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대공자가 어디까지 이를지 지켜보고 싶다
목함의 형태가 길쭉했다.
앞에 있는 이가 철금회주이니 모양새만으로 무엇이 들어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세 자루는 너무 과한걸.’
검법을 펼치는 것을 보았으니 검은 확실할 터. 하지만 서문세가에도 가주를 비롯해 수뇌에게만 한정해서 기껏 다섯 자루의 도만 건넸다고 했으니, 세 자루라는 사실에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표정에 담긴 의아함을 읽었는지 철금회주가 너털거렸다.
“검은 만병지왕이나 각자 펼치는 검법의 묘리에 따라 길이와 형태 탄성이 다르지 않나. 화산이 원하는 것과 청성이 원하는 것이 다르듯 말일세. 그러니 이중에서 자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선택했으면 하는 마음에 세 자루를 준비했네.”
바로 이해가 되면서도 후공의 기분은 묘해졌다.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가.’
과거 철금회주는 검을 진상하고 싶다며 맹에 서신을 보내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후공으로서는 웃고 넘겼건만 결국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철금회주가 눈짓하자 단강무가 좌측 목함을 열어 장검을 건넸다.
후공이 받아들어 들여다봤다.
검집이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검을 뽑자 푸른빛의 예기가 서슬 퍼렇게 드러났다. 검날의 예리함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티잉.
손가락으로 튕기자 맑은소리가 길게 울렸다.
소리가 높고 파동이 일정했다.
제련의 균일도가 극상이었다.
화산파에서 거액을 들여 철금회로부터 받고 있다는 검의 수준을 상회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떤가? 천화서고는 유물이나 옛 물건들을 잘 알 테니, 보는 눈이 남다르겠지.”
철금회주가 물었다.
곁에 앉은 단강무가 살짝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평가를 원하신다고?’
여태 보아온 아버지는 제련의 자부심이 누구보다 커, 자신의 완성품을 가타부타 평가하는 걸 같잖게 여겼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주면 고맙게 받아라’ 정도. 한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조바심을 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천화서고의 역량이나 안목이 대단하다 해도 이례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검 전체 제련의 균일도가 경이로운 수준입니다. 어느 한곳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사분할되어 있는 무게 배분도 훌륭합니다. 검병은 묵직하고 위로 가면서 7할, 5할로 무게가 줄고, 검 끝에 이르러선 그 중간 정도의 무게를 갖도록 했으니 정녕 누구나 원할 만한 검입니다.”
“하하, 과찬일세. 자넨 이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그러면서도 철금회주는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었다.
이어 두 번째 목함에 든 검이 건네졌다.
두 번째 검은 길이는 첫 번째와 비슷했는데, 검면에 은빛이 떠올랐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체가 얇고 탄성이 높았다.
살짝 내기를 흘리자 탄성이 더 올라갔다.
“어떤가?”
철금회주가 물으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바심을 내는 모습에 단강무는 다시금 미간을 좁혀야 했다.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겸비하기가 쉽지 않거늘, 이리 조화로움을 구현해내시다니 놀랍군요. 기를 받아들이면 탄성이 빠르게 변하는 성질 또한 경탄스럽습니다. 면검으로서의 효용성도 갖췄으니 다양한 변초를 구사하기 좋고, 화려한 검식을 구사하는 이라면 현란함은 더해질 테니 누구라도 탐을 낼 만한 명검입니다.”
“허허……. 그런가.”
철금회주가 웃으며 턱을 매만지면서 멋쩍어했다.
단강무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 보이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물론 슥 한번 바라보는 것만으로 검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천화서고의 대공자의 안목도 놀라운 일이긴 했다.
“점점 기대되는군.”
철금회주의 말에 후공은 세 번째 검을 받아들었다.
‘응?’
검집이며 검병(손잡이)이 낡아 있었다.
오랜 세월 누군가 지니고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과연 철금회주가 쓰던 검을 선물로 가져왔을까?
의문이 든 순간 안법을 전개했다.
안법 자령안(紫靈眼).
