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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34화 (34/460)

34화. 허운은 풍익이 되고

잠력 격발.

이는 내재된 진원진기를 일거에 끌어내는 것이다.

생에 마지막 불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경맥이 급팽창되며 막힌 혈도를 풀어낼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고통도 잊게 된다.

어느 한 군데 부러진 것 정도는 움직임에 하등 문제 될 것이 없게 되며, 역량에 따라 본연의 내력보다 두세 배 정도의 힘을 일시적으로 쏟아낼 수도 있었다.

유지 시간은 길면 반시진(약 한 시간).

“윤아, 수비대들과 함께 서고의 가솔들을 통제해라. 누구도 각 전각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고 보호진을 가동해라. 그다음 할아버지 곁에 머물러라.”

“네!”

윤이 크게 대답하고 달려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대기하고 있던 송화와 네 호위, 그리고 부몽이 다가왔다. 호위 중 하나가 경과를 보고했다.

“마차 세 대에 나눠 싣는 중에 서문추가 먼저 발작했고, 뒤따라 경상을 입은 자들이 일제히 잠력을 격발했다고 합니다.”

사단이 난 곳은 북쪽 출입로 쪽 광장.

이미 교전이 진행 중이었다.

서문세가 쪽은 서문추까지 13명.

그에 맞서고 있는 건 27명.

수적인 우세와 달리 형세는 좋지 못했다.

취운개를 비롯해 장문인과 장주들이 가세하고 그들과 함께 온 몇몇 호위들, 그리고 천화서고의 호위대까지. 인원으로는 두 배가 넘는다지만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서문세가 쪽은 이미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거기에 잠력 격발의 효과까지 보고 있는 것이다.

12명이 서문세가의 정예 중 정예인 탓도 있고, 가주인 서문추만 해도 홀로 세 사람을 상대함에도 기세를 험악하게 떨치고 있었다.

상대가 취운개와 반광, 염화각주인 걸 감안하면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번씩 서문추가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니 당장이라도 위험천만 낭패를 볼 것만 같았다.

본래의 무위는 의미 없는 상황.

지금은 실력이 비슷한 자들의 대결이 아니라, 뒤가 없는 자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자들 간의 싸움이었다.

순식간에 호위대 셋이 부상을 당하고 이탈했다.

여기에서 호위대를 더 투입한다고 달라질 양상이 아니었다.

호위대는 도리어 거추장스러운 상태. 서문추와 서문가의 정예들은 괴물처럼 날뛰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서문추는 왼팔이 부러져 나가 덜렁이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신형을 뛰고 도는 모습이 여간 활기찬 것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형아, 뭔가 방법을 내 봐. 이대로 구경만 하고 있을 건 아니지? 천화서고는 천지사방이 진법이니까 신통방통한 뭔가를 발동시켜서 끝내버릴 수 있을 거잖아?”

소천개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답한 건 부몽이었다.

“소천개야, 저 자리에도 진법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저렇게 한데 어우러져 싸우고 있으니, 진법을 개진할 방법이 없구나.”

“우리 편이랑 나쁜 편이랑 그 정도도 진법이 구별을 못 한다구? 바보멍청한 진법이 다 있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이어 소천개가 시선을 바꿨다.

“대공자 형아, 그럼 형이라도 나서줘. 대사형 말로는 형아가 무척 강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단 말이야!”

소천개가 울상이었다.

‘번거롭구나.’

후공은 입을 쓰게 다셨다.

해결은 시간이 지나면 되는 일이긴 했다.

고작 반시진. 결국 기운이 쇠진된 후 저절로 지푸라기처럼 쓰러질 터.

하지만 그때까지가 문제였다.

기다리다 혹여 가주나 장문인 쪽에 부상자가 나왔다가는 괜한 손실이요, 일만 커질 뿐이다.

‘어쩔 수 없군.’

공략지점은 복애혈.

왼쪽 갈비뼈 하단, 비경과 음유맥이 교차하는 혈도다.

