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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29화 (29/460)

29화. 예약하면 지켜진다

서문세가.

석양 아래 서문웅은 뿌듯함을 느꼈다.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아니 완벽한 하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화서고로부터는 총관을 얻어냈고, 연회는 훌륭히 마쳤다.

보고를 받은 아버지도 어깨를 두드리며 대견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이보다 더 나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형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오, 려찬이구나. 다 네 덕분이 아니겠느냐.”

“제가 한 것이 있나요.”

표려찬이 황송해했다.

려찬을 보니 쾌감이 차올랐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놈도 려찬과 같은 표정이었지.’

의형제를 제안했을 때 놀라던 얼굴이 아직 생생했다.

후후, 황송해하고 당황하던.

“너의 칠현금이 손님들의 마음을 녹여냈으니 어찌 공이 작다 하겠느냐.”

려찬이 웃는다. 병신새끼가.

서문세가를 위해 칠현금을 연주하는 려찬처럼 천화서고 대공자도 서문세가를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몸을 주무르겠지. 그날을 생각하니 서문웅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려찬을 보내고 거처로 들었다.

한쪽에 놓인 선물들을 끌어와 살폈다.

대륙전장, 청월문, 염화각의 선물을 확인하며 빈정이 상했다. 고작 술이라니. 하여튼 성의하고는. 오구문도 술이고, 백화장은 그중 비단포였다.

아니한 것만 못한 선물이었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철심회의 선물에서야 서문웅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상자를 열자 바느질 도구가 들어 있었다.

종류별로 열두 개의 바늘.

철심회의 바늘이라면 바느질에 쓰기엔 아까울 정도다.

기념품으로 가치가 크다. 어머니께 드리면 기뻐하실 테지.

천화서고에서 보내온 선물 상자를 살폈다.

비단으로 정성스레 포장되어 있고 좋은 향이 났다.

바짝 엎드린 천화서고이니 선물도 남다를 터.

비단을 풀자, 향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 귀한 백단목을 포장 상자로 쓰다니. 서문웅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 담긴 건 세 권의 책이었다.

역시 천화서고답다.

이미 총관을 통해 세 권의 진법서를 빼돌렸다.

화공왕정진.

팔황도요수진법.

육양구룡진법.

이 세 권.

그걸 알 텐데도 또 책을 보내왔다.

이는 극한의 아부라 할 만했다.

책을 꺼내 앞면이 오게 뒤집었다.

책자의 명칭을 확인한 순간 서문웅은 갸웃했다.

화공왕정진.

팔황도요수진법.

육양구룡진법.

‘같은 책?’

책자를 펼쳤다. 글자 따윈 없는 백지였다. 전부 다 비어있다. 한 글자도 없이 전부가 여백이었다.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지? 천화서고 이 개자식들!’

명백한 도발이다. 그럼 오늘은 도대체 뭐였지? 그 좋던 분위기는? 분위기를 주도하던 천화서고 대공자는?

‘그리고 총관은?’

아버지께 보고를.

벌떡 일어났지만, 서문웅은 발을 떼지 못했다.

대견해하며 미소 짓던 아버지의 표정이 발을 붙잡는다. 안 돼. 그래, 이건 어쩌면 작은 불만의 표시일 수도 있다. 이 정도 반항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내일 총관이 오면 되는 일이다.

연회에서 모두 총관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보낸다면 도리어 그걸 빌미로 삼으면 된다.

그래, 내일까지 기다렸다 말씀드려도 늦지 않다.

괜히 이 밤 언짢게 해드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그래, 아무 일도 아니야.

‘어쩌면…… 어쩌면…… 빈 책자를 보낸 건 이미 본가가 가져갔으니 상징적으로 기꺼이 바친다는 의미일지도 몰라.’

그러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하하!”

그러면서도 서문웅은 세 권의 빈 책자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

서문세가 부근 길바닥.

늦은 밤, 세거지가 뒹굴거렸다.

“막내야, 누가 돈 준다고 넙죽넙죽 받고 그러면 안 돼. 그러는 거 아녀. 쩝쩝……. 쩝쩝.”

“사형, 그래도 돈이 있어서 닭을 먹고 있잖아. 맛있지 않아?”

“응, 흐흐, 맛나다. 꿀이야.”

