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누굴 탓하랴
만박자도 어이없긴 마찬가지.
“시발, 죽을 사람이여 저게!”
“…….”
욕을 하는 만박자의 말에도 주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주양이 넋이 나간 건 겁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도리어 기쁨이 너무 커 표현할 방법도 없고, 감당조차 안 된 탓이었다.
그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살수들을 고용하여 죽이려 한 것조차 범항의 소망을 들어주려 했던 그였다.
그런 친우가 살수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목을 꺾고, 심장에 칼을 박아버렸다.
“만 선생……. 믿어지십니까?”
주룩.
주양은 결국 눈물을 글썽이다 쏟아냈다.
“뭐가?”
“제 친구 범항 말입니다. 자신이 살겠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사람을 죽였어요.”
만박자가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걸로 감동한 거여? 시발, 아주 그냥 한 열댓 명 죽이면 동네잔치 벌이겠네.”
“제 마음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그래, 감동이여 맞어. 됐나?”
“하하하하!”
“어? 주 공자, 지금 감동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네.”
“그럼 뭘 해야 합니까?”
만박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안 보여?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쪽으로 달려오잖아. 아주 죽일 기세잖아. 아무래도 자네 잠깐 피해 있는 게 좋지 않겠어?”
안 보일 리 있겠는가. 주양도 보고 있었다.
친우가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무섭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주양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 반가워서 저러는 겁니다. 기뻐서 저러는 겁니다.”
“심하게 기쁘니까?”
“그렇지요. 범항과 저의 우정은 피보다 진합니다.”
만박자도 잠깐 갸웃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본인이 죽여 달라고 해놓고 이제 와 누구 탓을 하면 사람새끼 아니지.”
친구의 모습이 빠르게 가까워지자 주양은 좀처럼 진정할 수 없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만 선생, 엄청 잘 달리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람도 죽이고, 달리기도 잘하고! 정녕 기적입니다, 기적!”
오늘만큼 뜻 깊은 날이 있을까.
범항도 살고, 자신도 살았다.
주양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범항, 내 친구여! 어서 오게! 내게 날아오게!”
주양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환영했다.
날아오라는 것이 비유만은 아니었다.
범항의 무공이 어찌나 대단한지, 주양의 눈엔 실제로 날아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점의 1층에서 신형을 솟구쳐 도약해 처마를 딛고, 그 탄력으로 2층과 3층의 창틀을 연달아 밟으며 4층 창가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주양.
후공도 그에 호응해 손을 뻗어주었다.
곧바로 주먹을 날려 주양의 턱을 날려버렸다.
퍼억.
“으어억!”
주양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탁자며 의자를 부서뜨리고 널브러졌다.
한 방에 기절.
주양이 얼마나 빠르게 기절했는지 눈에 아직 기쁨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얼굴도 웃는 표정 그대로였다.
그런 주양을 향해 후공이 열불을 토해냈다.
“미련해도 정도가 있지. 서신을 보내 설명을 했으면 최소한 확인이라도 하고 손을 써야 할 것 아니냐. 도대체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범항의 기억을 지녔기에 이미 오늘과 같은 사태를 예견한 후공이었다. 그래서 미연에 방지하고자 송화에게 대필시켜 주양에게 서신까지 보냈다. 직접 대면하면 달라진 면모를 십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우들을 몰래 꾀어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천불이 날 수밖에.
그런 후공을 향해 만박자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허허, 범 공자……. 주 공자는 기절한 것 같네만.”
후공이 돌아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만박자?’
만박자가 순간 움찔했다.
시선이 닿으며 전신이 훑어졌다 싶은 순간 어째서인지 마치 자신이 발가벗겨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살수들을 처리한 솜씨가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훑는 눈길이 무슨 죄인 보듯 하니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시발 나도 패게? 그짝이 청부 요청했으면서 우리한테 이러는 건 아니지 않아? 죽여달랄 땐 언제고 죽일라니까 난리네. 그냥 여기서 나랑 한판 붙으까?”
후공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어느 한구석 틀린 말이 없는 것이다.
총관.
서문세가.
주양에게 살인 청부.
누굴 탓하겠는가.
모두 이 몸뚱이인 범항이 싸놓은 똥의 결과물이었다.
그나마 똥이 여기까지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범항의 기억 어디에도 더는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없었다.
‘그런데 만박자 이놈은 돈을 얼마나 받고 끼어든 건지.’
후공은 당연하게도 만박자를 알고 있었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아 일명 돈 귀신이라 불리는 놈이었다. 또 정보통이어서 강호를 활보할 당시 몇 번 써먹은 적도 있었다. 물론 무료였지만.
후공은 뚱하니 쳐다보다 다시 주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양의 호위로 보이는 청색 장포의 검수가 주양을 안아 들고 있었다. 검수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으로 보였기에 후공은 내심 코웃음 쳤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주인이 당한 걸 무심히 지켜보는 호위가 어디에 있을까.
호위가 따로 행동을 보이지 않은 건 주양이 경거망동하지 말라 미리 언질 준 결과이리라.
그런 점에선 주양이나 호위나 기특하기도 하고 희한해 보이기도 하는 후공이었다.
***
기절했다가 깨어난 주양은 천화서고에서 또 맞았다.
이번 매타작에 나선 건 천화서고 가주였다.
과거의 서신들이 암호이며 그것이 살인 청부였음을 알게 된 천화서고 식솔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가주는 대표 격으로 주양의 등짝을 때리며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힘들었느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어.’
그렇게 가주도 울고 주양도 울었다.
어릴 때 배움을 위해 천화서고에 온 주양에게 가주는 스승이자 할아버지였고, 가주에게 있어서도 주양은 제자이자 손자였던 것이다.
