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후공에게 물어보라
“와아, 사형 방금 들었어? 둥둥이야!”
소천개가 펄쩍 뛰듯 반가워했다.
은앙개가 갸웃했다.
“막내야, 둥둥이 아니라 듕듕이었나 보다.”
“둥둥이야. 사형 귀가 어떻게 된 거 아녀?”
“그런가?”
그런 둘을 후공이 한심하게 바라봤다.
‘듕듕인데 이놈들 주의력이 형편없네.’
소천개가 언제부터인가 둥둥거릴 때부터 천잠의 태미를 따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첫째 태대를 비롯한 아이들을 이런 식으로 약왕문에서 조우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됐다 싶은 후공이었다.
안 그래도 여유가 되는 대로 만나보려 했던 차.
수고가 덜어진 셈이었다.
“단주, 친절하게도 조문이 찾아왔네. 나가도록 하세.”
금적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후공은 미간을 꿈틀.
‘이놈의 새끼들, 신났구나.’
들뜬 기색은 금적자만은 아니었다.
천공단 모두가 새로운 놀이를 발견한 것처럼 다들 기대에 차 눈을 반짝거렸다. 이건 절대로 조문을 하러 가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무료한 일상에 단비 같은 상황이라고 하기엔 무리다.
천공단은 무료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후공도 살짝 들떴다.
그 조그맣던 아이들이 어떻게 컸을지 궁금했다.
태대, 태야, 그리고 세쌍둥이와 막내 태미.
“그러시죠.”
일행이 별채 앞 뜨락에 나갔을 때 이미 준비는 끝나 있었다.
향이 모락모락.
상이 차려져 있고, 그 앞으로 고급스런 돗자리가 깔렸다.
병풍까지 세워져 그야말로 완벽.
그 곁에 천잠육도가 도열해 있었다.
천공단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앞다퉈 달려갔다.
“이거 듣던 대로 굉장하구만. 아까까지 없었는데 있어지다니!”
“와아, 너희들 진짜로 이걸 다 가지고 다니는 거였냐?”
“삼협도 참, 그깟 게 문제겠습니까. 사람이 여섯이지 않습니까.”
“야, 너희 중 병풍은 누가 드냐?”
“둥둥둥! 여기에서 둥둥이 형이 누구야? 나 둥둥이 형 엄청 보고 싶었다!”
위압적으로 도열해 있던 천잠육도는,
안색이 썩어 들어갔다.
이게 아닌데…….
원래는 둘 중의 하나다.
진중하거나 험악하거나.
혹은 제를 올리느냐, 마냐를 두고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기 마련인데, 이 사람들은 너무 활달했다.
그런 분위기에 묘빙빙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중요한 게 빠졌는데 아무도 지적을 안 하는군요.”
“뭐가?”
금적자가 물었지만, 그녀는 천잠육도 쪽을 보며 쌍심지를 돋웠다.
“천잠은 어째서 초상화는 안 갖고 다니는 거죠?”
“…….”
천잠육도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누구 할 것 없었다.
혹시나 해서 칼까지 차고 왔는데, 미흡하다고 꾸짖음을 당할 줄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차’ 싶기도 했다.
여태 아무도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던 것.
이어지는 상황은 제를 올리라, 마라 할 것도 없었다.
알아서 하는 천공단은 틈을 주지 않는다.
금적자가 성큼 나서며 육도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후공은 무림맹주이자 불세출의 영웅! 후공이 강호요, 무림이었을 만큼 강호 전반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지. 물론 나 또한 후공에게 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네.”
“…….”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갑자기 시작된 웅장한 연설에 천잠육도는 눈매만 가늘어졌다.
“어느 하루 내가 후공에게 물었다네. 후공, 저는 한계에 이른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벽을 넘을 수 있을는지요. 후공이 답했네. 금적자야, 너는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다. 예와 법도를 따름이 옳다 하나 절대적인 건 아니다. 너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 않느냐.”
“…….”
“그때 이후 생각했지. 막 살기로! 그랬더니 너무 좋아. 그러니 나 금적자는 천잠의 행사를 적극 지지하는 바일세.”
“경지는 올랐어요?”
웅장한 과거사에 소천개가 냉큼 물었다.
금적자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아니.”
“너무 막 사신 거 아녀요?”
“그랬으까…….”
