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천화서고 대공자는 우리 것이다
한 마리의 매가 창공을 가르며 날았다.
매는 소나무 숲에 이르러 한 바퀴 선회하더니 숲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뭇가지를 딛고 선 흑의인이 팔을 들어올렸다.
매가 흑의인의 팔에 내려앉았다.
사내는 매의 발목에 묶인 헝겊을 풀어 살폈다.
글자는 없었다.
대신 몇몇 도형과 알 수 없는 선들의 향연.
하지만 그는 암호가 익숙했다. 펴보자마자 내용을 파악했다.
천화서고 대공자 출발.
일식경 후 송림을 돌파할 예정.
최종 목적지는 약왕문.
- 무극(無極).
흑의인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바로 곁 나뭇가지들에서 네 명의 무극살부 일급살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수신호를 보내자 이내 그들이 주위 나무들로 각기 흩어졌다.
흑의인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뭇가지에 누웠다.
‘일식경 후라…….’
아직 여유가 있다.
‘지난번에는 운이 좋았다만…….’
첫 번째 살행 실패는 방심이 컸다.
죽기를 희망한 놈이 변심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물론 놀라운 점도 있었다.
방심했다곤 해도 일급 살수 넷을 순식간에 해치웠으니. 결코 얕볼 만한 무공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일급 살수라 해도 다 같지 않다.
일급에 막 들어선 이들의 수준과 자신들처럼 일급의 정점에 다다른 이들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첫 살행의 살수들은 이급에서 올라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후후, 한 번 청부는 영원한 청부. 천화서고 대공자여, 너의 시간도 끝이다.’
흑의인이 그렇게 조소를 머금을 때였다.
“크윽!”
“컥!”
“으악!”
“흡!”
단말마의 비명이 일제히 터져나왔다.
그가 놀라 튕겨 일어나 소리를 쫓았다.
눈에 들어온 건 이상한 광경이었다. 주변 나무로 흩어졌던 동료들이 맥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풀썩, 풀썩.
무슨 지푸라기 허수아비처럼 땅에 처박힌다.
‘……무슨?’
의문과 동시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살수의 기본은 주변 감지.
잠든 채로도 의식의 한 부분을 열어둘 정도다.
그런데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황망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없다. 아무도.
하지만,
“끼야야야약!”
난데없이 괴음이 아래쪽에서 울려퍼졌다.
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내려갔다.
눈에 들어온 건 희끄므리한 무엇.
그 백색 인영이 끔찍하게 솟구쳐오르고 있었다.
즉각 회피하려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좌측 허공에서 빛이 번뜩였고, 그가 인지했을 때는 빛살이 관자놀이를 화끈하게 관통하고 지나갔다.
“크어어억!”
그의 몸이 아래로 추락해갔다.
쿠웅.
흐릿해져가는 시야에 어느샌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세 인영이 보였다.
이윽고 생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클클클, 천화서고 대공자는 우리 것이다.”
***
마차는 소나무 숲으로 근접해갔다.
소로로 접어들면서 울퉁불퉁한 지면 탓에 마차가 흔들렸다.
“공자님, 길이 평탄치 않아 마차가 흔들립니다.”
마부석의 양소가 상황을 보고하며 속도를 줄였다.
아무래도 숲을 통과할 때까지는 저속을 유지해야 할 것 같았다.
비는 아직이었다.
하지만 날은 더 어두워졌고 음산함이 짙어졌다.
후공이 미간을 찡그렸다.
“흐음, 도대체 알 수가 없군.”
“공자님, 뭐가요?”
송화가 냉큼 물었다.
말 상대가 없어 적적하시다던 주인이 정작 말없이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어 쥐 죽은 듯이 있었는데, 드디어 말씀을 꺼낸 것이다.
“모르겠느냐?”
송화가 갸웃했다.
“뭘 알아야 하는데요?”
“글세, 나도 모르겠다. 한둘이 아닌데 말이야.”
“네?”
주인이 마차 창밖을 가리키는 것을 보며 송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 아니라 옆자리에 세워둔 검을 집어들고 있었다.