은신과 은잠을 투영할 수 있고, 일반 사물을 순간 몇십 배로 확대한 것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자,
‘오호, 이건 놀랍구나.’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후공으로서도 한참이나 들여다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이 낡음은 어이없게도 인위적인 흔적이었다.
정교한 세공으로 자연스럽게 사용감이 우러나오게 하나하나 흔적을 새겨 넣은 것이다.
“회주께선 멋을 아시는군요.”
“허허, 대단하네. 그걸 알아보다니.”
“속을 뻔했습니다.”
검을 뽑았다.
예기 대신 무거운 기운이 흘렀다.
긁히고 파인 흔적이 곳곳이었다. 안력을 돋워 확인하니 이 또한 한 줄 한 줄 섬세히 세공한 것이었다.
검날은 전혀 날카롭지 않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검을 갈고 다니라고 한소리 할 법한 둔탁함이었다.
검면도 평이했다. 아니 도리어 검을 비스듬히 들어 사선으로 바라보니 울룩불룩 얼룩이 비쳤다. 검을 튕기자 낮고 무거운 울림이 길게 이어졌다.
철금회주가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되는지 눈을 빛냈다.
후공이 검을 검집에 도로 넣고 입을 열었다.
“멋스럽고 마음에 드는 검입니다.”
“응?”
철금회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뿐인가?”
“네.”
담담한 말에 철금회주의 얼굴에 서운함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털어내듯 입을 열었다.
“이 중에서 자네는 뭘 갖고 싶나?”
“셋 다 제겐 과분할 정도입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첫 번째 검을 받았으면 합니다.”
“첫 번째 검을 말인가?”
철금회주가 놀라 소리쳤다.
그는 실망스럽고 의아해 이내 깊게 침음성을 흘렸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서문세가 가주와 흑염귀멸대가 폭주하던 그 밤.
그가 본 천화서고 대공자는 검극에 닿은 이었다.
화산파 장로 능량을 봤을 때와 같았다.
평생 검과 함께 해 검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대공자에게 있었다. 검을 우러르지 않고, 또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그저 검을 든 그 순간 어느샌가 검과 일체화를 이루는 검극에 이른 이들.
화산의 능량이 자신의 검을 보고 감탄했을 때만큼이나 천화서고 대공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기쁨으로 몰아갔거늘, 정작 세 번째 검을 못 알아보니 자신이 과대평가했나 싶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검을 집어 든 순간 검이 된 듯한 기운을 뿜어냈거늘…….’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모든 검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굳이 첫 번째 검을 고른 이유가 있지 않겠나.”
“두 번째 검보다는 첫 번째가 제게 적합합니다.”
“그럼 세 번째 검은?”
후공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 검은 회주께서 필생에 걸쳐 만드신 역작이 아닙니까.”
“어……?”
“제가 우연히 베푼 은혜로 세 번째 검을 택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따로 염두에 두신 검의 주인을 찾거나, 아니면 가보로 두셔야지요.”
철금회주가 놀라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건 사정을 알고 있는 단강무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자, 나는 자네가 알아볼 것이라고 믿었네. 내게 자세히 들려주지 않겠나. 부탁하네.”
“흐음…….”
후공은 침음성을 흘렸다.
표정만 봐선 철금회주는 거의 울 것 같았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던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갈망이 철금회주의 눈에 일렁였기에, 후공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돌아가는 길.
마차 안에서 단강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세 번째 검이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인지 단강무는 잘 알고 있었다. 그 검은 아버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처음 제련할 때부터 검의 주인은 정해져 있었다.
“너는 어떠냐?”
“네?”
무슨 뜻인지 몰라 단강무가 반문했다.
철금회주 단연청이 피식 웃었다.
“만약 네가 그 검을 처음 본 것이라면 말이다. 너라면 천화서고 대공자처럼 말할 수 있겠느냔 뜻이다.”
“그건 아닙니다.”
