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진심은 갖출 시간이 필요하다
두두두…….
약왕문을 향한 여정은 이어졌다.
마차의 질주 속에 무극살부의 추적매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천공단은 여전히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무겁고 어두웠다.
금적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더는 피리를 불지 않았고, 항마삼협이나 무산쌍웅도 그늘진 안색으로 한마디 말조차 없었다.
그렇다 해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언제나 따로 노는 이들은 있는 법.
“범 공자는 사람이 왜 그런가요? 팔을 잘 잘라야지, 그걸 내 쪽으로 날려 보내면 어떡해요! 제가 언제 팔베개 해달라고 하던가요! 산 사람도 아니고 뭐예요, 진짜!”
뜻밖의 팔베개였기에 묘빙빙의 불평불만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묘빙빙의 세계에 덜덜 떠는 일 따윈 없었다.
“누나, 머리통이 아닌 게 어디야.”
소천개가 다정하게 위로를 건넸다.
다정하게 말한다고 위안 받기엔 내용이 살벌했다.
“닥쳐, 거지야! 핏물에 머리카락이 떡져서 얼마나 곤란했는 줄 알기나 해!”
“팔베개가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았잖아. 형아한테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지. 마음씨가 너무 괘씸하네. 사람 맞아?”
“너희 거지들도 고마워하지 않았으면서 누구한테 훈계니!”
사실 여태 고맙다는 말은 거지들뿐 아니라 천공단 누구도 꺼낸 적이 없었다. 호언장담에 온갖 설레발을 치던 쾌활함과는 딴판이었다.
“우리는 형편이 달라. 애초에 형아 지키러 온 거 아니거든. 맛있는 것 먹으러 왔다구.”
“뭐가 어째!”
“대사형이 그냥 천화서고 형아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면 그게 공부랬단 말야. 그치, 사형아?”
“아무렴. 누가 누굴 보호해. 개소리지.”
은앙개가 낄낄거렸다.
대사형 취운개의 말인즉,
- 앞에 나서지 말고 대공자 놈에게 깝치지도 마. 그냥 공부한다 생각하고 지켜봐. 어지간한 강호인들 찜져먹는 놈이니까. 안 듣고 어디 쳐다보냐, 이 거지새끼들이 진짜.
은앙개와 소천개가 평상시 대사형을 개보듯 해도 진심은 아니다. 대사형의 안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드러난 결과는 역시나였다.
묘빙빙이 부루퉁해져 거지들에게 쏘아붙이고 거지들도 지지 않고 반발하니 말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금적자, 항마삼협, 무산쌍웅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빛은 어두워져만 갔고,
눈빛은 점점 음침해졌다.
***
그날 밤.
금적자는 일행과 떨어져 작은 주루에 홀로 있었다.
죽엽청 한 병.
채워진 술잔.
술잔은 채웠지만 그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선생, 여기 계셨습니까.”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자리에 합석했다.
금적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술잔만 응시했다. 항마나 무산도 자리를 잡고 앉았을 뿐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주루의 점소이가 머뭇거렸다.
원래라면 빈잔을 가져다주고 주문을 받아야했지만, 차마 다가갈 엄두를 못 내고 눈치만 살폈다.
한참 뒤,
먼저 입을 연 건 무산쌍웅이었다.
“선생께선 이번 일을 유야무야 묻고 가실 건 아니겠지요?”
둘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금적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 밤이 가기 전 끝을 봐야지.”
무산쌍웅이 잔악스러운 미소를 띠며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항마삼협을 바라보는 것으로 물음을 대신했다.
삼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중 이열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그걸 묻다니 언짢군.”
“확인한 것뿐이오.”
무산쌍웅이 형형하게 쏘아진 이열의 눈길을 피하며 어눌하게 답했다. 그걸 끝으로 좌중의 대화는 사라졌다.
대신 금적자는 음울하게 피리를 매만졌고,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은 허공에 초점 없이 눈동자를 두었다.
눈이 말하고 있었다.
수치스러운 어제의 일을 정리할 시간이다.
말끔히 날려버려야 한다.
이 밤이 가기 전.
그들의 다짐이 술잔에 맴돌았다.
**
같은 시각.
후공은 귀를 후비기 바빴다.
“그만 좀 떠들거라. 고막 나가겠다.”
송화와 양소가 난리법석이었다.
어찌나 요란하게 떠드는지, 누가 보면 어디서 불이라도 난 줄로 알 정도였다.
“공자님, 왜 이렇게 여유로우세요. 오늘 내내 공자님께서도 보셨잖아요. 금적자라는 분 얼굴은 죽어 있고, 항마삼협이나 무산쌍웅은 또 어땠는데요.”
“저도 똑똑히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음험한 기운을 뿜으며 따로 모여 있습니다. 당장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후공은 눈매를 찡그리며 한심하다는 듯 둘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두 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험하면 어떻고, 피리를 안 불면 어떻단 말이냐. 조용해서 마음에 드는 하루였거늘 너희는 뭐가 그리 불만이야.”
“공자님……. 제발요…….”
송화와 양소는 답답해 죽었다.
벌어질 상황이 명백하거늘 명석한 두뇌를 지닌 주인이 왜 이리 덤덤하게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자님, 금적 선생을 비롯한 몇몇의 안색이 음침해진 이유야 단 하나잖아요. 지난밤의 사건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요. 그들에겐 잊고 싶은 기억일 테고요.”
“맞습니다. 명성이 없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이름난 고수들인데 그 명성에 흠집이 났으니 분명 어제 일을 아예 없었던 일로 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오늘 밤에…….”
후공이 양소의 말을 가로챘다.
