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8화 (48/460)

48화. 천공단은 지루할 틈이 없다

그날 새벽.

두 거지는 지붕 위에서 잠을 청했다. 둘의 곁에는 금적자가 피리를 입에 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무극살부 두 살수가 멀리서 지켜봤다.

둘은 거의 어둠과 동화되어 있었다.

한 명은 짙은 청의, 다른 한 명은 흑의를 걸쳤는데 은신까지 시전한 터였다.

한순간 청의인이 미간을 움찔하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는 저녁 시간 객잔에서 후공이 주목했던 바로 그 청의인이었다.

그가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였다.

파라락!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나면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의인과 흑의인은 즉시 공손한 태도로 노인을 향해 예를 취했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예정된 만남이어서 둘은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노인은 예법을 생략했다.

“만면환(萬眠丸)은?”

“준비되었습니다.”

“이미 일급살수 아홉을 잃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물론 천공단 누구도 본 살부의 칼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에 투입된 살수들은 급이 다르다.

특급살수 다섯이 동원되었다.

이급살수와 일급살수의 격차가 열 걸음이라면, 일급과 특급의 차이는 백 보를 넘는다. 그만큼 특급살수가 다섯이나 투입된 작전은 드문 일이었고, 반드시 완수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만면환의 기회는 오직 한 번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노인은 확신을 경계했다. 완벽한 그물이라도 확인에 확인을 거치고 거기에 더해 최선을 다해야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예정일은?”

“칠 일 후로 계획 중입니다.”

“이레라……. 방심하기 좋은 기간이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위협이 없다면 하루 이틀은 날이 서있더라도 어느 순간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이다.

“천화서고 애송이를 죽일 때 금적자는 물론이고 항마삼난, 무산쌍악, 백화장의 여식까지 모두 죽여라. 단 개방의 두 놈만 남겨둔다.”

“그리하겠습니다.”

특급살수 둘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두 거지가 개방 방주의 직계 제자이니 그들을 죽인다면 개방까지 적으로 돌릴 위험이 따른다. 금적자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경고의 의미는 넘쳐날 터.

이번 작전으로 무극살부는 암중의 공포가 될 것이다.

“멸살단 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청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지 않다.”

“…….”

멸살단의 기세가 흉포해, 이미 무극살부에 위협적인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사실 천공단이 문제가 아닐 정도였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번 작전이 중요했다.

“멸살단을 붕괴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천화서고 대공자의 죽음이다. 너희에게 본 살부의 운명이 달려있음을 잊지 말도록.”

“네!”

“결과를 기다리마.”

두 살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몸을 바로 하기 전 바람이 일었다.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흑의 살수가 입을 열었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화창한 날일 테지.”

***

일행이 약왕문을 향해 나아간 지도 어느덧 엿새.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안휘 중부를 돌파해갔다.

그 와중 천공단은 극심한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첫날 이후 무극살부가 증발한 듯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애가 타고 속이 탔다.

“도대체 이놈들은 왜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신의 본분을 잊은 자들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

“무극이라며! 끝이 없다며! 이 자식들아 몰아치란 말이다!”

첫날부터 초조함을 보였던 항마삼협은 거의 말기 환자 수준이어서, 오지 않는 무극살부를 훈계하며 꾸짖을 정도였다.

무산쌍웅도 증상만 다를 뿐 상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끄럽게 떠들지만 않았을 뿐 쉼 없이 구시렁거렸는데, 잘 들어보면 욕이었다.

고요한 건 역시나 금적자.

이런 평정심이 정녕 삶의 연륜인 걸까.

첫 만난 때처럼 그는 마차 위에 떡하니 앉아 금피리를 불 뿐 한마디도 불평불만하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이 소란스러운 건 거슬렸음인가.

“소란 피우지들 말게. 다 때가 되면 올 테지.”

피리를 내리고는 점잖게 주변을 타일렀다.

“금적 선생께서도 내심 초조해하고 있으면서 그러십니다.”

항마삼협 중 하나가 비웃었다.

“내가? 허허, 날 이상한 사람 만드는군. 안 나타나면 안 나타나는 대로 좋은 일이거늘, 그깟 살수들 신경이나 쓰는 줄 아나.”

