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넌 좋은 꿈을 꾸나 보구나
후공은 처음부터 잠들지 않았다.
자신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육각망이나 영악초 때문이리라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한 척 고개를 떨군 건 순전히 효율성 때문이었다.
상대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고 놓치는 경우를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적의 인원도 파악해야 했다.
하나나 둘을 먼저 처리하는 중에 나머지가 송화나 천공단 중 하나를 인질로 삼는다면 번잡해지는 것이다.
“곧 반각. 일각이 되면 수면이 풀려.”
청의살수가 나직이 뇌까려 모두를 일깨웠다.
다른 살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공단의 상태를 보면 일각이 되기 전에 회복할 가능성이 컸다. 목숨줄을 끊는 것이야 일초반식도 안 걸린다지만 이젠 슬슬 결행해야 할 때였다.
“그래도 순서는 있어야겠지.”
흑의살수가 미소 지으며 천공단을 둘러보았다.
너희 천공단이 지키려 했던 대공자가 죽는 걸 지켜보라는 의미였다.
이내 흑의살수가 걸음을 뗐다.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떨군 대공자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너도 참 기구하구나. 왜 괜한 각성을 해서.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런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 아니냐. 천공단이며 멸살단까지 여러 소란을 피운 대가로 이제 너의 팔 다리는 천화서고로 갈 것이고, 머리는 은하전장으로, 몸통은 산에 던져져 짐승의 밥이 될 것이다.”
후공도 내심 혀를 찼다.
‘너도 참 기구하구나.’
많고 많은 삶 중에 왜 살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하필 나를 만난 건지.
결국 오늘 죽음을 맞게 되었으니.
흑의살수가 검을 쥐었다.
그 순간 후공이 전음을 발했다.
- 잠깐. 내가 죽이지.
전음은 우회되었다.
기파는 호선으로 돌아 뒤쪽 방향에서 흑의살수에게 전달되었다.
흑의살수가 뒤돌아서며 동료들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짜증이 깃들었다.
“누가 죽이든 의미가 있나?”
“……?”
네 살수의 표정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난데없이 무슨 말이지?”
“난데없이?”
흑의살수가 너털거렸다.
“어이가 없군. 방금 전음으로 나 대신 죽이겠다고 말해놓고 딴청인가?”
“전음?”
“그래. 누구냐?”
우리 중 누군가 전음을 발했다고?
네 살수가 서로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다시 흑의살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스악!
한줄기 검광이 흑의살수의 목 좌측에서 우측으로 그어졌다.
흑의살수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며 떠올랐다.
‘……?’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어, 네 살수는 경악을 넘어 멍해졌다. 예상치 못한 것까지 더해져 눈앞의 광경이 느리게 보일 정도였다.
잘려나간 흑의살수의 머리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돈다.
워낙 빨리 썰린 탓에 돌고 있는 중에 흑의살수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잘려나간 걸 자각했다.
눈을 부릅떴고 입을 쩍 벌렸다.
성대 절반이 몸통에 남아있어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
몸통의 목 부위에서 피가 솟구쳐 오른다.
찰나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 남은 네 살수의 머리는 하얘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의 공백을 타고 후공이 가장 우측의 백의살수를 향해 짓쳐들었다.
백의살수가 곧바로 반응했다.
괜히 살수에 특급이 붙은 것이 아닌 모양.
백지상태로 얼어붙은 몸임에도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검격은 이미 지척.
자신의 몸이 사선으로 양분될 위기에서 그는 급히 신형을 틀었다.
덕분에,
“크아아악!”
백의살수의 왼팔이 떨어져나갔다.
몸통이 갈라지는 건 면했다.
하지만 거의 어깻죽지까지 베어졌다.
그가 피를 뿌리며 몸부림치다 뒤로 쓰러졌다.
그의 잘려나간 팔은 묘빙빙 쪽으로 날아갔다.
그 탓에 묘빙빙이 손에 뭔가 잡힌다 싶자 ‘베개가 왔네. 데워 놨어? 따뜻해.’라면서 잠결 중에 살수의 팔을 머리에 받쳤다.