“아니, 아니야. 조만간 돌파할 거예요. 그건 그거고 저도 천잠 형아들을 적극 지지해요. 후공이 사부님을 빨래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좋아졌거든요. 한 번도 못 본 게 천추의 한이야. 너무 멋져, 후공!”
“나도야. 존경하게 됐다고. 깔끔한 분이셔.”
은앙개도 동의를 표했다.
뒤이어 항마삼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 방주를 씻겨버린 이야긴 처음 듣는데, 역시 후공이로군. 우리 삼협도 후공이라면 존중을 표하지 않을 도리가 없네. 우리야 후공에게 적당히 하고 다니라는 책망 속에 맞아죽을 뻔했지만, 그가 천하제일인임에는 틀림없으니.”
“저희도 삼협과 같은 생각입니다. 연이 닿지 않아 뵌 적은 없으나 강함은 존중 받아 마땅하지요.”
무산쌍웅도 지지를 선언했다.
“저도요.”
묘빙빙은 다부지고 짧게 맺었다.
초상화까지 언급한 그녀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천잠육도의 관심은 천공단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천공단이 척척 알아서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각주 용화청 곁에 서있는 청년.
천화서고 대공자라고 했던가.
천공단이란 이들과 달리 차분한 신색으로 그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묘하다.
미소가 어린 듯도 보이고, 한편으로는 감회에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호의와 따뜻함이 담겨 있었기에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태대가 입을 열었다.
“천화서고는 천잠에 따로 할 말이 있는 것인가.”
“제가 말을 해야 하는 겁니까?”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상한 습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할 말이 있다고밖에.”
“미안하지만 그런 습관은 없습니다.”
“그럼?”
“하는 짓이 같잖아 쳐다봤을 뿐입니다.”
“……?”
태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갸웃할 때,
뜨악해진 건 용화청이었다.
“대, 대공자…….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향 피울 생각에 들떠 돗자리 앞에서 줄을 맞추고 있던 천공단도 놀라 돌아봤다.
오가는 대화만 보면 칼부림 직전이다.
분위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단주가 난데없이 시비였다.
단주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곁에서 지켜본 단주의 평소 성향은, 예를 갖출 때는 갖추지만 기본적으로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 농담 혹은 무시.
웃고 넘기고 만다.
그런 단주였기에, 먼저 시비를 털어버리는 지금의 상황은 뜻밖이었다. 원래 시비를 터는 건 자신들 천공단의 몫이 아니던가!
“우리가 같잖다라……. 그대와는 초면이고 천잠은 천화서고와 접점이 없거늘, 말이 거칠군. 이유나 들어보지.”
“이유라. 하하, 이래서 머저리들과 대화하는 건 피곤하단 말이야.”
순간,
스릉, 스릉!
태야를 비롯 태미까지 반월도를 뽑아들었다.
스산한 살기 속에 뛰쳐나가려는 아우들을 태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태대는 아직 여유를 잃지 않았다.
도리어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이유는?”
“그건 후공에게 물어봐라. 그도 같잖아할 테니.”
“뭐?”
결국 태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틈새로 금적자와 천공단이 끼어들었다.
“단주, 이쯤하게! 굳이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나!”
“형님, 진정하십시오. 원치 않으시면 저희만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지켜만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천잠이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거늘 왜 그리 못마땅해하시는 겁니까.”
“두목, 이건 두목이 화낼 일이 아니야.”
“두목형아야…….”
모두가 천잠을 옹호하며 따지고 들었다.
천잠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천잠과 후공의 인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는 천잠이 좋아서가 아닌 후공에 대한 존중이었다.
언사 중,
‘후공에게 물어보라’는 말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알까.
정작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 것을.
후공이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좋다. 이유를 알려주마. 효심이 지극한 이들이라면 3년상을 치르곤 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제 부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라고 타인을 강요하는 일은 없다. 누굴 위한 애도인가? 그런 자가 있다면 자신이 효자라는 것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얼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너희는 그저 천하제일인과의 인연을 강호에 과시하고 싶었겠지. 그러니 이 행태가 얼마나 가소롭고 같잖은 일이냐. 그리고 얼마 후 몇 달이 될지 길면 내년이 될지 모를 어느 날 어느 야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겠지.”
“…….”
“…….”
