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1화 (31/460)

31화. 밤의 허공을 딛고 서다

그렇게 고작 일식경 정도 지났을까.

거짓말 좀 보태서 소 한 마리 정도를 해치운 세 거지는 이제 배를 퉁퉁 두드렸다.

“아, 배부르다. 세상 겁나 아름다워 보이네. 야, 범항. 이제 술도 좀 가져와 봐라. 용정차가 뭐냐, 쪼잔한 새끼. 아끼긴 더럽게 아껴요.”

은앙개가 그렇게 처먹고도 불만을 토해냈다.

송화가 불판을 치우다 말고 은앙개를 노려봤다.

주인에게 새끼 새끼 거린 것이 신경을 건드렸나 보다. 기세로만 보면 당장 불판으로 머리를 갈겨버릴 것 같았다.

풍운정 주변에 선 네 호위도 눈빛이 차가워졌다. 동석하라 해서 자리를 채우고 있던 윤과 부몽도 불편한 안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은앙개가 둘러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 분위기 뭔데. 왜 이렇게 살벌해. 잘 먹어줬더니 눈빛으로 죽일 기세네. 너네 대공자가 쪼잔한 건 맞잖아. 지난번에도 술 한 병만 주고 갔다고!”

먼저 나선 건 부몽이었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큰형님은 본 서고의 후계자요. 가문을 대표하는 분으로 여기 자리하고 있거늘, 이 무슨 무례란 말입니까!”

부몽이 선비의 기상을 드러내며 노를 발했다.

은앙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놈이 겁이 없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큰 소리야.”

“누구라 한들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안 지키면? 어린놈이 개방의 무서움을 모르네. 뒈지기 싫으면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라.”

부몽이 벌떡 일어났다.

“큰형님, 안 되겠습니다. 오늘 제가 이자에게 예의를 가르쳐야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오냐, 좋은 생각이다.”

내심 웃고 있던 중에 후공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잠시 후, 부몽이 어디론가 냅다 뛰어갔다.

다시 왔을 때는 손에 쌍절곤이 들려 있었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 뻔하게 흘러갔다.

닭울음소리와 함께 부몽이 은앙개를 패버리니 은앙개가 죽는다고 데굴데굴 구르며 난리였다.

그런 은앙개를 보며 소천개가 소리쳤다.

“난 모르는 거지예요. 절대로 몰라요!”

그러거나 말거나 후공은 이미 취운개와 거닐고 있었다.

취운개가 입을 열었다.

“자넨 서문웅이 아작날 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나?”

“천벌?”

“크하하하하!”

취운개가 터져버렸다.

겨우 진정하고 나서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다 아네. 천화서고 뒤를 봐주는 굉장한 사람이 있는 거잖나. 나한테만 말해보게. 비밀을 지킬 테니까. 비밀하면 나 취운개거든. 사부님 젖꼭지가 짝짝인 것도 여태 아무에게 이야기 안 했을 정도거든. 어때, 그이가 누군가?”

“굉장한 분이라니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분타주가 굉장하다고 할 정도의 인물이 있다면 제가 개방을 부를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그 이에게 부탁해 서문세가를 쓸어버리면 되는걸.”

“으잉?”

맞는 말이다 싶은지 취운개가 연신 갸웃거렸다.

그러다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듣고 보니 그렇구만. 그럼 남은 건 한 사람뿐인데……. 자네가 서문웅을 담가버린 건가?”

취운개의 눈이 한순간 깊어졌다.

안광이 투명하고도 차가워지며 날카로운 기운을 흘려냈다.

‘무구안?’

후공이 미간을 찡그렸다.

개방의 안법이었다.

안법이란 어둠이나 은신을 꿰뚫는 것에서부터 기세로 상대를 압박해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을 통칭한다. 지금은 후자였다.

후공의 언짢음은 취운개가 펼친 것이 무구안(無狗眼)이었기 때문이었다.

개장수가 눈을 부릅뜨면 개가 꼬리를 말고 신음한다.

