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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24화 (24/460)

24화. 지난 밤의 교릉은 언제 오는가

이후 며칠.

후공은 명상이란 명목 아래 잠을 아끼고 출입을 삼가며 운기행공에 전념했다.

집중한 건 ‘교릉’의 운용이었다.

서문세가를 상대하려면 ‘교릉’이 필수였다.

하지만 호위대주 천규인을 상대했을 때의 수준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 허허로운 중에 실을 취해야 한다. 상대의 일곱 혈도를 타점하고도 상대가 혈도에 닿았다는 인식을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야 했다.

마치 주무르듯. 그저 스친 것처럼.

그렇게 나흘째 밤.

후공은 교릉의 성취를 시험했다.

뚜드득, 뚜득.

뼈마디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순식간에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근골이 축소되는 속도가 매우 빨라 변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형태 또한 팔 다리, 몸통 할 것 없이 본래 크기에서 거의 삼분의 일 정도로 줄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서너 살 아이보다 작은 키가 되어 있었다.

‘후후, 제법 괜찮군.’

후공은 만족했다. 당장의 모습이야 우스꽝스럽다만.

스스로에게 적용함에 있어서는 변화하는 속도로 성취의 깊이를 측정하는지라, 이 정도면 타인에게 적용시 몸을 매만지는 정도로 일곱 혈도의 점혈이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절학인 은외법(隱猥法)의 점혈을 더한다. 후공에게야 은외법이지만 강호에서는 막연히 ‘후혈’로 불리는 고절한 점혈법이었다.

풍화정에서 윤이 반교인에게 물었던 일명 예약 점혈법.

당시 후공은 순간 이놈이 뭘 알고 묻나 싶어 눈이 휘둥그레질 뻔했다.

후혈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고, 누가 펼쳐낸 것인지도 드러나지 않는 이유라면 간단했다.

점혈 당한 당사자가 어느 시점에 자신이 당한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 혹은 반나절 또는 일식경이 지난 뒤가 될 수도 있다. 그건 시전자의 역량 혹은 의도한 바에 달린 문제.

뚜드드득.

후공은 삽시간에 본래 크기로 돌아왔다.

‘자, 그럼.’

그 밤 후공은 방을 나서 총관에게 향했다.

밤도 깊었거늘 자칭 그림자인 송화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와 뒤따랐다.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요 녀석은 잠을 안 자나?’

총관은 밧줄로 묶인 채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의식만 겨우 붙들고 있을 뿐 축 처져 머리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산송장이었다.

“밧줄을 풀어라.”

“네.”

대공자의 명이다.

호위 둘이 즉시 총관을 묶은 밧줄을 풀어냈다.

밧줄이 풀리자 총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져 갔다. 호위들이 얼른 총관의 몸을 붙잡았다.

“공자님, 다시 거꾸로 매다실 거죠?”

송화가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공이 미간을 찡그렸다.

“넌 잠이나 잘 것이지, 잠옷까지 입고 따라와서 시끄럽게 쫑알대는 거냐!”

“전 공자님의 그림자인걸요.”

“흥, 세상에 어떤 그림자가 그렇게 눈을 예쁘게 반짝이면서 말을 한다는 건지.”

그 말에 송화가 눈을 깜박대면서 입을 쏙 닫았다.

후공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총관의 어깨와 팔, 옆구리를 스쳤다가 등의 척추에 이어 목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일곱 혈도였다.

송화며 호위들이 의문에 차 바라봤다.

대공자가 죽여도 시원찮을 총관의 몸 상태를 걱정하듯 살피며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있으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고 지켜만 봤다.

혹시 이대로 총관을 풀어주거나 치료하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모두의 머리를 스칠 때, 대공자가 돌아섰다.

“다시 밧줄로 묶어라.”

***

다음 날 오전.

“아우들아.”

“네, 형님.”

큰형님의 부름을 받은 윤과 부몽이 공손히 답했다.