잠력이 격발하면서 단전의 폭발적인 기세가 기경팔맥으로 뻗어가는 관문으로, 그 복애혈이 찢기면 바람이 빠지듯 잠력의 흐름도 끊긴다. 서문이들에게 일검씩만 먹여도 쓰러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기 전, 후공은 안력을 돋워 격전의 상황을 살폈다.

복잡하게 얽혀들고 있는 장력과 검기와 칼날의 흐름.

한 명 한 명의 동선과 공격의 경로를 읽어나갔다. 각자의 무공이 변화를 어떻게 일으키는지, 각자의 반복되는 초식은 무엇인지, 보법의 특성까지 머리에 그려 넣었다.

“검을 빌리마.”

“네?”

호위가 놀라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스윽.

오른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우수에는 검을 뽑아내 쥔 상태.

무형보로 천천히 걸어 나아갔다.

뒤쪽에서 탄성이 터졌다.

“형아!”

“큰형님!”

“고, 공자님!”

방금 곁에 있었는데 대공자가 어느샌가 홀연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언제 어떻게 빼어든 건지 검까지 들고 멀어져 가니,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호위 중 하나는 자신의 허리춤에 검집만 달랑 걸려 있는 걸 보고 바보같이 빈 검집을 한참 내려다봤다.

후공이 무형보를 가속하며 격전 속으로 파고들었다.

첫 방향은 철금회주 쪽.

그는 장력에 머리를 격중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주춤거리고 있던 터.

스슷!

“커억!”

후공이 뻗은 검은 검광을 발하며 복애혈을 깊숙이 찢으며 나아갔다.

철금회주를 향해 장력을 내뿜던 서문세가의 정예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허물어졌다.

철금회주가 기겁했다가 무슨 일인지 놀라 주춤했다. 뭔가 스치는가 싶더니 상대가 맥없이 쓰러진 것이다. 그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번뜩이는 검광이 좌측을 휘저어갔다. 두 놈이 연거푸 쓰러져갔다.

‘대공자?’

비로소 알아본 철금회주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천화서고 대공자가 검격이 적의 가슴 아래 부분을 스칠 때마다 미쳐 날뛰던 서문세가의 정예들이 맥없이 푹푹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크윽!”

“윽!”

“커억!”

비명이 연거푸 터지고 서문세가 정예들이 쓰러졌다.

호위대와 다른 몇몇은 눈앞에서 상대하던 이들이 쓰러지고, 뒤늦게 적을 쓰러뜨리는 이가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공자의 신형은 빠른 것도 아니었다.

잠깐 정지해 있는 것 같다가 순간 사라져 몇 걸음 밖에 나타나는 식인데, 검광이 휘돌면 여지없이 하나씩 쓰러져가는 것이 신묘할 따름이었다.

그 동선이 너무도 간결하고 검격에 헛됨이 없으니, 움직임은 마치 바람 같고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런 상황은 후공이 검격이 검초에 얽매이지 않는 검법을 구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뛰어들기 전 다양한 변화까지 감안한 동선을 이미 마음에 담아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잡한 상황에 뜻밖의 변수가 어찌 없겠는가.

“헉, 범 공자!”

틈을 휘젓는 사이 백화장주의 장력이 공교롭게도 후공의 어깨를 강타해갔다.

“응?”

미처 피하기엔 늦은 상황.

순간 후공의 삼대 호신기 중 허운이 발동했다.

장력이 어깨를 때린 순간 후공의 신형은 바람에 밀려나듯 핑그르르 돌았고, 도리어 그 기세를 타고 휘돌아 검격을 이어갔다.

허운의 용법은 기의 반탄.

튕겨내거나 혹은 반탄을 받아들여 밀려난다.

밀려날 때는 바람에 휘말린 깃털과 같기에 풍익(風翼)이란 명칭이 붙어 있다. 아직 온전한 건 아니나 일격의 반탄이라면 지금 수준으로도 무리는 아니었다.

“크어억!”

“커억!”

