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천상의 손길이 서문세가에
서문웅은 술 한 방울을 검 끝에 매달고 검무를 추어 찬사를 받았다.
묘가령은 한잔 술에 시구가 빠질 수 있냐며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자, 그럼 드디어 이 강호대협인 왕소한의 차례로군요. 에헴~, 제가 보여드릴 건 조금 색다릅니다. 여기 단 형과 함께 준비한 것이기도 하죠.”
모두가 궁금해하는 가운데 왕소한이 일어나 손으로 검을 뽑는 자세를 취했다.
검을 차고 있지 않았기에 모습만으로 그런가 보다 유추할 따름이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이 푸른 광휘가 맴도는 검의 광채를 보십시오. 이 검은 철금회의 후계자인 단 형이 심혈을 기울여 최근 완성하여 제가 받은 검입니다. 오늘 특별히 제가 여러분께 자랑하고자 이곳에서 보여드리니, 다들 마음껏 구경하십시오!”
“거참, 빈손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왕 형은 대체 뭘 보라는 겁니까?”
목궁이 핀잔을 주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내 여기저기서 축하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왕 형, 축하합니다. 멋진 검일 테지요. 단 형이 직접 완성했다니 얼마나 뛰어난 검일까요.”
“언제 한번 꼭 구경해보고 싶어요.”
“축하드려요. 얼마나 검을 아끼시는지 눈에 선하네요.”
“하하, 모두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치 없이 떠든 목궁이 혼자 머쓱해져 안색이 검게 물들었다.
왕소한은 투명한 검을 다시 검집에 멋들어지게 넣는 모습을 취하고는 눈길을 돌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범 형만 남았군요. 자, 천화서고의 대공자께서는 어떤 재주로 우리를 놀라게 해줄 생각이십니까?”
드디어 내 차례로군.
이때만 기다려온 후공이었다.
술맛을 돋우기 위해 각자가 재주를 선보이자는 왕소한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왕소한이 어여쁘게 보일 정도였다.
후공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일어났다.
“저는 어릴 적에 고서에서 배워 익힌 지압법을 몇 분께 선보일까 합니다. 천상의 손길로 어루만진다 하여 천상수겸이라 칭하는 수법이지요.”
모두들 뜻밖인지 눈만 깜박거렸다.
기대했던 건 범인이 상상하기 힘든 신묘한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천화서고의 이름난 천재가 지압에 재능이 있다고 하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것은 진실로 드러났다.
“어…… 어…… 이게 도대체……. 하아…… 하악…… 하아악…….”
어디 한번 솜씨 좀 보자던 왕소한은 천화서고 대공자의 손길이 목과 어깨, 그리고 척추 등을 훑고 지나면서 눈빛이 풀리고 몽롱해져 갔다.
“으허허어어……. 시원합니다. 어, 어떡해……. 나 어떡해……. 이건 정녕…… 처, 천상의 손길…….”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면 장난으로 여겼겠지만, 왕소한의 표정은 어떻게 봐도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대체 어느 정도로 대단하기에 저러나 싶어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천상수겸이란 명칭이야 급조했다 해도, 왕소한에게 닿은 건 천상의 손길에 비견될 만한 천하제일인의 손길인 것이다.
각 혈도와 경맥, 거기에 뼈와 근육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하여 몸을 풀어주니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천상의 손맛인 셈이었다.
손을 떼고 물러난 뒤 왕소한의 혈색은 받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밝아져 있었다.
후공의 눈길이 서문웅에게로 향했다.
“자, 다음은 서문 형 차례입니다.”
총관을 건네받기로 하고 의형제를 제안했던 서문웅이 기꺼이 응했다.
잠시 후.
서문웅은 천상의 손길에 녹아내렸다.
경맥을 따라 손이 스쳐 가니 눈이 뒤집혔고 눈썹까지 파르르 떠는데, 그 모습은 어찌 보면 약을 한 것 같았다.
“흐헉……. 흐허어…… 하아아아악~~~.”
낙원에 온 건가.
서문웅은 처음 맞이하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온몸이 나른히 풀어지는 순간 정갈한 쾌감이 전신에 퍼져간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손이 지날 때마다 자신의 피부 위로 열매가 맺고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와아…….”
“이 무슨…….”
모두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왕소한이 경이로운 반응을 보였어도 그가 밝고 과장하기 좋아하는 성향이기에 내심 반신반의했다. 그저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이라고.
