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제가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1)
지붕이 날아간 마차는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고 기억에 쏙 박혔다.
건너건너 몇 번의 수소문 만에 위치를 파악했다.
약왕문 입장에서는 애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취선루 이 층.
서로를 확인하고 정중한 인사가 오갔다.
용화청이 자리를 먼저 권하면서 후공과 마주 앉았다.
후공으로선 의외의 상황이었다.
‘묘하군.’
찾아온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면한 순간, 웃는 얼굴 뒤로 약왕문 두 고수의 기운이 압박해온 것이다.
명백한 적개심.
게다가 두 놈 다 인상까지 험악하지 않는가.
마치 골라 온 것처럼.
물론 험악해봤자, 무산쌍웅에 견주어보자면 순한 맛이다만.
어쨌든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약왕문에서 직접 마중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내일 정도면 도착할 터인데 벌써부터 이리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겸손이십니다그려. 대 천화서고가 부르면 와야지요. 약왕문이 뭐라고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
‘내가 불렀다?’
후공이 갸웃했다.
“마중을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만.”
“허허허, 이거 당황스럽습니다. 그럼 서신에 마중을 나오라는 말은 농담이었나 봅니다.”
“아…….”
후공은 비로소 이해했다.
‘요놈의 자식들…….’
개방 아이들이 장난을 친 모양.
“모르셨던 겁니까?”
“네, 아무래도 제 수하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제가 세심히 살피지 못했으니 제 불찰입니다. 사과드립니다.”
“수하가 말입니까?”
용화청이 코웃음쳤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들어 양소와 송화를 바라보자, 송화가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저희는 아니에요.”
거기에 후공이 말을 보탰다.
“아, 제가 말씀드린 수하는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하지만 곧 돌아오니, 무례함에 대해 용서를 빌게 하겠습니다.”
천공단은 현재 이곳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웅성웅성 작당을 하더니만 우르르 몰려나간 터였다.
“수하가 많나 봅니다.”
“없었는데 이번에 생겼습니다. 다들 천방지축이고 그중엔 아직 나이 어린 수하도 있어서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습니다.”
“천화서고는 말씀을 참 재밌게 하십니다.”
용화청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자는 보기와 달리 뻔뻔함이 말로 할 수 없구나.’
분명 신색이 밝고 언행은 단정한데, 하는 말마다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세상 어떤 수하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서신을 작성한단 말인가.
그리고 없었는데 생겼다라니.
불만을 느낀 건 용화청의 뒤에 선 형악검과 단혼수도 마찬가지였다.
‘우릴 우습게 보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외무각주 용화청과는 다른 관점이었다.
뜻밖에도 천화서고 대공자는 위압적인 기세로 압박했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인 것이다.
허허롭게 기운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허공인 양 텅 빈 듯하다.
존재가 없이 투명한 느낌.
기운에 저항하는 건 일반적이며 도리어 쉽다.
하지만 흘려보낸다는 건 상승의 영역.
그렇기에 형악검과 단혼수는 내심, 천화서고 대공자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은연중에 까불고 있다고 생각했다.
“믿지 못하시는 듯한데, 늦어도 일다경 안에는 돌아올 것이니 그때쯤이면 제 말의 의미를 이해하실 겁니다.”
“믿도록 하지요.”
부드러운 어조 탓에 용화청은 더 탓하기가 뭐했다.
이쯤이면 주도권은 충분히 쥔 셈이었다.
더 몰아세우는 것도 좋지 않다.
뭐든 적당해야 한다.
용화청은 바로 화제를 바꿨다.
안휘 북부에서 벌어진 서문세가 사건과 그와 관련된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단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인 탓에, 대화는 두루뭉술 서로 간에 겉만 핥았다.
이윽고 본론.
“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건 서신 때문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양해를 구하기 위한 뜻도 있습니다.”
“양해라시면…….”
후공이 갸웃했다.
