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영약초의 공능
주양이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십니까.”
“내 수고비도 꽤 많이 들 테고.”
“물론입니다.”
“역시 시원시원하니 좋구만. 그럼 규모는 내가 알아서 꾸리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흐흐, 이름은 뭘로 할까나.”
“멸살단 어떻습니까?”
“직관적이고 좋구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신경 써주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만박자가 갸웃했다.
“살부의 멸살 전까지는 살수들이 움직일 테니, 그때까지 범항을 지키는 이들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천공단으로 하죠.”
“천공단? 천화서고 대공자를 지키는 이들?”
“그렇죠.”
“멸살단과 천공단. 알겠네.”
“이 이야기들은 범항에겐 비밀입니다.”
“으잉? 우리 무슨 이야기 나눴나?”
만박자가 짐짓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주양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지랄하십니다.”
“으잉. 하하하, 따라 할 줄도 알고. 이번엔 제법 괜찮았네.”
“하하하하!”
모든 것이 잘됐다.
주양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죽음을 확신한 오늘이었는데, 새로운 삶을 얻은 셈이었다.
***
주양과 만박자는 사흘을 머물다 떠났다.
좀 더 머물다 가라는 말에도 극구 사양하며 떠나니 가주를 비롯 여럿이 서운해했다.
후공도 의아하긴 했다.
어째 두 놈이 서두른다는 인상을 받은 탓이었다. 물론 내심으로야 빨리 꺼져줬으면 싶었다만, 진짜 빨리 꺼져버린 것이다.
‘너무 눈치를 줬나.’
살가운 대화는커녕 한심하다는 듯 몇 번이나 쳐다봤는지 모른다. 지들도 한 짓이 있어서인지 눈치를 슬슬 보면서 안절부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긴 만박자 녀석은 바쁜 몸이기도 하다.
어디 돈 나올 데 없나 찾으러 다녀야 할 테니까.
망나니 같은 놈.
어쨌든 두 놈이 떠난 건 잘된 일이었다.
후공은 하루 빨리 영악초를 복용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터였다.
대략 소요 기간은 이십여 일 정도.
길면 한 달을 예상했다.
먼저 가주를 만나 향후 일정과 가문의 방향에 대해 고했다.
허락을 구한 다음 실무를 위해 송화편으로 두 아우를 불렀다.
“형님께서 찾으신다고?”
“네.”
송화가 전하는 말에 윤과 부몽의 안색은 황급히 어두워졌다.
올 것이 온 것이다.
틀림없이 몽둥이 찜찔이었다.
자신들의 의도야 어떻든 이번 사건으로 하마터면 형님을 죽일 뻔하지 않았는가. 조용히 지나가나 싶었는데, 그걸 잊을 형님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만 전했어도 좋았으련만.
후회는 언제나 늦다.
“송화야, 큰형님께서 왜 부르신 것 같더냐. 기분은 어때 보이고?”
혹시 다른 이유일지도 몰라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송화가 씩씩하게 답했다.
“몽둥이 찜질일 것 같아요!”
“……”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두 분 어서 준비하세요. 이러다 매가 늘겠어요.”
“넌 어째 신나 보이는구나.”
“제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아시면서 그러시네요.”
말과 달리 송화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기에 윤과 부몽의 얼굴은 장난 아니게 일그러졌다.
주양 형님도 떠나고 여간 한가한 것이 아니다. 날씨도 화창해 딱 맞기 좋은 날이었다.
둘은 곧 채비한다면서 송화를 기다리게 한 후 서둘러 각자 바지를 두툼히 여러 겹 껴입었다.
하지만 정작 둘이 나아가 듣게 된 말은 ‘엎드려라’가 아니었다.
“윤아, 앞으로 한 달여. 가문의 일은 네가 책임자로 나서 일을 처리하도록 해라. 안휘 북부 연맹에 대한 논의와 진법의 선별, 추진까지다.”
“네? 제가 말입니까?”
뜻밖의 무거운 책무에 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큰형님을 바라봤다.
“그래. 할아버지는 연로하시고 숙부님은 활발히 움직이시는 건 아직 무리가 아니냐. 거기다 나는 오늘부로 영악초를 복용할 것이다. 영초의 효능을 최대한 받아들이려면 한동안 몸을 빼내기 쉽지 않다.”
“하지만 형님, 제가 어찌 그런 막중한 일을…….”
