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악인의 면모
칠현금의 선율이 서문세가를 휘돌았다.
서문웅은 음률에 맞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음악은 모른다.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었다.
그저 경쾌하네, 구슬프네, 애절하네, 정도만 알 뿐이었다.
무가에서 태어난 그의 관심은 오직 무공이었다.
그럼에도 듣는 것은 좋아했다.
특히 지금 이곳 서향정에서 칠현금을 타는 의동생 표려찬의 연주를 좋아했다. 듣는 것만이 아니라, 표려찬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널 보면 난 왜 이리 힘이 나는 것이냐.’
표려찬을 보고 있으면 온몸에 활력이 샘솟는 서문웅이었다.
아마 그건 의형제를 맺게 된 그때 그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리라.
3년 전. 려찬의 가문 표가장은 괴인들의 습격을 당했다.
서문세가에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장주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은 뒤였다.
그때 장주의 막내아들 표려찬은 외부에 있던 터라 구사일생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보와 재물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장원도 불타 재건은 어려웠다.
하루아침에 부모와 형제를 잃고 가문이 풍비박산 난 표려찬은 망연자실이었다.
그때 서문세가가 표려찬을 거두었다.
서문웅은 의형제의 연을 맺었다.
려찬이 서문세가를 은인으로 여기고 고마워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려찬, 언제 들어도 멋진 선율이다.”
곡조가 마쳐지고 감탄하니 표려찬이 일어나 극진히 예를 갖췄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솔직히 표현하자면, 나는 너의 연주를 들을 때면 전율을 느낀단다.”
“하하, 형님도 참. 너무 띄우십니다.”
“이제 곧 손님들이 도착할 시간이구나. 그때까지 멋진 연주를 부탁하마.”
“물론입니다.”
다시 표려찬이 칠현금을 당겨 튕겨내니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서문웅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은 잘 모른다.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병신 새끼.’
저 머저리는 가문을 멸문시킨 이에게 감동하고 형님이라며 읍소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표려찬을 볼 때마다 활력이 솟아난다. 힘이 없으면 저렇게 되고 만다는 걸 떠올리면서 더 강해지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온몸에 전율이 끌어오른다.
‘그래, 이번에는 천화서고다.’
먹물 가득한 서생을 아우로 삼아야 할 때다.
***
서문세가 앞으로 마차들이 줄지어 당도했다.
초대받은 명문가의 자제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화기애애한 인사가 오갔다.
“하하하하!”
천화서고 대공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반교인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니 정말 대공자께서 뿌르뿌르라는 걸 말씀하셨다고요?”
“네, 제가 그땐 오해해 장문인께 실례를 범했지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버지가 거처에서 한 번씩 따라해 보신다며 뿌르뿌르하시니, 왜 자꾸 저러시지 하고 걱정했지 뭐예요.”
은근 짓궂다며 반교인이 눈을 곱게 흘겼다.
이번 서문세가의 초청으로 반교인뿐 아니라 염화각의 장예, 백화장의 묘가령도 다시 볼 수 있었다. 다들 반가움을 표했지만, 누구보다 더 환한 얼굴로 친밀함을 보인 건 반교인이었다.
당연히 후공에게 첫 대면인 이들도 있었다.
“우하하하, 그 유명한 천화서고 대공자를 이리 보게 됩니다. 나는 대륙전장의 왕소한이올시다.”
“오구문의 목궁이라 하오.”
“저는 철금회의 단강무입니다.”
인사말만으로 성향이 드러났다.
이들은 범항의 기억 어디에도 없어, 후공으로선 말 그대로 첫 대면이었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부근 세력에 대해 윤이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인지했고, 이후 반교인에겐 더 자세한 정보를 들었던 터.
녀석들과 일일이 예를 갖추어가면서 후공은 철금회의 단강무에 흥미를 느꼈다.
철금회는 쇠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가문.
단강무는 철금회 아니랄까 봐 과묵한 인상에 얼굴이 각지고 말투도 무뚝뚝했다.
철금회라면 후공도 익히 알고 있었다.
작은 대장간으로 시작했지만 우연찮게 기회를 잡아 근 이십 년 만에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된 가문.
처음 화산파 장로 능량이 검을 의뢰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 화산파는 철금회에서 만든 검을 일대 제자들에게 하사한다고 했다.
후공이 알게 된 것도 화산의 능량을 통해서였다.
능량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며 ‘맹주, 이 검을 한번 보십시오. 가히 신검이라 할 만하답니다’라고 떠들어대서 검을 살펴보니 과연 예사롭지 않았다.
그 뒤 능량이 떠벌린 건지 철금회주가 맹으로 서신을 보내왔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맹주께 검을 진상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후공은 이미 세 자루의 애검이 있는 데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검을 휴대하지 않은 지 오래였기에 웃고 말았는데, 이곳에서 철금회와 연이 닿은 것이다.
기묘하다 싶어 단강무를 보며 미소를 지을 때, 껄껄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범 형은 제가 생각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군요. 음울한 눈빛에 분위기나 잡고 있겠지 했는데, 세상 태평한 모습을 보자니 뒤통수가 얼얼합니다그려.”
말이 거침없고 목소리가 높았다.
왕만두같이 생긴 대륙전장의 왕소한이었다.
큰 재력을 지닌 대륙전장의 아들답다고 해야 할까 보다. 악의는 없어 보이는데 입에 거름망이 달려있지 않았다.
‘요주의 인물로 생각했더니만……’
막상 왕소한을 대면하고 보니 기우였다.
