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7화 (27/460)

27화. 긴장되냐고?

후공은 한 귀로 흘리며 백뇌를 따라 걸었다.

그러는 중에 후공은 한 번씩 눈을 찡그렸다.

백뇌는 눈치 빠르게 그 변화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의 머리는 비상해 백 개의 뇌를 지녔다는 칭호가 괜히 생긴 것이 아닌 것이다.

“혹여 공자께선 긴장이 되시는지요?”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심장은 뛰는 것이며, 두려움은 막기 힘들다.

위로하듯 진중한 물음 속에 비웃음이 숨어 있음을 후공이 모를 리 없었다.

‘이놈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건가.’

후공은 걸음을 멈추고 백뇌를 노려봤다.

번쩍, 번쩍.

머리에 뭘 발랐는지 아까부터 백뇌의 대머리가 햇살을 반사해 눈을 찔러오고 있던 터였다. 낮에 다닐 때는 벙거지라도 쓰고 다닐 것이지, 이놈의 자식은 민폐인지도 모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제가 긴장해야 할 일이 있던가요?”

“허허, 제가 잘못 보았나 봅니다. 아까부터 눈을 찡그리셔서.”

“햇살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찌 된 게, 하늘에 해가 두 개 떠 있는 것 같군요.”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너는 해가 하나여서 좋겠다.

강호에 이 정도로 번쩍이는 놈이 하나 있긴 했다.

원광자.

녀석은 원래 머리숱이 많은데 억지로 머리를 밀고 다녀, 낮이건 밤이건 여간 번쩍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경공이 뛰어나 인간 전서구로 써먹기도 했는데, 멀리서 뭐가 번쩍인다 싶으면 원광자였다.

한번은 ‘원광자야, 너는 머리를 기르는 것이 어떠냐’라고 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이래야 세 보이고 성깔도 있어 보여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후공은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서 원광자의 머리를 열어볼 뻔했다. 도대체 강호에 몇이나 원광자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패지 않아서인지 녀석은 꿋꿋이 대머리를 고수했다.

잠시 후, 백뇌가 서재 문을 열어주며 머리를 숙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후공이 안으로 들어가니 서문웅이 일어나 반겼다.

격식을 갖춘 인사말이 오가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시녀가 내온 송엽차의 솔향이 퍼져 가며 마음에도 없는 가문의 안부와 날씨 등의 대화가 오갔다. 또 간헐적으로 가식적인 미소가 몇 번 떠돈 것도 잠시.

서서히 서문웅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제 시작인 모양인 게로군.’

후공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런 식일 테지.

- 불쾌했다.

-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 갔다.

- 소문을 낸 건 천화서고가 아니냐.

- 용서하기 힘든 사안이다.

등등의 준비된 말들을 서문웅은 쏟아낼 터.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한 것인지, 아니면 늘 해오던 것이라 어느덧 몸에 익은 건지 서문웅의 싸늘한 표정은 제법 그럴싸했다.

그럴싸하단 이유로 이 얼굴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표정을 바꾸는 방법은 간단했다.

후공은 미소를 지으며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서문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까지 떠올렸던 싸늘함 같은 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총관을 보내겠다고요?”

“물론입니다. 총관의 세 치 혀가 서문세가의 명성에 흠집을 냈으니 마땅히 서문세가의 처벌을 받아야지요. 혹시 곤란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워낙 뜻밖의 말인지라 놀랐습니다.”

놀라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상 못 했던지 서문웅은 표정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 입술을 핥으면서도 핥았다는 것을 모를 정도. 온통 압박하고 추궁하려는 생각에 몰두해 있던 차에 가히 허를 찔린 것이다.

하지만 서문웅 입장에서 이런 놀람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환영이었다.

총관이 어떤 존재인가.

서문세가에게 있어서 앓던 이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인.

무시해도 되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총관만 깔끔히 제거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딨겠는가.

‘천화서고 놈들 도대체 어느 정도로 겁을 먹은 거지?’

총관을 건네겠다는 건 증인을 확보하고 있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환심을 사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서문세가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한편, 이번 일을 조용히 묻고 가고 싶다는, 살려달라는 천화서고의 간청이다. 후후, 과연 머리 좋은 놈들답게 굽신거리는 수준도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저희 쪽에서 심문을 한다고 했습니다만 총관의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문세가에서라면 총관이 버티지 못하고 진정한 배후를 자백할 테지요. 본래 저희가 해야 할 일을 서문세가에 떠넘기는 일이 되었습니다만, 부디 사양치 마시고 어려운 일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일이라니요. 천화서고가 본가의 체면을 이리 세워주실 줄 몰랐습니다. 사실 본가의 어른들께서도 총관을 소환해 죄를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던 차였답니다.”

기분이 좋아진 서문웅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천화서고가 총관의 입을 못 열었겠는가.

다 알면서 하는 말인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문웅은 몸에 전율이 일 만큼 기분이 좋았다.

‘병신 새끼.’

천재적인 두뇌를 지녔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 좋은 머리를 그저 조아리는 데 사용하며 살려 달라고 구걸하고 있을 뿐인 것을.

“그럼 저는 연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대로 총관의 소환을 준비해, 하루 이틀 뒤 도착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리 빨리 말입니까?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쇠뿔도 단김에 뽑아야지요.”

“하하하, 그 속담이 이렇게 쓰인단 말입니까.”

서문웅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정녕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서문세가와 천화서고가 더욱 긴밀한 우애를 가진 관계가 될 터. 그 시작점으로 저는 범 형과 의형제의 연을 맺고자 하는데, 어떠십니까? 제 마음을 받아주실는지요?”

후공은 멍해지고 말았다.

‘이놈이 사람인가?’