단강무는 순순히 인정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자신이 검을 제련한 사람처럼 그 하나하나를 설명했고, 그건 단강무에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대공자의 말인즉,
- 이 검이 평범함을 두르고 있는 것부터 마음에 듭니다. 멋스러움의 극치입니다. 하지만 진가를 드러내는 건 내력을 머금은 다음일 테지요. 최소한 검기를 다루는 이들의 손에 들렸을 때에야 본연의 기세가 발휘되도록 제련하시다니요.
기를 머금게 되면 검날은 무엇이라도 벨 수 있게 예리해지고 미세하게 제련의 강도가 다른 검면은 기의 흐름이 가속될 수 있게 구조화되었고, 울긋불긋한 층을 두신 건 대충 두드려서가 아니라 군데군데 현철이 가미된 흔적이겠지요.
현철이 구하기 힘든 값비싼 희귀 광물이어서 일부만 사용한 것은 아니실 겁니다. 단지 현철로만 이루어지면 무겁고 탄성이 아예 없어지기 때문이겠죠. 무거움은 차지하고라도 탄성은 검의 다양한 묘리를 다룸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까.
회주께선 현철의 배열을 마치 진법인 양 배치해 강도와 탄성을 조화시켰고, 그 배열로 검기는 물론이고 검강을 발현할 시 위력이 가중되게 제련해내셨으니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대공자가 말을 맺었을 때 단강무는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정녕 제련하는 내내 곁에서 지켜봤다고 해도 이처럼 물 흐르듯 검의 정수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 검의 본질을 꿰뚫으니 오싹 소름이 돋아났을 정도였다.
“검은 다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겠지. 이 애비는 천하제일인이자 천하제일검으로 불린 후공을 위해 검을 만들었지만, 후공은 뜻밖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느냐.”
철금회주의 목소리에 서글픔이 묻어났다.
“솔직히 내내 두렵기도 했다. 후공이 지닌 세 개의 검이 놀라울 터인데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보잘 것 없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아니 아예 진상도 못하고 쓸쓸히 돌아오게 되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
“결국 후공이 아닌 천화서고 대공자가 검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 애비는 왜인지 기분이 좋구나. 대공자는 생명의 은인이자 검을 아는 자다. 아직은 시작점에 있긴 해도 언젠가는 정점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정도입니까?”
단강무도 그의 진면목에 감탄하긴 했지만, 지금 아버지의 말은 천하제일인까지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서문세가의 연회에서 대공자의 손이 지나며 주무를 때마다 네 몸이 극락에 온 듯하고 등에 날개가 돋치는 것 같았다고 말이다.”
“네, 경맥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실로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손길이었습니다.”
“후후, 그래 이쯤이면 서문세가 대공자 놈의 발작도 짐작이 가지 않느냐?”
“설마…….”
“그렇지 않느냐. 날개를 돋치게 하는 자가 과연 날개만 돋치게 할까? 꺾을 수도 있을 테지. 이 애비는 즐거운 일이 생겨 기쁘다.”
“……?”
“천화서고 대공자가 어디까지 올라설지 지켜보는 것도 즐겁겠다 싶구나. 이 애비의 검이 대공자의 손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물론 학문에 심취해 검을 들 날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껄껄, 그럼 실망할 테고.”
**
청월문 장문인도 천화서고 방문을 열망했다.
천화서고의 진법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여전히 경탄스럽고, 천화서고 대공자도 알면 알수록 그 면모가 놀라우니 어떻게든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이미 다른 가문들이 천화서고를 다녀갔다는 소식을 접한지라 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딸을 불렀다.
“교인아, 함께 천화서고로 가자꾸나.”
“아버지, 무슨 일로 가시는 건가요?”
“그냥 가는 거다.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게지.”
“하지만 빈손으로 가기에는…….”
“선물은 이미 준비되었다.”
반교인이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요? 뭔데요?”
“너.”
“…….”
“나는 어떻게든 너를 대공자와 엮어야겠…….”
쾅.
문이 세차게 닫히며 딸이 눈앞에서 사라졌기에 반광은 머리를 긁적이며 퀄퀄거렸다.
“예비 사위에겐 천천히 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