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강호로, 노래와 함께
그런 지부장을 후공이 미소로 다독였다.
“너무 상심 마십시오. 제안은 과하고, 충분히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은 아니더라도 언제 또 기회가 되거나 인연이 닿으면 제가 맹에 갈 일이 있을 테지요. 사람 일이란 게 어찌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중히 말을 건넸지만, 몽연몽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
“그래, 약왕문으로 가겠다고?”
“네.”
안휘지부장을 보낸 후 후공은 가주에게 앞으로의 길에 대해 알렸다.
약왕문.
약에 미친 문파.
약왕문에 없다면 그 약은 세상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런 약왕문이 보내 온 서신 속에는 큰 선물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독양충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온 것이다.
육각망을 취한 후 후공은 가주에게 영악초와 독양충을 구해달라고 했고, 가주는 당시 그 뜻을 바로 알아듣고 세 곳에 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그중 약왕문에서 연락이 온 터.
생각보다 빠른 회신이었다. 후공조차 강호를 활보할 시 약쟁이라 부르기도 했던 약왕문이니, 그들이 독양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영악초는 뜻하지 않게 대륙전장을 통해 얻었고, 남은 하나 독양충만 취하면 삼악을 이룰 수 있다.
“흐음…….”
가주가 침음성을 흘렸다.
삼악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약왕문이 다른 요구조건 없이 너만을 지목한 것이 걸리는구나. 그들은 정파와 사파의 경계가 모호한 이들이니 무슨 꿍꿍이인 줄 모르겠다.”
가주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묻어났다.
약왕문의 조건이 간단명료한 것이 문제였다.
- 천화서고 대공자의 방문.
만약 독양충의 대가로 보물을 원했거나 다른 물질적인 무언가로 교환하려 했다면 도리어 아무 걱정이 없었을 터.
“심려 마십시오. 별일 아닐 겁니다.”
“어찌 걱정이 없을까.”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서신 내용이 단순해서 그렇습니다. 그들이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문장들은 장황하고 여러 감언이설로 채워졌을 겁니다. 짐작컨대 그들은 난제에 직면했고, 어쩌면 제가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듯합니다.”
“흐음…….”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이치가 마음에 와 닿았다.
미소 뒤에는 칼이 숨겨져 있고, 화려한 버섯은 독을 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약왕문의 서신은 미소나 화려함이 없었다. 오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또 말린다고 자신의 말을 들을 손자도 아니었다.
“다녀오도록 해라. 매사 주변을 잘 살피는 것을 잊지 말고.”
“물론입니다.”
“무림맹의 초대를 거부한 일은 오해가 없도록, 내 따로 맹에 서신과 보물을 보내도록 하마.”
“네.”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오고 감이 있다는 건 나쁠 것 없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내부를 정비한 후 열흘쯤 지나 떠날까 합니다. 빠르게 마무리된다면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오냐.”
가주는 내부 정비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무얼 하든 큰 손자는 기대 이상을 할 것이 자명한 까닭이었다.
***
다음날,
후공은 호위대를 연무장에 불러모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후공이 입을 열었다.
“오늘 부른 건 한동안 공석이었던 호위대주와 부대주를 임명하기 위함이다. 이림, 중강은 앞으로 나오너라.”
두 중년의 검수.
이림과 중강은 놀라는 기색 없이 나아가 대공자 앞에 섰다.
이미 간밤에 불려가 직위 변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터였다. 놀라고 감격한 건 지난밤으로도 넘쳐났다.
“이림, 너를 호위대주로 임명한다. 너는 철두철미한 성격에 일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통솔력을 갖췄다. 무공 또한 호위대 중 으뜸이니 호위대를 잘 이끌 것이라 믿는다.”
“감사합니다.”
이림이 머리를 숙였다.
다음은 중강.
“중강, 너는 유순하면서도 강직한 면모를 동시에 지녔고 친화력이 뛰어나니, 능히 호위대와 대주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할 만하다. 부대주로서 천화서고의 굳건한 방패가 되어주길 바란다.”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임명을 마쳤을 때 호위대에서 일제히 환호와 축하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들에, 이림과 중강의 입매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호위대들이 기뻐한 건 무엇보다 대공자의 각성이요, 안목이었다. 서문세가와 맞서는 와중에 호위대를 진두지휘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두루 신임 받는 이림과 중강을 선별한 것은 짧은 기간임에도 한눈에 호위대를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호위대 중 누군가가 외쳤다.
“천화서고를 위하여!”
“천화서고를 위하여!”
선창에 따라 모두가 함께 목청을 높였다.
“호위대는 목숨을 바치리!”
“호위대는 목숨을 바치리!”
“그 무엇에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되리라!”
“그 무엇에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되리라!”
우렁찬 외침이 이어졌다.
후공은 뚱해졌다.
‘언제까지 하는 거냐.’
놔두면 몇 시진이라도 좋을 분위기다. 말도 어찌나 잘 만들어내는지 원. 또 뭘 얼마나 삶아먹었는지 목청이 장난이 아니었다.
더 두고 볼 수 없어 손을 들어 휘저었다.
“그만, 그만해라. 정신 사납다.”
이내 고요해지자, 후공이 말을 이었다.
“난 너희가 목숨을 바치길 원치 않는다.”
“…….”
“천화서고를 건드리는 자에게 당당히 맞서 이기고 무릎 꿇리길 바랄 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호위대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하지만 그다음 대공자가 꺼낸 말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직접 며칠 너희 수련을 지도할까 한다.”
정녕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이 알까.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 것인지.
눈앞에 있는 이가 천하제일인이었음을 알았다면 눈만 깜박이고 있지만은 않았을 터.
수련 지도는 각각 개인의 역량을 살피는 방식은 아니었다.
호위대가 유기적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검진’의 전수였다.