“아, 그러십니까. 그런데 왜 사흘 전부터 자꾸만 선생의 피리 소리가 삑사리가 나는 걸까요?”

순간 금적자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이이!”

“말이 됩니다. 다들 아는 사실이기도 하지요.”

“내 피리 연주에 삑사리란 있을 수 없네에!”

금적자는 크게 호통치고는 씩씩거렸다.

“내 바로 증명해주지!”

곧바로 금피리를 입에 가져갔다.

삐리 삐리~ 삐리리~~ 삑! 삐리리~~

도중에 삑사리가 나버렸다. 이내 금적자는 피리를 떼고는 시무룩해졌다.

“잠을 못 잤던 탓이겠지. 한숨 자야겠군.”

“같이 자요. 삑사리 할아버지.”

끝끝내 초조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금적자가 마차 위에 벌러덩 누웠다.

그 곁으로 소천개가 뛰어올라왔다.

금적자는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소천개는 그딴 건 개의치 않았다.

“옆으로 좀 가요.”

“……어.”

초조해하는 건 마차 바깥만이 아니었다.

마차 안에도 있었다.

바로 묘빙빙.

그녀는 어제부터 자연스럽게 마차 안에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연신 마차 창밖을 흘깃거리면서 손을 주물렀다 풀었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왜 안 나타나는 거야. 설마 멸살단 녀석들이 다 쓸어버린 걸까. 그렇다면 실망인데……. 나약한 놈들 같으니.”

묘빙빙이 통통한 얼굴에 앙증맞은 입술을 연신 달싹댔다.

‘웃기는 녀석 같으니.’

맞은편에서 내내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는 후공이었다.

어릴 때 보약을 잘못 쓴 걸까.

보통 이 나이 대의 여자아이들은 한창 예쁘게 꾸미는 데 정신이 팔려 있게 마련인데, 묘빙빙은 누구 하나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났으니 참 재밌는 아이였다.

한편으로는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많았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도 이목구비가 다 앙증맞은 데다 손등도 통통한 것이 우량아스러운 어여쁨이었다.

“애야…….”

불쑥 말을 걸려다 실언을 깨닫고 얼른 후공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우량아 손등을 보면서 입을 연 것이 실수였다.

“크흠…….”

“혹시 절 부른 건가요?”

묘빙빙이 갸웃했다.

후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그럴 리 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옛 노래를 부르고 있다가 그만 입으로 내고 말았군요.”

“그런 건가요? 참 천재치고는 실없네요.”

“허허…….”

“말이 심했다면 미안해요. 예민해져있어서 그만.”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후공은 원래 꺼내고자 했던 말을 건넸다.

“묘 소저는 사연이 있나 봅니다. 살수들을 꼭 죽여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요?”

“제가 알고 있어야 합니까?”

“당연하죠. 저를 봐요.”

“……?”

“실적이 없잖아요. 천공단인데도 아직 저는 단 한 명의 살수도 처치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아……. 그 생각을 못했군요.”

어릴 때 약을 잘못 쓴 것이 틀림없다.

“금적 선생이 혼자 둘을 처지해서 1등, 항마삼협이 힘을 합쳐서 둘을 죽여서 2등, 무산쌍웅은 한 명을 처리. 그래서 3등인데 저는 4등이에요. 그것도 공동으로. 사람 머리수로 치면 7등이고요. 이러니 안 불안하고 배겨나겠나요?”

“듣고 보니 참 심각한 일이로군요.”

“그렇다니까요.”

박자를 맞춰주자 묘빙빙은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후공은 묘빙빙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앞으로 묘빙빙과의 대화는 삼가야 한다는 큰 교훈만 얻은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마차 위쪽에서 큰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오오! 나타난 것인가아아아!”

금적자였다.

이어 항마삼협도 소리쳤다.

“드디어 왔나 봅니다!”

“지금 떠들고 있을 때입니까!”

“가자아아아!”

환호성을 지르며 금적자를 비롯한 천공단이 우르르 신형을 날렸다.

응당 마차 안에 있는 묘빙빙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녀는 순위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같이 가욧!”

