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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42화 (42/460)

42화. 무림맹과 약왕문

분절칠십이검식은 검식의 기본이자 다양한 변화를 부릴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분절(紛節)이란 흐름을 끊는 것.

상대의 경로를 어지럽히며 검의 길을 흩뜨리는 파검식.

장법을 흐름을 끊는 파장식.

파권식, 파도식, 파암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열흘.

이 장여 앞에 검을 꽂아두고 후공은 가부좌를 틀었다.

검연의 결과를 확인할 차례였다.

기는 일체 운용하지 않은 상태로 검을 의식으로만 부르는 것이다.

“령! 내게로 오라.”

준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공은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처음부터 바로 성공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와라!”

…….

검은 묵묵부답.

후공이 너털거렸다.

“녀석, 쑥스러운 게냐. 괜찮다. 냉큼 오너라!”

다시금 반응은 무.

“자자, 이리 온. 쭈쭈쭈쭈쭈!”

강아지처럼 살갑게 불러봤지만 그래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넘어가는 내내 한 사람은 부르고, 한 놈은 석상처럼 꿈쩍도 안했다.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고 정겨움을 담아 봐도 소용없어 서로 쳐다만 보는 상황이 이어지니 후공은 크게 실망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꿈틀조차 없으니 서운할 지경이었다.

“적당히 하고 오면 좋잖아!”

…….

“에잇, 됐다 이놈의 새끼야.”

한마디 던져주고는 서책을 움켜쥐었다.

겨울 풍경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서재로 바뀌었다.

***

밖으로 나왔을 때, 후공을 기다린 건 뜻밖의 손님이었다.

송화의 득달같은 보고에 후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맹에서?”

“네, 도착은 사흘 전으로, 지금까지 공자님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흐음…….”

무림맹.

정확히는 무림맹 안휘지부장의 방문이었다.

안휘지부장이 누구였더라. 후공은 기억을 더듬었다.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존재감이 없던 놈이었나.’

후공은 생각을 미뤄두고 물었다.

“안휘지부장 이름은?”

“몽연몽이라 들었습니다.”

“흠, 그놈인가?”

“공자님, 그놈이라뇨?”

“아니다.”

송화는 더 캐묻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이미 겪은 바, 혈우독 이후 주인은 한 번씩 아는 척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무슨 일이라더냐?”

“여쭤도 웃기만 하시면서 직접 공자님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흥, 꽤 거창하군.”

서문세가 사태 때는 안휘지부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사흘간 진득하게 기다리다니.

콧방귀를 뀌고 있으려니 송화가 바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 한 가지 소식이 더 있답니다.”

“응?”

“보름 전쯤 약왕문에서 한 통의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주님께서 살펴보신 후 무척 기뻐하셨어요.”

“오호! 약왕문이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굳이 서찰 내용을 보지 않고도 후공은 대충 짐작이 되었기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송화도 따라서 활짝 웃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도 주인이 기뻐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공자님, 어디부터 모실까요? 아무래도 무림맹보단 가주님부터 보셔야겠죠?”

“넌 눈이 나빠진 모양이로구나.”

“네?”

보고에 정신 팔려 있던 송화는 그제야 주인의 옷이며 수염이며 추레해진 모습을 인지했다.

지금 최우선 순위는 목욕물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공자님, 바로 준비할게요.”

***

후공은 먼저 가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왕문의 서신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안휘지부장을 접견했다.

“허허, 대공자 반갑네. 이거 듣던 대로 자네 인물이 아주 훤하구만.”

오십 대 초반.

눈가에 웃음주름이 가득한 몽연몽이 반겼다.

특이한 건 눈썹이 팔(八)자 형태로 축 처져 괜히 안쓰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래, 이 녀석이었군.’

대면하자 후공은 바로 기억이 선명해졌다.

호호검 몽연몽.

무림맹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늘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고 성격이 느긋해 별호가 호호검(好好劍)이었다.