죽음만 기다리던 금적자와 항마삼협, 그리고 무산쌍웅까지 급반전된 상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가 묘빙빙을 보고는 더 놀라버렸다.
하지만 남은 세 살수들은 동료의 팔이 베개로 전락한 것 따위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순식간에 둘을 처리한 천화서고 대공자의 검격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먼저는 황의 살수.
자신의 머리를 쪼갤 듯 닥쳐오는 검격에 맞서 황의살수가 번개같이 검을 뽑아 막아갔다.
수많은 훈련과 실전경험을 지닌 그는 그 와중에 이미 다음 변초를 떠올리고 있었다. 검을 막고 신형을 좌측으로 반보 디딘 다음, 천화서고 대공자의 옆구리를 쓸어간다.
대공자가 회피한다 해도 그 틈이면 두 동료가 출수할 여유는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망상이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힌 순간,
서걱.
황의 살수의 장검은 내력을 머금고 있었음에도 종잇장 찢어지듯 잘려나갔다.
황의 살수가 눈을 부릅떴다.
‘신검?’
경악도 잠시, 그의 머리가 두부처럼 갈라졌다.
특급살수 셋이 처리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번의 호흡에 불과했다. 하지만 남은 두 살수가 대응할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청의 살수가 신형을 틀어 쓰러진 송화를 향해 짓쳐들었다.
굳이 평안한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예와 법도를 익힌 먹물 가득한 서생의 근본이 어디 갈 리 없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자의 약점은 극명하다.
시녀라 할지라도 인질로서의 가치는 충분할 터.
그에 발맞춰 적의살수가 암기를 발출했다.
직접적인 위협임과 동시에, 청의살수가 시녀를 붙들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좋은 한 수다!”
후공이 칭찬하며 검을 들어 암기를 튕겨냈다.
타당탕!
다섯 개의 암기가 세 방향으로 튕겨졌다.
파암식.
분절칠십이검식 중 암기술을 파훼하는 검식이 펼쳐졌다.
분절(紛節)이란 흐름을 끊고 어지럽히는 것이 기본 심결이다.
튕겨나간 암기 중 세 개는 청의살수를 향하고, 하나는 적의살수, 다른 하나의 암기는 어깻죽지가 베어져 바닥에서 꿈틀대던 백의살수에게 돌아갔다.
좋은 한 수일 수밖에 없었다.
후공은 제때 발출된 암기 덕분에 단번에 세 방향을 공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송화를 붙들려던 청의살수가, 튕겨나간 탓에 더 맹렬해진 암기를 피하려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암기를 발출했던 적의살수는, 가까운 데다 미처 예상치 못한 탓에 암기가 옆구리를 훑고 지나가는 걸 피하지 못했다.
“크윽.”
꿈틀꿈틀 백의살수는 이내 꿈틀임을 멈췄다. 암기가 이마를 파고들어가 깊숙하게 박히면서 그대로 목숨줄이 끊겼다.
‘이 대처와 여유는 뭐지?’
청의살수와 적의살수의 동공이 작아졌다.
심장도 무섭게 고동쳤다.
질려버린 둘은 현실을 인정했다.
천공단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거라던 막연한 예감은 불행하게 들어맞았다. 대공자는 천공단이 있든 없든 만면환이든 아니든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슈슈슉!
두 살수가 암기를 있는 대로 발출했다.
똑같은 우를 범하진 않았다.
대공자가 튕겨내면 암기들의 속도는 몇 배로 빨라져 자신들에게 쏟아져 돌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암기의 방향은 쓰러져 있는 금적자를 비롯 항마삼협과 무산쌍웅 쪽으로 향했다.
모두 요혈을 노렸다.
제 아무리 대공자가 날고 뛴다 해도 모든 암기를 해소할 순 없을 것이다.
하나라도 적중하면 인명을 중시하는 대공자를 멈추게 할 수 있고 도주의 시간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암기 발출 직후, 두 살수는 창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후공은 바로 대응했다.
쿠웅!