그녀는 그대로 마차 천장을 뚫고 사라져버렸다.

파자작!

바쁜 것이다.

지붕이 사라진 마차.

후공이 올려다봤다.

뚫려 하늘이 보였다.

‘전망이 좋아졌군.’

하늘은 맑고 구름이 예쁘게 흘렀다.

유유히 하얀 새가 높이 떠 선회하는 것도 보였다.

마차는 멈췄고, 송화는 서둘러 마차 안에 떨어진 천장의 나무 파편들을 정리했다.

“공자님, 드디어 무극살부가 나타났나 봐요. 안 오나 했더니만 역시 포기를 모르는 자들일까요.”

“무극살부 아니다.”

“네? 하지만 천공단이 다들…….”

후공은 대답 대신 밖으로 나왔다.

“이왕 멈춘 김에 잠시 쉬었다 가자. 천공단은 금방 돌아올 것이다.”

금적자가 외칠 쯤 후공도 이미 파악한 터였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무극살부가 아닌 그저 부근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

그걸 모를 리 없는 금적자 등이 달려간 건 순전히 몸이 근질거려 어딘가에 화풀이를 할 요량에 불과했다.

‘망할 놈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천공단이 돌아왔다.

그들은 일단의 무리를 잡아왔는데 그 수가 열한 명이나 되었다.

“음하하하하! 범 공자, 우리가 이렇게 무극살부 놈들을 잡아왔네.”

금적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항마삼협은 무리를 무릎 꿇리고는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바른대로 고해라. 너희 무극살부 놈들, 무슨 수작을 부리려 했던 게냐?”

“너희는 싸우는 척하면서 우리가 방심한 틈을 노려 감히 공격할 생각이었겠지!”

“어림없는 짓이야!”

곧바로 해명이 쏟아졌다.

“대인들 저희는 쌍륜문입니다. 무극살부라니요.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저흰 파월문입니다. 저희도, 아니 저희는 저자들의 패악질에 맞서 싸우던 중이었습니다.”

“패악질은 파월문 너희가 부려놓고 무슨 소리냐!”

해명 중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만 봐도 상황은 뻔했다.

그저 그런 지역 세력 간의 갈등.

하지만 어디 천공단이 말이 통하는 작자들인가.

닥치라면서 윽박질러대기 바빴다.

그 와중 무산쌍웅 중 하나가 파월문도의 품에서 작은 종이쪼가리를 발견했다.

“그럼 이 암호들은 뭐냐!”

펼치자 거기엔 바삐 갈겨쓴 암호문이 적혀 있었다.

“그건 저희 문파에서 급전을 주고받은 서신입니다.”

“닥쳐라. 내가 해독하지 못할까 봐 둘러대다니. 흥, 지금 바로 해독해주지. 우리 무극살부는 천공단을 죽이고 천화서고 대공자를 반드시 죽인다. 그들은 우리가 싸우는 것으로 생각해 방심할 테지. 멍청이들이니까.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이렇게 써 있는데도? 앙!”

작은 쪼가리가 참 길기도 했다.

누가 들어도 개소리였다.

하지만 무산쌍웅이 감히 우릴 멍청이라고 했다면서 죽일 듯 윽박지르고 천공단이 거드니, 소란스럽기가 말로 할 수 없었다.

‘지루할 틈이 없는 놈들 같으니.’

기분 전환으로 이 정도면 충분했다.

후공으로선 더 까부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천공단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답은 나온 듯하군요. 서둘러 죽이고 정리합시다.”

천공단의 소란이 급 잦아들었다.

당장 죽일 것 같더니 정작 죽이라고 하자 아무도 손을 쓰지 않고 미적거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지들이 잘 아는 것이다.

애초에 무극살부라면 굳이 여기까지 끌고 와 호통을 칠 이유도 없었다.

“안 죽일 거면 풀어주십시오. 천공단은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으이? 할 일이 있단 말인가?”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너희놈들은 왜 여기 있냐! 당장 썩 꺼져라!”

잡아와놓고 왜 있냐는 타박을 들었지만 쌍륜문과 패월문도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망쳤다.

“그래, 할 일이란 뭔가?”

후공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파란 하늘에 하얀 매 한 마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