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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59화 (59/460)

59화. 제가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2)

정녕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서생 나부랭이 따위가 신경질을 내버리다니!

세상 물정을 몰라도 그렇지, 조금 시끄러운 걸 못 참고 강호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에게 시비를 털어버린단 말인가.

용화청은 물론, 형악검과 단혼수도 다를 건 없었다.

잠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대체 누구더러 조용히 하라는 것인가.

‘나다’로 시작된 서신도 그렇더니, 이 정도면 시비가 일상인 자였다.

찰나가 억겁 같다. 서둘러 무마해야 했다.

자신이 대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용화청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무릎을 다 펴기도 전에 엉거주춤 굳어버렸다.

‘……어째서?’

이건 뭘까.

고요해졌다.

금적선생뿐 아니라 항마삼협, 무산쌍웅까지 몸을 한껏 움츠리고는 음성까지 낮춰 소곤소곤 대고 있었다.

‘조용히 하란다고 조용히 해버린다고?’

그것도 반말이었는데?

형악검과 단혼수도 혼란에 빠졌다.

‘우리가 사람을 착각한 건가.’

다시 확인했다. 맞다. 틀림없다.

그런데 왜?

아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시비가 걸리면 곤란했다.

금적선생 쪽이 그저 놀아주고 있는 것이라면 후폭풍은 더 무서워진다.

용화청이 서둘러 전음을 날렸다.

- 대공자, 말조심하십시오.

“왜 갑자기 전음이십니까? 그리고 말을 조심하라니요?”

용화청이 뜨악해져 서둘러 전음을 이었다.

- 전음을 모르시면 듣기만 하시오.

“전음이야 가능합니다만, 제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왜 말조심을 해야 합니까? 예의 없이 너무 소란스럽지 않습니까!”

용화청의 혈색은 더 하얗게 변했다.

‘천재 맞아?’

상대가 전음을 보내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거늘, 뚱하니 항변하니 답답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대공자, 저쪽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인지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저들은…….

“대단하든 대단치 않든 상관없습니다.”

- 상관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니오!

용화청이 전음으로 역성을 냈다.

“진정하세요. 제가 더 대단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

용화청은 이제 완전히 질려버려 할 말을 잃었다.

후공은 짐짓 모른 척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를 꼬았다.

“각주께선 제가 누군지 모르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누구라니요? 누구라는 것이 따로 있소이까?”

급기야 용화청은 전음을 포기했다.

“사실 저는.”

“……?”

“위대한…….”

“위대한?”

“천공단의 단주입니다.”

“네?”

용화청이 미간을 좁혔다.

천공단이라니, 그런 건 여태 듣도 보도 못했다.

형악검과 단혼수도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들의 머리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천공단!’

들어봤다. 그것도 방금.

금적선생의 무리에서 몇 번이고 나온 이름.

그리고,

어린 거지의 가슴 쪽에 수놓아진 황금빛 자수.

금적선생의 어깨 위 묵빛 천공단 자수.

무산쌍웅의 분홍 천공단.

하지만 이해해버리는 바람에 더 의문에 휩싸이고 말았다.

얼이 나간 셋을 둘러보며 후공이 빙긋 웃었다.

“맞습니다. 모두 제 수하들입니다. 금적자, 항마삼협, 무산쌍웅 그리고 기타 등등.”

웅크리고 있던 천공단 중 기타 등등으로 분류된 셋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용화청은 의문을 해소하기 바빴다.

“아까 온다던 수하가…….”

“그렇지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아하하, 이게 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로선 도통…….”

용화청이 어정쩡하게 웃다 말다 더듬거렸다.

천공단 자수도 선명하고 조용히 하란다고 조용해진 건 알겠는데, 어떻게 천공단의 단주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될 수 있는 건지 그로선 이해불가였다.

용화청의 생각을 읽듯 후공이 입을 열었다.

“백 마디 설명보다 직접 소개하는 것이 빠르겠군요.”

