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5화 (35/460)

35화. 크흠, 성의를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요

서문웅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를…… 죽여다오……. 부디…….”

어눌하게 겨우 말을 맺었을 때 서문웅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표려찬이 따라 흐느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부디 내게 자비를…… 으어어…… ”

서문웅은 말을 맺지 못하고 기이한 신음을 발했다.

표려찬이 흐느끼는 줄 알았는데, 눈이 웃고 있는 것이다.

려찬을 봐 온 몇 년 동안 지금처럼 밝고 감격에 젖은 웃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웃음은 닮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이 려찬을 보며 짓던 웃음이었다.

“으어어…….”

표려찬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한다.

“형님, 생명은 고귀한 겁니다. 오래오래 사셔야지요.”

“으어어…… 으어어어어……”

표려찬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오자 서문웅은 손을 피하려 한없이 움츠렸다. 하지만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 미칠 것 같았다.

“형님, 참 사람 일 모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으어어…… 려…… 찬……”

“오래 오래 사실 겁니다. 형님을 보고 있으니 정말이지 흥이 납니다.”

“으어어어……”

“병신새끼. 후후후……”

표려찬의 미소가 더할 나위 없이 짙어졌다.

**

나흘 뒤.

천화서고로 손님들이 연이어 찾아들었다.

첫 손님은 서문세가의 장로 서문봉이었다.

그는 가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대공자와 마주앉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어찌 이리 서둘러 오셨습니까.”

“허허, 그 많은 일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러 왔을 뿐이네.”

“하하, 그렇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장로 서문봉은 서문추가 탈취한 천화서고의 보물들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사죄의 뜻을 담아 금궤까지 들고 온 터였다. 번잡한 상황에서도 성의를 다한 셈이었다.

“과거 피해 사례는 파악되었습니까?”

“죄가 무겁더군. 멸문에 이르게 한 가문과 문파가 다섯 곳이었네. 금수만도 못한 짓을 자행한 것이라,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를 정도일세.”

‘금수만도 못한 짓이라. 이 정도의 자책이라면…….’

후공은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전통의 명문가라는 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곪았다 해도 어디 전부가 그러겠는가. 가문 내 뛰어난 인물도 많을 것이다.

서문세가는 비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멸문시켰던 가문과 문파의 재건을 도울 것이다. 피해 보상으로 곳간은 텅텅 빌 것이고.

향후 십 년 정도는 봉문에 가깝게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지금 서문봉의 말은 그걸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다음으로 맞이한 건 대륙전장 부장주였다.

대륙전장은 서문세가와 혼담이 오가던 중이었고 그 대상이 서문웅이었으니, 십년감수 정도가 아니라 가문의 흥망의 기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마움을 어찌 표해야 할지 모르겠네. 진심으로 천화서고에, 그리고 자네에게 고맙네.”

“말씀이 과하십니다. 고마움이야 저희가 드려야지요. 대륙전장을 비롯해 명문가에서 기꺼이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면 본 서고는 크게 곤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하, 관전이 도움이라면 천하에 웃을 걸세. 확실히 해야지. 은혜는 은혜일세. 지금 본 전장은 서문세가의 일로 난리도 아니라네. 혼사가 깨져 안도하고 기뻐하고. 천화서고가 아니었다면 훗날 얼마나 큰 화를 입었을지 모른다며 아찔해하고 있지. 뭐 소한이 녀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울화를 터뜨리고 있지만 말이네.”

“눈에 선하군요.”

통통한 왕소한이 부루퉁 볼을 부풀리며 화를 내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후공은 웃음이 났다.

대륙전장의 부장주는 가져온 목함을 끌어다 앞에 놓았다.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네.”

“……?”

후공이 갸웃하는 것으로 물음을 대신했다.

선물이라면 천화서고 대공자가 아니라 가주에게 전해야 마땅한데 자신에게 내밀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장주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주께는 말씀드렸네. 솔직히 선물이라고 칭하기엔 선물이 아닐 수도 있고, 미안한 점도 있어서 그렇네.”

은혜라면서 미안하다?

이런 상황에서 맥이는 건 아닐 테고.

선물이라면서 선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또 뭔가.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부장주의 말이 이어졌다.

“일전에 천화서고에서 영약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네. 돈은 상관없으니 혹시 지니고 있는 영약이 있는지, 그도 아니면 구할 방도가 없겠냐는 이야기를 들었지. 하지만 고민하던 쯤 당시 총관의 재산 압류 건으로 불편해져 모른 척했다네.”

“영약을 가져오셨단 말입니까?”

“그렇네. 구하기 힘든 진귀한 것이지.”

영약을 구해달라고 했을 때 우선 주변 명망가부터 수소문했었던 모양.

영약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 다 지워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귀한 선물을 어찌 선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부장주께선 영약의 대가로 본 서고에 바라는 것이 있는 겁니까?”

부장주가 손을 급히 내저었다.

“바라는 것이라니, 당치 않네. 대륙전장이 돈을 좋아해도 은혜를 모른 척하는 무뢰배는 아닐세.”

“그럼……?”

“선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영초가 특이해서 그렇다네. 들어봤을지 모르겠네만. 하아…… 이게 뭐냐면…….”

“……?”

“영악초일세. 좋긴 한데 냄새가 심히 고약하지. 이게 어지간해선 사람이 복용할 수 없는 것이어서…… 어? 대공자…… 자네 괜…… 괜찮은가?”

부장주가 더듬거렸다.

대공자가 눈을 부릅뜨고 동공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화가 난 것도 같았다.

부장주는 후회막급하며 내심 탄식했다.

‘아, 역시 다른 걸 챙겨올 걸 그랬구나. 천화서고의 천재가 영악초를 모를 리 없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을 테지. 이를 어쩐다…….’