천화서고를 피로 물들이려 했다는 사실은 서로 간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거늘, 의형제라니!

게다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하하, 의형제라니요. 이거 너무 영광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보잘 것 없는 천화서고의 범부가 그럴 자격이나 되겠습니까.”

“어허, 범 형은 어찌 그리 말씀을 서운하게 하십니까. 자격이라니요. 말씀도 참.”

서문웅이 마치 여인처럼 눈웃음을 치며 흘겼다.

‘죽일까?’

후공은 계획이고 뭐고 순간 살심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아니다, 아니야.

후우, 후우…….

이렇게 쉽게 죽일 순 없는 일.

무엇보다 여기서는 뒷감당이 안 된다.

“범 형, 눈이 빨갛습니다.”

“하하, 제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 눈이 붉어집니다.”

“하하하하, 제 제안이 싫지만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솔직히 저도 서두른 감이 없진 않지요. 그럼 일단은 총관의 일을 정리한 후 의형제 건은 다시 이야기합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범 형은 제 마음속에선 이미 형제라는 사실을요.”

“하.하.하.하!”

***

“오늘같이 기쁜 날은 축배를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

“두 분 소저께서도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요?”

“그럼요.”

“두 잔도 문제없답니다.”

연회석의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기다리는 동안은 다들 태연한 척했지만 걱정하고 있었던 터였다. 특히 오구문의 목궁이 ‘천화서고의 천재의 얼굴은 아주 죽상을 하고 나올 것이다’, ‘썩은 얼굴이 어떤 것인지 곧 보게 될 테니 기대하라’, ‘연회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것이다’라는 식으로 저주를 쏟아낸 탓에 신경이 곤두섰었다.

하지만 웬걸.

서문웅의 얼굴이 더 이상 밝을 수 없을 만큼 화사하고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친근하게 구는 모습으로 연회석에 나타나니, 목궁의 얼굴만 상한 생선처럼 썩어갔을 뿐 모두가 한껏 기뻐했다.

특히 서문세가로 총관을 이송하기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는 남아있던 일말의 의문이나 불안도 모두의 머리에서 날아가 버린 터라, 오가는 술잔마다 웃음꽃이 피었다.

“모두 멈추십시오!”

우렁찬 목소리가 떠들썩한 분위기를 압도했다.

돌아보니 대륙전장의 왕소한이었다.

의문에 찬 눈길에 왕소한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강호에 몸담고 있다는 분들이 어찌 이리도 멋이 없단 말입니까. 축배의 자리에서 밋밋하게 환호만 지르고 말 겁니까?”

“그럼 왕 형께서, 밋밋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베풀어주십시오.”

장예의 말에 왕소한이 과장되게 거드름을 피웠다.

“흠,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 하는 겁니다. 술맛을 돋우기 위해 각자가 탄성이 터져 나올 만한 눈요깃거리를 하나씩 선보이는 것이지요. 무공도 좋고, 연주도 좋고, 춤도 좋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보물도 좋겠습니다. 이런 건 원래 일일이 설명을 하고 하는 게 아닌데 다들 모르는 듯하니, 내가 오늘 특별히 알려드린 겁니다. 에헴~.”

왕소한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마 하고 먼저 나선 건 염화각의 장예였다.

묘가령에게 잔을 들고 있게 하고 3장(약 9미터) 정도 떨어져 섰다.

장예가 술병을 오른손에 쥐고 몇 번 빙글빙글 돌리다 손목을 챘다. 그러자 한 줌 술이 술병에서 빠져나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묘가령의 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 이거 정말 신통방통합니다.”

“염화각의 비도술(飛刀術)이 일품이라더니, 술을 따르는 솜씨 또한 대단합니다.”

“거리도 거리지만, 어찌 딱 한 잔에 맞는 술만 튕겨내고 또 흘리지도 않고 담아낼 수 있단 말입니까.”

솜씨가 제법이어서 후공도 절로 흐뭇해졌다.

장예도 장예지만 묘가령의 솜씨도 훌륭했다.

원래 장예의 술방울은 튕겨져 절반은 넘쳐흘러야 했는데, 묘가령이 아무도 모르게 기로 감싸 튀어 오르려는 술을 잔에 가두었던 것이다.

묘가령은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장예를 향해 연신 찬사를 보내고 있으니, 어린 나이임에도 어른스러운 면모였다.

그 다음 나선 것은 오구문의 목궁이었다.

목궁이 술병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자니 이내 부글부글 소리가 나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심에서 일으킨 열로 술을 끓게 한 것이다.

왕소한이 술잔을 내밀어 받으면서 뜨겁다고 요란법석을 떠니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다지 대단한 재주는 아니었기에 장예 때만큼이나 큰 환호는 없어, 안 그래도 많이 썩어가던 목궁의 얼굴이 더욱 떨떠름해졌다.

이어 반교인도 술병으로 재주를 보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병목을 잡고 오른손은 검결지를 맺더니 마치 점혈하듯 술병을 연달아 빠르게 두드렸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술병의 바닥을 톡 하고 올려쳤다.

그 순간 술이 차례대로 총총총 세 줄기가 튀어 올라 허공에서 세 차례 폭죽 형태로 터졌다.

“오오오! 한낮에 폭죽에 취합니다. 술병에 점혈을 하다니,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놀랍습니다. 청월문의 점혈법이 이렇게 신묘했습니까?”

“왕 공자께 감사해야 할 것 같아요. 덕분에 이런 멋진 구경을 보게 되었잖아요.”

“묘 소저, 제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왕소한이 껄껄 웃자, 이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덕분에 찬사와 환호 속에 부끄러워하던 반교인에게 머물던 시선이 덜어졌다.

이어지는 차례는 서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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