“꿀 아니라 닭이라고, 바보 사형. 쩝쩝쩝.”

길바닥에 삐딱하게 누워 어린 거지와 젊은 거지가 튀긴 닭을 정신없이 뜯으며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댔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분타주 취운개가 두 사제를 보며 오만상을 썼다.

“하여튼 거지새끼들 아니랄까 봐 먹는 것도 더러워 죽겠네.”

“사형, 아까 그 손으로 송충이 찍어누르지 않았어요?”

“으익!”

취운개가 놀라 닭가슴살을 얼른 다른 손으로 옮기고, 원래 쥐고 있던 손은 옷에 문질러 닦았다.

“옷이 더 더러운데, 바보 대사형.”

소천개가 비웃고는 말을 이었다.

“근데 사형들, 천화서고 대공자 좀 이상한 거 있죠.”

“돈 준 것 때문에?”

“아뇨. 저보고 씻고 다니래요. 안 그러면 빨래처럼 빨려버린다나 뭐래나. 개방을 너무 얕잡아보는 거 같아서 솔직히 기분이 나빠. 몹시 나빠!”

“미친 새끼네.”

은앙개가 낄낄대며 기름진 손으로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러나 취운개는 달랐다.

“멍청한 놈들아 그거 진짜야. 재수 없으면 그렇게 돼.”

“에이, 말도 안 돼. 꼰대 대사형.”

“사형은 한 번씩 꼭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더라. 꼰대 새끼.”

취운개가 얼굴을 구겼다.

“이것들이 하늘같은 사형한테 말하는 거 봐. 뒈질라고. 이 새끼들아, 사부님도 한번 빨래 된 적 있어. 꼭 뭘 모르는 놈들이 아는 척 큰 소리지.”

“사부님이요?”

“하하, 누가 개방 방주를 빨래한다는 거야. 대사형 나빠.”

“누구긴 누구야, 후공이지. 방주된 지 얼마 안 돼서 무림맹에 갔다가 후공이 그랬다더라. 더러우니까 씻고 오라고. 사부님이 코웃음치며 맹주면 다냐며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했다가 강으로 끌려갔다는 거 아니냐.”

“헐…….”

“헐…….”

“천하제일인이 작정하고 빨래하면 어떻게 될 것 같냐.”

“샤랄랄라~~?”

은앙개가 머리를 털며 찰랑이는 머릿결 흉내를 냈다.

우수수 비듬이 장난 아니게 떨어졌다.

“그래, 아주 샤랄라라 깨끗해져 버리는 거여. 근데 사부님 말로는 후공이 후회했다더라구.”

“왜요?”

“강물이 너무 더러워진 걸 보고 어이 터져버린 거지. 그날 이후 사부님은 한동안은 맹 근처에도 안 가셨고.”

“사형, 어째 후공 이야기치고 제대로 된 이야기가 없답니까. 언짢다고 녹림총채에 가서 산봉우리 하나 날려버리고는 녹림왕에겐 소 키우라고 하는 게 사람입니까. 그 대단한 녹림왕이 그 뒤로 한동안 수전증에 걸렸담서요.”

“말해 뭐해. 그나저나 녹림이 키운 소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뭐 지금은 후공도 없으니 다 먹어치웠겠다야.”

“후공 나빠. 쩝쩝쩝…….”

“그나저나 천화서고 대공자 놈도 웃기네. 지놈이 뭔데 우리더러 이래라 저래라인 건지.”

“그러게, 지가 뭐라고. 오늘 밤 안에 서문세가에 재밌는 일 안 생기면 나 천화서고 쳐들어간다. 절대로 말리지 마라. 다 부숴버릴 거야 아주!”

“일이 생겨도 가야 하잖아요.”

“어……. 그렇네.”

“멍청이. 바보 대사형. 쩝쩝쩝…….”

“흐흐흐…….”

**

서문세가.

늦은 밤, 서문웅은 안정을 찾았다.

독한 죽엽청 한 병을 비운 뒤였다.

‘괜찮아.’

생각해보면 애초에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천화서고는 칭얼거린 것뿐이다. 먹물들이 먹물의 방식으로 서운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전부가 아닌가.

어쩌면 이 밤 천화서고 대공자는 괜한 짓을 했다 싶은 후회로 전전긍긍하며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하겠지.