얼굴이며 몸매가 통통해 왕만두가 연상되어, 어째 보고 있기만 해도 푸근한 녀석이었다.
“왕 형, 그 음울한 눈빛이란 건 어떤 것입니까?”
“음울 말입니까? 흐음……. 이런 것이겠죠.”
즉시 왕소한이 음울한 표정이란 걸 지어 보였다.
후공은 왕만두의 음울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이놈은 처량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인가.
제 딴에는 한다고 하는데 그저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을 뿐이었다.
지켜보는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왕소한은 머쓱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좋아진 것이 즐거운 모양인지 깔깔대며 웃어댔다. 사람 눈치나 평가 따윈 신경 안 쓰는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왕만두가 변수가 될 일은 없겠고…….’
대륙전장이 신경 쓰였던 건, 반교인으로부터 서문세가 대공자와 대륙전장 딸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응당 서문세가와 각별하여 적대심을 보일 줄 알았건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도리어 혼사 전이니 대륙전장의 딸에겐 행운이라 할 만했다. 하늘이 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냉소가 터져나왔다.
“흥! 천화서고의 뻔뻔함이란.”
누군가 하고 보니 오구문의 목궁이었다.
비쩍 마른 몸에 콧방귀를 뀌더니 입매를 보기 싫게 축 늘어뜨렸다.
“천화서고가 이렇게 염치없는 곳이었다니, 놀랐습니다. 범 형은 적어도 우울한 척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피면구를 쓴 것도 아니고 웃는 낯짝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목궁이 눈까지 희번덕거리며 도발했다.
다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 공자, 좋은 자리에서 갑자기 왜 그러나요. 말씀이 심하시네요!”
반교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목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깨를 으쓱했다.
“반 소저, 내 말이 심하단 말입니까? 심한 말이 어디 있었습니까? 이번 일은 어떻게 봐도 천화서고에서 소문을 낸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정황인데 대공자라는 자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희희낙락이니, 난 이제껏 이보다 뻔뻔한 사람을 본 적이 없소이다.”
“정황은 누구 멋대로 정황이죠?”
“거참 희한하네.”
목궁이 실실거렸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아차릴 일을 반 소저만 모르는군요. 청월문도 피해자라고 생각하오만 반 소저는 전혀 화가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혹시 천화서고에서 보물이라도 줍디까? 아니면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연심이라도 품고 있는 겁니까?”
“목 공자,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반교인이 쌍심지를 켰고, 이내 장예와 묘가령도 나서 목소리를 높이며 목궁을 나무랐다.
그럼에도 목궁은 여유만만이었다.
“워워, 다들 고정하십시오.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소를 머금고 몇 마디를 더 지껄여대니 이내 분위기가 어지러워졌다.
후공은 내심 혀를 찼다.
‘오구문이라…….’
반교인에게 듣기로 오구문은 ‘서문세가를 추종하는 문파’라고 했거늘, 설명이 잘못되었다.
오구문은 ‘서문세가의 개’였다. 따로 서문세가로부터 언질을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주인은 개들에게 짖어라 마라 굳이 말하지 않는다. 개들이 눈치껏 짖으면 주인은 뒤늦게 느긋이 나타나 개를 꾸짖는 시늉을 할 뿐.
목궁이 본분을 따라 충실히 짖고 있긴 해도, 후공으로서는 계속 짖게 둘 수 없었다.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하지만 몽둥이도 없고, 더욱이 이 자리에서 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공은 언쟁이 격화되는 사이로 끼어들어 반교인과 장예 등을 말렸다.
“그만하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니요, 이리 예의 없이 구는 경우가 어딨답니까!”
“장 형의 마음 고맙습니다. 반 소저, 묘 소저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쯤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보니…….”
이어 후공은 목궁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늘 목 형이 제정신이 아닌 듯합니다. 분명 뭔가를 잘못 드셨을 테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 귀한 자리에서 목 형이 개처럼 짖어댈 리 있겠습니까. 이런 날 잘못하면 물립니다. 그럼 약도 없지요. 그러니 아예 오늘만은 상대를 안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뭐라고? 개…… 개? 너…… 지금…….”
목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동시에 대륙전장의 왕소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 개라고요? 비유가 화끈하십니다. 역시 배우신 분은 달라도 다릅니다. 이렇게 유쾌하게 먹여버리는 겁니까! 으하하하하하하하!”
왕소한의 파안대소는 오구문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럼에도 목궁은 대륙전장을 감히 무시하기 힘든지, 왕소한을 노려만 볼 뿐 반발하지 못했다.
이미 반교인을 비롯한 장예등도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는 모습이었다.
‘젠장.’
목궁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로선 서문세가에게 잘보이려 초장부터 천화서고의 기를 꺾어놓고자 했던 것인데, 도리어 꼴만 우스워지고 만 것이다.
일행은 연회가 베풀어질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바깥에 마련된 긴 식탁에 자리를 잡으니 시녀들이 차를 내왔다. 차를 음미하며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그때 불쑥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들 오셨군요. 환담을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돌아보니 대머리 노인이었다.
노인이 미소 지으며 후공 쪽을 바라봤다.
“천화서고 대공자께서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연회 전에 소주께서 먼저 뵙고자 하십니다.”
소주라면 서문세가 대공자를 말함이다.
바라던 바여서 후공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안내해주십시오.”
후공은 백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개가 나직이 짖었다.
“후후, 지금이야 의기양양이다만 잠시 후 어떤 얼굴을 하고 나올지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