“현재 본가 내부적으로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바로 모시고 싶습니다만, 부득이 외부에서 조금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흠……. 무슨 문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부 문제이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이곳에서 닷새 정도만 머물러주십시오. 물론 그 안에라도 상황이 호전된다면 바로 모시도록 하지요.”
“…….”
후공은 즉답 대신 용화청을 지그시 바라봤다.
양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태도가 거슬린다.
외무각주는 등을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고 나른한 어조인 것이다.
타협이 아닌 통보다.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약왕문이 천화서고에 보내왔던 서신 속에는 특이하게도 반드시 ‘천화서고 대공자’가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의미가 단순한 만남에 있을 리 없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두뇌가 필요하다는 뜻.
약왕문이 해결해야 할 어떤 난제가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환대가 아니라 여유를 부린다.
거기에 시간을 끈다는 건, 내부 문제가 아니다.
이미 대체제가 있다는 뜻.
‘누군가 와 있겠구나.’
먼저 온 이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둘이든 셋이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난제가 먼저 온 이의 손에서 해결된다면 상황은 바뀔 것이다. 닷새 후 약왕문은 다른 핑계를 대며 양해를 구할 터.
이러면 결국 독양충은 요원해진다.
‘어쩐지 과도하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했더니…….’
먼저 짖는 개는 이유가 있는 법.
서신에 대한 불쾌함이라기엔 과한 면이 있었다.
‘재밌게 됐군.’
후공은 내심 웃음지었다.
이미 천공단이 시끌벅적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관점에서야 천공단이 잡놈들이지만, 실제 면면을 따져보면 강호의 명성이 녹록지 않다.
천화서고의 서생과 천공단주를 대함이 같을까?
그럴 리가.
강호의 시선은 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천공단이 주루에 들어오자마자 실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목을 따와야겠어!”
“돈이 얼마가 들었는데 이 모양인지, 그 공방의 여자는 웃는 얼굴로 순 날강도짓을 벌이는구나!”
“쌍웅께선 고정들 해요. 생각의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홍빛깔 자수도 잘 어울려요.”
“생각하고 말하는 것 맞아! 우린 진한 핏빛으로 해달라고 했단 말이야! 천(天) 자부터 선혈이 낭자해야지, 분홍이 웬말이냐고!”
어디 갔나 했더니만 자수공방을 다녀온 모양.
‘자수까지 새긴 거냐. 이놈들, 쓸데없이 천공단에 몰입하는군.’
지들 멋대로 천공단에 직책을 만들더니, 급기야 대놓고 옷에 글자까지 새겨온 모양이었다. 천 자 운운한 걸 보니 ‘천공단’일 것이 뻔했다.
일 층부터 시끌벅적하던 천공단이 계단을 올라섰다.
이때 이미 형악검과 단혼수는 한껏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이리 소란스럽단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겁 없는 놈들 천지로군.’
저들의 대화 속에서 쌍웅이란 소리가 들렸지만, 예로부터 별호에 영웅이 들어가는 놈들치고 제대로 된 놈은 드물었다.
수틀리면 모조리 밖으로 끌고 가 한바탕 훈육을 해 줄 요량으로 눈을 사납게 뜨고 지켜봤다.
이 층으로 제일 먼저 올라선 건 소천개와 은앙개였다.
즉 거지들.
순간 허탈해진 형악검이 전음을 발했다.
- 설마 거지 떼인가?
- 요새 거지들 팔자 좋네.
- 어쭈?
이어 올라온 묘빙빙을 보면서는 기가 막혔다.
- 허허, 거지들과 다니는 처자라니.
- 조금 전에는 제법 나이 든 목소리도 들리던…… 헉!
묘빙빙 다음 인물에서 단혼수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쌍웅이라던 이들이…….’
형악검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 무……무산쌍웅 선배들이 왜 여기에!
- 아니 잠깐. 지금 보이는 이들은 항마삼난이 아닌가?
- 항마삼난? 아…… 아니 정녕 항마삼협이란 말인가?