후공이 부를 것도 없었다.

천공단은 떠들면서도 한쪽 귀로는 다 듣고 있던 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르르 몰려왔다.

용화청이 놀라 허겁지겁 일어나 예를 갖췄다.

“어르신, 인사 올립니다.”

금적자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잘 지냈느냐?”

“덕분입니다.”

“덕분은 무슨, 내가 뭘 했다고. 근데 넌 그동안 제법 늙었구나. 올해 몇 살이냐?”

“마, 마흔다섯입니다.”

“아직 한창 때구나.”

“그런데 천공단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요?”

“천공단 말이냐. 천공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현 무림 최고의 조직이라 할 수 있지. 조만간 강호를 제패할 것이다.”

엉뚱한 대답에 용화청은 표정관리가 곤란해졌다.

강호제패야 농담일 테지만,

금적선생이 천공단을 인정하고 있음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미 소개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다닥 달려오기도 했고.

이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원래부터 활달한 천공단이다.

“약왕문인가? 우린 천공단의 핵심 중의 핵심, 항마삼협이다.”

“클클클, 우리는 천공단의 기둥 중의 기둥인 무산쌍웅.”

항마삼협은 안광을 번뜩였고, 무산쌍웅은 잔혹한 웃음을 흘렸다. 다섯 명 전부가 당장이라도 살수를 전개할 것 같은 섬뜩함이어서 용화청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다음 차례로 묘빙빙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단주께서 저를 기타 등등으로 분류했지만 그런 말 같은 건 잊어버리세요.”

“…….”

“본인은 천공단에서 책략과 귀계를 맡고 있는 묘빙빙이에요. 생각은 제가 다 한답니다. 약왕문에서도 걱정거리가 있다면 언제든 말만 하세요.”

“네…….”

처자는 그저 통통하니 귀여울 뿐 책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모였기에 용화청의 반응이 떨떠름하게 나왔다.

묘빙빙이 갸웃했다.

“근데 약왕문 분들은 좋은 약을 하나 보네요. 피부가 뽀얗네요. 분을 바른 것 같지도 않은데 하얀 게 핏줄까지 다 보이고 아주 좋아 보여요.”

“누나, 창백하게 질린 거야.”

“약이야! 내가 알아!”

소천개가 냉큼 조언했다가 야단만 맞았다.

용화청은 바로 묘빙빙을 알아봤다.

생각 같은 거 안 한다는 사실을.

그다음으로는 은앙개가 나섰다.

한손으로 머리를 근사하게 쓸어올렸다.

“샤랄라~. 천공단 두목 밑에서 외모를 맡고 있는 개방의 은앙개입니다.”

“하하, 사형 비듬을 어디다 털어. 거지 아니랄까 봐 늘 노심초사지!”

소천개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마지막 소개자로 나섰다.

“저는 천공단에서 두목형아에게 빌어먹고 있는 개방의 소천개라고 해요.”

“개방의 젊은 영웅들이로구만.”

“약왕문 님, 잠시 제 족보를 읊어도 될까요?”

“족보라……. 그러시게.”

웬 족보인가 싶으면서도 용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요, 대사형이 안휘 분타주고요, 사부님이 곤오신개로 불리고 있답니다. 지금도 잘났지만 나중엔 아마 개방 장로가 될 것 같기도 해요.”

‘곤오신개?’

꿀꺽.

용화청이 마른침을 삼켰다.

현 개방 방주가 아닌가.

그럼 눈앞의 거지들은 거지 중의 금수저.

이 무리에서 제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들까지 근본이 넘쳤다. 개방 방주의 둘째 제자와 막내 제자.

소천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약왕문에 보낸 서신을 쓴 건 저예요. 사형이랑 누가 쓰냐 내기해서 제가 이겼답니다. 멋대로 써서 죄송해요. 하지만 혼내시기 전에 방금 제 족보를 떠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용화청은 애써 웃음지었다.

