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8화 (38/460)

38화. 천화서고 대공자는 내일 죽습니다

밖으로 나와 두 아우와 걷자니 부몽이 자꾸 윤에게 눈짓하고 어깨를 쳤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형님, 내일 점심 때 시간을 내주십시오.”

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데 뜬금없었다.

“맛집이라도 찾은 거냐?”

“네, 홍미반점이라고 이번에 새로운 요리를 내놓았는데 맛이 끝내준다고 합니다. 한 입에 세상 시름을 잊을 정도라고 하니 이 아우가 모시고 싶습니다.”

“넌 없던 수줍음이 생겼나 보지?”

“네?”

“이게 머뭇거릴 말이냐?”

“하하, 아니죠.”

“명심해라. 맛집! 요리! 이런 거 말할 땐 망설이는 거 아니다!”

“헤헤, 명심하겠습니다.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후회하게 되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

그 밤.

홍등가의 불빛과 노랫가락 속.

개방 분타주 취운개는 한 사내를 미행했다.

사내는 오십대 초중반의 초로인으로, 눈이 가늘고 쥐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번화가의 끝자락 쯤.

한 객잔 앞에서 초로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넌 언제까지 따라올 참이야.”

뒤쪽 밤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거리에 먼지가 소용돌이치더니 휘릭, 선회하며 취운개가 사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마치 먼지를 타고 허공의 단면을 찢고 빠져나온 듯 신비로웠다.

“클클, 알았으면 진작 멈추시든가. 난 술래잡기 하는 건 줄 알고 계속 따라왔잖습니까.”

취운개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초로의 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술래면 잡든가. 귀찮아 죽겠네.”

“선배, 이야기 좀 합시다.”

“싫은데?”

“그러지 마시고요.”

취운개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눈빛이 차갑게 빛나며 푸르스름해졌다.

초로의 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알았다. 이 새끼야. 천하의 개방 분타주 나리께서 할 말이 있으시다는데 경청해야지. 아무렴 귀를 씻고 들어야지.”

“클클, 제가 선배에게 백초지적이나 됩니까. 저야 뭐 사부 잘 둔 덕이죠. 앉으시죠.”

“와아아, 누가 들으면 의자 있는 줄?”

취운개가 길바닥을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기에 초로의 사내는 어이가 털려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취운개는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면 푹신하게 제 무릎에 앉으시든지요.”

“까부는 걸 보니 제법 실력이 늘었나 보구나. 그래, 궁금한 게 뭐냐.”

둘이 나란히 벽을 기대고 앉았다.

“일견일사. 난데없이 안휘 북부에 선배가 나타났으니, 이번에는 누가 죽는 겁니까?”

일견일사(一見一死).

그가 나타나면 누군가 반드시 죽는다.

초로의 사내를 칭하는 여러 수식어 중 하나였다.

“일견이 뭐가 어쩐다고? 야, 그런 거 아냐. 나같이 정상인이 어딨다고 그러냐. 대체 이놈의 강호는 왜 이리 이상한 소문만 떠도는지 원.”

“에헤~ 왜 이러실까. 선배 그러지 말고, 재밌는 일 같은데 나도 좀 압시다.”

“거지새끼야. 나 좀 믿어다오. 내가 개방을 건드리길 하냐, 누구에게 시비를 걸기를 하냐. 왜 보자마자 죄인 취급인지 모르겠구나.”

“그럼 한 가지만 묻죠.”

“한 가지만이야.”

“서문세가와 연관된 일입니까?”

“전혀. 절대로 전혀.”

초로의 사내가 팔까지 교차해가며 부정했다.

“장담할 수 있습니까?”

“시발, 내 머리 열어서 보여주랴?”

“클클클, 그럼 더할 나위 없지요.”

“지랄.”

“그럼 쉬십시오.”

취운개가 히죽이며 일어섰다.

따라 일어나며 초로의 사내가 물었다.

“거지야. 근데 이번 서문세가 이야기 진짜냐?”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갑니다.”

“그래, 잘 가고 다시 보지 말자. 그리고 좀 씻고 다녀.”

취운개가 등을 보인 채로 손만 들어 흔들었다.

