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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61화 (61/460)

61화. 천잠육도가 왜 여기에 있어!

용화청이 말을 이었다.

“저로선 대공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아, 그렇습니까.”

후공은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저를 특정하여 초빙한 건 약왕문입니다. 약왕문에서 제 외모가 궁금했을 리는 만무하고, 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

“저를 통해 해결해야 할 사안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정작 마중까지 나오셔서 외부에서 머물러 달라며 시간을 지연하려 애쓰고, 안으로 들여서는 외딴 섬 같은 이곳 별채에 머물라 하십니다.”

“…….”

“이쯤 되면 제가 누군가의 대비책이나 여벌 취급을 받고 있다 싶은데, 각주 생각은 어떻습니까?”

용화청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마치 내부 사정을 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변명을 늘어놓는다 한들 추함만 더해질 뿐이다.

‘어찌하면 좋은가…….’

대공자의 언사는 거침이 없다.

태도로 보아 말 한마디 삐끗하면 당장이라도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날 기세. 이런 식으로 정면 돌파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터라 용화청의 머리는 한없이 복잡해졌다.

동시에 동행한 천공단도 감안해야 했다.

도리가 없다.

지금으로선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최선.

“대공자…….”

“듣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용화청은 문서 해독과 난화서원 묵 공자에 관해 설명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난화서원의 묵 공자를 믿지만, 세상 일이란 모르는 것.

만약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대로 떠나고, 난화서원의 묵 공자가 실패한다면 그보다 난감한 상황은 없다.

그때 가서 재차 천화서고에 도움을 청한다면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우스워지고, 거래에 있어서도 독양충만으로 끝나지 않을 터.

“……뜻하지 않게 이중의뢰가 된 터라 부득이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한 오해나 마음 상하는 일이 없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의도이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먼저 반응한 건 천공단이었다.

“난 또 뭐라고. 별일도 아니잖아.”

은앙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금적자도 양쪽 입꼬리를 내리며 혀를 찼다.

“쯧쯧쯧, 그 정도 일로 마음 쓰고 있었단 말이냐.”

“기가 막히군. 설마 위대한 천공단주께서 그런 사정도 이해 못 할 것이라고 봤단 말인가.”

“약왕문은 도대체 형님을 얼마나 소인배 취급하고 있었던 것인가!”

항마삼협과 무산쌍웅까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도리어 그들의 짜증은 약왕문 때문에 천공단주가 하찮고 치졸한 자가 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어,

‘생각’하고 있던 묘빙빙이 나섰다.

“너무들 야단치지 마세요. 약왕문 님 입장에서는 내심 얼마나 마음 졸였겠어요. 이건 모두 제대로 날아오지 못한 전서구 탓이에요. 저기요, 약왕문 님?”

용화청이 옅게 미소 지으며 묘빙빙을 바라봤다.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가.

그것도 적절하게.

천공단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치 않은 것에 안도했는데, 심지어 묘빙빙은 변호까지 해주고 있는 것이다.

묘빙빙이 왜 자신을 각주라 부르지 않고 자꾸 약왕문 님이라고 하는지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용화청은 이어질 위로의 말을 기다렸다.

“어깨 펴도록 해요! 사내대장부잖아요! 당당해지도록 하세요! 병신같이 기죽을 것 없어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여요.”

용화청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기대를 괜히 하는 바람에, 이 처자가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란 걸 잊고 있었다.

묘빙빙에 익숙한 천공단은 이미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묘빙빙의 위로가 제대로 위로가 될 리 없다는 것쯤은 진즉에 깨우친 천공단인 것이다.

묘빙빙의 위로가 다시 이어지려 할 때,

후공이 바로 개입했다.

“묘 소저!”

“네, 형님!”

“위로도 좋지만 예의를 지키도록 하세요. 그 예쁜 외모에 그에 걸맞은 말이 어우러지면 훨씬 더 좋지 않겠습니까.”

책망에 즉시 발작 증세를 보이려던 묘빙빙이, 이어진 ‘예쁜 외모’라는 말에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주께서는 약왕문을 대표하는 분으로 이 자리에 오셨으니 다들 언행에 각별히 주의해주십시오.”

이어 후공이 용화청에게 대신 사과를 건네며 문제될 상황을 일단락지었다.

중요한 건 독양충이요, 약왕문의 난제 해결일 뿐이다.

“각주, 저 또한 말씀을 듣고 보니 난처하셨을 상황이 이해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씀해주시고 저를 붙잡으신 건 분명 난화서원 쪽과 겸해 교차검증을 바라는 것일 테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난화서원 묵 공자의 암호해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사라졌으니, 저도 바로 문서에 접근할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굳이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용화청으로선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말을 꺼내 부탁하자니 좋아진 분위기를 망칠까 염려되어 망설여졌다.

후공이 그 속내를 읽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와 천공단은 이곳 별채에만 머물며, 난화서원 쪽에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은 외딴 섬 같으니, 귀문에서 밝히지 않는 이상 난화서원은 저희가 온 것을 알 수 없을 겁니다.”

용화청의 안색이 환해졌다.

이래서 천재인가.

