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은신을 꿰뚫어보다
저잣거리를 느긋이 거닐자니 송화가 쫑알거렸다.
“공자님, 서문세가에 안 가시면 안 돼요?”
“넌 걱정되나 보구나.”
“네, 벌써부터 서문세가 대공자가 크게 곤욕을 치를까 걱정돼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요.”
‘기특한 녀석.’
송화가 나름 기분을 풀어주려는지 농담을 던졌다.
기특하게 여긴 내심과 달리 후공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넌 그 녀석이 맘에 드나 보구나. 눈이 그리 낮아서야 어디에 쓸고.”
“헤헤, 근데 공자님 진짜 안 가시면 안 돼요? 여럿을 초대했으니 험한 일은 없겠지만, 수모를 당할 그림이 딱 그려지잖아요.”
“엉뚱한 소리 말고 맛집이나 찾아라. 넌 언제까지 날 걷게 할 셈이냐!”
“넵!”
수모를 당한다라.
송화의 말을 듣자니 후공은 문득 독고세가가 떠올랐다.
명문가라고 해도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곳은 있게 마련이다. 은폐하고 치장하여 명문가라는 그럴싸한 겉모습을 갖춘 곳들이 허다하다.
청월문의 반교인처럼 잘 자란 아이들도 있지만, 명문가의 자제들 중에는 망나니들도 많다. 어릴 적부터 떠받들리고 가문의 위세는 높아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깔보는 성향이 자신도 모르게 굳어져 망나니가 되는.
그렇게 장성한 망나니의 욕망이 능력을 넘어설 때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십여 년 전 독고세가의 이 공자 놈은 자신이 후계를 이으려는 욕심에 형을 몰래 독살하고 아버지를 감금했다가 일이 어그러져 끔찍한 최후를 맞기도 했다.
독고세가의 일은 외부로 드러났던 것일 뿐, 권세가의 내부라고 늘 태평할 리 만무하다. 고작 일 년 전만 해도 황보세가는 일명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후계 쟁투가 있었고. 그 외에도 명망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세를 확장하려 피를 뿌리는 일은 흔했다.
“공자님, 이곳은 동파육으로 이름 높고, 저쪽은 유폭하가 끝내주는 곳이래요.”
“너는 뭘 먹고 싶으냐?”
“음……. 저는 유폭하요.”
“좋다. 그럼 동파육으로 가자.”
송화의 입이 부루퉁 나팔이 되었다.
그렇게 일행이 반점으로 올라갈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개방의 두 거지.
- 사형, 천화서고 대공자 녀석 아무리 봐도 허당 같지 않아요?
- 꿀꺽.
대답 대신 중년 거지의 목젖이 출렁였다.
-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뭘 처먹고 있어요?
- 침 삼켰어.
- 맛나겠네. 그럼 나도. 꿀꺽.
중년거지와 젊은 거지가 나란히 침을 삼키며 배를 채우는 와중에도 시선은 한곳에 머물렀다.
- 근데 저놈은 왜 이 층 창가에 앉아서 동파육을 뜯는 거냐. 부럽다. 부자는 얼마나 좋을까. 먹고 싶은 대로 다 처먹고.
- 그러게 말이에요. 사형은 거지새끼인데.
- 어째 너 은근히 나 욕한 듯?
- 아뇨, 그건 사형의 자격지심입지요.
개방의 두 거지는 벽 모퉁이에 기대 앉아 있었다.
거기로부터 약 20여 장 너머에 반점 건물이 있고, 이 층 창가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딱 한눈에 보기 좋은 장소.
널브러진 두 거지 앞쪽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녔지만 아무도 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니, 눈길을 줄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개방의 잠영술인 궁잠형허술(窮潛形虛術)로 은신하여 주변 풍경과 동화된 탓이었다.
대화도 전음.
누구도 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냄새만은 어쩔 수 없는 탓에, 바로 앞을 지나는 이들이 어디서 고린내가 나지 않냐며 코를 찡그릴 뿐이었다.
- 너 진짜 욕하면 내 손에 죽어. 돌려 욕해도 죽어.
- 저희 집 가훈이 ‘욕하면 내 손에 죽어, 라고 말하는 자를 만나면 죽여라’인데, 뭔가 공교롭네요.
- 너 이 새끼, 가훈이 아주 수천 개여 아주. 오늘 확 대를 끊어버릴라.
- 흐흐, 근데 천화서고는 이대로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 걸까요?
- 그럼 난 아주 실망하겠지.