“마땅한 사람이 없어 널 지목한 것이 아니다.”
“네?”
“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야.”
“……형님.”
윤이 울컥해 눈시울을 붉혔다.
인정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것도 가문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는 형님이 담담히 인정해주고 있다. 각성 후 서문세가를 무슨 한 끼 식사하듯 대수롭지 않게 상대하고 굴복시킨 천재에게 받은 인정이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래서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나 보다.
형님의 마음도 모르고 그저 오늘은 매를 열 대만 맞았으면 좋겠다며 걱정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이 아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고 있다. 잘해낼 테지.”
“중요한 결정사항이 발생할 시 형님께 상의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다. 특별한 일이 발생하면 날 찾아와도 좋다. 하지만 예상컨대 별일은 없을 것이다. 연맹의 대표 선임 정도가 난맥일 터. 만약 그런 의논이 오간다면 본가는 관여하지 말고 일체 의견을 내지 마라. 누구로 결정 나도 큰 의미 없다. 그러니 그저 결과에 따른다고만 하면 된다.”
“네.”
“또 진법에 관한 것이라면 부몽의 재주가 너를 상회하니 도움을 받도록 하거라. 이 외 중차대한 일이라면 날 찾아오면 된다.”
“그리하겠습니다.”
“네, 큰형님!”
윤과 부몽이 동시에 답했다.
윤은 윤대로, 부몽은 부몽대로 칭찬을 듣자 절로 미소가 떠올랐고,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면서 좋아 죽었다.
“자, 그럼 대충 전할 말은 다 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네?”
뭔 소리인가 싶어 윤과 부몽이 눈을 깜박였다.
방금 본론이 끝났는……
그렇게 둘이 서로를 보며 갸웃거리기까지 할 때, 후공이 밖을 향해 나직이 불렀다.
“송화야.”
“네, 공자님!”
송화가 벼락같이 나타나 몽둥이를 건넸다.
윤과 부몽이 기겁했다. 큰형님이 몽둥이를 받아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지 않는가.
“혀, 형님!”
“큰형님, 살려주십시오!”
둘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지만 얄짤 없었다.
“니들이 잘난 건 잘난 거고, 맞을 건 맞자. 엎드려라. 맞기 좋게!”
“형님, 다시는 그 어떤 것도 형님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큰형님, 저도요!”
“그럴 테지. 똑똑한 아우님들이시니까. 후후, 사실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걷기도 힘들 정도로 두껍게 옷을 껴입고 온 걸 보니 성의를 무시할 수 있어야지. 봄인데, 이놈의 자식들 감기 걸린 줄!”
이윽고,
빠악!
빠아아악!
두 아우가 비명을 내지르고 신음과 함께 엉거주춤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둘을 보낸 다음 후공은 송화와 네 호위들을 불렀다.
“영악초의 악취는 육각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 탓에 나는 외부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서재 안 겨울진법 안에서 영악초를 복용하고 머무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희는 내 호위들이고 날 걱정하는 마음이 클 테니, 당연히 진법 안으로 함께 들어가고 싶을 테지. 그렇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송화를 포함 네 호위가 소리 높여 답했다.
후공이 눈을 가늘게 뜨며 갸웃하자 다시금 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희는 일체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다들 이젠 어느 정도 적응한 터.
말귀가 트여 의중을 바로 파악했다.
대공자의 뜻인즉 귀찮게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대공자는 명령할 뿐 묻는 성향이 아니었다.
“이런…… 네놈들 충성심이 약해졌구나.”
“그렇습니다.”
이번 대답도 빠르고 단호했다.
대공자의 시선이 유일한 희망인 양 송화를 향했다.
“송화, 잘 생각해 봐라. 너의 충성심은 다르지 않느냐?”
“공자님, 저는 처음부터 충성심 같은 거 없었는걸요.”
“그…… 그랬어?”
“넵!”
“크흠. 난 이제 지옥에 들어가거늘, 고얀 놈들.”
대공자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에 호위들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격세지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었다.
주인을 홀로 둔다는 건 자살 방조요, 간접살인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지금의 주인은 죽이겠다고 덤비는 살수들의 목을 가차 없이 따버릴 정도이니, 죽을 것이 염려되는 것이 아니라 이젠 누굴 죽여버리는 것이 아닌가 염려해야 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미 주인의 무공이 자신들보다 월등하다는 걸 알기에 도리어 지킴을 당할 처지였다. 호위한답시고 겨울 속으로 들어가 봐야 악취만 맡고 괴로울 따름.