대화가 편안하기 그지없다.

대공자는 예의는 예의대로 갖추고, 고민하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먼저 말하여 답을 준다. 상황을 연주하듯 조율하는 것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대공자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의도한 바와는 달라졌지만 용화청은 충분히 만족했다.

이제는 천잠육도에 관하여 말할 때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탓에 그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대공자,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혹시 천잠육도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응?”

후공이 미간을 좁히며 갸웃했다.

천잠이라니?

그야말로 난데없었다.

대화가 튀어도 너무 튀었다. 왜 갑자기 여기에서 천잠의 아이들이 나온단 말인가.

“아직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아닙니다. 개방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저 갑자기 천잠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이 의아했을 뿐입니다.”

용화청이 웃음지었다.

“하하하, 갑작스럽긴 했지요. 하지만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그 천잠육도가 본문에 머물고 있답니다. 하하하…….”

“뭐가 어째!”

“하하하…… 아……?”

용화청이 웃음 끝에 멍하니 입을 쩍 벌렸다.

뭐가 어째, 라니.

호통뿐 아니다. 어찌된 일인지 천화서고 대공자가 쌍심지를 켜며 눈을 무섭게 뜨고 있었다.

거의 극대노.

분노가 이어졌다.

“자세히 말해봐라! 그 녀석들이 왜 여기에 있어!”

“…….”

쏟아지는 분노에 용화청은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반문을 하든 답을 하든 해야겠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례한 말투 때문이 아니다.

이 어린 새끼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막연하고 흐릿했다.

대공자의 눈빛.

자줏빛으로 일렁이며 폭사해오는 안광.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저 두려움.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심지어 눈길을 피하려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이는 격동한 후공이 자령안을 발현한 탓.

“그……그게…….”

용화청이 몸을 덜덜 떨며 겨우 입을 뗐다.

더듬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그제서야 후공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이런…….’

자신은 이제 무림맹주도 천하제일인도 아니거늘, 천잠의 미친 짓이 떠올라 그만 격동하고 말았다.

황급히 자령안을 갈무리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자령안은 상대의 심지를 옭아맨다.

지금 수준에서도 용화청 정도에겐 충분히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형아야, 괜찮아?”

“형님…….”

“두목, 진정하라구.”

소천개를 비롯 몇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염려의 말을 건넸다. 정확히는 걱정 반, 놀라움 반이었다.

놀라울 수밖에 없다.

약왕문이 비록 무력을 추구하는 문파는 아니라 해도 명색이 한 문파의 각주가 안광만으로 일순간에 압도당한 것이다. 게다가 용화청의 신분은 그저 일개 각주만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특급살수들을 처리할 때 심상치 않은 무위를 확인하긴 했어도, 단주가 방금 보인 면모는 또 다른 놀라움이자 의아함이었다.

안법의 기예는 상승의 영역.

검법과 빠른 임기웅변. 거기에 안법이라니. 드러내지 않고 감춘 실력이 어느 정도인 건가.

하지만 당장은 그런 의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도대체 이 격한 반응은 뭔가?

“단주, 어서 사과하시게. 이러다 각주 죽겠네.”

금적자가 준엄히 입을 열었다.

용화청이 그런 금적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죽다니, 그 정도까진 아닌 것이다.

어떻게 된 게 천공단의 위로는 전혀 위로가 되질 않는다.

“각주, 제 반응이 과했습니다.”

언제 그랬냐 싶게 대공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오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용화청은 왜인지 송구스러워져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히 울컥해지면서 하마터면 안 그러셔도 된다는 말을 꺼낼 뻔했다.

그 이유야 거대한 태산의 그림자를 엿보았기 때문이었지만, 용화청이 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두목 어쩌나. 강호의 맛과 마주쳐버렸으니. 흐흐흐…….”

은앙개가 실실 쪼갰다.

금적자가 갸웃했다.

“강호 맛? 그게 무슨 소리냐?”

단주를 보니 그저 ‘크흠’ 하며 불편한 심기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두목에게 천잠에 대해 처음 말해줄 때도 두목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서책만 파고 예를 중시하는 두목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3년상은 그렇다 쳐도, 찾아다니는 조문이라니 상상이나 했겠냐고요.”

“황당한 놈들이긴 하지.”

동조하면서도 금적자는 웃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단주, 그렇다 해도 천잠의 행사를 그리 나쁘게 볼 건 아니네. 순수한 마음인 데다 무려 대상이 후공이거든.”

“형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나름 마음 쓰는 것이 가상하잖습니까.”

“가상하다말다요.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3년상을 치릅니까. 분명 저승에서 보고 있을 후공도 가슴이 울컥해져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겁니다.”

후공은 진심 울컥해졌다.

금적자를 비롯 항마와 무산을 노려봤다. 대체 이놈들은 뭐라고 떠드는 건가.

내가 3년상의 당사자인데.

울화가 치밀어올라 다들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용화청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각주, 밖에 와 있는 것이 천잠육도입니까?”

“네?”

용화청이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일 때였다.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각주, 천공단과 이야기가 원만치 않은 겁니까?”

“듕듕듕!”

천잠육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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