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천외의 요새 천화서고
서로 간의 거리는 약 삼십여 장(약 90미터).
환상진이 걷어진 상태인지 아닌지는 아직 구분할 길이 없었다.
“가주, 표국을 통해 보낸 선물과 화평의 서신을 보냈거늘 어찌 이리 살기등등하십니까.”
“너는 말장난을 하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하하하, 그렇게 됩니까. 맞는 말입니다.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봤습니다.”
놈의 웃음이 해맑다. 긴장감조차 느낄 수 없어 서문추는 미간을 좁혔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가?
“하나만 묻자. 내 아들은 네놈의 짓이냐?”
“아니.”
“그럼 누구냐?”
“서문가주, 그걸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니 한심하군.”
한심할 수밖에.
후공으로선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서문웅을 망친 건 아비인 서문추가 아닌가.
누가 누구에게 복수를 논하고 원한을 찾아 따지는 것인지.
“넌 제법 기고만장하구나.”
“천만에. 서문세가 따위를 상대하는데 굳이 의기양양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우선 당신의 계획이나 들어봅시다. 오늘 밤 천화서고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널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가운 소리인데 왜 이리 찜찜할까.”
대공자가 귀를 후볐다.
서문추는 고개를 끄덕인다.
“약속하마. 넌 오래 살게 될 것이다. 네 혀를 뽑고, 눈을 파내고 사지를 뜯어내 몸통만 남긴 채로 내내 죽지 않게 널 돌봐주겠다.”
“하하하! 가주, 누가 들으면 마교도인 줄 알겠습니다. 책에서 보니 거기가 그렇게 흉악하다던데. 뭐 어쨌든 오늘 천화서고는 멸문이겠고, 계획이라면 이렇게 되는 겁니까? 당신 뒤에 선 시커먼 놈들이 흑단이란 이름으로 천화서고를 휩쓸고 나면 그다음 서문세가가 뒤늦게 나타나 아쉬워하면서 본 서고를 먹어치우는 것입니까?”
서문추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후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로구나.”
명분이란 만들면 된다.
멸문의 이유는 칭하기 나름.
그것들은 천화서고를 멸한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너희 천화서고가 잔재주를 부린다 하여 빠져나갈 수는 없는 일. 지옥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아, 그렇습니까. 과연 그렇게 될지 모르겠군요.”
그때였다.
“퀄퀄퀄, 서문가주. 이런 사람이었다니 실망스럽소이다. 평소 당신의 칼이 궁금했는데, 오늘 견식해볼 수 있겠습니다.”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한 중년인이 성큼 나타나 대공자 옆에 섰다.
서문추가 눈을 부릅떴다.
흑염귀멸대도 누구 할 것 없이 동요를 보였다.
땅딸막한 체구에 신광을 번뜩이는 이를 모를 순 없었다.
“청월문주……. 당, 당신이 어떻게…….”
“퀄퀄. 어디 나뿐이겠소?”
“……무슨?”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가주, 정녕 보고도 믿을 수 없구려. 혹시나 했건만 당신 입으로 자백할 줄은 몰랐소이다.”
“염, 염화각주 당신까지?”
청월문 장문인과 염화각주는 시작에 불과했다.
서문추의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분분히 한 사람씩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가주, 그대는 어찌 이리 파렴치할 수 있단 말인가!”
“정녕 그대가 내가 알고 있던 서문가주란 말이오? 솔직히 본인은 총관이란 자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거늘……. 한데 지금 당신의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소름끼치는 자가 아닌가. 천화서고를 멸문시킨 다음 당신이 제일 먼저 애도를 표하려 했을 테지. 이러고도 본 전장의 조카딸과 혼사를 진행하려 했다니, 끔찍한 자로구나.”
청월문 장문인 반광과 염화각주 장임인.
그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백화장주 묘운료와 철금회주, 그리고 대륙전장의 부장주였다.
그 곁으로 한 노인이 더 나타났는데,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깊은 한숨만 내쉴 뿐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문추는 다른 누구보다 그 노인을 보자 눈에 띄게 당혹했다.
