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나다
묘빙빙이 가슴을 탕탕 쳤다.
“제가 묘씨예요. 묘수, 묘안. 이런 데 정통하다구요.”
“누나, 그 묘하고 다른 거 아냐?”
“닥치고 듣기나 해. 이 거지야.”
“웅!”
이제껏 보아온 묘빙빙은 제안에 능통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우리가 누군가요?”
“누구라니?”
“답답하군요. 우리는 천공단의 창단공신이에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
“창단공신은 파면이 불가해요!”
다들 눈만 깜박였다.
“그런 게 있었어?”
금시초문이었다.
묘빙빙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천공단의 법도는 원래 이래요. 창단공신의 파면 요건은 천공단 장로들이 절반 이상 동의해야만 가능하죠.”
“으잉? 천공단에 장로들이 있었어?”
역시 금시초문.
금적자는 어리둥절했다.
“선생께선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신 모양이네요. 그 머리로 무공은 어떻게 익히셨대요?”
그제야 금적자의 머리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아하! 그러니까 우리가 장로인 거야?”
“그렇죠. 창단공신이면서 여러분들이 팔장로예요. 천공단의 법도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이들.”
단박에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오오오오오!”
“묘수군, 묘수야!”
“그래, 우린 창단공신이었던 거야!”
“누나, 끝내준다! 천공단의 법도는 우리가 만드는 거였네!”
생각의 전환.
막 나가는 묘빙빙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긴 했지만, 이것이라면 억지 부리기 딱 좋았다.
어둠 속에 한줄기 빛.
단주에게 절대복종해야 맞지만, 천공단의 세부 법도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다들 죽었다 부활 받은 사람처럼 기뻐하며 환호하는 중에, 문득 무산쌍웅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묘 소저, 근데 왜 팔장로인 겐가? 우린 아홉인데?”
“어라, 그렇네?”
모두 의아해할 때 묘빙빙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호, 느려욧! 언제 물어보나 기다렸잖아요. 본녀는 장로가 아니에요.”
“그럼?”
“천공단의 군사랍니다! 계략과 모략. 귀계를 펼치는 생각의 신!”
“…….”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관두세요. 생각을 하지 마요. 아무 걱정 말고 머리를 비우도록 해요. 생각은 제가 다 할 테니까. 호호호호호호호호!”
“…….”
“…….”
“…….”
***
우격다짐은 통했다.
파면은 무효라며 천공단은 복귀했다.
그것도 화려하게.
팔장로와 군사라는 이름으로.
“금피리 할아버지, 피리 소리가 너무 구슬퍼요. 오늘같이 기쁜 날은 빠르고 신나는 걸로 가자구요.”
“거지야.”
“왜요?”
“언제까지 할아버지라고 부를 셈이냐.”
“할아버지는 저를 언제까지 거지라고 부를 셈인데요?”
“허허, 그렇게 되나. 천공단의 수석장로로서 내 생각이 짧았구만, 소천 장로. 자, 그럼 경쾌한 음률로 가자꾸나.”
삐리리리~~ 삐삐삐삐삐~~
후공은 달리는 마차 창을 통해 보며 내심 혀를 찼다.
‘한심한 놈들. 떠먹여줘도 받아먹질 못하다니.’
간밤에 파면 선언은 귀찮은 것이 주된 이유였긴 해도, 다른 한편으로 이들에게 숨통을 열어주려는 뜻도 컸다.
쫓겨났을 뿐이라는 명분을 던져주었다.
마음의 짐 없이 제 길을 갈 수 있는 자유를 건넸다.
그러니,
‘싫다면 도리가 없구만’ 하면서 떠나면 그만이었다.
적절히 책임을 회피할 이유를 만들어주었거늘 이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다.
‘오냐, 제대로 굴려주마.’
솔직히 천공단의 면면은 제정신 아닌 듯 소란스러운 것만 빼면 솜씨들은 제법 쓸 만하다.
금적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항마삼협도 용처가 쏠쏠할 터.
또 이번에 알게 된 무산쌍웅이란 녀석들은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눈치가 빠르고 의리가 있으며 순진한 면모도 엿볼 수 있었다.