이미 주인의 무공 수준이 자신을 월등히 넘어선 걸 알지만, 주위를 기울여 봐도 바깥은 아무 낌새도 없었다. 송화는 뭔가 싶어 눈만 깜박였다.
그때였다.
“크하하하하하하!”
느닷없이 숲속에서 광소가 울려퍼졌다.
마차가 급히 멈추었다.
“공자님!”
마부석의 양소가 염려하는 목소리를 내더니 이어 크게 호통쳤다.
“누구냐!”
대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클클클…….”
“우리가…….”
“누구냐고…….”
“묻는 것인가?”
양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들려온 목소리가 각각 다를 뿐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가 심후한 내력이 실려 있어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마차 안 송화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심후한 공력이 실린 목소리에 내부가 진탕된 것이다.
급히 운기하려 할 때 손이 잡혔다. 놀라 바라보니 주인의 손이었다.
이내 손바닥 장심을 타고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더니 순식간에 전신을 휘돌며 기운이 안정되었다.
“공자님…….”
송화가 멍하니 바라봤다.
주입되어 휘도는 기운은 따스할 뿐 아니라 정순하기 이를 데 없어 어떤 이질감조차 없었다.
그런 송화를 보며 후공이 미소지었다.
“넌 여기 있거라.”
“공자님 아니에요. 저도…….”
“걸리적거려서 그러는 것이야!”
“……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송화를 뒤로하고 후공은 검을 들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양소가 곁으로 다가와 섰다.
“양소, 뒤로 물러나라.”
“네.”
양소가 군소리 없이 말을 따랐다.
후공이 숲을 향해 나직히 입을 열었다.
“어떤 분들이 마중을 나왔는지 궁금하군요. 그만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우리가 궁금한 것인가!”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소나무 숲에서 신형들이 솟구쳤다. 높이 호선을 그리며 마차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총 인원은 아홉.
그들의 면면을 보며 후공은 미간을 찡그렸다.
‘흐음?’
그들이 각기 솟구친 상태로 허공에서 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누구냐면!”
“우리는!”
“천!”
“공!”
“단!”
“이다!”
후공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뭐지. 이놈들. 연습한 건가.’
한마디씩 끊어서 잘도 이어붙여 가며 등장이라니.
후공은 어이가 나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그 면면을 확인한 탓이기도 했다.
‘아니, 이놈들은 왜 여기에…….’
멋지게 등장하며 착지하는 것은 좋다만, 후공은 짜증이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아홉 명 중에 여섯이 아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여섯 중에 두 놈은 최근에 자주 본 놈들이다.
그중 한 놈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쪼르르 달려왔다.
“형아, 나야. 내가 왔어! 사형도 왔어!”
“…….”
“형아, 우리 방금 굉장히 멋지게 등장한 것 같지 않아?”
개방의 소천개가 깔깔 웃으며 한껏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개방이 천공단이 된 건가.
아니 그전에 천공단은 또 뭐고.
의기양양은 소천개만이 아니었다. 소천개가 쪼르르 다가온 뒤쪽으로, 일명 천공단이라 칭한 여덟 명이 마차 앞쪽으로 부채꼴 형태로 늘어섰다.
어째서인지 그 표정들이 하나같이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한마디씩 끊어서 말하며 나타난 주제에 어째 이놈들은 단 한 명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인가.
어디 보자.
거지가 둘.
노인 하나. 그리고 중년 사내가 다섯.
연령이 폭넓은 남노소에 처음 보는 젊은 여인 하나가 더해져, 완벽히 남녀노소를 이루고 있다.
여인의 외양은 유독 눈에 띄었다.
여자임을 강조하고 싶은지 몸에 착 달라붙는 붉은 경장 차림이었는데, 몸매가 통통해 옷이 당장에라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
이들 중에 후공이 아는 인물은 거지들과 노인, 그리고 항마삼협이라 불리는 세 중년인이었다.
노인은 금적자.
무공 수위가 구대문파 장로급에 육박한 실력자였다.
이놈은 한동안 잠적해 기이한 소문만 들었거늘 여기서 보게 된 터.
