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5화 (45/460)

45화. 천공단은 결코 든든하지 않다 (1)

내심 고개를 젓고는 소천개를 바라보며 전음을 발했다.

- 설명해봐라.

‘어?’

소천개는 느닷없이 귓가를 파고든 전음에 놀라 눈이 커졌다. 설마 천화서고 형아에게 전음을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긴, 서문가주를 상대할 때의 무공 실력을 생각해보면 전음을 할 수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 형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

제비뽑기 한다고 난리가 난 와중에 소천개가 전음을 발했다.

내막이 드러났다.

“허허…….”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후공은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무극살부.

한 번 청부는 영원한 청부라…….

주양과 만박자가 어쩐지 서둘러 떠난다 싶었다.

범항을 끔찍이 아끼는 주양이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점도 이상했었다. 당시에는 그저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늘, 살인 청부가 끝나지 않았다니.

그딴 철칙을 지키는 무극살부라는 놈들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에 맞서 주양이 안 멈추면 모조리 숨통을 끊어놓는 수밖에 없다며 강호 고수들을 불러모아 멸살단을 꾸리고 있다는 것에는 뒷목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무극살부와 주양.

서로 상생하던 업체와 고객 사이가 이제 철천지원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멸살단만이 아닌 살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천공단을 조직했다니 참으로 꼼꼼한 일 처리가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주양의 근심걱정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명분과 돈만 주어지면 뭐든 하는 만박자가 실행에 옮겼을 터.

그런데 만박자 이놈은 정신이 나가버린 걸까.

천공단의 면면을 어떻게 이런 망나니들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든든하지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건 둘째치고, 보기만 해도 심란하다.

“천공단 여러분, 그만 싸워도 돼요! 제가 방금 다 설명했거든요. 하하하하!”

소천개의 말에 제비뽑는 소란이 뚝 그쳤다.

닭 쫓던 개처럼 천공단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몇몇은 죽일 듯 소천개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중에 은앙개도 있다는 점에서 개방의 장래가 심히 우려되었다.

이내 금적자가 언제 그랬냐 싶게 미소를 지으며 후공을 향해 다가왔다.

“노부는 금적자라 하네. 이 노부가 곁에 있는 한 자네가 다칠 일은 없을 것이야. 음하하하하!”

후공은 뚱하니 쳐다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금적자……. 잠적해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원래 금적자는 점잖았다.

과묵하고 몸가짐이 가볍지 않았다.

말하는 시간보다 금빛 피리를 부는 때가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금적자가 금빛 피리 부는 미친놈이 되어 나타나다니.

차례로 소개가 이어졌다.

세 놈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항마삼협일세.”

“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지.”

“우리 삼협이 있는 곳에는 사마외도들이 존재할 수 없지. 반드시 자네를 지키겠다 약속함세.”

이어 험상궂은 얼굴의 두 중년인이 나섰다.

인상만 보면 그냥 사마외도였다.

“무산쌍웅이다.”

“천공단에서 다른 사람은 볼 것 없다. 우리만 있으면 넌 영생이다.”

후공은 피식했다.

흉악스럽게 생긴 놈들이 장담하니, 그러면 안 되는데 어째서인지 믿음직스러웠다.

마지막은 여인이었다.

“제 존성대명은 묘빙빙이에요. 호호호, 제 호위를 받다니 범 공자께선 복이 많으신 분이로군요.”

통통함과 뚱뚱함의 경계면에 서 있는 여인의 소개에 후공은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여태 강호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인물 중에서 존성대명 운운한 인간은 묘빙빙이 최초였다. 아직 한창 때인 아이가 왜 이렇게 됐단 말인가.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와 동생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서문세가의 패악 때는 마침 제가 수행의 고비인 탓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천공단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대공자는 참 행운아시네요.”

말이 이상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중요한 건 처음 부분.

“아버지라면?”

“백화장주랍니다.”

“크흠…….”

후공은 백화장주와 묘가령을 떠올리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묘가령에게 언니가 있었던 모양.

전혀 닮지 않았다.

백화장주가 아닌 엄마 쪽인 듯.

아니 그보다 용케도 허락을 맡았구나.

“우리는 개방 제자들이라오. 나는 은앙개.”

“저는 소천개입니다.”

두 거지가 마치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소개라는 걸 했다.

후공이 둘을 향해 미간을 찡그리니 은앙개와 소천개가 짐짓 딴청을 피웠다.

어디 짜증의 대상이 두 거지뿐일까.

면면이 너무 화려하다.

후공이 뒤쪽의 양소를 돌아봤다.

“출발하자.”

꺼지란다고 곱게 물러날 놈들이 아니었다. 그걸로 씨름하다간 시간만 낭비될 게 뻔한 일.

양소가 마부석에 올랐다.

그때, 우레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아직이오오오!”

노인 금적자였다.

어찌나 갑작스럽고 목청이 큰지 몇몇이 화들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천공단조차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금적자를 바라봤다.

“금피리 할아버지, 피리 불려고요?”

“아니란다, 거지야.”

소천개의 말에 금적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가슴께까지 드리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노부가 한 말씀 올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 자리는 천공단이 출범하고 지키는 자와 보호받을 자의 첫 만남입니다. 출발하기 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이까. 천화서고 대공자가 무공을 익혔다고 들었소이다. 먼저 대공자의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신법은 어떤지, 내공은 어느 정도인지. 그래야 위기 상황에서 최선의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바로 동의하고 나섰다.

“그것참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뒤를 이어 묘빙빙이 말을 보탰다.

“본 낭자는 금적 선생께서 천공단의 대표인 것처럼 말해서 기분이 별로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네요.”