- 틀림없네.
- 쌍웅과 삼협이 왜 함께 있는 건가. 그것도 거지들과 함께…… 으헉!
- 그그그……금적선생??
놀라움은 금적자의 등장으로 정점을 찍었다.
무산쌍웅은 두 사람이 우러르는 선배들이었다.
무공도 무공이고, 험악한 얼굴만 따져도 자신들과는 태산과 야산의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불어 항마삼협은 일명 항마삼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어디 죽일 놈이 없는지 찾아다니기로 명성이 자자해 삼난이라 불린다. 삼협이라 안 부르면 난리가 나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삼난은 금지어다.
상승의 무공을 지녔을 뿐 아니라 성격도 폭급.
괜한 시비가 걸리면 사파로 몰아붙여 죽여버리고는 사파 놈을 척결했다면서 자랑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문파의 명성을 봐가면서 손을 쓰는 이들이 아니다.
거기에,
무산과 항마도 뭔가 싶은데 금적선생이 웬 말인가.
이 상황에 용화청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금적선생?’
그도 면면을 알아보면서 흠칫했다가 금적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버린 탓에 의자가 덜컥거렸을 정도였다.
눈앞에 있는 천화서고 대공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선생께서 어찌 이곳에……. 어떻게 해야 하지? 당장 인사를 올려야 하나? 아니, 지금은 다들 이야기에 바쁜 듯하니 방해가 될지도…….’
왜 금적선생이 항마삼협 등과 함께 있는지, 또 이 무리에 거지들이 왜 있고 젊은 처자가 왜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 제쳐놓고 금적선생의 존재만으로 용화청의 마음은 급해졌다.
무공 수위나 배분으로 따지자면 명문 정파의 장로급.
약왕문과도 인연이 있어 익히 안면이 있었다.
최근 들어 예의를 중시하는 성격으로 변했다고 들었다.
나이를 그렇게 따지신다고 말이다.
그러니 인사가 먼저인 것도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공단은 떠들면서 힐끔 약왕문 인사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이내 먼 쪽 탁자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아 다시 왁자지껄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분홍분홍 자수라니, 누가 보면 여자인 줄 알 거야. 무섭게 생긴 여자들이라고 생각하겠지.”
소천개가 깔깔거리자 무산쌍웅의 얼굴이 장난 아니게 일그러졌다.
“이놈이!”
“하하, 그러니까 저같이 황금빛 자수로 해달라고 했어야죠. 여기 좀 봐봐. 이 찬란한 금빛 좀 보라구요. 이제 나에게 돈이랑 복덩이가 쏟아져 들어올 거야. 둥둥!”
소천개가 가슴팍을 내밀며 으스댔다.
소천개의 겉옷 가슴 부위에 천공단(天公團)이라 수놓아진 금빛 자수가 빛났다. 원래 옷이 꼬질꼬질한 탓에 금빛은 더욱 두드러졌다.
자수로 된 글자는 소천개나 무산쌍웅뿐 아니라 천공단 모두의 겉옷에 형형색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누구는 묵빛, 누구는 청색, 또 누구는 뜻하지 않은 분홍분홍으로 취향에 맞게 천공단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어 글자 색을 하나로 했어야 하지 않냐, 아니다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 또 누구는 왼쪽 가슴이고 누구는 어깨에 하니 천공단이 무슨 오합지졸 같다는 등을 떠드니 소란이 끝날 줄 몰랐다.
형악검이 서둘러 전음을 발했다.
- 각주님, 우선 대공자에게 양해를 구하시고 선생께 예를 갖추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용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참이었다.
왜 선생께서 보고도 아는 척을 않는지는 중요치 않다.
어쩌면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계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이 급해진 용화청이 입을 열려 할 때,
후공이 빨랐다.
“어이 거기, 조용히 좀 하지!”
“으어헙!”
용화청이 입을 쩍 벌렸다가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는 숨이 턱 막히고 피가 바짝 말라 덕분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