항마삼협은 정신 상태가 개방 제자들과 다를 바 없이 엉망진창인지라 끼리끼리일 테니 다른 중년사내 둘과 여인도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그냥 저들 무리에 같이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태가 짐작될 지경이었다.
후공이 눈앞의 소천개에게 시선을 던졌다.
“소천개, 천공단이란 건 또 뭐냐?”
“형아, 궁금하지? 궁금할 줄 알았어. 천공단은 뭐냐면 말이야.”
“잠깐!”
신이 나서 설명하려던 소천개를 한 목소리가 막아섰다.
은앙개였다.
부채꼴 형태에서 은앙개는 좌측 맨 끝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여태 본 적 없는 엄숙한 얼굴이었고 어울리지도 않아 정신 나간 놈처럼 보였다.
“소천개, 약속을 잊으신 게요?”
“험험, 은…… 은앙개 대협. 내 잠시 깜박했소이다. 미안하외다.”
소천개가 흠칫하더니 더듬거렸다.
“허허, 깜박할 게 따로 있지 놀랐지 않습니까. 자, 그럼 시작하리다.”
“그러십시오.”
두 거지가 예의를 갖춰 말하더니 곧바로 은앙개가 행동을 개시했다. 오른손을 하늘로 쭉 뻗었다.
“우리 천공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은앙개가 거기까지 말한 후 옆에 서 있는 점잖은 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금적자가 다음 차례인 모양.
“천은 천화서고의 천!”
금적자는 체면 같은 건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한쪽 다리를 들어 가슴께에서 굽혔다.
학 자세였다.
외침이 옆으로 이어졌다.
“공은 대공자의 공!”
“천공단은!”
“천화서고 대공자를 지키는!”
“사람들!”
“이지!”
“끝!”
마지막 말 ‘끝’을 장식한 건 맨 우측에 선 젊고 뚱뚱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끝!’ 하고는 빙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더니 나름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여인의 생김새는 매우 귀여운 편이어서 요염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녀를 비롯해 여덟 명은 각각이 외치면서 취했던 자세를 유지하고서 후공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호가 미쳐 돌아가는구나. 병이 도는 건가…….’
후공은 입을 쓰게 다셨다. 이쯤이면 전염병 중에서도 꽤 독한 류라 할 만했다. 그런데 이 병자들이 자신을 지키겠다니, 무슨 뜻인가.
“다들 저를 지켜주신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만 보충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군요. 누가 대표로 말씀을 해주십시오.”
자꾸 한 사람씩 끊어서 말고, 라는 말은 생략했다.
또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말할 것을 방지하고자 후공은 ‘대표’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었다.
“에헴, 대표라면 응당 이 노부가 나서야겠구려.”
금적자가 학 자세를 풀고 한 걸음 나섰다.
그 뒤로 세 중년인이 소리치며 노인을 만류했다.
“대표라면 우릴 부른 것 같은데 금적 선생은 물러서십시오!”
“우리는 세 명이니 우리 중에서 설명하는 것이 맞지요.”
경쟁자는 더 있었다.
“아니 이분들이 뭘 잘못 드시고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요. 내 대사는 ‘끝’이 전부였어요. 양보해주니 한이 없네요. 설명은 천공단의 미모를 담당하는 제가 나서는 게 맞지요!”
노인 금적자가 나서는 걸 항마삼협이 버럭 소리지르며 막아서더니, 이어 여인이 뾰족한 목소리를 냈다.
“…….”
후공은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설명하는 게 뭐라고 서로 하겠다고 이 난리란 말인가. 장난하는 줄 알았는데 이놈들 표정들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은앙개와 다른 두 중년인이 참전하니 일순 소란스러워졌다.
“내 대사도 ‘이지’뿐이었다! 설명은 내가 해야 한다!”
“난 ‘사람들’이었다! 고작 한 글자 많다고 양보를 해야 한단 말이냐!”
“오호, 통탄할 일이로고! 강호가 언제부터 위아래가 없어졌단 말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늙은이는 정녕 안중에 없는 겐가!”
“노인공경이라면 충분히 해드렸거늘 또 나이 타령이십니다.”
“그냥 이것도 제비 뽑읍시다!”
제비뽑기라는 말에서 후공은 이놈들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