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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56화 (56/460)

56화. 천공단주가 되다

반대로 금적자, 항마삼협, 무산쌍웅의 얼굴은 완전히 구겨져 아주 죽일 듯 묘빙빙을 쏘아봤다.

삽시간에 진중한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자신들이 하루 동안 쌓아올린 진지함과 무게가 묘빙빙의 말 한마디로 아무렇지 않게 날아가버렸다.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그냥 다 물거품.

후공도 미소를 거두고 미간을 좁혔다.

‘터무니없는 녀석 같으니.’

이건 역시 가정교육 문제다.

다시금 백화장주를 어떻게 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는 후공이었다.

하지만 묘빙빙은 누구 시선 따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공단을 빙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에요. 다들 입으로만 은혜를 떠들고 말 건가요? 사람이 그럼 못써요. 그래서!”

“?”

모두 의문을 띠고 바라봤다.

“본녀가 제안합니다. 본녀는 범 공자를 천공단주로 추대했으면 싶어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가요?”

후공은 내심 코웃음쳤다.

‘누구 맘대로.’

바로 일어나 정중히 예를 취했다.

“말씀이 과합니다. 천공단주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제 일은 은혜니 뭐니 할 것이 못됩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니 다들 이번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천공단주? 아서라.

후공은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이놈들과는 하루 빨리 작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게다가 천공단주에 미쳐있는 금적자며 항마삼협 등이 순순히 이 제안에 응할 리도 만무…….

“찬성일세에에에에!”

생각은 끊겼다.

금적자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천둥 같은 고함.

방금 전까지 진중히 무게를 잡고 있던 탓에 다들 놀라 오만상을 쓰며 노려봤다.

후공이라고 다를 건 없어 금적자를 쏘아봤다.

‘이놈의 새끼, 금세 돌아왔네.’

차분함이 하루를 넘기지 않다니.

묘빙빙이 막나가는 바람에 금적자도 ‘에라 모르겠다’가 되어버린 건 알겠는데, 꼭 이렇게 소리칠 건 아니잖은가.

“좋군. 우리도 찬성!”

“우리도!”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바로 동조하고 나섰다.

뜻밖에 추대의 물결이 파도쳤다.

은앙개와 소천개도 ‘찬성입니다요’라고 소리치면서 만장일치가 되었다.

그때 무산쌍웅이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짜증나는군.”

“두 분은 갑자기 왜 그래요? 찬성한다면서 고새 생각이 달라진 건가요?”

묘빙빙이 쌍심지를 돋우고 쏘아붙였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요?”

“모두 다 같이 범 공자를 천공단주로 추대하니 은혜에 대한 차별점이 없어서 그런 게지! 좋아, 그럼 우리 무산쌍웅은 천공단주에다가 하나를 더하도록 하지.”

“뭘요?”

“향후 5년 동안 우리는 범 공자를 형님으로 부르고 따르도록 하지. 클클클클…….”

자신들이 말하고도 만족스러운지 무산쌍웅이 끔찍하게 웃어댔다.

이렇게 되자 항마삼협의 안색이 급 초조해졌다.

쌍웅에게 밀리는 느낌.

밀려서는 안 된다는 다급함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났다.

셋은 빠르게 전음으로 의견을 나눈 뒤, 화통하게 외쳤다.

“우리 항마삼협은 5년 6개월!”

“얍삽하게 뭔 짓입니까!”

무산쌍웅이 반발했다.

이열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 이미 지나간 일이네.”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건 금적자였다.

침을 꼴깍꼴깍 삼켜대면서 안면을 불안하게 매만졌다.

후공쪽을 봤다가 천공단을 봤다가 동공을 흔들던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나, 나는 그냥 잘하겠네. 형님이라 부르기엔 내…… 내가 예순둘이다 보니…….”

다들 이해했다.

나이에 심한 집착을 보여 온 금적자가 아닌가. 잘하겠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받아들였다.

그다음은 묘빙빙이 나섰다.

“좋아요. 본녀도 형님으로 모시겠어요! 저는 통 크게 10년 갈게요!”

