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7화 (37/460)

37화. 형님이 저의 형님이어서 너무 좋습니다

스릉.

후공은 처소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역시 훌륭한 검이다.’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

장인의 노력과 정열의 산물이다.

철금회주가 선물한 이 검은 본래 자신이 지니고 있던 <번> <쾌> <친> 세 자루의 신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생명의 은인이네 뭐네 이런 낯간지러운 사연 때문에 검을 받은 건 아니었다. 과거 자신을 위해 검을 진상하고 싶다는 철금회주의 의중을 몰랐다면 받지 않았을 터.

분명 이 검은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리라.

검강에 최적화된 검이었으니.

오래된 흔적을 남긴 건 어쩌면, 늦게 전해졌어도 가장 오래된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걸지도.

번. 쾌. 친.

세 자루의 애검을 회수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다.

아니, 되찾는 것이야 수를 낸다면 어려울 건 없었다. 하지만 그걸 버젓이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많다. 해명해야 할 것이 한 가득이고, 그 전에 절도로 몰려 쫓겨다니게 될 터.

‘애검들은 나중에 찾아도 늦지 않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많지 않은가.’

일단은 영악초를 복용하여 경지를 끌어올려야 한다.

호신기 중 전혈만 온전할 뿐, 허운과 통격은 이제 겨우 형태를 갖춰갈 뿐이다. 제대로 된 적수나 위기를 만나게 되면 허운과 통격이 없이 살아남기 힘들었다.

독양충도 빠른 시간 안에 확보해야 한다.

독문, 약왕문, 그리고 천화서고와 더불어 삼대서고라 불리는 천금서고와 난화서고에 서신을 보내놨다고 했으니, 어쩌면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삼악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그리고,

후공은 검을 내려다봤다.

‘새로 얻은 이 녀석 또한 동화시켜 나가야 하고……. 크흠, 근데 이름을 뭐라고 짓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과 부몽이었다.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오만 불평을 토해내며 떠들썩하게 다가오는 것이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형님, 그렇게 안 봤는데 철금회주가 그리 속 좁은 인물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나요.”

“부몽아, 네 말이 내 말이다. 우리 가문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건지. 아니, 검을 가져오려면 하나만 가져오면 될 걸, 철금회주는 세 개나 가져와서 고르게 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원.”

“큰형님께서 차마 좋은 걸 못 고르고 가장 후진 검을 고르도록 유도한 것이 틀림없으니,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두 아우에 의해 최고의 역작을 선물하고도 철금회주는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었다.

철금회주는 지금쯤 귀를 후비고 있을지도.

“부몽, 이 형은 솔직히 들어온 선물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문세가야 그렇다 쳐도, 대륙전장은 무슨 생각인 거냐. 맥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영영 못 먹겠다 싶은 영악초를 가져오다니.”

“육각망에 영악초까지 뭐 몸에 좋다지만 이러다 큰형님 몸이 썩어나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철금회주의 검은 형태만 검이지 그냥 쇳덩이잖습니까.”

둘이 툴툴대며 거의 이르렀다 싶을 때, 후공은 검을 들고 나가며 아우들을 반겼다.

“아우들아, 왔느냐.”

“형님, 나오셨습니까?”

“큰형님, 인사드립니다. 쇳덩이 검 때문에 상심이 얼마나 크신가요.”

후공이 미간을 찡그렸다.

“쇳덩이? 부몽, 넌 무슨 헛소리냐.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에 둘도 없는 신검이다. 얼마나 대단하다고!”

“신검이라니요.”

“봐라.”

후공이 검을 빼 허공에 휘저었다.

붕붕~.

파리라도 잡을 것처럼 정신 사나운 휘저음이었다.

“어떠냐? 붕붕~ 소리부터 남다르지 않느냐. 이제 누구든지 내게 까불면 아주 다 썰리는 거다.”

붕붕~.

연신 붕붕대는 큰형님의 모습에 부몽이 그 모습에 눈물을 그렁거렸다.

같잖은 쇳덩이인데도 성의를 무시하지 못하고 기쁘게 받는 큰형님은 도대체…….

“큰형님, 제가 꼭 명검을 찾아 선물 드리겠습니다.”

“아니 이 미련한 놈이 왜 자꾸 신검이라고 말해줘도 못 알아먹어. 엉뚱한 소리는 그만하고 내게 온 용건이나 말해봐라.”

“아, 그렇지. 할아버지께서 찾으십니다.”

“그래?”

모반에 가담한 이들의 처리에 대한 논의라며 부몽이 설명을 보탰다.

“가자. 그렇지 않아도 나도 드릴 말씀이 있던 차였다.”

들어서니 가주 곁에 숙부가 먼저 와 있었다.

인사를 건네고 아우들과 함께 둥그러니 자리잡았다.

가주는 두루 덕담을 건넨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죄가 있다 해도 무거움과 가벼움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두려운 마음에 마지못해 가담한 이들에게는 돌이킬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함께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니, 그들을 내쫓는 선에서 끝냈으면 싶구나.”

총관을 통해 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자들이 누구인지 파악했고, 다각도로 검증까지 마쳐둔 상태였다.

이미 호위대주와 부대주는 뭉개진 채 서문세가로 보내졌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미 다수가 처리되었다.

문제는 협박과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합류하게 된 이들에 대한 처분이었다. 가주는 그들까지 죽일 순 없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가주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다들 동조하는 중에 큰 손자만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깊이 생각하는 모습에, 잠시 기다려주던 가주가 자상히 물었다.

“얘야, 너는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냐?”

금번 사건이 해결된 건 순전히 큰 손자의 공이였다.