묘빙빙이나 개방 아이들과도 투닥대긴 해도 결코 선은 넘지 않는다. 즉 모두가 부려먹고 굴리기 딱 좋은 놈들이란 뜻이었다.
‘생각의 신이 달리는군.’
후공은 묘빙빙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 그녀가 망가뜨린 마차 천장은 구멍이 뚫려있고, 덕분에 전망이 좋다. 어째 생각의 신께서는 천장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신법을 펼쳐 달리던 묘빙빙이 뭔가를 느꼈음인가.
순간 돌아보았고 후공과 눈이 마주쳤다.
묘빙빙이 맑게 웃어보였다.
“형님, 무슨 걱정이 있나요?”
“…….”
“걱정 같은 건 하지 마요. 설마 형님은 제가 천공단의 군사가 되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죠? 생각은 누가 한다? 호호호호호!”
후공은 시선을 거둬버리곤 양소를 불렀다.
“양소, 마차를 세워라. 잠시 쉬었다 가자.”
“네, 공자님.”
오전 내내 달려왔다. 천공단에겐 휴식이 필요 없지만 말들은 숨을 돌려야 했다.
이어 후공은 은앙개를 불렀다.
“두목, 무슨 분부라도?”
“두목형아, 저쪽에 냇가가 있는 것 봤어, 못 봤어. 우리 물고기 잡아다 구워먹고 가자.”
부록처럼 은앙개를 따라 온 소천개가 물고기를 잡기도 전에 군침부터 삼켜댔다.
후공은 송화를 바라봤다.
미리 언질을 받은 송화가 은앙개에게 은전을 건넸다.
두 거지의 눈동자가 말도 못하게 흔들렸다.
“두두두, 두목, 이 돈은 뭐야? 설마 급여?”
“약왕문은 이제 사흘. 가까운 표국으로 가서 약왕문에 전서를 띄우도록 해.”
“근데 돈이 많은데?”
“남는 돈은 오는 길에 간식거리를 챙겨오면 된다.”
표국은 화물만 배송하는 건 아니다.
지역 문파와 명문가를 왕래할 전서구를 운용하기에, 소식을 전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후공은 천화서고에서 출발할 당시 약왕문에 서신을 띄우긴 했지만, 근접했으니 예의를 갖추는 의미에서 다시금 도착일을 알리고자 했다.
독양충을 얻어야 하지 않는가.
예의를 다하는 건 일을 수월하게 풀어내는 방법 중 하나다.
“서신 내용은 간단명료하면서도 최대한 공손히 적도록 해라.”
“넵, 두목.”
거지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달려갔다.
돈이 많아 이것저것 사고도 잔돈 좀 나오겠다며 떠들다가 뭘 사먹을 건지를 놓고 투닥대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후공은 약왕문주를 떠올렸다.
‘약왕문주는 오랜만이군. 여전히 약에 파묻혀 살고 있으려나.’
이십여 년 전까지는 가까이 두었었다.
당시 강호는 혼란했던 터. 이후 강호가 안정된 다음에는 가끔씩 보다가 얼굴을 못 본 지도 8년 정도 되는 듯하다.
부를 일이 없기도 했지만, 세월이 그만큼 빨리 지난 것도 있었다.
**
그날 밤.
서신은 약왕문 부문주의 손에 들어갔다.
몇 문장에 불과했지만 부문주의 미간은 깊게 파였다.
그는 서신을 여러 차례 읽고 또 읽었다.
‘알 수 없군. 제정신인가.’
갸웃한 그는 외무각주를 불렀다.
“부문주님, 부르셨습니까.”
“화청, 둘뿐이니 편히 말하거라.”
“네, 형님.”
용화청이 즉시 호칭을 바꿨다.
그는 약왕문주의 차남이자 동시에 외무각주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서신을 보내왔다. 이틀이면 도착할 듯싶구나.”
“아! 천화서고. 잊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그래, 덕분에 난처해졌구나.”
용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일이 조금 꼬였습니다. 지금 상황에선 천화서고가 본가에 발을 딛게 하면 안 됩니다.”