초로의 사내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서서, 취운개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코웃음쳤다.

‘멍청아, 천화서고냐고 물었어야지.’

**

초로의 사내는 바로 객잔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좌석마다 술잔이 오가면서 대화 소리가 요란했다.

“진짜래두. 서문세가의 몰락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이가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말이 파다하단 말일세.”

“개소리 말게. 천화서고가 신비한 곳이란 건 나도 아네. 하지만 헛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아니 무슨, 거기 대공자가 무공이 염화각주나 청월문 장문인에 버금간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네.”

“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이 있나? 뭔가 이번 사건에서 큰 역할을 했으니 다들 천화서고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 거겠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났던 천화서고 대공자가 왜 이리 사방팔방 오르내릴 지경이 된 건지 원.”

최근 장안의 화제는 단연 서문세가와 천화서고였다.

서문세가의 패악에 경악하는 한편으로,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번 사건을 해결한 중심이었다는 것의 진위를 놓고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초로의 사내는 사람들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 빈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점소이가 알아차리고 안내를 위해 잽싸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내 초로의 사내는 손을 휘저어 생각이 바뀌었다는 뜻을 보이고는 계단을 올랐다.

3층과 4층은 객방.

그는 4층까지 올라 복도를 걸어 중간쯤의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 탁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던 청년이 초로인을 돌아봤다.

청년의 기도는 남달랐다.

눈빛은 차분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해 헌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 선생, 이제 오십니까. 그런데 어찌 근심이 가득하십니다.”

“주 공자, 뭔가 잘못됐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여기에서 멈추는 게 좋겠어.”

“왜 또 그러십니까.”

“정황이 달라. 확인이 필요하네.”

“그만하시죠.”

“……?”

나직이 들려온 음성에 만박자가 미간을 좁혔다.

청년이 히죽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죽어 있다.

청년이 말을 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내일 죽습니다. 반드시.”

**

다음 날 정오 무렵.

산을 내려가는 윤과 부몽은 싱긍벙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바로 약속의 날인 것이다.

큰형님의 절친.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주양 형님을 만나는 날이다.

아직 큰형님께는 비밀로 한 터였다.

그야말로 큰형님을 위한 깜짝 선물이다.

상봉의 기쁨이 어디 큰형님뿐일까.

주양 형님도 달라진 큰형님을 보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윤과 부몽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네놈들이 헤실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맛에 자신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런 사실을 모르는 후공은 두 아우를 같잖다는 듯 바라봤다.

“네, 형님. 오늘이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맛을 보시게 될 겁니다.”

후공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네놈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믿으십시오, 형님. 제가 언제 형님께 헛소리를 한 적이 있던가요.”

“아하, 그러십니까. 그래서 그러셨구만. 응. 그래서 아름다운 얼굴과 복스러운 얼굴을 구분 못하셨던 거로군.”

아침나절에 풀려난 종무극이 인사를 왔었다.

아직 어린 딸과 뚱뚱한 여인과 함께 왔는데, 그만 못 알아보고 종무극에게 ‘네 처는 어디에 있느냐.’며 물었다.

일전에 윤이 말하길 종무극의 처가 아름다워, 종무극이 끔찍이 아낀다고 한 말을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종무극은 뚱뚱한 여인을 가리키며 웃었다.

- 대공자님, 이쪽이 제 처입니다.

순간 후공은 동공이 흔들려 지진난 줄 알았다.

어떻게 봐도 종무극의 처는 맏며느리감이요, 복스럽고 귀여운 상이었으니까.

“형님, 틀린 말이 아닙니다. 종무극이 아름답게 보니 저도 아름다운가 보다 하고 그대로 전한 거지요.”

“녀석, 뻔뻔해졌구나. 하지만 요리 맛도 ‘맛있게 먹으면 다 맛있는 거죠’ 따위로 둘러대면 각오해야 할 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윤이 전혀 겁먹지 않고 실실거리니 후공은 내심 갸웃했다.

‘평소와는 다른데?’

다른 뭔가가 있나?

아니면 홍미반점의 새 요리가 그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

그 시각.

홍미반점의 4층 창가에 주양은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전망이 좋았다.