- 실망할 건 뭔가요? 청월문은 관련 없는 듯하여 빠졌다 해도, 남은 게 서문세가인걸요. 책벌레들이 대적하기엔 벅찬 상대란 말입죠.
- 천화서고가 보통 책벌레냐? 천재들이잖아. 대가리가 좋은 친구들이라고! 그럼 그 좋은 대가리로 뭘 해도 하겠지.
- ……
돌아오는 전음이 없자 중년 거지가 사제를 향해 인상을 팍 찡그렸다.
- 아니 이 쌍놈의 새끼가, 지엄하신 사형이 말씀하시는데 한눈을 파네?
- 사형, 그게 아니고요.
- 아니긴 뭐가!
- 저길 보세요.
- 응?
- 천화서고 대공자가 우리를 보고 있는데요?
- 뭐?
뭔 개소리인가 하고 객잔 이 층을 올려다 본 분타주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어…….”
그냥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자신들을 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너무 놀라 전음을 하는 것도 잠시 잊고 말았다.
- 뭐냐 저거. 웃는다?
- 책벌레가 웃네요.
원래 이렇게 자신들을 막 쳐다보고 그러면 안 된다. 은신이란 게 이렇게 쉽게 꿰뚫리는 것이 아니니까.
개방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잠영과 은신에 능하고 또 발전해온 개방이고, 그 자부심도 남달랐다.
“공자님, 뭘 보고 웃으시는 거예요?”
그때 창가 자리 맞은편에 앉은 송화가 주인의 표정을 보고 궁금한지 창밖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주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송화는 주인이 그냥 기분 좋은 상상을 하시나 보다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마칠 쯤,
“송화야.”
“네, 공자님.”
“계산할 때 이 집에서 가장 비싼 술 한 병을 사도록 해라.”
“이 집에서요?”
“그래.”
송화는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서고에 가면 진귀한 고급술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왜 주인이 이곳에서 굳이 싸구려 술을 사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후공이 호위들과 반점을 나오는 중에 거지들은 난리도 아니었다.
- 사형, 내 팔뚝 좀 보십시오. 와아, 시발 아까 대공자 녀석이 창 너머로 쳐다보는데 소름이 어찌나 돋던지요. 오돌토돌 닭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대로 튀기면 닭튀김이라구요!
- 난 이미 껍질이 너덜거린다만.
- 아니 저 인간, 막 우울증 엄청나게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우울하면 내공이 쌓이는 비급이라도 익혔을까요? 와나, 천화서고 대공자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니……. 은신을 볼 정도면 저랑도 맞짱 뜨겠는데요?
- 미련한 놈아, 그게 중한 것이 아니여.
어느새 반점에서 나와 저만치 멀어져가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보며 중년 거지가 미간을 찡그렸다.
- 그럼 뭣이 중한데요?
- 사제야.
- 왜요?
- 평생 생각 같은 거 안 하고 살래? 네놈 머리는 눈깔 수납장이지?
- 그니까 뭐가 중하냐고, 사형아!
- 따라오기나 해라. 사제 새끼야!
후공이 외곽을 빠져 산의 초입에 진입했을 때였다.
“거기 멈추시구랴!”
난데없는 고함에 송화를 위시한 호위들이 순식간에 후공을 감싸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이내 몰골이 추레한 두 거지인 것을 보고는 긴장을 풀었다.
송화가 나섰다.
“거지님들,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여.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그냥 훅 가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거지님들, 사람을 착각하셨나 봐요. 저희는 거지님들을 이제 처음 보는걸요.”
“처자는 가만있어. 범 공자, 말해보게.”
‘범 공자라니?’
송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인은 최근에야 바깥출입을 시작했거늘, 거지들이 익히 주인을 알고 있는 듯하니 경계심이 부쩍 치솟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방 분타주 취운개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목을 벅벅 긁었다.
그는 머리를 눈깔 수납장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았기에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대공자가 무공을 익힌 것도 놀라운 일이나, 그보다는 더 놀라운 건 대공자가 자신들을 향해 무공을 익혔노라고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은 두 분 개방의 고수분들과 안면이나 익혀두려 한 것입니다. 조만간 도움이 필요할 듯싶으니 그때 다시 기별하겠습니다.”
“헐…….”
두 거지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로써 명백해진 것이다.
자신들이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늘, 동시에 관찰되고 있기도 했다. 유폭하 대신 동파육을 선택한 것도 딱 내려다보기 좋은 위치 때문이리라.
놀란 건 송화를 비롯한 네 호위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들어보니 이미 교감이 오간 상태로 보이는데, 도대체 언제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또 밖을 나간 적이 손에 꼽는 대공자가 어찌 이 이 거지들을 안단 말인가.