적하검진.
후공은 자신이 아는 검진에 범항의 두뇌를 활용해 진법지식을 결합했고 변화를 더했다.
기본은 12인이 하나의 검진을 이룬다. 상황에 따라서는 6인의 검진으로, 또 3인의 검진으로 분화할 수 있다. 또한 강한 상대를 맞이했을 때 합공으로 기를 증폭시키고, 방어에는 거대한 철벽이 되게 했다.
검진의 요체는 합(合), 묘(妙), 은(隱), 망(網), 섬(閃)의 결을 따라 변화무쌍하며 신묘하기 이를 데 없어, 호위대는 구결을 암기하고 위치의 의미와 움직임 하나하나를 배우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내심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단기간의 지도가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거늘, 검진의 완성시 짐작되는 위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호위대는 다시금, 왜 대공자가 어릴 때부터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천재라 불린 것인지 실감했다.
후공은 검진의 전수가 오랜 숙련이 필요한 상황으로 접어들자 한 번씩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수정해주었다.
그러는 한편 아우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과 부몽에게 스스로 몸을 지킬 수단을 전수했다.
우선 윤의 거처에 11개의 발자국을 남겼다.
일명 금허보.
이 보법은 매 일보마다 기의 운행이 난해하나 딛는 것만으로 내력이 증진되는 공능이 있으며, 보법만으로도 교묘하기 이를 데 없어 상대를 교란하기 좋았다.
거기에 더해 광섬장도 전수했는데 이는 금허보와 짝을 이룰 시 파괴력이 더해지는 장법이었다.
부몽에게는 윤과 함께 금허보를 수련토록 하는 동시에 곤법인 무류곤을 전수했다.
원체 쌍절곤을 좋아하는 녀석인 탓에 실컷 몽둥이질을 하라는 의미가 담겼지만, 무류곤 또한 후공에게나 단순할 뿐 결코 수준 낮은 곤법이 아니었다.
배움 속에 윤과 부몽은 좋아 죽은 건 당연.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뜻하지 않은 큰 선물이었다.
“형님이 제 형님이어서 너무 좋습니다.”
“큰형님이 최고입니다.”
후공도 늘그막에 얻은 아우들을 보며 흐뭇한 건 마찬가지였다.
“허허, 녀석들 그리 좋더냐. 하지만 어디 이게 끝일까 보냐.”
“네?”
윤과 부몽의 눈이 커졌다.
지금도 과분한데 또 무엇이 준비되어 있단 말인가. 둘은 기쁨에 차 동공을 지진 난 것처럼 흔들어댔다.
“너희는 내 아우들인데 소홀할 순 없지. 그래서 빠른 수행을 위해 몸에 좋은 약을 준비했다.”
“이미 다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로군요.”
“큰형님, 궁금합니다. 어서 알려주십시오.”
후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을 향해 외쳤다.
“송화야, 가지고 들어오너라.”
“넵!”
이내 송화가 작은 목함을 들고 왔다.
후공은 목함을 받아 앞에 놓았다.
“내 특별히 준비한 이것은 영물이니라.”
윤과 부몽이 갸웃했다.
“영물요? 그런 것이 있었던가요?”
“큰형님, 설마 육각망은 아니겠지요?”
후공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맞다.”
둘의 안색이 삽시간에 노랗게 떴다.
그늘에 잘 말려 보관한 것이 윤이요, 부몽도 들어 알고 있었다. 이게 왜 자신들에게 쓰인단 말인가. 아주 특출한 효능도 아니거늘. 말린 육각망의 껍질은 무향이지만, 둘은 다른 사실도 알고 있었다. 씹는 순간 악취가 터져나온다.
“형님, 살려주십시오.”
“큰형님, 보약을 여러 채 많이 먹겠습니다.”
사색이 된 아우들을 보며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쓴 경험은 한 번쯤 해보는 것도 괜찮다. 추억도 되고 이야기 거리도 되지.”
미소가 너무 따뜻해 윤과 부몽은 뭔지 모를 뭉클함에 울컥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녀석들. 약왕문에 다녀올 동안 너희의 성취가 없다면 엄히 문책할 것이니 부지런히 수련하도록 하고. 알겠느냐?”
“네, 형님.”
“네, 큰형님.”
***
두두두…….
마차가 내달렸다.
마차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짙은 회색빛이었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날이 우중충했지만, 마부석에서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우리가 간다~ 천화서고 나가신다~ 천하여 듣고 있니, 우리가 간다고~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아~~~. 약왕문아, 기다려라~~.”
신난 송화였다.
이번 약왕문의 길에 동행한 것이 좋은지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동행인은 단둘만 대동했다.
송화와 개인 호위 중 양소.
양소는 마부로, 송화는 사사로운 심부름을 위해 데려간 것인데 후공은 벌써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느라 마부석 옆에 앉아 노래를 시작하더니만 한이 없었다. 1절에서 끝날 줄 알았던 노래는 어느샌가 3절을 넘고 후렴에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이대로면 밤까지 부를 기세였다.
“송화야.”
“네, 공자님 부르셨어요.”
마부석에서 송화가 급 공손히 답했다.
“차를 한잔 하고 싶구나. 안에 혼자 있자니 적적하기도 하고.”
“네, 바로 마차 안으로 들어갈게요.”
“아니다. 1절만 더 부르고 들어오너라.”
범항이 바깥출입 없이 틀어박혀 죽을 궁리만 하고 있던 터라 송화에게 먼 여행길이 즐거움이란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래든 뭐든 적당해야지.
이 정도 말했으면 누구라도 알아들었겠다 싶었지만,
“하하, 그럴까요? 우리가 간다~ 천화서고 나가신다~ 천하여 듣고 있니~~~~”
“…….”
식은땀은 후공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