뭐든 좋은 게 좋은 거지, 혹은 좋구만 좋아, 정도.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다 좋다고 껄껄거리는 녀석이고, 분란이 일면 싸우면 안 된다고 걱정이 태산 같은 놈이라고 했다.

“귀한 분이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앉으십시오.”

자리를 권하자, 앉으며 몽연몽이 껄껄 웃었다.

“허허, 유명인사를 마주보니 신기하네그려.”

“제가 유명인사가 된 겁니까?”

“말도 말게.”

몽연몽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안휘의 어딜 가도 온통 자네 이야기뿐이네. 서문세가에 경악해야 맞는데 어찌된 게 다들 천화서고 대공자에 대해 경탄하고 있지 뭔가. 그런데 직접 보니 그럴 만하다 싶구만. 허허, 천재가 정신을 차리니 세상이 뒤집어지네그려.”

후공이 심드렁하니 말을 받았다.

“세상이 뒤집혔는데 무림맹 인사는 다 뒤집히고 나서야 보게 되는군요.”

갑작스런 추궁에 몽연몽이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무안하구만. 그 점은 내 소홀했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함세.”

“물론 사정이 있으셨을 테지요.”

이유가 없을 리 만무.

후공이 추궁한 건 질책보단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이네. 아무렴, 사정이 있었지. 아, 그걸 생각하니 또 두통이 이는구만. 안휘 남부에서도 꽤 큰 소동이 벌어져 정신이 한 개도 없었다네. 갑자기 요상한 놈들이 튀어나와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그걸 수습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지 뭔가.”

“한둘이 아니었나 봅니다.”

“말도 말게. 한 놈은 어디서 기연을 얻은 모양이야. 아주 신이 나서 문파마다 도전장을 내밀고 다니면서 하나씩 깬다고 난리법석이었지. 거기다 조용하던 천잠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시비를 걸고 다녔다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고 난장판이었거든.”

“천잠이? 그럴 리 없을 텐데요.”

“응? 자네가 천잠을 아나?”

“흠…….”

“……?”

“얼핏 듣기만 했습니다.”

천잠과는 인연이 닿아 있는 후공이었다.

하지만 안다고 말하면 괜히 복잡해질 터, 후공은 얼렁뚱땅 답했다.

“사람 싱겁긴. 난 또, 잘 안다고.”

“그런데 무슨 시비였습니까?”

“말해 뭐하겠나.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괘념치 말게.”

후공은 궁금했지만 괜히 캐묻는 모양새라 입을 다물었다.

천잠에 관해선 따로 알아보면 되는 일.

“그런데 오신 이유는?”

“맞아. 그 이야기를 해야지.”

껄껄 웃으며 몽연몽이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무림맹에서 자네를 초청했네. 인재 영입인 걸세. 놀랍지 않나?”

“…….”

후공은 뚱해졌다.

얼마 전까지 무림맹주였거늘 인재 영입을 당해버릴 줄이야.

그 모습을 놀라 그러는 줄 오해한 몽연몽의 목소리가 커졌다.

“무림맹은 말일세, 아무나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네. 하지만 뛰어난 인재를 가만두지도 않지. 무림맹이 인정하는 천재!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 천하를 위해 자네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해보게. 무려 무림맹 군사의 추천으로 이뤄진 일이라네.”

“제갈혜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목소리에 몽연몽의 눈이 반짝였다.

“오호, 자네 제갈군사와 아는 사이인가?”

“크흐흠……. 제갈군사의 재주가 특출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몽연몽이 미간을 좁혔다.

“자네, 이상한 버릇이 있구만.”

“……?”

“다짜고짜 일단 아는 척하고 시작하는 거 말이네. 그러면 못써. 난 또 이름 부르길래 엄청 친한 줄 알았잖나.”

“크흠.”

몽연몽이 핀잔을 주었지만, 어디 후공에게 제갈혜가 친한 정도인가.