“어찌…….”
노인은 서문가의 장로 서문봉이었다. 과거 대수롭지 않은 일을 부풀려 가문에서 축출해 외지에 거처하게 했거늘, 이 자리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건 개방의 취운개였다.
“하하, 대공자! 서문가주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걸 보니, 확실히 자네가 모셔오라는 분들이 굉장하긴 굉장한 분들인 모양이네.”
“다 개방에서 힘써주신 덕분입니다.”
안휘 북부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수장들과 개방 분타주.
소고기를 배터지게 먹고 난 후 새벽부터 취운개는 개방의 힘을 한껏 활용해 천지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이들을 천화서고로 초빙해온 것이다.
하루 만에 이들을 불러모은 건 개방의 명성과 분타주의 역량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직 무림맹주는 개방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취운개는 또 그에 부응한 것이다.
취운개가 이죽거렸다.
“서문가주, 이제 어쩔 셈이오? 딱 봐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이오만.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순순히 무릎 꿇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소?”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서문추는 여유를 찾고 혈색이 안정되어 있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후후,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솔직히 이 노부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 하지만 그뿐이다. 훌륭한 함정이었다곤 해도 너희가 날 어찌하겠느냐. 괜한 일에 끼어들어 결국 너희 모두가 천화서고와 함께 저승에 가게 생겼구나.”
“이노옴, 서문추!”
“악독하고 무모한지고!”
“정녕 추악한 자가 일말의 양심조차 없구나!”
명문가 수장들이 일제히 분노를 토했다.
서문추의 웃음이 짙어졌다.
“추악한 자는 패배한 자들, 죽은 자들의 몫이다. 설마하니 내가 천화서고를 상대함에 빈손으로 왔을까?”
“……?’
“……?”
의문에 찬 시선이 서문추에게 꽂혔다.
서문추의 일갈이 터졌다.
“진천뢰를 준비하라!”
“지, 진천뢰?”
다들 놀라 눈을 부릅떴다.
흑염귀멸대 중 뒤쪽에 있는 몇이 움직여 두 개의 나무 상자를 앞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관짝 정도의 크기였다. 그 안에 진천뢰가 가득 들어있다면 산 하나는 충분히 날려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폭약이었다.
폭약의 일종인 진천뢰는 폭약 중에서도 위력이 강력하기 이를 데 없다. 단 하나만으로도 전각 두어 채 정도를 재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천화서고의 진법이 제아무리 신묘하다 해도 진천뢰를 버틸 수는 없을 터.
“후후, 왜 이제야 겁이 나나? 천화서고가 기기묘묘한 진법으로 두르고 있어 천외의 요새라 불리는데, 이만한 대우는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다들 경악에 빠져 말을 잃었다.
하지만,
짝짝짝짝.
천천히 손뼉 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쫓아 바라보니 천화서고 대공자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만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매우 흐뭇해하고 있었다.
“가주, 난 또 빈손으로 온 줄 알고 내심 실망했습니다. 한데 진천뢰라니, 역시 이래서 서문세가 서문세가 하는가 봅니다. 양도 많고 폭발력도 대단할 테지요. 진천뢰 선물은 본 서고가 기쁘게 받겠습니다.”
“선물?
서문추가 갸웃했다.
그것은 곁에 있는 명문가 수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진법이 미치지 않는 절벽 쪽으로 달려가 싸워 빼앗는 방법 외에 마땅한 대응이 떠오르지 않건만, 천화서고 대공자는 너무도 천하태평인 것이다.
“가주, 이야기는 추락한 뒤에 나누도록 합시다.”
“하하, 넌 재밌는 이야기를……. 허억!”
서문추가 웃음 짓다 경악했다.
쿠구구궁.
갑자기 땅이 갈라지면서 무너져내렸다.
“가주님!”
“이, 이게 어찌!”
“따, 땅이!”
