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60화 (60/460)

60화. 원래부터 천공단의 단주였던 것처럼

태미였다.

태미는 우울한 기색으로 쪼그려앉아 흙바닥에 손낙서 중이었다. 의복마저 상복인 탓에 그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용화청이 다가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듕듕!”

“듕듕…….”

태미가 고개를 들어 힐끗 보고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인사말에 무슨 특별한 뜻이 담겨 있는 건 아니었다.

천잠육도의 막내는 원래 이런 식일 뿐이다.

인사를 하든 말을 길게 하든 모조리 듕듕이었다.

듕듕이 짧고 길고의 차이만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용화청은 표정만으로 대충 이해해야 했다.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네.”

“듕듕?”

기쁜 소식이란 말에 태미의 눈이 반짝였다.

용화청이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지.”

“듕듕듕!”

방 안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이 방이 향의 진원지인 탓이다.

자욱한 안개가 피어난 듯, 향 연기로 자욱했다.

그 가운데 용화청은 천잠육도와 둘러앉았다.

“기쁜 소식이 있다고요?”

서늘한 음성.

입을 연 건 천잠육도의 둘째 태야였다.

태야는 육도 중 용화청이 가장 꺼림칙하게 여기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다네.”

“각주께선 말을 가려서 하시면 좋겠군요.”

“무슨 뜻인가?”

용화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섬뜩한 기운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서늘함은 둘째만이 아니었다. 똑같이 생긴 세쌍둥이인 셋째, 넷째, 다섯째까지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각주, 혹시 후공께서 약왕문에 오셨습니까?”

“그 무슨……. 그럴 리 없잖은가.”

“그럼 각주께선 후공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나 봅니다.”

“……아니네.”

이쯤 용화청도 눈치챘다.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말실수를 했다지만, 천잠육도는 적당히가 없었다.

그래도 이해해야 했다.

천잠육도는 지금 상중(喪中)인 것이다.

2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의 여섯 형제는 상복을 입고 후공의 3년상을 치르는 중.

“내가 경솔했네.”

용화청이 사과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참았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 방의 병풍.

병풍 앞에 차려진 제사상.

향은 쉴 새 없이 피어오르고, 그 위로 펼쳐진 두루마리 족자에 쓰인 글귀를 보고 있자면 불편한 심기 정도는 참아야 했다.

- 후공, 극락왕생하소서!

천잠육도에게 있어 후공은 일생의 은인.

어릴 때 후공과 연이 닿아 천잠노조에게 맡겨졌다고 했다.

천잠의 칼날이 된 후 듣게 된 후공의 부고.

아버지가 아님에도 아버지 같은지,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거기까지라면 좋다.

후대에 미담이 되어 전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함이 문제였다.

절강에서 튀어나온 이후, 천잠육도는 안휘 남부를 휩쓸며 만나는 모두에게 조문을 강요하고 다닌 것이다.

강호 역사상 전례 없는 ‘찾아다니는 조문’이었다.

염병……. 상상조차 못했네, 라면서 다들 혀를 내둘렀다.

육도는 문파만 순회한 것이 아닌 탓이었다.

강호인 누구든 제를 올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하고, 그것이 엄포만으로 그치지 않으니 가는 곳마다 시비와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제아무리 후공이 무림맹주이자 천하제일인이었다 해도, 모두가 기꺼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기야 이 사태에 무림맹 안휘지부가 나서 중재에 나서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안휘지부장 몽연몽도 천잠육도의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림맹이 맹주의 장례를 3년상이 아닌 7일장으로 끝낸 것이 트집의 이유였다.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라며 무림맹도 쓸어버리겠다며 눈이 시뻘겋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사람 좋기로 소문난 안휘지부장 몽연몽마저 급기야 쌍욕을 박을 정도였다.

‘그러니 경이로울 수밖에.’

이런 지경이니 용화청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

“각주, 주의해 주십시오. 후공께서 돌아오는 것 외에 기쁜 소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안하네.”

“이곳에 머문 지도 이십여 일. 알 만한 분이 이러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만해라.”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중앙에 자리한 육도의 첫째 태대였다.

태야는 곧바로 얌전해졌다.

태대가 웃는 듯 마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각주, 그래서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용화청이 천공단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태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서고 대공자라…….”

“대공자는 별 문제가 아니네. 그보다 정작 주의해야 할 이들은 수하를 자처하는 이들일세.”

“……?”

“부디 예의를 갖춰주게. 특히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은 의와 협은 명분일 뿐, 자비가 없는 이들이라네.”

“각주, 우리가 누구인지 잊었습니까?”

“…….”

용화청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잊겠는가.

대대로 천잠도 자비가 없는 이들이다.

태대가 옅게 미소지으며 오른손을 뻗었다.

벽에 기대어진 반월도가 그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척!

“주의는 그들이 해야지, 우리가 아닙니다.”

“칼은 두고 가면 안 되겠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

***

용화청은 별채로 먼저 갔다.

우선 천공단 쪽에 상황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짜고짜 조문을 하라고 들이닥칠 수는 없는 일.

지체할 수 없다는 천잠과 잠시 실랑이가 일었지만 겨우 만류할 수 있었다.

별채 안에서 용화청은 이제 천공단과 둘러앉았다.

상석이라 할 수 있는 윗자리에는 천화서고 대공자가 태연히 자리하고 있었다.

‘거참…….’

천공단의 결성이라 봐야 최근일 터.

그런데 대공자의 분위기가 희한했다. 상석에 자리한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기에 용화청은 의문과 동시에 절로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각각 격이 있다.

수양의 깊이와 그릇에 따라 맞는 자리, 맞는 옷이 있다.