영약의 효능 면에선 대륙전장이 지니고 있는 것 중 으뜸이었기에 가문의 의논 결과가 영악초를 보내자였는데, 으뜸이고 나발이고 뭐든 먹을 수 있을 때라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던가.

부장주가 미안해한 건 그도 영악초의 지독함을 겪어보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대륙전장이 구한 영악초는 두 뿌리였다.

그중 한 뿌리를 가족들이 기세 좋게 나누어 씹어먹었다. 몸에 좋은 건 원래 입에 쓰다면서 그깟 것 못 참겠냐며 덤볐다가, 누구 할 것 없이 구역질과 함께 다 토해내고 물거품이 된 적이 있었다.

먹성 좋은 조카 왕소한조차 그 후유증으로 열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남겨진 한 뿌리는 이제 계륵이었다.

누구도 먹을 순 없지만 또 남 주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선물이면서도 선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밑밥을 깐 것이었는데, 대공자의 안색을 보니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지 않는가.

하지만 정작 후공이 경악한 건 기쁨에 찬 경악이었다.

육각망, 독양충과 함께 삼악으로 불리는 영악초를 이렇게 얻게 되다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는 것이다.

“대, 대공자……. 내 생각이 짧았네. 못 들은 걸로 해주게. 내 돌아가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해 오겠네.”

부장주가 목함을 끌어당길 때,

덥석.

손이 잡혔다.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대공자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성의를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무, 무시해도 되네. 이건 아무래도……”

“최고의 선물입니다.”

“괘,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영악초가 아닙니까.”

“그니까. 영악초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

정말 괜찮겠나, 라고 더 물으려다 부장주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어리거늘 그릇이 이 정도라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공자가 목함을 끌어다 놓고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마지못해 억지로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선물한 자신이 혹시 상심하고 민망해할까 봐 도리어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 먹는다 해도 다 토하고 말 텐데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는구나. 우리 소한이라면 진작 팽개쳤을 텐데…….’

부장주가 삼악에 대해 알았다면,

눈앞의 대공자가 육각망의 피를 쪽쪽 빠는 걸 보았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만, 그걸 모르는 부장주의 눈에 비친 지금 광경은 거의 부처님이었다.

게다가 독양충과 영악초를 구한다는 소식까지는 듣지 못했던 터이기도 했으니.

“대공자, 이번 선물이 전부라고 생각지 말게. 단단히 준비해 보답하겠네.”

“물론입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하하하!”

- 천화서고 대공자 사람이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더라니까. 아주 배려심이 넘치는 데다 남자야, 남자. 영악초가 뭔지 뻔히 알 텐데 그걸 그렇게 고마워하다니, 이게 쉬운 일이냐고.

대륙전장의 부장주가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입에 불이 나도록 감탄을 토해낸 건 당연했다.

**

천화서고에 찾아든 방문객은 계속 이어졌다.

제비뽑기로 순번을 정하기라도 한 것인가.

대륙전장 이후 염화각주와 백화장주가 차례로 찾아왔다.

한꺼번에 오면 좋으련만, 오후에 저녁에 나눠오니 맞이하는 것도 일이었다. 둘은 각각 청아주와 고급 피독주를 선물로 가져왔는데,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단 사흘간의 선물은,

서문세가의 금궤.

대륙전장의 영악초.

염화각의 청아주.

백화장의 피독주.

이런 식으로 선물이 한 달만 쏟아져 들어온다면 천화서고는 천하제일거부가 될 터였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백화장주가 돌아간 그 밤이었다.

“천화서고여, 우리가 왔다!”

“문을 여시오오오!”

“형아아아아아!”

취운개를 위시한 개방의 세 거지가 들이닥쳤다.

다른 이들은 선물을 들고 왔지만, 거지들은 그런 거 없었다. 고기 내놓으라고 난리였다.

천화서고 고기가 최고라면서 당장 많이 내놓으라면서 배부르게 먹고, 아예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에야 떠났다.

거지들까지 왔으면 이쯤에서 방문이 끝나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철금회주가 아들과 함께 천화서고를 찾았다.

아들은 일전 서문세가의 연회 때 만난 적이 있는 단강무였다.

“하하하, 범 형!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단 형, 다시 보게 되니 좋습니다.”

지난 연회 때의 단강무는 과묵하고 표정 변화가 드물었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얼굴로 웃을 줄도 아는 녀석이었나?’

친해지면 친해진 이들에겐 스스럼없이 밝은 이들이 있는데 단강무도 그런 성향인 모양. 그래도 반응이 거의 죽마고우급이라 도리어 후공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크흠, 철금회주가 생명의 은인이니 뭐니 단강무에게 떠들었나 보구만.’

자리를 권하고 마주앉자 철금회주가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반복되는 노래의 후렴처럼 한참이나 감사에 또 감사의 말을 하니, 후공도 어쩔 수 없이 했던 겸양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말씀이 과하십니다. 회주께서 본 서고를 위해 나서 주셨으니, 저희야말로 철금회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공자, 내 이 마음이 단지 자네에 대한 고마움뿐이겠나. 이 노부가 서문가주에게 도를 만들어준 장본인이네. 그 칼이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에 관여했겠나. 이번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죽음의 칼을 더 만들어 보냈을 테지. 내 죄도 무겁게 여기고 있네.”

철금회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서 후공은 장인의 자부심과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본시 쇠를 다루는 이들은 거짓된 자가 드물다. 뜨거운 불과 함께하며 오직 일념으로 쇠를 두드리는 이들. 사념이 일어나면 사념이 불순물로 남는다고 믿는 이들이다.

“대공자, 내 은혜를 입은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네. 자네 마음에 들었으면 싶군.”

세 개의 큰 목함이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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