싸한 분위기 아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금적자와 항마등은 멍청히 눈만 깜박였다.
그러던 한순간,
“듕듕!”
천잠의 막내 태미가 신형을 솟구쳤다.
“어딜!”
반응한 건 가장 근접해 있던 은앙개.
은앙개가 태미의 머리를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태미가 반월도를 틀어 은앙개의 장력을 막아내면서 충돌음이 터졌다. 둘의 신형이 동시에 뒤로 튕겨졌다.
타다닥.
은앙개가 착지하고도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두어 걸음이나 물러나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오! 제법인데?”
그사이 천공단의 신형이 움직였다. 어느샌가 후공 앞쪽을 가로막아서며 방벽이 되었다.
삼협 중 이열이 천잠을 향해 나직이 뇌까렸다.
“잘 들어. 천잠노조고 뭐고 이번 한 번뿐이다. 천공단주를 향해 다시 칼을 뽑으면 너흰 오늘 다 죽어.”
“클클, 삼협! 다시는 뭡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버립시다.”
무산쌍웅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이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나. 형님께서 저 녀석들을 꽤 아끼시는 듯하니 솔직히 난감하단 말이네.”
“클클, 그렇긴 하지요.”
그 말에 천잠육도의 미간이 좁혀지며 살기를 자욱하게 피워 올렸다.
하지만 태대는 달랐다.
태대의 눈은 깊어졌고 그런 시선으로 후공 쪽을 바라봤다.
오가는 시선 속에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이윽고,
“돌아간다.”
“큰형님.”
“돌아간다.”
“네!”
태대를 따르며 아우들은 기세를 갈무리했다. 표정은 어둡게 내려앉았다. 언뜻 이유를 알 것 같은 것이다.
***
그날 저녁 뜨락.
치이이이익!
장작불 위에 고기가 익어갔다.
천공단은 진지하게 둘러앉았다.
누구 할 것 없이 심각했고, 신중했다.
단주는 생각이 없다며 자리에 함께하지 않은 상태.
천공단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천공단은 알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동안,
말을 많이 할수록,
고기가 급격히 사라져 간다는 걸.
그저 고기를 굽는 송화만 천천히 먹으라고 악을 쓰며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무섭게 이어지던 쩝쩝 소리가 잦아들고 배가 채워진 후에야 대화라는 것이 오갔다.
“근데 아까 무슨 말이에요?”
“응?”
“형님이 천잠을 아끼는 듯하다고 했잖아요.”
묘빙빙이 묻는 말에 이열이 술잔을 채우며 미소지었다.
“내가 그랬던가? 천공단의 군사께서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까.”
“지금 비웃는 거죠?”
“하하, 그건 또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네.”
“흥!”
콧방귀를 뀐 묘빙빙이 나지막이 ‘상놈의 새끼’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은앙개에게 다시 물었다.
귀 밝은 이열이 사레가 들려 켁켁거릴 때, 은앙개가 입을 열었다.
“그거, 걱정해준 거잖아.”
“뭔 소리야? 요즘은 걱정을 그렇게 한다고? 최신 유행이야?”
“하하, 누나 너무 웃겨. 나가 뒈지라는 게 걱정해주는 유행이면 진짜 재밌겠다. 아침인사하면서 나가 뒈져, 잠들기 전에도 나가 뒈지셔요! 깔깔깔!”
소천개의 박장대소에 묘빙빙이 발작을 일으키려 했기에 은앙개가 진정시켰다.
“군사님, 고정하라구. 여태 말이야, 우리 두목이 그렇게 화낸 걸 본 적 있어?”
“없지.”
“바로 그거야. 서문가주를 마주했을 때조차 어디서 잡놈 하나 왔나 싶을 정도로 차분했던 두목이었다고. 근데 오늘 천잠 녀석들은 거의 잡아먹을 듯 했잖아.”
“그니까 그것이 왜 걱정해주는 것이 되냐고, 이 거지야!”
결국 묘빙빙이 터져버렸다.
은앙개는 실실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은앙개나 소천개에게 ‘거지야’ 따위는 정론이지, 욕이 아닌 것이다.
“천잠육도가 죽을까 봐.”
“응?”
“설치고 다니다간 죽으니까.”
“어? 어…….”
묘빙빙이 느껴지는 바가 있는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소천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누나, 강호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