그처럼 무구안의 뜻은 눈을 뜨니 개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라는 뜻이었다. 안법이고 뭐고 개 취급당하는 것이다.

무공마다 이름이 어찌 하나같이 개방다운지. 하긴, 개방 방주의 신물부터가 개를 팬다는 타구봉이니 말을 말아야지.

서로의 안광이 마주한 순간,

쩌엉.

취운개가 순간 비틀거렸다.

머리가 핑 돌아 찰나간 의식이 단절된 탓에 현기증이 인 것이다.

“……뭐여?”

취운개의 눈이 경악으로 왕방울만 해졌다.

어째 익숙한 기운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무구안이 튕겨 되돌아왔다.

스스로 공격하고 자신의 공격에 스스로 당한 셈이었다.

‘반탄?’

이는 외부의 위협에 후공의 삼대 호신기 중 하나인 허운이 자연스레 반탄을 일으킨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후공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취운개는 한참을 얼떨떨하니 있다가 덥석 후공의 손을 잡았다.

“자네로구만.”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어진 취운개는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웃었다.

“자네가 서문웅을 아작내버린 것이잖아. 그니까 자넨 기연을 얻은 것이구만. 비급을 얻어버린 것이여. 몇 권짜리인가?”

몇 권이냐고 물어봐버리는 건가.

“얼마나 익혔어? 막 소문으로 자살한다 어쩐다 한 건 눈가림이었던 것이지? 그치?”

후공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리고는 먼저 걸었다.

“따라오십시오.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전에 나랑 한판 붙어보면 안 될까?”

“안 됩니다.”

단호히 거절하고 향한 곳은 총관 앞이었다.

골골하는 총관이 다시금 취운개 앞에서 사건의 과정과 개요를 진술했다. 나왔을 때 취운개의 낯빛은 싱글벙글이었다. 새로운 장난감에 원래의 호기심이 뒤로 밀려났다.

“흐흐, 내 이럴 줄 알았지. 대어를 낚을 감이 오더라니까.”

이럴 줄 알았다라.

어감이 미묘하다. 후공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혹시 분타주께선 서문세가 뒤를 캐고 있었던 겁니까?”

“캐려고 했네만 안 캐지더라구. 표가장의 멸문 후였는데, 서문세가가 그 일에 관여되었다 봤거든. 그림자만 얼핏 보고 접근하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 일도 밝혀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네. 자, 그래서 자네 계획이 뭔가?”

“내일 본 서고로 서문가주를 초대할 생각입니다.”

취운개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서문가주가 오란다고 와?”

후공이 피식 웃었다.

“오라면 와야지요.”

“그런 거야?”

“그 걱정은 마시고, 취운개께선 그 사이 굉장한 분들을 불러오십시오.”

“굉장한 분들은 내가 잘 모르는데? 굉장한 사람들은 사부님이 친하지.”

“아니, 분타주께서 잘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 자, 그럼 한 분 한 분 그 면면을 말씀드리죠.”

***

아침 일찍 윤과 부몽이 표국으로 보낼 화물 준비를 마치고 들어섰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큰형님께 들었던 터라 윤은 붓을, 부몽은 먹을 갈았다.

서신의 수신인은 서문가주였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서문추는 들으라.”

막 ‘서문’까지 붓을 놀려가던 윤이 고개를 들었다.

“형님, 서문추가 누군가요?”

“서문가주.”

“아! 가주 이름이…….”

윤이 어찌 가주 이름까지 아시는가 내심 갸웃했지만 묻지 않고 붓을 놀렸다.

- 듣자 하니 너의 첫째 아들 서문웅이 응보를 받았다지. 이는 하늘이 너희의 악행을 좌시하지 않음이니라. 그리하여 본 서고도 하늘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총관은 보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총관을 받길 원한다면 네놈들이 탈취한 천화서고의 보물들을 가져오라. 그리하면 총관을 건넬 것이다. 그래도 약조한 것이 있어 뭔가는 주어야겠기에, 총관을 대신해 공모한 호위대주와 부대주를 보낸다. 그 둘을 보면 어리석은 그대라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겠지. 아들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 천화서고 대공자.