하지만 서문웅이 어디 꾸며낼 사람인가.
그는 몸가짐이 바르고 언행에 절도가 넘치는 이다.
한데 지금 서문웅이 흰자위가 드러내며 황홀해하고 있으니 이건 진짜요, 현실이었다.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왕소한이 버럭 소리쳤다.
“범 형! 뭐 하는 겁니까!”
막 천상의 손길이 거둬지고 서문웅이 한결 밝아진 얼굴에 웃음을 매달고 감사의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문웅이 대신 나섰다.
“왕 형, 왜 갑자기 범 형에게 화가 나셨습니까?”
“서문 형도 잘 알 텐데 그러십니다.”
“뭘 말입니까?”
“내가 똑똑히 봤습니다. 분명 들인 시간이 달랐습니다. 보니 두세 번은 더 훑습디다. 천상수겸에 있어 그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서문 형은 잘 알 텐데요? 범 형, 대답해보십시오. 왜 서문 형만 특별대우입니까!”
왕소한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없다는 듯 씩씩거렸다.
후공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쳐다봤다.
왕만두 이놈의 새끼는 뭐라고 떠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시기할 걸 시기해야지.
서문웅은 이제 곧 죽게 생겼는데, 죽을 놈을 부러워하고 있다니. 서문웅에게 시간을 더 들인 건 은밀히 교릉을 심고 은외법까지 더하면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문웅은 끝났다.
교릉은 뿌리를 내렸고, 은외법으로 잠복되었다.
당장 오늘 밤이면 서문웅은 뒤틀리고 오그라들게 된다.
“왕 형, 고정하십시오. 서문 형이 초대하였고 맞이한 입장이니 조금 더 신경을 써드린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서운합니다. 아니 그런 식이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다음 모임 날짜 잡읍시다. 장소는 대륙전장으로 하고요.”
‘후후, 고 녀석 참.’
한 귀로 듣고 흘리는데 어째 주변이 한산했다.
돌아보니 네 사람이 빙 둘러서 수군대고 있었다.
장예, 반교인, 단강무, 묘가령이었다.
이내 장예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 이겼습니다! 범 형, 다음 차례는 접니다!”
‘이런…….’
뭘 하나 했더니만 자기들끼리 순번을 고르고 있었던 모양.
오구문의 목궁만 지놈이 뱉은 말이 있는지라 한쪽에 찌그러져 있을 뿐, 다들 순번이 정해졌는지 누구는 기뻐하고 누구는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모두 천상의 손길에 대한 기대로 눈을 반짝인다.
천상의 손길이 목궁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임했다.
그 결과.
연회가 끝날 때까지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감탄에 찬사와 질문이 쏟아졌다.
반교인과 묘가령은 왜 자신들은 오른팔만 해준 거냐며 툴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문웅을 요절내려는 목적을 달성한 후공으로서는 찬사고 뭐고 시간이 왜 이리 더디 가는가 싶을 뿐이었다.
“허허,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간 걸까요?”
“그러니까요.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말이에요.”
“다들 기억하십시오. 다음 모임은 대륙전장입니다. 한 분도 빠지시면 안 됩니다. 특히 범 형은 명심해주십시오.”
작별의 시간이 되며 다들 아쉬움을 드러냈다.
첫 만남인데도 오래 본 친구처럼 서로가 마차에 오르기까지 몇 번이고 인사를 나눴고, 다음 만남을 또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
두두두두…….
화려한 사두마차가 석양을 등지고 천화서고로 향했다.
마차가 교외를 빠져나갈 때쯤 후공은 턱을 쓰다듬으며 마차 천장을 올려다봤다.
‘왔구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송화가 주인의 시선을 따라 올려다보고 갸웃했다. 뭐가 날아다니거나 곤충이 붙어 있나 싶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목을 푸신 건가?
힘드셨던 거려나?
“공자님, 오늘 힘드셨죠?”
“힘들었지.”
“제가 주물러드릴게요.”
하긴, 너라면.
한 번씩 엉뚱한 면도 있지만, 송화는 기특한 아이다.
후공은 송화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송화는 연회 자리에 없어 직접 보진 못했어도, 작별하며 나눈 대화를 들었기에 저러는 것이었다.
콧방귀를 뀌어주었다.
“흥, 이제야?”