윤은 붓을 들고 있었고, 부몽은 먹을 곱게 가는 중이었다. 큰형님이 서신을 보내겠다고 한 터였다.

하지만 둘은 어디에 보내는지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간밤에 꿈을 꾸었단다. 꿈에서 신선 같은 도인을 만났지.”

“와아, 길몽입니다, 형님!”

“큰형님, 신선이라니요, 우리 천화서고가 큰 복을 받을 모양인걸요.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틀림없이 길몽이라 윤과 부몽은 벌써부터 흥분되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후공은 진중하면서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도망쳐!”

“네?”

“그 한마디를 꽥 지르시더니 구름을 타고 신선께서는 떠나셨다.”

“도, 도망치라고요?”

“그래.”

“무엇에서 도망치라는 뜻일까요?”

“서문세가겠지.”

윤과 부몽이 각자 붓과 먹을 내려다봤다.

이내 둘은 눈을 사납게 떴다.

“뭡니까! 겨우 꿈 하나 꿨다고 서문세가에 평화 서신을 보내겠다는 것입니까?”

“큰형님! 이리 당하고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넘어가신다고요? 내내 명상을 하시더니 결론이 고작 이것인가요!”

“어쩔 수 없다.”

큰형님의 목소리가 체념하듯 담담히 흘러나오자 두 아우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니 될 말입니다. 가문을 멸문시키려 했던 놈들입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거다.”

“현실이라고요! 에잇!”

윤이 울화를 터뜨리며 붓을 분지르고, 부몽도 갈던 먹을 바닥에 팽개쳐버렸다. 방바닥이 먹물에 검게 물들어갔다.

윤과 부몽이 소리쳤다.

“형님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고 싶은 겁니까!”

“큰형님은 그렇게 죽는 게 무섭습니까!”

후공은 그런 두 아우를 진정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저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면 다 되는 일.

아니나 다를까, 방금까지 광분했던 윤과 부몽이 지들이 소리치고 다시 지들이 얼떨떨한 표정이 된 채 멍하니 굳어버렸다.

“어…….”

“어어…….”

성질을 있는 대로 내며 그렇게 살고 싶냐고 소리치고 보니까, 눈앞에 있는 사람이 큰형님인 것이다.

가문 내 어둠의 근본.

죽지 못해 살았던 존재.

자살 시도 이백 회를 초월하는 기록 보유자.

그런 큰형님이 앞에 있었다.

죽는 게 무서운 듯이.

꿀꺽.

두 아우가 마른침을 삼킬 때 후공이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나는 좀 살면 안 되냐?”

“아니요. 됩니다.”

“되고말고요. 큰형님, 사셔야죠.”

후공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감히 내게 대들다니. 다 살자고 이러는 건데. 송화야!”

“네, 공자님. 여기 있습니다.”

부르기만 했는데도 송화가 기다렸다는 듯 척하니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서는 공손히 내밀었다.

후공이 미간을 좁혔다.

“뭐냐, 방을 치워라!”

“네? 넵!”

부몽이 다시 먹을 갈았고, 윤은 서신을 작성할 준비태세를 갖췄다.

서문세가 가주 앞으로 보내는 화평의 서신.

그 내용을 한마디 한마디 불러주며 후공은 한 번씩 창밖을 바라봤다.

“될 때가 됐는데…….”

“형님, 방금 말씀도 적어야 합니까?”

“아니다.”

두 아우는 큰형님이 자꾸 창밖을 보는 것이 뭘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처한 상황 때문에 마음이 허해져 그런 것 같기도 해 괜히 서글퍼졌다.

그때였다.

“대공자님!”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공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되었구나.’

확신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안 되나 싶던 근심이 씻은 듯 사라졌다.

“웬 소란이냐?”

“총관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뼈마디가 오그라들고 뒤틀렸습니다. 다리가 뒤로 꺾여 허리 위로 올라가기까지 했습니다. 무섭기까지 합니다. 대, 대공자님, 저희는 맹세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후공은 흐뭇함에 젖었다.