“물론이다. 난화서원의 묵 공자가 알게 된다면 좋은 그림이 아니니.”
약왕문의 난제는 암호화된 문서의 해독이었다.
그 일을 해결코자 처음 초대한 인물은 난화서원의 천재였다.
난화서원은 삼대 서고 중 하나로, 천화서고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곳.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난화서원에 도움을 청했건만 회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선책으로 떠올린 곳이 천화서고였다.
천화서고에서 독양충을 구한다며 존재 유무를 타진해 온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당시 서신을 받았을 때만해도 ‘독양충을?’ 하며 코웃음쳤는데, 상황이 바뀌니 생각도 달라졌다.
또 안휘 북부의 서문세가 사건도 전해 듣고 나니, 천화서고의 천재가 정신을 차렸다면 괜찮은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열흘 전.
일이 꼬였다.
가타부타 연락이 없던 난화서원에서 예고도 없이 약왕문을 찾아온 것이다.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사정을 듣고 보니 난화서원에서는 회신을 보냈으나 전서구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이중 의뢰.
천화서고와 난화서원.
난화서원의 천재는 이미 문서해독 작업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약왕문이 천화서고를 부른 걸 난화서원에서 알게 된다면, 해명을 한다고 해도 오해의 여지가 남게 된다. 또 한참 열중인 작업에 방해요소로 작용할 우려도 있었다.
“화청, 네가 수고해 주어야겠다.”
“그리하겠습니다. 이틀이 걸리는 거리라면 행방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범위는 약왕문의 영향권 안이다.
수소문한다면 금방 만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독양충을 건네는 것이 찜찜했는데, 독양충을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까. 제가 원만히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부문주 용화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밖에서 대기하게 해라.”
“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다. 난화서원의 묵 공자가 뛰어난 천재로 불린다 해도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
“흐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여지는 있지요.”
강호에 퍼진 명성으로 치자면 천화서고 대공자 쪽이 월등했다. 어릴 때부터 세상을 들썩이게 한 규모부터 다르다.
천재성이든, 폐인성이든.
“나 또한 묵 공자 선에서 마무리되길 바란다.”
“돌려보내긴 쉬우나, 천화서고 대공자의 발을 묶어두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쉽게 만들어야지.”
“네?”
본시 천재란 것들은 자존심이 강한 데다 다루기가 어렵거늘, 쉽게 만들다니?
“묘책이 있으십니까?”
“이걸 봐라. 천화서고 대공자의 서신이다.”
부문주가 서신을 건넸다.
받아들어 읽어내려간 용화청이 쌍심지를 돋으며 갸웃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서신의 내용은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이건 건방진 문제를 떠나서 아직까지 대공자놈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하아, 천재라는 작자가 이 무슨…….”
용화청이 다시 읽어 내려갔다.
다시 봐도 얼척이 없었다.
내용인즉,
- 약왕문에게.
나다.
천화서고 대공자.
조만간 상춘현에 도착하니까 마중 나와라.
지붕이 날아간 마차를 찾아라.
거기에 나 있음.
- 천화서고 대공자.
이건 겁이 없다기보단 머리가 어떻게 된 수준이었다.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것으로 포장하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잘된 걸 수도 있다. 예의 없는 자는 다루기 쉽다. 기세로 눌러 순응케 하면 된다. 갈 때 형악검과 단혼수를 대동하거라.”
“아!”
용화청은 단박에 말뜻을 알아차렸다.
형악검과 단혼수.
이 둘은 약왕문 내에 손꼽히는 강자.
하지만 무공만 고강한 것이 아니다.
기세가 거칠고 외모가 험상궂기 짝이 없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인상이다.
이제 막 강호를 접한 천화서고 대공자는 날뛰기도 전에 위축될 것이다.
“그리고 천잠은 어찌하고 있느냐?”
“천잠은 외출을 삼가고 마련된 거처에 얌전히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 와중에 천잠까지 날뛰면 곤란해진다.”
“본가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떠나기 전 다시 점검하고 천잠육도에게도 언질을 해두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다음 날.
약왕문이 천화서고 대공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