맞은편에 앉은 만박자가 불편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양이 찻잔을 입에 가져간 후 물었다.

“만 선생께선 아직까지 불안하신 겁니까?”

만박자가 코를 찡긋하고 미간을 좁혔다.

“주 공자, 그러니까 내 말은 확인을 먼저 해보자는 거네. 돌다리도 두드린 후 건너면 좋잖나. 두드린다고 누가 뭐라고 하냐고!”

“만 선생께선 제 친구를 몰라서 하는 말이겠지요.”

느긋하게 돌아온 대답에 만박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니 시발 진짜. 확인만 하고 죽여도 늦지 않잖아.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려고!”

“후회는 없습니다.”

욕설에도 주양은 한없이 차분했다.

만박자가 오만상을 찡그리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오늘 애먼 사람을 잡는구나. 이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는데……. 어쩜 좋단 말인가.”

“흐음…….”

“흐음이 아니라고 지금.”

“흐음……. 어쩔 수 없군요. 이걸 보여드리는 수밖에.”

“응?”

주양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총 여섯 장의 서신이었다.

“만 선생, 이 서신은 범항이 제게 보낸 것들입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만박자가 한 장 한 장 정독을 끝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보라는 겐가? 그냥 모조리 안부 편지가 아닌가. 날씨 이야기, 잘 지내냐, 뭔 새가 지저귀고 꽃도 피고. 나랑 장난하나?”

“맞습니다. 그럼 이제 그 여섯 장의 서신을 순서대로 포개어서 보십시오.”

“포개?”

만박자가 날짜 순서대로 서신 위에 서신을 한 장씩 올렸다. 그러곤 꾹 눌러 반투명하게 비치게 한 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점점 눈이 커졌다.

“뭐……. 뭐 이런…….”

“네, 그건 저와 범항만의 암호 서신입니다.”

여섯 장의 서신이 겹쳐져 중첩되어진 형태 속에서 글자가 교차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서신이 되었다.

거기엔 날씨도 없고 정겨움도 없었다.

안부와는 한참 거리가 먼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 주양에게.

나는 살아있으나 죽은 자다.

나로 인하여 천화서고는 어둠에 잠겨 있다.

내가 존재하는 한 가문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너에게 죽음을 청한다.

날 아끼는 이들의 슬픔은 그때 비로소 그칠 터.

소망에 대한 너와 나의 약속.

나는 죽음을 염원한다.

너에게 그 선물을 청한다.

네가 외부에서 만나길 청하는 날.

그렇게 내가 밖을 나서는 날.

청부의 손길에 죽음을 맞게 하여라.

너는 은밀함 속에 머물러라.

누구도 내 죽음의 비밀을 알지 못해야 한다.

비밀 속에 내가 떠날 뿐.

- 범항.

주양이 서신을 거둬들였다.

만박자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섯 장의 서신이 모여 만들어낸 건 ‘청부살인’

이 글귀를 완성하려 정교하게 안부 편지들을 한 통 한 통 쌓았다니.

천화서고에서 서신을 검열해도 의심은 없었을 터.

“이제 믿어지십니까? 범항의 간절함이 느껴지십니까?”

“……”

“만 선생, 장담하신 대로 무극살부의 살수들은 믿을 만하겠지요?”

“걱정도 팔자군. 그나저나 이런 것이 있었으면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꽁꽁 숨겨두고 말로만 떠들다니.”

만박자가 눈을 흘겼다.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 만박자였고, 강호에서 그는 해결사로 통했다. 그에게 의논하면 무엇이 되었든 답은 금방이었고, 난해한 일은 해결되곤 했다.

물론 그의 도움을 얻으려면 거금이 들긴 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워 찾는 이가 많았다.

그 와중에 죽음이 피어나기도 하니, 그가 나타나면 누군가 죽는다 하여 ‘일견일사’로 불리기도 했다.

“잘될 테니 염려 말게. 무극살부는 강호 삼대 살수 조직 중 하나이고, 그들은 잘 죽이기로 명성 높거든.”

적혼부, 은자림, 무극살부.

현 강호에서 청부 조직에 있어서는 이 세 곳을 최고로 친다. 그중에서도 무극살부는 장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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