“혹시 자네 나랑 구면인가? 천화서고가 대대로 굉장한 천재들이 났다고 해도, 이거 너무 심하잖아?”
분타주 취운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정황만이 아니라 어째서인지 이 책벌레가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알다마다.’
후공이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취운개는 개방 방주 곤오신개의 제자.
곤오신개가 데려와 두어 번 본 적이 있는 후공이었다.
방주의 대제자답게 취운개는 차기 방주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유능했고 무재도 있었다.
무림맹에서 첫 대면 때 취운개는 뚱뚱한 몸이 만만해보였는지 위아래로 훑어보다 자기와 누가 빠른지 달려보지 않겠냐고 말한 덕분에 그 자리에서 곤오신개에게 반 죽어나갔었다.
“우리가 구면입니까?”
천화서고 대공자가 되묻는 말에 취운개가 갸웃거렸다.
“아니지.”
“그럼 아니겠군요.”
“흐흐, 거참.”
“그럼 또 뵙지요. 변변치는 않지만, 빈손으로 보내드리기 뭐해서 술 한 병을 준비했습니다.”
송화가 들고 있는 술병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주인을 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송화가 의문을 접어두고 냉큼 달려가 술병을 건넸다.
술병을 받아든 취운개가 껄껄 웃었다.
“어쩐지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난 개방 분타주 취운개라고 하네.”
곁에 젊은 거지도 자기를 소개했다.
“어이~ 난 은앙개야. 근데 너 왜 술 한 병만 샀냐? 부자면서?”
***
은은하고 맑은 백단향이 방 안에 퍼진다.
윤과 부몽은 선물 포장을 끝내가고 있었다.
선물을 백단목으로 만든 상자에 잘 넣고, 푸른 비단포로 잘 여몄다.
이는 내일 큰형님이 서문세가로 가져갈 선물이었다.
마음 같아선 무슨 선물이냐 싶지만,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문과 가문의 교류요, 얽힌 사안도 풀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또 다른 명망가의 자제들도 거창하진 않아도 작은 선물을 준비해올 것이 아닌가.
“형님, 괜찮을까요?”
비단 보자기를 내려다보는 부몽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괜찮다마다. 넌 우리가 서문세가에 금궤라도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요.”
“백단목만 해도 진귀한 거다.”
부몽이 머리를 긁적였다.
둘은 시녀를 불러냈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곤 아니라면서 그대로 돌려보냈다. 두 형제는 직접 움직여 내일 출발할 마차에 선물을 넣어두었다.
달빛이 내리는 밤을 천천히 거닐었다.
씁쓸함이 딛는 걸음만큼이나 두 형제의 마음에 쌓여갔다.
의연해 보이나 큰형님에게 이 밤은 길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낸 것을 넘어 어느덧 가문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된 큰형님. 딱히 걱정하는 기색이나 표현은 보이지 않았어도, 어디 걱정이 없을까. 어른의 근심은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마음 여린 부몽의 눈시울이 붉어져 갔다.
윤이 어깨로 툭 건드렸다.
“녀석아, 다 잘될 것이니 청승 떨지 마라. 어릴 적부터 큰형님이 어디 보통 분이었냐. 그리고 좋은 소식도 있지 않더냐.”
“네?”
“주양 형님께 온 서신을 벌써 잊은 거냐?”
“아!”
부몽이 그제야 떠올리고는 웃었다.
주양 형님!
단 한 명뿐인 큰형님의 절친.
강북 제일의 갑부로 지닌 돈을 쌓는다면 태산보다 더 높이 쌓을 수 있다는 은하전장의 둘째. 마음이 곧고 심지가 굳건하며 매사 진지해 농담이 통하지 않는 분이었다.
어둠의 나날 속에서도 큰형님과 서신을 교환할 정도로 우정이 깊었는데, 그런 주양 형님이 조만간 온다는 소식이 오늘 도착한 것이다.
“큰형님께는 계속 비밀로 하는 건가요?”
서신은 큰형님이 아닌 둘째 형님 앞으로 보내진 터였다.
“당연하지. 너도 입조심해라. 주양 형님이 서신에 신신당부하지 않았느냐.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고 말이다. 괜히 김새게 마라. 그럼 무슨 재미가 있겠어.”
“흐으, 그럴게요. 벌써부터 기대되는걸요.”
부몽이 근심은 어디로 쫓아냈는지 히죽거렸다.
서문세가의 일만 어찌 마무리되면 조만간 기쁜 날도 올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