“헤헤, 다 때가 있는 법이잖아요.”
“정 네가 하고 싶다면 한번 기회를 주마.”
후공은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을 맡겼다.
송화는 반색하며 어깨며 목이며 팔을 주물러갔다.
손이 가는 곳마다 정성이 가득했다.
뭉친 곳은 없었지만, 후공은 시원하다고 느꼈다.
“하아아아……. 송화야……. 이건…… 천상의 손길……. 하아아…….”
“하하, 공자님도 참.”
송화와 마차 안 호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갔을까, 마차는 산의 초입을 지나 소로로 접어들었다. 후공은 마차 창 너머로 밖을 바라보다가 마차를 멈추게 했다.
“마차를 세워라. 잠깐 쉬었다 가자.”
“여기서요?”
“그래.”
송화와 네 호위가 먼저 내렸다.
마차 주위를 두른 채 사방을 경계했다.
이어 후공이 나오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내려오너라.”
내려오라니? 어디에서? 무슨 소리인가 놀라 호위들이 대공자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눈이 커졌다.
마차 위였다.
어린 거지가 마차 지붕에 걸터앉아 발을 왔다 갔다 굴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마차 위에 있었던 걸까. 송화와 네 호위의 눈빛은 경악에 물들며 서로 놀란 얼굴을 확인하기 바빴다.
‘대공자께서는 어떻게?’
‘설마 쉬었다 가자는 말씀이?’
‘저 어린 거지는 언제부터 올라타 있었던 거야?’
그때 어린 거지가 쫑알거렸다.
“헤헷, 이대로 쭉 천화서고에 가면 안 되나요? 나 꼭 한번 가보고 싶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어린 거지가 헤실헤실 웃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고작 열한두 살 정도로 보인다. 옷은 더럽고 머리는 산발에 얼굴에 땟구정물이 범벅이었다.
그러면서 손을 곱게 모아 배꼽에 대고 인사했다.
일명 배꼽인사.
“인사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소천개라고 해요.”
“소천개로구나.”
“네, 멋진 소천개지요. 형아는 천재 범항이라죠? 분타주 사형이 따라다니라고 했어요. 근데 어째서인지 힘을 숨기고 있다면서요?”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다 좋은데 신경 쓰인 말은 형아, 였다.
“내가 힘을 숨겼다는데 넌 알고 있구나.”
“으에에엥? 그렇네? 뭐지, 그럼 안 숨기고 있는 거잖아! 이런, 나 멍청이가 돼버린 거여요!”
굉장한 것을 깨달아버린 양 어린 거지의 눈이 커졌다.
“너의 사형들은 뭘 하고 있길래 네가 온 것이냐?”
“사형들은 자고 있어요. 길바닥에서.”
“너는?”
“전 이미 잤어요. 길바닥에서. 교대로 자요.”
길바닥을 왜 이리 강조하는지. 개방 거지답다.
“네 사형들에게 전하거라.”
“깨어 있으라고요?”
어린 거지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니, 오늘 밤은 서문세가 근처 길바닥에서 자라고 해라.”
“자기만 하면 돼요?”
“자다 보면 재밌는 구경에 깰 테지. 그다음 천화서고로 오면 된다. 밤이 깊어도, 더 늦어도 상관없다.”
“우와아아아아아! 형아, 진짜야? 천화서고로 오라고? 나, 나도 갈래요? 그래도 되죠?”
“오냐.”
소천개라.
곤오신개에게 세 번째 제자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직접 보니 제자로 거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린데도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벌써 이만한 신법이라니. 게다가 말귀를 알아먹고도 돌려 말하면서 과장이 심한 것이 귀여운 녀석이었다.
“송화야.”
“네, 공자님.”
송화가 소천개에게 은자 두 냥을 쥐여주었다.
소천개가 흥분한 나머지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켰다.
“형아…… 이, 이렇게나 큰돈을 주는 거여요? 부, 부자라서?”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옷도 사고, 씻고 다녀라. 그리 더럽게 다니다가 재수 없이 빨래 빨리듯 씻겨지는 수가 있으니.”
“하하하하, 형아 되게 웃겨. 세상천지에 누가 개방 거지를 씻겨요. 뒈질라고! 형아, 천재라면서 강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네. 안 그렇게 생겼는데 형아 좀 웃긴 듯.”
후공은 이마에 땀이 맺히려 했다.
‘크흠, 형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