곧바로 찬사가 쏟아졌다.

“오오오!”

“굉장하구만!”

“역시 권세 있는 백화장의 장녀다워!’

“누나 멋져!”

왜 호칭이 오라버니가 아니고 형님인지는 누구도 따져 묻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묘빙빙에게 천공단은 적응 완료.

그때 얌전히 있던 은앙개가 나섰다.

“험험, 위대한 천공단분들에게 이 거지 한 말씀 올립지요. 중요한 건 천공단주라는 칭호가 아닙니다. 천공단주는 그에 걸맞은 권위와 위상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령은 절대적이어야 하고 거부권은 없어야겠죠. 이름하야 상명하복을 뛰어넘는 절대복종! 무상의 위엄!”

두둥.

- 절대복종!

- 무상의 위엄!

잠시 정적이 일었다.

단순히 천공단주라는 것과는 무게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댔다.

“어제 죽었을 목숨이었는데 문제될 것 없네.”

“저희도 선생의 생각과 같습니다.”

“클클, 그쯤 되어야 대공자가 천공단주를 할 맛이 날 테지.”

“형님, 절대복종할게요!”

마지막으로 묘빙빙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잘들 논다.’

후공은 내심 혀를 끌끌 찼다.

이놈들은 천공단이 되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건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녀석들이 죽이 척척 맞으니, 후공은 기도 안 찼다.

하지만 후공에게 있어 천공단주에 대한 생각은 이미 달라져있었다.

‘후후, 절대복종이라면 사양할 이유가 없지.’

은앙개가 처음으로 밥값을 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고기를 먹인 보람이 있었다.

“범 공자, 천공단주가 되어주게!”

금적자가 예를 취했다.

뒤따라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따라서 청했다.

소천개도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냈다.

“형아, 나의 두목이 되어줘!”

모두가 공손히 포권을 취한 상태.

후공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의 뜻이 그러하다면 더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수락합니다. 천공단주가 되겠습니다. 저는 오늘부로 천공단주입니다.”

“와아아아!”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이게 환호까지 터뜨릴 일이냐 싶지만, 천공단에게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천공단!”

“천공단!”

“천공단!”

급기야 천공단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 두목형아!”

‘정신 나간 놈들.’

후공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진정하십시오. 제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곧바로 잠잠해졌다.

금적자가 작게 ‘취임사로구만’이라고 중얼거렸다.

후공이 고개를 저었다.

“취임사는 아닙니다. 천공단주로서 여러분들께 첫 번째 명을 내리고자 합니다.”

“오오오!”

“벌써 임무가 시작된 건가?”

“이거 기대되는구만!”

다들 눈을 반짝였다.

“모두들 천공단주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물론이네!”

“당연하지!”

“좋습니다. 그럼 천공단주로서 여러분께 명합니다. 이 시간부로 여러분들을 천공단에서 파면합니다!”

쿠웅!

시작하자마자 추방!

금적자를 위시한 천공단이 휘청였다.

***

비척비척.

걸음걸이에는 힘이 없었다.

금적자 등은 아까의 주루로 발을 질질 끌며 다시 돌아갔다.

다들 어깨가 축 처쳤고 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점소이가 움츠러들며 눈치를 살폈다.

‘이 사람들, 왜 또 온 거야?’

아까와 다른 분위기였지만 이번엔 이번대로 묘하게 심각해보였기에 주문을 받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못 죽였나.’

분명히 누구 하나 죽이러 가는 비장함이었다.

그런데 축 처져 돌아왔으니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럴 땐 모른척하는 것이 생명연장의 요체였다.

괜히 술 좀 팔아보겠다고 눈앞에서 얼쩡거렸다간 화풀이 대상이 되어 죽어나갈 수 있었다.

“완전히 망해버렸구만.”

금적자가 탄식했다.

항마삼협도 이를 갈았다.

“분통이 터져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무산쌍웅도 눈을 이글거렸다.

그러다 분노를 애먼 점소이에게 쏟아냈다.

