세가는 천하 십대 세가 중 한 곳으로, 비록 말석 자리를 진주언가와 다투고 있다곤 해도 그 힘이 강성하고 정도를 추구하는 가문이었다.

또 청월문은 구대문파 외 군소 문파로 분류되지만 안휘 북부에서는 그 명성이 자자했다.

문득 서문세가의 삼공자 서문헌과 청월문주의 딸 반교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묘하군. 그 아이들에게선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거늘……’

서문세가와 청월문이라.

터무니없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천화서고의 처지는 누구라도 딱 먹기 좋게 차려진 밥상이었다.

게다가,

‘서문추라면 맑은 느낌이 아니었지.’

후공은 서문가주 서문추를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서문추의 인상은 웃는 상인데 그 웃음에서 소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었다.

청월문주는?

‘크흠, 본 적이 없군.’

후공은 떠오른 생각을 우선 접어두고 총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넌 사실을 말하라고 했더니 재밌는 말을 늘어놓는구나.”

“믿기 힘드실 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이 상황에서……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흑단의 결성은 차선책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대공자께서…… 죽을 듯 죽지 않으시는 탓에…… 죄, 죄송합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날 속이려 드는군. 서문세가와 청월문은 명문정파이거늘 어찌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겠느냐. 너는 허무맹랑한 말로 틈을 내 살길을 찾으려는 것일 테지.”

“대공자님, 소인이 거짓을 고하고자 했다면…… 조금 더 그럴싸한 곳을 대지…… 않았겠는지요. 안휘 북부에서…… 서문세가와 청월문을 음모의 배후로…… 지목하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계속해봐.”

“최근 가주님과 대공자의 동반 자살이…… 물거품이 되면서 차선책 실행에…… 힘이 실렸습니다. 흑단이 침투해 천화서고를 멸하면…… 서문세가와 청월문이 흑단을 몰아내는 형태를 취한다는 계획입니다. 그 실행을 위해…… 미리 진법 일부를 변형하고 일부는 폐쇄해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인데…….”

“그 틈으로 애먼 육각망이 들어와서 땅속을 휘젓고 다닌 거로군.”

“네, 하지만 저는…… 줄곧 차선책을 반대해왔습니다. 천화서고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흐음…….”

원래 후공이 배후나 더 큰 연계가 있을 것이라 짐작한 건 진법의 변형 때문이었다. 외부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총관이 무공을 모르는 필부라는 점도 고려되었다. 호위대주와 부대주가 포섭되었다 해도 음모의 규모로는 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이 복잡해졌군. 서문세가와 청월문이라니.’

무턱대고 믿자니 터무니없고, 안 믿자니 총관의 진술은 일관적이었다.

“네 말은 믿을 수 없다.”

후공은 조금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서문세가와 청월문도…… 부인할 겁니다. 하지만 서문세가와 제가 징표를 교환하였으니…… 그것이 증거입니다.”

“징표라고?”

후공이 눈을 빛냈다.

“네, 제가 머물던 임시 거처에서 찾을 수 있으실 겁니다.”

“확인해보면 되겠지. 네 목숨을 거두는 일은 그때까지 보류하도록 하마.”

**

후공은 바로 가주와 마주했다.

총관이 실토한 바를 전해들은 가주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며 펄쩍 뛰었다.

“흑도도 아니고, 명문정파인 서문세가와 청월문이 다른 가문의 어려움을 틈타 집어삼키려 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징표라는 것도 말하기 나름일 테고. 곽도 그놈이 이간질을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확인은 필요합니다.”

“어찌 확인한단 말이냐. 직접 찾아가 따질 수도 없는 일이 아니냐.”

당연했다. 대놓고 강도냐고 물어보는 격인데 강도여도 문제고, 강도가 아니라고 밝혀져도 혐의를 두는 것은 무례한 경우였다.

그렇기에,

“미끼만 던지면 됩니다. 그곳이 어디든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미끼?”

***

저녁시간.

후공은 호위대를 불러모았다.

내부에 필요한 인원을 제외한 가용 가능한 인원은 총 19명.

이들은 모두 믿을 만했다.

천화서고가 정신적인 붕괴 상황이었음에도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고, 애초에 총관 쪽에서 포섭 시도조차 못한 이들인 것이다.