후혈법? 아니 후공에겐 은외법(隱猥法).

교릉이 발현된 것이다.

어젯밤 총관에게 펼쳐놓았던, 그저 매만지는 것으로 보였을 교릉이 예정에 맞춘 시각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걸 밝힐 순 없는 노릇.

후공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밖을 향해 엄히 소리쳤다.

“너희는 아침나절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드는 것이냐! 총관이 왜 오그라들어!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서문세가 가주 집무실.

“제가 안일했습니다.”

대머리 노인이 머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창밖에서 들어온 햇살에 머리의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서문세가의 모사로 백 개의 뇌를 가지기라도 한 듯 계략과 전술에 능해 달리 백뇌(百腦)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서문가주 서문추가 고개를 저었다.

온화한 인상에 따스한 미소가 피어났다.

“허허, 네 잘못일 리가.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된다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란 그렇지 않다. 이번 천화서고 일은 나조차 예상치 못한 일. 천화서고 첫째가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이는 거의 천재지변이라 할 만한 일이잖느냐. 천화서고 건은 그들의 처신이 빠르며 바짝 엎드리니 이쯤에서 덮도록 한다.”

“네.”

“큰 녀석을 불러오라.”

잠시 후 가주의 집무실에 서문세가 대공자가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천화서고 쪽에서 서신을 보내왔다. 직접 대면하고 불미스러운 소문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다는구나. 이번 일은 네가 마무리짓거라. 엄히 추궁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고해야 할 것이나, 지나치게 몰아세우진 말고 적절한 선에서 포용해 어려워하면서도 널 의지하게 만들어라.”

“네, 그리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따로 외부에서 만날 건 없다. 본가로 초대하여라. 천화서고의 첫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또 얼마나 달라진 건지 나도 보고 싶구나. 그 외 주변 명문가 자제들도 함께 초대하는 것도 좋겠다. 간단히 연회를 베풀어 자연스럽게 해명함은 물론이고 동시에 본가의 위세를 드러내거라.”

“네, 아버님.”

서문세가 대공자 서문웅이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

그로부터 사흘.

서문세가의 답신이 천화서고에 도착했다.

서신 내용을 확인한 후공은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본래 후공이 보낸 서신은 외부에서 따로 보자고 청하였는데, 답신이 내부 초청으로 바뀌어 돌아온 것이다.

거기에 흡족함이 더해진 건, 부근의 인망 높은 가문의 자제들까지 초청했다는 점이었다. 교릉을 펼침에 있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터.

서문세가가 의도한 바야 모두의 앞에서 수모를 안기려는 것일 테지만 그 점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후공의 내심이야 어떻든 천화서고는 이 서신으로 인해 천하제일 성토대회가 개최되었다.

먼저 노가주.

“어찌 명문가라는 서문세가가 이리도 파렴치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공손한 표현들은 도대체 무엇이고! 변명은커녕 아주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이라니!”

이어 윤과 부몽.

“할아버지, 서문이들은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놈들의 행태가 사람의 탈만 썼지, 아주 짐승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서신을 작성한 것도 가주가 아니고 큰아들이라니요!”

“힘이 있으면 이래도 되는 건가요! 가진 권세와 힘으로 패악질을 덮어버리고, 진실은 거짓이 되게 하는 뻔뻔함이라니요. 할아버지, 정녕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단 말입니까!”

두 아우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콜록, 콜록…… 고얀 것들…… 콜록…….”

몸이 제법 회복되어 거동이 가능해진 숙부도 거칠게 콜록대는 것으로 분노를 표했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입에서 불을 뿜는 상황.

후공도 물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천벌 운운하면서 열심히 씩씩거려 주었다.

그러다 천하제일 성토대회가 다들 끌어안고 울먹거리며 어깨를 다독일 분위기로 흐르자 후공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답답하니 밖으로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

후공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걸음을 옮기니, 송화와 네 호위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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