돚단배에 순풍이 불어온 것처럼 순간 닥쳐오는 장력을 이용해 움직임이 빨라져, 도리어 두 놈을 찌르고 베어가니 비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열 명을 쓰러뜨렸을 때 격전의 양상은 확연히 기울었다. 이어 여러 방향의 합공에 의해 서문세가는 허물어졌다.

이제 남은 건 서문추뿐.

그는 이미 장내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터라 이젠 거의 발악 수준으로 장력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후공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은앙개와 백화장주가 가세하니 서문추는 대응이 불가능해졌다. 반광의 판관필이 심장을 꿰뚫고 동시에 취운개의 장력에 목이 꺾이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어차피 죽을 몸, 도리어 고통이 덜어진 죽음이었다.

서문추의 최후 발악이 그렇게 마무리 되자, 사람들이 일제히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목숨을 빚졌고, 누군가는 해를 끼칠 뻔했으며, 또 다른 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공자, 노부가 큰 신세를 졌네.”

철금회주를 시작으로,

“십년감수했네. 하마터면 자네를 다치게 하는 줄 알았지 뭔가.”

“허허, 무공을 익혔다고 분타주에게 듣기는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그려.”

“퀄퀄퀄,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앞으로 소문 따위는 안 믿어야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무위라면 강호에 신성이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명문가의 수장들은 찬사를 보내면서도 아직까지 믿기지 않아 누구 할 것 없이 얼떨떨한 표정도 동시에 떠올렸다.

그만큼 방금 전 본 광경은 평소 생각해온 천화서고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취운개가 언질을 주긴 했어도, 평소처럼 취운개가 너스레를 떤다고 여겼지 그대로는 믿지 않고 있었던 터. 그런데 방금 전 펼친 대공자의 검법과 움직임은 자신들 아래라고 생각하기 힘든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모두가 탄성만 터뜨린 것은 아니었다.

은앙개가 삿대질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야, 범항! 너 이 새끼, 진작 좀 나설 것이지! 하마터면 이 잘생긴 거지님께서 골로 갈 뻔했잖아!”

“사형, 형아한테 왜 그래. 거지가 아주 염치가 바닥이양.”

은앙개의 불만에 후르륵 달려온 소천개가 쏘아붙였다.

한가한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명문가의 수장들은 원래 계획한 대로 밤을 도와 떠났다.

***

다음 날 정오 무렵.

보고가 들어왔다.

서문추의 세력을 무리 없이 제압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합니다. 모두 감사의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대공자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었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서문가주와 정예의 부재.

서문세가 첫째 서문웅까지 오그라들고 뒤틀린 상황.

급습한 연합 세력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했겠지.

특히 서문세가의 모사인 백뇌를 사로잡으면서 피아를 정확히 구분해내니 혼란도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백뇌를 통해 과거의 만행 또한 추가로 밝혀내고 있다고 했다.

후공이야 담담했지만 천화서고는 잔칫집 분위기였다.

거대하고 막막하게만 보이던 서문세가의 위협이 끝난 것이다.

윤과 부몽도 기뻐 방방 뛰었다.

“형님, 정녕 하늘이 보고 있었던 것이겠죠? 하늘은 악인을 언제나 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큰형님,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것이 아닌가요!”

후공은 뚱해졌다.

‘이놈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서책은 진법서만 읽은 건가?

역사서도 꽤 봤을 놈들이 하늘이고 정의 타령이라니.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정의가 몰살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이유도 모르고 학살당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

서문세가의 외곽 작은 방.

그곳에 서문웅이 있었다.

대공자이자 장차 서문세가를 이을 것이 당연시되었던 서문웅. 그에겐 소원이 하나 생겼다.

그 소원은 여태 그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소원이니만큼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가문의 변화에 따라 차디찬 골방으로 옮겨져 방치된 마당이니, 어떻게든 소원을 이루고 싶었다.

“으어어……. 려찬……”

“네, 형님.”

서문웅 곁을 지켜주고 있는 건 표려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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