절벽 끝자락부터 붕괴되면서 삽시간에 뒤쪽까지 땅이 허물어졌고, 신형을 솟구칠 틈도 없이 서문추와 흑염귀멸대가 까마득히 낭떠러지로 추락해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몸이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는 중에 흑염귀멸대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몇몇이 추락 와중에 절벽의 튀어나온 기암괴석에 몸이 부딪혀 연달아 인형처럼 튕겨나갔다. 머리를 부딪힌 대원 하나의 머리가 터져나갔고, 몸통이 연달아 부딪힌 하나는 그대로 찢겨나갔다.
“크헉!”
“크아아아악!”
서문추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분명 환상일 텐데 어찌 이런 일이……’
환상일 수밖에 없었다. 붕괴는 너무나 급작스러웠다. 어떤 징조조차 없이 일거에 자신들이 서 있는 곳만 지반이 붕괴되었다. 게다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허공에 떠 있는 걸 보고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성과 달리 신체의 모든 감각은 현실이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고, 머리가 젖혀져 흩날렸으며, 볼살도 밀려나며 부들거렸다.
환상이라고 믿으려 해도 환상이 의식을 집어삼킨 형국이었다.
일단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먼저 떨어지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몸을 수평하게 활짝 펴고 바람의 저항을 최대화했다. 그래도 여전히 가공할 속도였다. 챙! 검을 뽑아 절벽에 박아 넣었다.
카카카캉!
검이 절벽에 박히면서 긁혀나갔다.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슈웅, 슈웅.
그 와중에도 흑염귀멸대 몇이 빠른 속도로 몸을 스치듯 서문추의 곁을 지나 추락해갔다. 위쪽에서 갑자기 비명이 크게 들려 바라보니, 바로 머리 위쪽으로 흑염귀멸대 하나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가주님!”
“헉!”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서문추는 그대로 장력을 발출했다. 퍼엉! 장력에 직격당한 흑염귀멸대는 비명을 토해내며 절명했다. 다행히 방향이 틀어져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건 면했다.
하지만 그 반동의 여파로 절벽을 긁어내려가던 검이 뽑히면서 서문추는 다시 빠른 속도로 추락해가기 시작했다.
파라라라라락!
옷자락을 펄럭이며 추락 중에 서문추가 외쳤다.
“모두 진정해라. 지금 이 상황은 실재가 아니다. 그저 진법의 허상일 뿐이니 마음의 평정을 찾아라! 우리는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 후으읍…….”
말을 하다 바람에 숨이 막혀 끝맺지 못했다.
파라라라락!
슈웅, 슈웅.
경고는 무의미했다.
뭔가가 양옆으로 빠르게 지나가기에 보니, 귀멸대 중 둘이 이미 혼절해서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광속으로 추락해갔다. 다른 귀멸대들은 그래도 최대한 몸을 수평으로 넓게 벌린 채 활강하고 있었다.
지면은 아직이었다. 아니 여전히 까마득했다.
산의 높이가 이렇게 높지도 않았고, 실제 산이라 해도 이미 몇 번이나 지면에 닿았을 시간이었다.
그러자 다시 희망이 샘솟았다. 진법의 환상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높이가 아닌가.
“현혹되지 말라. 이 현상은 그저 우리의 감각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바람도 후으읍…… 차가운 공기도…… 옷자락이 나부끼는 것도 모두 환영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면 위에 있는 것이다. 후우우웁…… 것이다. 다들 평정을…… 하아압!”
‘시발…….’
결국 서문추는 폭풍 같은 바람에 막혀 내심 욕을 뱉어내고 말았다. 말로 아무리 평정을 취하라 해도, 자신조차 말하는 중에 숨을 뱉어낼 수 없어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고 있으니 설득력이 떨어지기도 했다.
땅이 시야에 급격하게 근접했다.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흑염귀멸대의 비명을 터져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악, 안 돼에에에에!”
“살려줘어어어어어!”
서문추도 환상이고 뭐고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경악에 찬 건 서문추와 흑염귀멸대만은 아니었다.
대공자 곁에서 지켜보는 명문가의 수장들도 황당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대공자의 입에서 ‘추락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문가주를 비롯한 그의 수하들이 갑자기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내지르며 허우적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