**
“짜악, 짜악, 소리가 대단하던데 몸은 괜찮나?”
“만 선생도 참. 스승님의 손이 걱정이지, 제 등이 아팠을 리가요.”
그 밤, 마련된 처소에서 주양이 만박자와 마주 앉았다.
“후후, 그나저나 고맙네.”
“뭐가 말입니까?”
“내 살아생전에 천화서고를 다 구경하다니. 내가 천지사방을 다 다녔어도 여긴 못 올 거라 생각했거든. 이게 자네 덕분이 아니면 누구 덕이겠어. 흐흐흐…….”
“제 덕분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 선생께선 제게 할 말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면 무서워서 저를 껴안고 주무셔야 안심이 되시는 걸까요?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만박자의 방은 따로 마련되었는데 차나 한잔하자며 이 밤에 찾아온 터였다.
주양의 농담에 만박자의 얼굴이 장난 아니게 일그러졌다.
“자넨 어디 가서 농담 같은 거 하지 말게. 들을 때마다 아주 썰렁해 뒈질 것 같아.”
“제가……. 그 정도인가요?”
“그래, 하나도 재미가 없어. 너무 춥고.”
“……네.”
주양이 시무룩해졌다.
만박자가 어깨를 툭 쳤다.
“주 공자, 지금 의기소침할 때가 아니네. 문제가 아직 남아있어.”
“문제라뇨? 무슨 말씀입니까?”
“청부가 아직 안 끝났어.”
“네?”
“잊었나? 정신머리 하곤. 청부 조직이 무극살부란 말이네.”
“아!”
그제야 떠오른 주양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무극살부는 무극이다.
끝이 없다고 했다.
청부 대상이 죽어야 끝난다는 말이었다.
범항이 달라져 삶의 의지를 불태울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라 임무완수 때까지 멈추지 않는 무극살부가 제격이다 싶었는데, 이젠 도리어 그러한 장점이 걱정거리가 된 셈이었다.
“설마 계약 취소가 전혀 안 되는 겁니까?”
“안 돼. 절대로.”
“그럴 리가요. 지급한 돈에서 다시 두 배의 금액을 지불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 정도 금액이면 무극살부가 거절하기 힘들 텐데요.”
“강호라는 곳은 말이네. 아주 복잡해. 상식 없는 놈들이 너무 많아. 또 돈이 다가 아니고 말이지. 아니 강호까지 들먹일 것까지도 없군. 막말로 자네도 돈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그냥 죽을 판이었잖나.”
“…….”
“이제 좀 심각성을 알겠나?”
“그래도 만 선생께선 방법을 아시겠지요?”
“내가?”
만박자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깜박였다.
“그럼 누구에게 부탁합니까.”
“안타깝지만 나도 답이 없네. 무극살부를 설득하는 건 나라도 불가능이야. 그건 그들만의 철칙이니까.”
“그럼 평생, 범항이 죽을 때까지 무극살부의 살수들이 따라붙는다는 겁니까?”
“그렇지, 평생. 범공자가 죽든 무극살부의 살수들이 다 죽어 나가든 둘 중 하나일세. 아마 살수들이 다 닳아지고 나면 무극살부 부주까지 나설 테지. 지독한 놈들이거든.”
“그런 겁니까?”
주양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런 거네.”
“근데 말씀을 듣고 보니 별일 아니다 싶습니다만.”
“별일 아니라고? 자네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건가. 잤어?”
정신 차리라는 듯 만박자가 주양의 눈앞에 대고 손뼉을 짝 쳤다.
주양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무극살부가 다 죽어 나간다면 끝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냥 이참에 무극살부를 멸살하죠. 어차피 살수 조직 같은 거, 있어 봐야 좋을 게 뭔가요.”
“응??”
만박자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너무 신박해서 잠시 뇌 기능이 멈출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인데,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그런 거여?”
만박자가 더듬거렸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살수조직의 고객이었던 주제에, 주양의 태세전환은 거의 초상비급인 것이다.
“네, 물론입니다. 이번에도 만 선생께서 도와주십시오. 다른 살수 조직을 고용해서 무극살부를 치면 되겠군요. 적혼부와 은자림이 무극살부와 대등하다고 하셨으니, 아예 두 곳을 다 고용해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상에나…….”
만박자는 반쯤 넋이 나갔다.
살수 조직을 고용해 살수 조직을 죽여 놓을 생각을 하는 놈이라니.
지금 말이 농담이었으면 제법 웃었을 것 같은데, 주양의 표정이 세상 진지했기에 만박자는 다른 의미로 추위를 탔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돈 지랄인가.
하지만 이 의견은 현실성이 없었다.
“발상은 참신하네만 택도 없네. 그쪽 업계에도 상도라는 것이 있어. 적혼부나 은자림이 그런 일을 하진 않아. 무조건 돈만 준다고 모든 청부를 다 받는 게 아니거든.”
“흐음……. 까다롭군요.”
“당연한 걸세.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예를 들어 소림 방장 목을 따달라면 그 청부를 받겠어? 또 그게 따지겠어? 개방 방주 죽여 달라면 찾을 수나 있고? 또 만약 천하제일인을 죽여 달라는 청부를 수락했다고 치자고. 그럼 어떨 것 같나? 살수들 다 죽는 거여. 아주 그냥 싸그리.”
“하아…….”
주양은 실망스러운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이내 웃음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만박자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보다 싶어진 주양이 눈을 빛냈다.
만박자가 실실 쪼갰다.
“이 친구,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천하에 고수들이 살수들만 있겠나? 여기저기 고수들이 한둘이 아니잖나. 그들을 불러모아서 무극살부를 박살내자고.”
“오호!”
주양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근데 돈이 많이 들 걸세.”
만박자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