“너는 손님이 왔으면 응대를 해야지, 뭘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는 거냐! 죽고 싶냐!”

“네?”

“술을 내오란 말이다!”

“바……바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요.”

술이 나오고 폭풍같이 들이마시는 중에 한탄이 이어졌다.

“젠장, 우리가 뭐가 모자라다고 파면인 건지.”

“솔직히 우리의 두목이 된다면 든든해야 하는 거 아냐!”

“제놈이 후공이야 뭐야! 수하가 소림방장쯤 되어야 만족한다는 거냐고!”

분통 속에 이열이 방법을 모색했다.

“선생,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리되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입니까.”

금적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나.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인데.”

“잘난 건 맞습디다.”

“뭐?”

“발끈하실 거 없습니다. 직접 보셨잖습니까.”

“끄응.”

금적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다른 이들도 반론은 없었다.

“소문이 오히려 축소된 겁니다. 서문세가를 조져놓았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다들 안다.

수면독에 당해 비몽사몽이었다 해도 볼 건 다 봤다.

이열의 말에 무산쌍웅이 짜증을 내며 말을 받았다.

“말씀이 옳습니다. 영락없이 잠들었다 싶었거늘, 잠든 척하며 급습한 것만 봐도 대공자의 상황 판단이 얼마나 빠릅니까. 그 짧은 순간 그 같은 결정을 내리기가 어디 쉽습니까.”

금적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임기웅변뿐이 아니다.

“그 와중에 전음으로 살수들을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뜨려놓은 것도 빼놓을 수 없지. 암기에 대응함에 있어서도 머뭇거림이 없었고. 바닥을 무너뜨릴 생각은 어찌한 건지.”

“그런 대처는 수많은 실전을 거쳐야 우러나올 수 있거늘, 대공자 녀석은 아예 생각의 속도가 다른 차원입니다.”

푸념은 계속 이어졌다.

검법과 빠른 결단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비가 없죠. 책 속에 파묻혀 살았을 서생 주제에 피를 보는데 주저함이 없다니.”

도주하는 자들까지 깔끔히 처리한 솜씨는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그리 간단치 않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강호를 살아감에 있어 망설임이나 자비심이 얼마나 쓸데없고 큰 위험을 불러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죽여야 할 땐 죽여야 한다. 하지만 실행은 어렵다.

“그래서 대공자가 마음에 들었는데 파면이라니.”

“이제 좀 재밌어지려니 했거늘.”

항마삼협이 술을 거칠게 들이켰다.

무산쌍웅도 답답한지 술병을 들고 나발을 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이 없었다.

절대복종은 꺼낼 것이 아니었다.

외통수였다.

거지새끼들 때문에 되는 것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한숨 속에 술병만 빠르게 늘어갔다.

그때였다.

“다들 여깄었네요.”

활달한 목소리로 묘빙빙이 들어섰다.

거지들이 뒤따라 들어오면서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누가 죽기라도 했나 봐.”

“왜 여기서 죽상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곧바로 항마삼협이 으르렁거렸다.

“네놈들은 뭐가 좋다고 처 웃는 거냐!”

소천개가 실실거리면서 이열 옆으로 가서 비집고 앉았다.

“안주는 안 시켰어요?”

“어.”

“피이…….”

“너흰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우리요? 우린 상관없어요. 우리야 천화서고 형아랑 친해서 그냥 같이 다니면 되거든요. 천공단이든 아니든 뭔 상관이람. 그치, 사형아.”

“말해 뭐해.”

은앙개가 우쭐하더니 금적자 등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 제가 처음부터 말씀 드렸잖습니까. 서문세가가 괜히 아작난 게 아니라고요. 천화서고 녀석도 만만한 녀석이 아니에요. 거슬리면 누구든 곤란해져요. 물론 우린 예외지만. 에헴.”

금적자를 비롯 모두가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묘빙빙이 인상을 찡그렸다.

“다들 고개 처 들어요. 왜 병신같이 의기소침해 있는 건데요! 제게 묘안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아요!”

“묘안?”

병신 소리에 화를 내려다 묘안이란 말에 다들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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