모두가 찬성한 건 아니었다.

은앙개가 발끈했다.

“아니, 다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겁니까. 내가 직접 봤다니까 무슨 확인이여 지금!”

은앙개가 눈알을 부라리며 막아섰다.

소천개도 그 곁에서 허리춤에 손을 척 얹고는 같이 눈을 부라렸다.

“워워, 거지 친구들 진정하게.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는 것뿐이네.”

“서문가주를 상대할 정도의 무위라면 한 번 더 보여주는 것도 어려울 것 없지 않나. 거짓일 리 없으니 하는 말이지.”

항마삼협 중 둘이 부드럽게 달랬다.

은앙개도 마음이 풀어졌는지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확인하실 겁니까?”

“겨뤄보는 것보다 확실한 것이 어디 있으려고.”

“그럼 우리 중 누가?”

후공은 반대하는가 싶어 거지들을 기특하게 보고 있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그렇지. 개놈들. 천화서고에 불러다가 먹인 고기가 아깝구나.’

은앙개가 이젠 도리어 주도하고 있었다. 소천개까지 기대된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다시금 천공단은 서로 자신이 겨루겠다면서 소란스러워졌다.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하든 대표로 누가 나서든 후공은 겨루어줄 마음이 없었다.

“잠시 주목해주십시오.”

소란이 당장 그쳤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자 후공이 하늘을 가리켰다.

“비가 오는군요.”

순간,

쿠르르릉, 콰광!

천둥이 내리쳤다.

짙은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작렬하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마차는 빗길을 내달렸다.

후공과 송화만이 마차 안에 있고, 천공단은 비도 오는데 마차를 감싸듯 하며 함께 움직였다.

“은앙개 대협, 신기합니다. 아니 무슨 말 떨어지기 무섭게 비가 내리다니요! 천화서고 형아는 대단한 것 같지 않나요?”

“그러게. 범항 이놈, 막 천둥과 비를 마음대로 조절하고 그러는 건가?”

“사형, 왜 갑자기 반말?”

“너도 해.”

“알았다.”

비는 세차게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천공단은 비가 그치면 출발하자고 했지만 내심 열 받은 후공은 못 들은 척 그대로 출발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개방 거지들과 몇몇이 정확한 시점에 비가 내리는 것을 주제로 떠들고 있었다.

먹구름이 가득하고 누가 봐도 비가 올 날씨였지만 시점이 너무 절묘했던 것이다. 천화서고가 기문과 진식 그리고 시서예화의 잡기들에 능하니 신통방통한 신기를 발휘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물론 후공이 비를 내린 건 아니었다.

내력이 상승하면서 동시에 기감도 높아져 습도와 바람, 공기 중의 압력과 기온의 변화를 더욱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 탓에 그 순간을 정확히 짚어냈을 뿐.

삐리~ 삐~ 삐이이~

피리 소리가 마차와 함께했다.

그 와중에 금적자는 쓸데없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역시 오래 살아온 연륜인 것일까.

그는 홀로 고고했다.

비도 오고 바람도 세찬데 마차 지붕 위에 앉아 피리를 불었다.

음률은 처량했고, 그의 몰골도 처량했다.

마차가 빠르게 달리는 탓에 빗줄기는 사선으로 내리치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금적자는 얼굴을 강타하는 비를 철철 맞으면서 젖은 머리카락으로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다.

마차 곁을 달리는 무산쌍웅이 그만 좀 하든가 곡조를 바꿔주시면 안 되냐고 소리쳤지만, 금적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편 항마삼협은 초조해했다.

“초조하구나. 도대체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지.”

“큰형님, 저도 벌써부터 협을 행하지 못하니 금단 현상이 일어 손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후우! 무극살부 놈들, 이쯤이면 나타날 만도 한데 우리 피를 말려 죽일 생각인가.”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초조함인지, 도대체 정신 상태를 가늠하기 힘든 놈들이었다.

항마삼협은 일명 항마삼난(降魔三亂).

이들이 천지사방을 돌아다니며 협을 행한답시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기에, 이들을 삼협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협이라곤 해도 강호의 안녕과 번영 같은 건 애시당초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일각에선 본래 살인광들인데 무림공적으로 몰릴까 봐 협행이란 가죽을 두르고, 죽여도 탈이 없는 자들을 실컷 죽이러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무극살부 이놈들! 썩 나타나거라!”

“천화서고 대공자가 여기 타고 있다!”

“마차로 달리고 있으니 냉큼 나타나거라!”

초조함을 넘어 급기야 항마삼협은 우렁찬 고함으로 무극살부에게 행적을 노출하고 도발했다.

이 정도면 방어와 보호의 임무를 띤 천공단이 아니라, 무극살부 본진 멸살단 쪽이 맞다 싶은 모습.

당연히 후공은 부글부글 끓었다.

정녕 이쯤이면 무극살부가 문제가 아니다.

천공단이 재앙이었다.

‘다 죽일 수도 없고……. 이놈들을 어찌 통제한다…….’

마음 같아선 모두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천공단의 무력은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정신 상태와는 별개로 금적자는 대놓고 강했고, 항마삼협은 금적자와 버금가는 실력을 갖췄다. 물론 셋이 함께한다는 전제라 해도 셋이 따로 싸우는 일이 없으니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런 항마삼협이 무산쌍웅을 잡아먹지 않는 것을 보면 두 놈도 만만치 않다는 뜻.

생각할수록 심란함이 더해지는 중에 그런 후공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삐리~ 삐~ 삐이이~

금적자의 처량한 피리 소리가 마차 지붕 위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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