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눈이 엄청 빨간색
무너지지도 않았고, 바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눈을 뜨기 힘들다는 듯 힘겨워했고, 움찔움찔 난리에다 숨쉬기도 힘든지 어푸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뭐 하는 짓인가 싶어질 만한 미친 광경이었다.
진천뢰가 담긴 상자도 얌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서문가주는 검까지 뽑아들고 허공에 꽂는 시늉을 하다 바로 옆에 있는 검수 하나를 장력으로 쳐 죽이고는 다시 엎드려 추락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면서,
- 현혹되지 말라. 이 현상은 그저 우리의 감각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바람도 후으읍…… 차가운 공기도…….
이렇게 떠들어대고 있으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대공자, 그러니까 지금 서문이들이 추락하고 있는 거지?”
취운개가 물었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바닥에 거의 다 왔습니다.”
이는 후공이 윤에게 지시 내렸던 진의 확장.
평시에는 절벽 안쪽이 외부진의 경계이나 비상시에는 산 전체를 두르고 활용할 여지를 둔 터였다.
그걸 서문세가에서는 알 리 없으니, 진법 밖에서 안심하고 진천뢰 운운했을 따름이었다.
“퀄퀄퀄, 천화서고가 괜히 천외의 요새라고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그려. 퀄퀄퀄…….”
“이것 참 대단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광경입니다.”
“헛! 보십시오. 곧 땅인 모양입니다!”
다른 한마디씩 꺼내며 혀를 내두르는 중에 지면과의 충돌이 임박했다. 자세가 달라진 것이다. 공기의 저항을 늘리려 사지를 활짝 벌리고 있던 서문세가인들은 이제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환상 속에서 낙하 속도가 가공할 지경이고, 곧 지면이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처박힐 상황인 것이다.
다들 놀라워하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후공은 의아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놈들 왜 이리 호들갑이지. 설마 환상진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건가?’
천화서고의 환상진이 정교하고 탁월하다지만, 이런 극한의 현실 같은 환상진이 천화서고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냉정히 볼 때 천화서고의 진법들은 기품이 있고 얌전한 편에 속했다. 마교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황천의 악령진만 해도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되살아나 덤벼드는 악령들이 덮쳐오는 식이고, 옷깃만 스쳐도 실제로 옷이 타들어 간다.
과거 사황천의 비처로 파고들 때 진에 빠졌고, 몇 놈 죽이다 귀찮아져서 부근 백여 장을 통째로 날려버린 적이 있었다. 이처럼 환상진이라도 마도나 사파의 것은 살상력이나 흉악함의 격이 달랐다.
그런데 이놈들은 강호 경험이 얼마나 일천하면 이리도 놀라는 것인지, 후공으로선 한심해서 놀랄 지경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안 돼에에에에에…….”
“으아아아, 이건 환상일 뿐이거늘 왜……!”
결국 지면과 충돌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뭔가가 퍽퍽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드러난 광경은 참상이었다.
서른 세 명 중에 열 명이 즉사했다.
그중 다섯은 엎드린 채로 스스로 머리를 땅에 박았는데 뇌수가 터졌다. 셋은 목뼈가 부러져 죽음을 맞았다. 다른 하나는 허리를 스스로 등 쪽으로 접어버리고는 신음을 토해내다 숨이 끊어졌다. 아마도 환상 속 추락 장소가 암벽 쪽이고 허리 쪽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다른 하나는 서문추에게 맞아 죽은 이.
사망자 외에도 11명가량이 중상을 당했는데 곧 죽어갈 것처럼 꺽꺽거렸다. 그 외 나머지라고 멀쩡한 건 아니었다. 다들 어디 한 군데는 부러져나간 채로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서문추조차 왼팔이 이상한 각도로 돌아갔고, 내부가 진탕되었는지 선혈을 연신 울컥거리고 있었다.
“아니 환상 속인데 어찌 목이 꺾이고 죽는단 말인가?”
“얼…… 얼굴을 스스로 뭉개버렸소이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입니까?”
“정녕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인 겁니까?”
다들 난리였다. 환상은 환상으로 끝나야지, 왜 엎어져 있다가 죽어버리고 뼈를 부러뜨리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그나마 백화장주가 마지막에 꺼낸 말이 정답에 가까웠다.
정신과 몸이 어디 분리되어 있음인가.
심상만으로 몸을 뜨겁게 달굴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음의 상심에 내부 장기가 손상을 입기도 한다.
피는 왜 뜨거워지는가.
눈물은 왜 저절로 흐르는 것인가.
그저 연모하며 바라볼 뿐인데 심장 박동은 왜 빨라지는가.
괜히 단장의 슬픔이란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십 년 전쯤 묵혈공자라는 놈이 그렇게 죽었다.
빙연침을 발출하지도 않은 현음신녀가 이미 네놈의 혈맥에 빙연침이 침투했노라 툭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그 밤 묵혈공자는 공포에 질렸다. 아침에 발견되었을 땐 몸에 서리가 낀 채로 꽁꽁 얼어붙어 죽어 있었다.
빙연침의 위력과 그 결과가 어떤지 알고 있었던 탓에 밤새 자기 암시에 떨다가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만약 묵혈공자가 빙연침이 뭔지 몰랐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터.
서문세가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추락을 현실로 받아들인 순간, 타격도 심상의 크기만큼 당하게 된 것이다.
후공은 호위대를 향해 손짓했다.