호위대의 분위기는 하염없이 무거웠다.

이미 총관의 자백 내용을 전해들은 터라 다들 비장한 것이 죽음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대로 서문세가 혹은 청월문으로 따지러 들어간다면 분쟁이 일 테고, 그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서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후공이 그들 앞으로 나아가 서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명만 내리십시오. 저희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후공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싸우다 죽어라! 그것이 바로 무인이지!”

“네!”

다 같이 한 목소리로 대답하니 밤하늘에 쩌렁하고 울렸다.

기백이 대단해 절로 흐뭇해진 후공이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

그럼 왜?

모두가 의문에 찬 눈동자로 대공자를 바라봤다.

“오늘 너희는 밖으로 나가 하루를 보내고 내일 밤에 귀가한다. 너희가 할 일은 단 하나! 주루, 객잔, 저잣거리로 다니며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다.”

“……”

여전히 다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대공자의 말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소문은 이렇다. 서문세가와 청월문이 흑단이란 제삼의 조직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어떤 과정으로 천화서고를 집어삼키려 했는지 최대한 많이 알려지게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총관의 자백 내용 그대로를 퍼뜨리면 된다. 옷은 각자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결코 언쟁이나 시비에 얽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일 밤이면 안휘 북부 사람들이 온통 이 이야기를 주고받게 해라.”

호위대의 안색이 밝아졌다.

“알아들었느냐?”

“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분노에 차 앞뒤 안 가리고 쳐들어가는 건가 했는데, 대공자의 대응을 듣자니 현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재 드러난 건 오직 총관의 자백뿐인 상황.

서문세가나 청월문이 발뺌하면 난감해지는 건 천화서고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도리어 당할까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러니 소문을 퍼뜨리는 계책은 묘수라 할 만했다.

정녕 서문세가와 청월문이 배후라면 소문은 두 가문을 움츠러들게 할 것이니, 추가적인 피해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흑단이란 조직 또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굳이 찾아가 따져 묻지 않아도 해명의 몫은 서문세가와 청월문에게 던져지는 셈이었다.

총관이 거짓으로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소문에 불과한 것이니 쉽게 무마될 수 있었다.

머리는 차갑게, 행동은 빠르게.

말이 쉽지 이 말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들은 대공자가 머뭇거림 없이 밤을 도와 명령을 내린 것이 만족스러웠다. 정녕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린 천화서고의 대공자가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호위대를 떠나 보낸 후 후공은 종무극과 송화를 불러들였다.

“종무극.”

“네, 대공자님 하명하십시오.”

“너는 총관의 외부저택으로 간다. 총관이 서문세가로부터 받은 두루마리 징표가 있다고 하니, 총관의 심부름으로 가장해 어떻게든 증표를 가져와라.”

“네.”

징표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설명한 후공은 이어 송화를 바라봤다.

“송화, 너는 종무극과 함께 가라. 너의 임무는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저택에서 멀리 떨어져 동태를 살피다가 종무극이 실패하면 혼자 돌아오고, 성공하면 함께 오면 된다. 만약 반시진이 지나도 종무극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땐 종무극이 죽었거나 일이 꼬인 것일 테니 망설이지 말고 돌아오도록. 알겠느냐?”

“네, 공자님.”

두 시진 후.

종무극과 송화가 돌아왔다.

둘 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중 종무극의 낯빛은 최악이었다.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찍어대며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죄송합니다. 총관의 저택에 도착하니 텅 비어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총관이 말한 징표 또한 해당 장소가 어지럽혀져 있고 사라진 뒤였습니다.”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불똥이 자신의 혈육에게 튈까 두려워 종무극은 손을 덜덜 떨었다.

후공이 확인차 송화를 바라보았다.

송화는 자신도 종무극에게 말을 전해 듣고 직접 저택으로 들어가 확인했다면서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면서 분통이 터지는지 씩씩대며 넓혀진 코 평수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후공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자결했다는 말에 일이 성사되었다 싶어 흔적을 지운 것이겠지.’

실망할 건 아니었다.

징표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

무슨 징표든 상대가 부정하면 효력을 상실한다.

한편으로 징표를 숨겨놓은 곳까지 꼼꼼히 파헤쳐 흔적을 지웠다는 건 나름 의미하는 바가 컸다. 총관의 자백에 신빙성이 높아져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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