“나를 죽여 강호에 소문이 흘러가지 않게 한다?”
“네. 당연합니다. 알려지면 웃음거리로 전락할 테니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양소야, 송화야.”
후공이 차분히 불렀다.
“네, 공자님.”
“너희는 생각을 안 하기로 한 거냐, 아니면 처음부터 멍청이였던 거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천공단이 명성에 신경을 쓴다는 거냐?”
“네!”
“아하, 그런 것이로군. 천~공~단~ 하고 튀어나온 놈들이 명성에 신경 쓴단 말이지? 등장 때 말 한마디 덜했다고 투닥대던 그 천공단이?”
“어…….”
순간 송화와 양소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후공이 말을 이었다.
“비 맞고 마차 지붕 위에서 피리 불던 금적자가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걸 막으려 한다라. 재밌구나, 재밌어.”
송화와 양소는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생각해 보니 천공단은 처음부터 웃음거리였던 것이다.
지나던 길에 아무 상관없는 이들을 잡아다가 무극살부가 틀림없다며 쥐 잡듯 잡기까지 했었다.
후공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이리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원. 소천개도 신경 쓰지 않는 걸. 너희가 제정신 아닌 사람까지 정상인으로 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건 알겠다만, 망상으로 이어지면 곤란해.”
“그, 그치만 오늘 분위기는 너무 괴상했잖아요. 또 대수롭지 않게 여긴 무극살부에게 당했으니 경우가 다르기도 하구요.”
송화가 나름 항변했다.
“그만해라.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후공은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송화와 양소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릴 때였다.
“범 공자,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문 너머에서 금적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화와 양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이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걸 주인이 간파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인의 무공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자신들과는 이미 수준차가 극명하다.
‘그보다…….’
금적자의 목소리가 심히 정중했다.
무엇보다 문밖에서 허락을 구하고 있다니.
여태 겪어온 금적자는 이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에게 문이란 건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문을 박차고 들어오거나 창문으로 넘어오는 사람이지, 허락을 구하고 답을 기다리는 이가 아니었다.
“들어오십시오.”
“그럼…… 들어가겠네.”
들어선 건 금적자만이 아니었다.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뒤를 이었다.
누구 할 것 없이 표정이 진지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송화와 양소는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림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눈만 빠르게 깜박였다.
먼저 나선 건 금적자였다.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네. 어제 일로 이 노부가 생을 이어가게 되었고 크게 신세를 졌네. 말로 고마움을 다 표할 순 없겠으나, 지금은 진심을 담아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니 받아주게나.”
한마디 한마디가 정중하고 진지했다.
“으허억!”
송화와 양소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루 내내 뭔 일이 나도 날 것 같던 살벌한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보고 있으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금적자의 공손함은 아예 딴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주인의 반응이었다.
주인은 의자에 앉은 채로 일어나지도 않고 뚱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겸양도 없이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건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귀찮음까지 느껴지는 표정은 뭐란 말인가.
놀라움은 이어졌다.
금적자에 이어 항마삼협이 정중히 예를 취했다.
대표로 입을 뗀 건 이열이었다.
“우리 삼협이 강호를 종횡하며 여러 위기를 겪어왔지만 지난밤처럼 무기력했던 적은 없었네. 원한은 두 배로, 은혜는 열 배로. 범 공자, 결코 이 은혜를 잊지 않음세.”
삼협의 태도도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디 죽일 사람 없나 전전긍긍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송화와 양소의 입은 다물어지다가 더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다음은 무산쌍웅.
“대공자, 고맙네.”
둘은 짧고 굵게 말을 맺었다.
험악한 인상은 여전했지만 그들의 언행에는 무게가 실려있었다.
후공은 턱만 천천히 문질렀다.
‘녀석들, 거창하긴.’
대충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촐싹대던 놈들이 어두운 안색으로 말이 없어진 건 뻔했다.
단지 설레발을 떨었던 것이 민망해서?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놈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었으리라.
목숨을 빚진 경우가 최초여서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
한편으로는 마음을 가다듬고 진심을 갖출 시간으로 하루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걱정은 없었다.
항마들의 경우 죽음이 확정된 순간 자신들이 대신 죽겠다는 말을 꺼낸 녀석들이 아닌가.
단지 성향과 사람마다의 색깔 문제.
개방 거지들이야 깔깔 웃는 것으로 마음을 전했고, 이들은 이들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 좋다만.
‘귀찮네.’
정중히 예를 갖춰 말하니 이놈들과 더 얽힐 것 같아 후공은 여간 불길한 것이 아니었다.
대충 겸양하고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해야 했다.
무극살부의 추적매도 사라진 마당이고, 약왕문도 나흘이면 도착이다.
그렇게 후공이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다들 여깄었네요.”
묘빙빙이 당당한 기세로 들어섰다.
두 거지도 함께였다.
묘빙빙은 방을 둘러보다 상황을 파악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의 시간 뭐 그런 건가 보죠? 저한테도 미리 말을 해주시지 참, 사람들이 왜 그래요. 의리 없이.”
금적자 등이 옆으로 물러나며 자리를 내주었다.
묘빙빙이 성큼 나아가 후공을 향해 절도있게 포권을 취했다.
“범 공자, 고마워요.”
후공은 그저 빙긋 웃어보였다.
이 아이는 터무니없이 밝아, 보고 있기만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묘빙빙의 감사가 이어졌다.
“고맙고, 또 한편 그동안 얕잡아봐서 미안해요.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 줄 몰랐네요. 면박 주고 마차 지붕도 부순 것도 미안해요. 제법 고수였는데 병신새끼라고 놀린 것도 사과할게요.”
감사의 말이 끝나자 은앙개와 소천개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