나이도 무척 어린 데다 친절하게 금수저임을 밝힌 탓에, 책망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이 면면의 화려함은 뭐란 말인가.’

머리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뭐라고, 금적선생부터 개방의 유망한 제자들까지 수하를 자처한단 말인가.

‘요즘 강호에 유행하는 장난인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사라졌다.

금적선생이나 개방이라면 몰라도,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은 재미삼아 처신을 낮추는 이들이 아니었다.

지나가다 눈만 마주쳐도 눈 안 깔았다고 난리를 칠 인물들이 아닌가.

그쯤, 후공이 나섰다.

“각주! 앉으십시오.”

“네?”

“이야기를 마저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더 나눌 말이 있었습니까. 곧바로 출발하시죠!”

용화청이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상대는 천화서고 대공자가 아니다.

천공단주다.

위대한 것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

용화청은 천공단을 약왕문 외곽 별채로 안내했다.

이후 부문주를 찾아 사정을 설명했다.

선조치 후보고.

하지만 부문주 용화운은 책망하지 않았다.

그였다 해도 금적선생이 포함된 천공단을 마주했다면 같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신,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경위로 금적선생 등이 대공자의 수하가 되었단 말이냐?”

천화서고의 천재가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킨 순간부터 서문세가의 해악을 분쇄하고, 이제는 천공단주라니 정녕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흐음……. 어디 네 잘못이겠느냐. 아직 그 내막을 묻기엔 시간이 없었을 테지.”

“아닙니다. 물었고, 듣기도 했습니다.”

“응?”

부문주가 갸웃했다.

방금 전 알아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용화청이 입을 열었다.

“무산쌍웅이 말하길, 강대한 적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적은 하늘을 날고 무공은 일격에 산을 무너뜨릴 정도이며 심지어 잠재우는 사술까지 부려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한 죽음의 순간…… 천화서고 대공자가 홀연히 나타나 적을 일거에 섬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그 말이 끝나자 개방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대공자는 무산쌍웅을 미친놈 보듯 쳐다봤…….”

“알겠다.”

괜히 물었다.

바로 이해한 부문주가 말을 잘랐다.

곧 화제를 바꿨다.

“난화서원 쪽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도착한 것이 알려지면 안 된다. 길면 닷새. 그 안에 묵 공자의 암호 해독이 완료될 테니, 그때까진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차라리 잘됐다. 이 일은 본가의 보물에 관한 것. 묵 공자 쪽의 해석이 미심쩍다 싶으면 천화서고 대공자 쪽을 통해 검증하면 좋겠지.”

가문의 보물.

그 말이 나온 순간 용화청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이내 크게 숨을 내쉬며 떨쳐내고는 입을 열었다.

“천잠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별채 쪽에도 향냄새가 흘러들어, 천공단이 무슨 일이냐며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렇지, 향냄새. 곤란하구나.”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싶습니다. 천잠육도 쪽도 나중에 알게 되면 크게 소란을 피울 것입니다.”

“그럴 테지.”

약왕문은 천잠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천잠에 빚이 있다.

천잠육도의 사부인 천잠노조의 낯을 생각해야 했다.

“차라리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회를?”

“네, 금적선생께서 후공과 인연이 있고 후공을 잘 따랐다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또 천공단에는 개방의 제자들이 있어, 이미 천잠의 소문도 인지한 상태일 겁니다. 오히려 천잠의 행사를 보면 반기고 당연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외로 무탈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부문주 용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그리하자. 네가 조율토록 해라.”

“네.”

***

천잠육도의 거처 부근쯤,

지독한 향냄새에 용화청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얼마나 짙은지, 약왕문 전반에 도는 약향을 덮어버릴 정도다.

미친 듯 향을 피워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천잠육도.

‘후공이 죽은 지가 언젠데…….’

이 정도면 경이로움이었다.

용화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용화청은 처소의 뜨락으로 들어서면서 천잠육도의 막내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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