**

서문세가는 음울함에 젖어있었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웃음은 사라졌고, 하루는 백년 같았다.

어슴푸레 해가 질 무렵, 백뇌가 가주를 찾았다.

“가주, 찢어진 책의 조각을 모아 복원했습니다.”

“그래서?”

서문가주의 목소리에는 날이 섰다.

백뇌가 몸을 웅크렸다.

“천화서고에서 취한 세 권의 진법서였습니다. 허나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천화서고 놈들이 장난을 쳤다?”

“그런 듯합니다. 그리고 방금 천화서고에서 태평표국 편으로 서신 한 통과 커다란 궤짝을 보내왔습니다.”

“궤짝이라면 총관?”

“확인 전입니다. 우선 서신부터 보시지요.”

백뇌가 공손히 서신을 건넸다.

한 줄 한 줄 서신을 읽어나가던 서문가주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고, 몸을 부들대기 시작했다.

“천화서고 이놈들이 감히!”

와락.

서신을 구겼다.

분노로 그의 안광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서신을 쥔 손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삼매진화!

서신은 불타며 재가 되었다.

서문추는 밖으로 뛰쳐나가 궤짝을 확인했다.

“열어라!”

뜨락에 옮겨놓은 궤짝을 검수들이 나서 한쪽 면을 뜯어냈다.

순간 혈향이 확 풍겼다.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검수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궤짝 안에 드러난 건 두 개의 괴생물체였다.

꿈틀대고 있는데 뭉쳐지고 오그라든 채였고 신음을 옅게 흘리고 있었다.

간신히 사람임을 알아본 건 괴생물체가 이목구비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과 희번덕거리는 눈 때문이었다.

서문가주의 낯빛은 흙빛이 되었다.

‘이런 미친…….’

궤짝 안 괴물은 영락없이 아들의 모습과 같았다.

서신의 문구가 떠올랐다.

- 그 둘을 보면 어리석은 그대라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겠지.

‘설마 어제의 연회에서 놈이 손을 썼단 말인가?’

그럴 리가. 도대체 무슨 수로?

아니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최근 일어난 일련의 과정이 천화서고의 반격이라는 점이었다.

퍼져나간 소문에 이어 평화 서신.

이후 연회, 그리고 암습. 보란 듯이 비웃음이 담긴 백지 책자 선물. 그리고 오늘이다.

서문추가 웃음 지었다.

그것이 웃음이 아니란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천화서고는 오늘 밤 사라질 것이다.”

**

스스슷.

서문추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천화서고로 향했다.

그 뒤를 서문세가의 흑염귀멸대가 따랐다.

정예 중의 정예 32인.

평시에는 존재 여부도 드러나지 않는 흑염귀멸대요, 수많은 멸문을 이끌었던 살인귀들이었다. 뒤쪽 대원들은 관짝 형태의 큰 상자 두 개를 들고 이동했다.

일명, 흑단.

흑염귀멸대 전원이 움직인 건 십여 년 이래 없던 일이었다. 그것은 분노가 크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천화서고를 그만큼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휘이잉.

절벽 앞에 이르자 밤바람이 불어와 서문추와 흑염귀멸대를 쓸고 지나갔다. 눈앞에 보이는 건 밤하늘이며 별과 달이 비출 뿐이고, 구름이 흘러갈 뿐이나, 이것이 환상진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서문추가 크게 외쳤다.

“천화서고는 서문세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느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 오셨습니까.

쇠를 갈아낸 듯한 기괴한 음성이었다.

등 뒤에서 시작되었다가 좌우를 휘돌더니 끝마칠 때는 앞에서 들려왔다. 이어 저만치 허공에서 하얀 안개가 맺혔다. 안개는 차츰 옅어져가더니 한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서문추는 바로 알아봤다.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놀랍게도 밤의 허공을 딛고 서 있었다. 옅은 구름이 부근에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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