진정한 선물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도착하니, 내일이면 오늘 일도 잊어주시겠지.

오냐, 이 정도는 웃고 넘겨주마. 나는 큰 그릇이니까.

술병을 들어 잔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몇 방울에 불과해 아쉬움이 남았다. 한 병 더 마실까 하던 서문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바로 시녀를 불렀다.

“목욕물을 준비하거라.”

“네, 공자님.”

“아, 그리고…….”

나가려는 시녀를 불러세웠다.

“이번에 새로 온 두 시녀가 곱다지?”

얼핏 봤는데 어여쁜 데다 몸매가 빼어났다.

“네, 초향과 유연 두 아이가…….”

“그래, 그 아이들을 불러라. 목욕 시중을 맡기겠다.”

“네.”

시녀의 안색이 찰나였지만 어두워진 걸 서문웅은 놓치지 않았다. 미친년. 왜 자신은 안 부르냐는 것이겠지. 둘 보다 셋은 더 낫지 않냐며. 욕조 안에서의 황홀한 시간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얼굴이라니. 몇 번 내 몸을 취했다고 착각하긴. 그 몇 번도 영광으로 알아야지.

시녀 둘이 들어왔다.

초향과 유연.

서문웅은 먼저 눈으로 훑었다. 역시 훌륭한 몸매다.

욕조로 들어가 옷을 벗기기 쉽게 두 팔을 들었다. 초향과 유연이 옷을 벗긴다. 둘 다 손을 바르르 떠는 것이 귀여워 서문웅은 웃음이 났다. 탈의를 마치고 군살 없는 맨몸을 당당히 드러내자, 시녀들은 얼굴을 붉힌 채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힐끔거린다.

후후, 이미 내게 푹 빠졌군. 복 받은 줄 알아, 이년들아.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 팔을 걸쳤다.

“너희들도 옷을 벗고 이 안으로 들어오너라.”

“네? 네…….”

두 시녀가 놀랐다가 빠르게 체념했다. 이미 그녀들은 오기 전에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들었던 것이다. 서문세가에 들어올 때만 해도 희망에 찼건만, 이곳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명문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두 시녀가 옷고름을 풀려 할 때였다.

뚜드득.

격한 뼈마디 소리가 터졌다. 서문웅이 목을 옆으로 홱 돌려 무서운 눈으로 두 시녀를 노려본다. 부릅뜬 데다 핏발이 서 있었다. 왜 옷을 늦게 벗냐면서 당장이라도 죽이려 욕조 물을 튀기며 달려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닌데. 두 시녀의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하지만 두 시녀보다 서문웅의 심장이 더 거칠었다.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서문웅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찌나 세게 홱 도는지 목이 뻐근할 정도였다. 그리고,

“모가지가 안 움직인다. 왜지?”

“네?”

시녀들이 뭘 묻는지 몰라 반문할 때, 서문웅은 두 팔을 마구 내리쳤다. 마치 아이 물장난처럼 보였다.

첨벙, 첨벙.

손의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물이 튀어 올라 서문웅의 얼굴에도 튀고 주변 바닥도 흥건해졌다. 여전히 고개는 옆으로 돌린 채였고 핏발 선 눈도 그대로였다. 어떻게 봐도 물장난인데 그 와중에 세상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시녀들은 급기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뚜드득, 뚜득.

물장난하며 서문웅의 목이 돌아갔다. 목을 풀려는 듯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목을 돌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머리를 뒤로 확 젖혔다.

“으가가가…….”

기이한 신음에 시녀들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터뜨렸다. 물장구를 치는 것도 무서운데, 지금 모습은 당장이라도 대공자의 목이 부러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두려움이 어디 서문웅만 하겠는가.

교릉이 발동한 서문웅은 공포에 질려버렸다. 젖혀진 목은 바로 할 수도, 물장구치는 팔을 멈출 수도 없었다. 내력도 조절할 수 없었다. 내부에서 기운이 멋대로 움직여댄다. 첨벙, 첨벙. 시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서문웅은 혼신의 힘을 오른손에 집중했다.

“으아아아아아악!”

거친 외침에 처소 바깥을 지키던 시녀가 쓰게 웃었다.

‘빨리도 끝나네.’

하지만 서문웅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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