위엄이란 것이 꾸민다고 꾸며지는 것인가?

누군가 흉내낸다고 해서 같아지는 것인가?

흉내는 금방 들통나고 만다.

분에 넘치는 지위와 권한을 지닌 자는 쉽게 허울이 드러나고 우스꽝스러워지는 일은 허다하다. 정작 드러내기도 전에 스스로가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어색해한다.

그걸 상쇄하기 위해 과도한 언행을 하다 보면 꼴은 더 우스워지고 말이다.

그렇거늘…….

천화서고 대공자는 자연스럽다.

어떤 이질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

원래부터 천공단의 단주였던 것처럼, 처음부터 주군이었던 것처럼.

금적선생을 비롯한 천공단의 면면이 대단함에도, 당연히 그들은 수하처럼 보이고 심지어 평범해 보일 정도. 마치 날 때부터 이들의 주군이었던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건 왜인가.

천재라서? 그것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우러나오는 본연의 기운이고 자연스러움인 것이다.

“각주,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던 차였습니다.”

“그러셨습니까. 대공자,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신 겁니까?”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네, 그러시…… 네?”

뻔히 오가는 형식적인 인사말에 무심히 답하던 용화청이 황망해졌다.

“각주, 이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어디라니요?”

“물론 거처로만 보자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곳입니다.”

“…….”

“하지만 그뿐입니다. 사방은 숲이고 심지어 분지라, 저는 이곳이 약왕문인지 아니면 산속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특별대우라기보단 유배지에 가깝다 싶은데, 각주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하하, 유배지라니요.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용화청이 짐짓 태연을 가장하며 말을 이었다.

“귀인들만 모시는 곳입니다. 가장 좋은 거처로 모시고자 했을 뿐입니다. 또 한적한 곳을 택한 건 일전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본문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그 정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답을 들을 수 없을 테지요?”

“죄송하오만 그렇습니다.”

사실을 어찌 말한단 말인가.

난화서원의 천재가 이미 난제를 해결 중이고, 그저 천화서고는 예비용이란 것을.

난화서원, 천화서고.

두 곳 모두 서로가 서로를 몰라야한다.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다.

용화청이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었을 때였다.

느닷없이 고함이 터졌다.

“이노오오오옴!”

목청이 얼마나 컸던지 용화청이 와닷 놀라버렸다.

금적자의 대노가 이어졌다.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단주께서 물으시는데 똑바로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니냐아아아아아아아!”

너 몇 살이랬냐, 라는 말까지 쏟아내며 금적자가 불같이 분노를 토해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용케 조용하다 싶던 천공단이 기다렸다는 듯 비난을 쏟아냈다. 원래 말이 많은 천공단이다.

“위대한 천공단주인 형님께서 물으시는데 각주 따위가 대답을 안 해 버린다고? 우린 장로인데?”

“워어어, 대단한 약왕문 나셨구만.”

“약왕문이 우릴 이런 식으로 깔볼 줄은 상상조차 못했군. 누가 보면 천하제일문파인 줄 알겠네.”

“클클클, 천공단에 대한 약왕문의 도전인가. 이거 일이 재밌게 됐군.”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음산한 살기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험악한 건 아니었다.

천공단에는 의를 숭상하는 개방이 있었다.

은앙개가 급히 중재자로 나섰다.

“아이구야, 이거 다들 왜 그러십니까. 진정들 하세요. 각주께서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인 걸 보면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두목이 산속 같다고 했지만, 솔직히 난 여기 별채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요. 막내야, 안 그러냐?”

“응, 나도 좋아. 한적하니 고기 구워먹기도 딱이잖아. 우리 이따가 고기 구워 먹어!”

묘빙빙이 바로 거지들을 꾸짖었다.

“고기 타령 좀 그만해. 너희들 자꾸 그렇게 먹는 데 정신 팔렸다간 후공처럼 뚱뚱이가 되고 말걸!”

“누나가 먼저 될 것 같은데?”

“뭐가 어째!”

“누난 이미 통통하잖아.”

“내가 강호 표준이야!”

“너희 어린 것들은 입 좀 닥치고 있으면 안 되는 거냐아아아!”

“여기서 고기랑 후공이 왜 나와!”

“왜 나한테 큰 소리예요. 거지들이 나보고 뚱뚱하다고 하잖아요!”

“나도 장로인데 왜 어린이 취급인 거여요!”

“어린 건 맞잖아!”

성토하던 천공단이 서로가 이빨을 세우며 싸우는 모습을 보며, 용화청은 식은땀을 흘렸다.

순식간에 소외당했다.

어째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자신이 이곳에 없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사람이라면 천화서고 대공자밖에 없…….’

그런 마음으로 대공자를 쳐다보던 용화청의 뇌가 일시 정지했다.

‘……?’

어째서인가,

대공자가 묘빙빙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까탈스럽긴 해도 그나마 대화가 통할 사람으로 봤던 대공자거늘…….

용화청의 식은땀 양이 증가되었다.

용화청이 어찌 알겠는가.

눈앞의 대공자가 바로 그 뚱뚱한 후공인 것을.

하지만 후공의 퀭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용!”

후공은 손을 들어 소란을 중지시켰다.

이내 천공단의 떠들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후공이 용화청을 똑바로 응시했다.

“각주.”

“네.”

“약왕문의 사정에 관해 언급하기 곤란해하시니, 제가 대신 이야기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

“혹시 약왕문에 저를 대신할 누군가가 와 있습니까?”

“네? 허허……. 허허……. 대신할 사람이라니요?”

허를 찔린 용화청이 당혹감을 웃음으로 애써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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