호위대가 신속히 달려와 서문추와 흑염귀멸대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과 부상당한 자들을 구별해 나누고, 서문추를 비롯해 상대적으로 경상을 입은 이들은 혈도를 점혈해갔다.
움직임에 머뭇거림이 없었기에, 지켜보는 명문가의 수장들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이리 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구나.’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서문세가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만한 착각이었다. 천화서고는 당당히 자신들의 힘으로 서문세가와 맞섰다. 초대한 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뿐이 아닌가.
“대공자님…….”
호위대 중 하나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회복 불능의 중상자들에 대해 어찌해야 좋을지를 묻는 물음이었다.
후공은 눈으로 훑어 상세를 살폈다. 죽이는 것이 깔끔한 일이었다. 상태가 중해 살릴 수 있는 확률도 없었다. 하지만 서문세가의 일원들을 천화서고가 결정할 건 아니었다.
바로 서문세가의 장로 서문봉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장로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흐음…….”
이미 오가는 대화를 들은 서문봉이 중상자 쪽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살아 있다고 해도 고통만 더할 뿐이겠지. 정리해주게.”
“네.”
후공이 호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가 돌아가 호위대에게 말을 전했다. 이후 몇몇이서 여기저기 움직여가면서 중상자들의 명줄을 끊었다. 이리되니 서문세가에 살아남은 건 서문추를 포함 열셋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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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내전으로 옮겨 둘러앉았다.
천화서고 대공자와 명문가의 수장 7인이었다.
여기에 후공은 윤을 한쪽에 참관토록 했다.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가. 견문을 넓혀주려는 의미였다. 개방의 취운개와 그 사제들이 왔을 때 곁에 있게 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회의의 포문은 서문봉이 열었다.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서문세가의 일원으로서 이런 일련의 사태를 막지 못했으니 부끄러움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군요. 서문추가 본시 음험하고 자기 사람이 아니면 다 내치기에 그저 가문 내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나 보다 했습니다. 정녕 이 정도로 패악을 부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큰 한숨처럼 흘려낸 말에 백화장주 묘운료가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의 누구라고 면목이 있겠습니까. 천화서고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면 또 뒷북을 울리고 있었을 테죠. 어떤 흉악한 무리가 날뛰었냐며 안타까워만 하면서 말이지요.”
“이번 일을 볼 때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많을 터인데, 명문정파를 자부하면서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저 곁에서 방관만 한 꼴이어서 심히 부끄럽습니다.”
이어 염화각주가 깊이 탄식했다.
청월문 장문인과 철금회주 등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연이어 안타까워했다.
반성에 탄식이 끝이 없을 듯 이어졌다.
이러다간 며칠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주위를 환기시키며 나선 건 개방의 취운개였다.
“자자,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탄식이든 환호든, 뭐가 됐든 다 끝내고 하십시다. 벌써 자정이 넘었지 않습니까. 후딱 정리하고, 해 뜰 때쯤에는 눈 좀 붙입시다.”
취운개의 말에 다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첨삭이 이루어지면서, 일식경 정도가 흐르자 대응 방안이 뚜렷해졌다.
요약하자면 단순했다.
이 밤 각 가문과 문파의 정예를 이끌고 서문세가를 덮치는 것. 단지 의논이 이어진 건 시간과 동선, 그리고 선행되어야 할 목표 인물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세부 사항을 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열심이네.’
지켜보고 있자니 후공은 무림맹 때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회의라는 건 따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면서도 몇몇 얼굴들도 떠오른다.
불쑥 무림맹으로 가볼까 싶었지만 이내 떨쳐냈다.
서두를 건 없었다. 이제 고작 이성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이었다. 삼대 호신기 중 고작 전혈만이 완전할 뿐. 허운과 통격도 아직 완전치 않았다. 현 수준은 잘 쳐준다고 해도 맹의 대주급에 불과했다. 당장 취운개와 겨룬다고 해도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검을 든다면 겨우 평수를 유지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
“대공자, 자네가 볼 땐 어떤가?”
논의를 마친 취운개가 물어왔다.
모두의 시선도 쏟아져왔다.
‘이 정도 일은 알아서 할 것이지.’
어째 모양새가 자신에게 최종 승인을 바라는 모습이었다.
이해는 된다. 단순한 예의 차원만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끌고 온 당사자이기에, 실질적으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없는지를 점검 받고 싶은 것이다.
“의논하신 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다들 역량이 출중하시니 무리 없이 마무리되겠지요.”
“좋네. 근데 참 희한하단 말이지.”
취운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어째 긴장감이 한 개도 없어. 무슨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태평하냐고. 천재란 것들은 다 이런가. 재수 없네, 아주.”
십대세가의 말석을 다투는 서문세가 따위를?
아무래도 이 녀석은 강호 경험이 더 필요해 보인다.
일말의 긴장이라도 하려면 현 강호에서 위세를 떨치는 남궁, 제갈, 모용, 팽가의 4대 세가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자, 그럼 출발해보십시다.”
취운개가 선언하듯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절규가 터져나왔다.
절규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고, 겹쳐지면서 여러 번 들려왔다. 모두 놀라 안색이 굳어질 때,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소천개였다.
“대사형! 할부지들! 서문이들이 폭주하고 있어요!”
“뭐?”
“은앙 사형 말로는 잠력을 격발시킨 것 같다던데, 눈이 엄청 빨간색인 거야!”
그 말에 일제히 뛰쳐나갔다.
후공과 윤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형님, 무슨 일일까요?”
“글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 봐도 상황은 훤했다.
‘잠력 격발이라니……. 서문추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