제갈혜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부터 안아들고 귀여워했던 후공이었다. 볼에 뽀뽀하라면 뽀뽀하는 척하고 볼을 깨물어버리곤 해서 그렇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였다.

“뭐 그건 그거고. 제갈군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하네만, 제갈군사는 맹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네. 맹을 떠났거든.”

“그렇습니까.”

“후공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에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넋이 나갔다더군. 그럴 만도 하지. 맹주는 제갈군사의 대부였고 혈육이나 다름없었으니까.”

“…….”

후공은 고개만 끄덕였다.

죽음도 죽음이지만, 사인이 자살이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제갈혜가 제일 먼저 주검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컸고, 그러했다면 보고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군사 자리는 모용곽이 이어받았지. 그도 뛰어난 인물이네.”

“맹에서 저에게 요구하는 일이라면?”

“맹은 자네가 암부에 합류해주길 바라고 있네. 암부가 어떤 곳이냐면…….”

몽연몽이 암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후공에게 이 설명은 들으나마나였다.

암부(暗府).

원 명칭은 암호해독부.

강호무림의 세력들은 각기 자신들만의 암호를 사용하는 탓에 그들의 비밀 문건을 입수했을 때 해독해내는 역할을 맡는 조직이 암부였다. 또 암부는 무림맹 내에서 사용하는 암호체계를 만들고 변형하며 문서를 암호화한다.

암부의 인원은 다섯.

한 사람 한 사람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암부에 천화서고 천재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라면 일단 그럴싸해 보이긴 했다.

그렇게 내심 생각하고 있자니, 몽연몽이 암부에 대한 설명을 마쳐갔다.

“……천화서고 천재라면 암부에서도 으뜸이 될 테지. 어떤가? 더 큰 세계에서 자네의 천재적인 재능을 꽃피워 보는 것이.”

“거절합니다.”

“어?”

예상치 못했는지 몽연몽이 입을 벌린 채 멍해졌다.

눈도 붕어처럼 깜박깜박대다가 쉰소리를 냈다.

“왜에에에?”

“제갈혜가 맹에 없지 않습니까. 그럼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아니, 이유가 뭐 그런가? 제갈 군사가 아름답긴 해도, 맹에는 다른 미녀들도 많다네.”

“그럴까요?”

“어……. 사실 자네 말이 맞긴 해. 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거절할 셈인가? 농담하지 말게나. 자네라면 장래가 유망하단 말이네. 암부에서 몇 년 지내면서 능력을 입증하면 장차 맹의 군사까지도 가능할 테고 말일세.”

“군사라……. 무림맹주도 아니고 군사가 정점이라니, 흥미가 더욱 떨어집니다.”

“으잉, 맹주 하게?”

몽연몽의 표정이 가관이라 후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몽연몽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머리만 긁적였다.

그러다 중요한 뭔가가 떠올랐는지 무릎을 탁 하고 쳤다.

“이런! 내가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렸구만. 자네가 맹에 온다면 특별한 선물을 준다더군. 무려 영단이네. 구화단이란 것인데, 내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되는 단약일세. 나도 십 년 만에 겨우 한 번 받았을 정도로 귀한 영약이지. 자네가 무공에도 관심이 많고 이미 기량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이 정도면 정말 특별대우인 게야.”

“흠, 구화단이라…….”

“당기나?”

“지부장께선 여기가 천화서고란 걸 잊으신 모양입니다.”

“……?”

갸웃하며 의문을 띠던 몽연몽은 이내 말뜻을 이해하고는 급 시무룩해졌다.

이곳은 천화서고인 것이다.

구화단 수준의 영약을 천화서고가 구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의미를 둔다면 무림맹의 하사품이란 점인데, 도통 갈 의사가 없다 하니 몽연몽은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의기소침해진 탓에 안 그래도 팔자인 눈썹이 더 아래로 축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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