“다녀오십시오!”
걱정만큼 쓸데없는 일이 없다.
호위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
그로부터 이십여 일 후.
새하얀 눈으로 덮인 겨울 진법 안.
두드득, 두득.
후공은 영악초의 공능을 확인했다.
경지의 가늠은 교릉.
일 보를 디디며 몸이 빠르게 오그라들었다.
서너 살 아이처럼 작아졌다.
이 보를 딛을 때 본래의 형태로 순식간에 돌아왔다.
세 번째 걸음에는 다시 작아졌고, 네 번째는 어김없이 회복되었다.
그렇게 십여 보를 딛고 나서 멈췄다.
뼈마디가 축소되고 근육이 응축되는 속도가 말로 할 수 없이 빠르다. 근육의 통제와 내부 장기와 혈맥과 세부신경까지 온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이제 어지간한 급습에는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할 터.
후공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영악초의 악취를 버텨낸 보람이 있었다. 육각망이 시궁창에 잠수하는 것이라면 영악초는 극도로 매캐하고 시큼하고 몸이 타들어가는 기묘한 악취였다.
그 결과물은
무형건곤심결 3성 초기.
매순간 1성을 뛰어넘는 건 이미 지나쳐온 길이라 해도 결코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만약 영악초가 아니었다면 3성까지의 회복에 1년여를 보내야했을 것이다. 그걸 이십여 일 만에 이룬 것이다.
3성에 이르며 여러 변화가 찾아왔다.
안력을 돋워 자령안(紫靈眼)을 펼치자 눈동자에 자줏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저 멀리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의 형태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기감도 상승했다.
상승한 내력은 기경팔맥의 세맥 깊숙이 스며들어 허허로움이 더해졌다. 경지가 높아져 가면 점점 더 먹물서생으로만 보일 터였다.
삼대 호신기는 비로소 온전해졌다.
전혈. 허운. 통격(通擊).
전혈은 일시적으로 혈도의 위치를 바꾼다. 유지시간도 일각에서 이각으로 늘었다.
허운의 반탄도 더욱 섬세해졌다.
통격은 이제 운용이 가능해졌다.
허운과는 반대되는 공법인 통격은 반탄이 아닌 충격을 흘려보낸다. 맞닿아 있다면 충격을 통과시키고 전이한다. 그것이 딛고 선 땅이든 물체든 타인이든 닿아 있다면 고스란히 그쪽으로 가게 한다.
격산타우(隔山打牛)와는 상반되는 작용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중수법인 격산타우로 겹쳐진 세 장의 기와장을 내리칠 경우, 타격한 첫 기와장은 그대로이고 그 아래 두 번째 세 번째 기와장만 깨져나간다.
통격은 스스로 첫 기와장이 되는 격이었다. 받아야 할 충격을 맞닿은 두 번째 세 번째 그 무언가에 전이시키는 것.
허운의 반탄이 모든 공격에 유효한 것이 아닌 탓에, 통격은 호신에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또한 근접한 다수와의 접전에서는 그 쓰임새가 단순히 호신에 그치지 않는다.
‘둘을 얻고 보니 이제 독양충이 기대되는군.’
영악초의 성과가 만족스러웠기에 삼악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독양충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다. 삼대악취를 모두 얻을 경우 오대영물급의 공능에 이르는 것이다.
후공은 진법 안에서 열흘을 더 머물렀다.
자신의 의식과 새로 얻은 검을 잇기 위함이었다.
일명 검연(劍連).
검을 끌어옴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허공섭물처럼 기를 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과 연결된 검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
검연은 후자.
검과 일체를 이루어 기운을 인지시킨다.
주인임을 인지시킨다.
검과의 동화이며, 진정한 신검합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후공은 검에 이름도 주었다.
- 령(靈).
환혼으로 얻게 되었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사흘에 걸쳐 연성하고, 이후 분절칠십이검식을 펼치며 설원 위에서 검무를 추었다.
검초를 수련한 건 이미 초식에 구애받지 않음에도 이 몸에 체득해두기 위함이었다. 몸에 체득해둔 후 구애받지 않는 상태 속에 자신을 놓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검식을 펼치며 ‘령’과의 동화를 이루기 위한 뜻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