발을 굴렀다.
꽈자작.
진각을 밟는 순간 나무 재질의 바닥이 폭삭 주저앉았다.
이미 살수들의 예비 동작을 통해 암기 발출을 직감한 후공이었다. 천하제일인이던 때라면 발출 전에 두 놈을 끝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든 암기를 쳐내는 것도 무리.
막을 수 없다면 천공단을 다른 쪽으로 옮기면 그만이었다.
“으어어…….”
“우어어…….”
바닥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 범위 안에 있던 금적자, 항마삼협, 무산쌍웅까지 아래층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론 발을 구른 후공의 신형도 아래쪽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후공은 허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나무 잔해를 딛고는 그 반동을 타고 다시 위로 솟구쳐 올랐다.
둥실 솟구쳐 떠오른 후공은 공중에서 휘리릭 신형을 선회하고는 이내 창문을 타고 살수들을 뒤쫓았다.
쿵, 쿵, 쿠궁.
그사이 금적자등은 아래층 방으로 떨어져 구면인 이웃과 뜻밖의 조우를 맞았다.
음산오살도 만면환에 당해 널브러져 있던 터.
위층의 이웃이 층간소음보다 더 심하게 층간을 박살내며 떨어져 내리면서 방문했지만, 대부분 잠에 취해 불만을 토해내는 일은 없었다.
오직 잠들 듯 말 듯 의식을 붙들고 있던 건 음산오살의 대형뿐.
마침 그의 곁으로 떨어진 것이 금적자였기에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는 눈이 커졌다.
금적자가 더듬거렸다.
“……니, 니가 왜…… 여깄어? 너 몇 살이랬지?”
“…….”
음산오살의 대형은 말이 없었다.
나이는 올해 예순셋이다.
금적자가 예순둘이랬으니까 한 살 많다.
하지만 대체 나이를 왜 이렇게 따지는 건가.
이 와중에!!
한 살 많다고 금적자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를 작자도 아니지 않는가.
“응? 말을…… 해!”
“예순……셋이다.”
금적자의 채근에 결국 참다못한 음산오살의 대형이 입을 뗐다.
금적자가 멍해졌다.
“……형?”
“…….”
“나…… 예순둘…….”
“…….”
음산오살의 대형이 아예 할 말을 잃어버렸을 때,
도주하던 두 살수는 난관에 처했다.
적의살수가 문제였다.
암기에 의해 찢겨나간 옆구리에서 출혈이 심해지고 있었다. 지혈을 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리하게 운기하며 신법을 펼쳐 기혈이 역류한 데다,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확인하면서 맥박이 말로 할 수 없이 뛰는 탓이었다.
앞서던 청의살수가 일시 멈춰 돌아오려 했다.
분명 부축하려는 의도였기에 적의살수가 소리쳤다.
“난 틀렸어. 먼저 가.”
“그래, 넌 틀렸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 음성에 적의살수가 놀라 돌아본 순간, 그의 목이 날아갔다.
스악!
쿵.
머리를 잃은 적의살수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이어 마지막 남은 청의살수를 향해 튀어나가려던 후공이 신형을 멈췄다.
‘……?’
후공이 청의살수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뜻밖에도 놈이 도주할 의사를 접고 검을 고쳐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공이 피식 웃음지었다.
“넌 좋은 꿈을 꾸나보구나.”
웃음이 끝나기 전 신형이 폭발했다.
청의살수가 맞서 검광을 뿌렸다.
십여 초 후.
털썩.
청의살수가 무너졌다.
어쩌면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울컥울컥 피를 게워내기 바빴다.
그의 두 손은 그어진 자신의 목에서 쏟아진 피를 막아내려 필사적이었다.
세 토막 난 검이 초라하게 그 곁에 흩어져 있었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천화서고 대공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의 결이…….’
당하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천화서고 대공자의 각성은 얼마 전이거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왜 이렇게 된 걸까.
누굴 건드린 건가.
대공자뿐 아니라 천공단에 멸살단까지.
‘무극살부는 철칙을 버렸어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