큰 손자는 지휘관이었고, 매순간 대처가 명확했으며, 예기치 못한 능력까지 보인 터라 이젠 가문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곁에 없으면 안 되는 보물이자, 든든한 기둥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다른 의견을 낸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천화서고를 위한 일임을 가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절대적인 신뢰가 어디 가주뿐일까.

모두가 입을 떼기만을 기다릴 때 이내 후공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공은 잠시 무공을 폐쇄하고 내보낼까 생각했는데, 이내 몇몇 얼굴이 스치면서 마음을 접었다. 종무극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 저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죽어도 좋으나, 딸과 아내만은 부디 살려주십시오.

누굴 탓하겠는가.

굳이 모질게 굴 일은 아니었다.

금번 일련의 사태의 원인 제공은 이 몸인 것이다.

가주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 정리는 그렇게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고, 다음 의논할 일은 연맹에 대한 것이다. 일명 ‘안휘 북부 연맹’으로, 백화장주가 처음 제안했고 여러 가문에서 동의 의사를 밝혀왔다. 선한 우의를 품은 채로도 어려운 일에 대응이야 되겠지만, 공식적인 형태가 되면 더욱 긴밀한 협력이 가능하고 대처도 빠를 테니 괜찮다 싶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연맹이라. 백화장에서 먼저 제안했다니 잘된 일이다.’

연맹에 대해 후공도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이 자리에서 상황을 봐가며 말을 꺼내려 했는데, 뜻밖에도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니. 모양새로 따져도 다른 문파에서 제의하고 천화서고가 동조하는 편이 나았기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 후공이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부근의 문파나 가문들은 모난 돌이 없었다. 격이 떨어지는 오구문 광휘문 이런 곳만 걸러낸다면 최상일 터.

후공이 그렇게 내심 생각을 정리할 때 부몽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적극 찬성입니다! 솔직히 무림맹이 나타나 뭐라도 할 줄 알았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잖아요. 이참에 우리가 하나 만들면 좋죠!”

“저도 부몽과 같은 생각입니다. 후공이 죽었다고 맹이 경황이 없다기엔 벌써 석 달이 되어가니까요. 맹의 지부도 많다더니, 다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우들에 이어 숙부도 좋은 의견이라며 동의했다.

후공은 괜히 맹과 자신이 거론되자 퀭해졌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서문세가의 일은 끝난 것처럼 보이나 끝은 아직이니까요. 서문추의 인맥이 단순할 리 없고, 외척 세력의 반발도 있을 겁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그들이 본가를 위협할 모종의 행동을 할 소지는 충분합니다. 또 서문세가는 암중으로 내부 권력투쟁도 겪게 될 터라, 부근 명문가들이 연맹을 구축하는 것만으로도 반발세력을 억제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세부적인 설명이 나열되자 다들 눈이 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연맹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고, 아직 안심하기 이르다는 현실 인식에 경계심이 치솟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탄도 금치 못했다.

특히 두 아우 윤과 부몽이 그랬다.

큰형님은 평소 늘 태평해 보이는데 언제나 가장 깊은 곳을 응시하고 있으니 경외심이 우러났다.

“거기에 더해, 연맹이 결속할 때 본 서고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가주가 물었다.

“진법의 지원입니다.”

“진법이라…….”

가주가 말을 흐렸다가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사실 그렇지 않아도 각 명문가에서 내게 은근히 요청해오기도 했다.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가주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그 우려가 무엇인지 모를 후공이 아니었다.

진법이 외부로 공개되는 것이 꺼림칙한 것이다.

그런 소심함은 이제 떨쳐내야 할 때였다.

“진법을 지원할 시 얻게 될 이익이 많습니다. 수익에 대한 부분만 아니라, 부근 지역을 본 서고가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지원이면서도 동시에 저희는 진법을 통해 어느 곳이라도 드나들 수 있는 열쇠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각 가문에 모종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본 서고는 쉽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진법은 중상급 정도 선으로 지원하고, 설치시 본 서고에서 언제든 변형이 가능한 비밀 진식을 심어놓아야 합니다. 그들은 정해진 진법을 따르고, 천화서고는 언제라도 자유롭게 진법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

“…….”

가주가 멍해졌고, 숙부를 비롯 두 아우가 입을 쩍 벌렸다.

진법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던 건 진법의 묘용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에 대한 단순한 우려였다.

한데 천화서고 후계자는 도리어 명문가들을 천화서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통제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역발상.

진법의 묘리 중 무엇을 심어 두냐에 따라 방어진은 공격진이 되고, 교란할 수도, 가둘 수도 있었다.

뭔가 마음의 벽이 파삭하고 부서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가문이 지닌 힘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며 위협적이라는 자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네 말대라면 악용될 소지가 있다. 그건 어찌 생각하느냐?”

역시 예법과 신의를 중히 여기는 선비였다. 그렇게 신중한 목소리를 낸 가주는 뜻밖에도 큰 손자의 미소 띤 얼굴과 마주했다.

“할아버지께서 악용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

“그럼 누가 악용할까요? 숙부님입니까? 그도 아니면 여기 아우들입니까?”

“허허……”

가주가 멍청하게 너털거렸다.

빙 둘러 한 명 한 명 바라보니, 자신의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깨달은 것이다. 악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제대로 활용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가주의 너털거림은 결론이나 다름없었기에 숙부를 비롯한 아우들이 감개무량한 얼굴이 되었다.

“하하, 이러다 우리 가문이 천하제일가가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구나.”

숙부가 껄껄 웃었고,

“형님이 저의 형님이어서 너무 좋습니다.”

“큰형님 언제나 우리 편이셔야 해요. 정녕 큰형님께서 작정을 하고 살려고 하시니 굉장합니다.”

두 아우가 든든해했다.

‘작정을 하고라니…….’

후공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 정녕 글과 학문에 심취한 이 선비들의 순진무구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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