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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63화 (63/460)

63화. 두루마리 문서

그 시각.

부문주 용화운은 아우의 보고에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오늘 일은 의외구나. 천잠과 대공자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맞는 것이냐?”

“네,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천화서고의 천재가 폐인이 되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태대의 당황해하는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흐음…….”

부문주 용화운이 침음성을 흘렸다.

의문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대공자가 굳이 쓴소리를 한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강호의 위험은 예상할 수 없다.

강자는 어느 곳에나 있다.

사소한 다툼이 원한이 되는 경우는 허다했다.

천잠의 행사에 명분이 있다 해도 분쟁은 일어나게 마련이고 끝이 좋을 리 없다.

천잠노조를 떠올리면 없던 인내심이 생기는 이도 많겠지만, 어떤 이는 분노로 인해 천잠노조고 뭐고 당장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천잠육도가 알아야 할 건 강호의 현실이요, 냉혹한 면모. 그걸 처음 대면한 천화서고 대공자가 험악함을 감수하고 깨우쳐주려 한 것이다.

“오지랍을 부리는 자는 아닐 테고……. 의외로 대공자가 정이 많은 인물이란 뜻인가?”

“단순히 설명하기 어려운 자입니다.”

“그래, 그렇긴 하지. 금적선생, 항마삼난 등의 천공단을 자연스럽게 아우르는 것만 봐도…….”

천잠을 상대함을 보면 강호의 특성이나 생리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고, 천공단을 생각하면 사람을 다루는 데도 능통하니 천화서고의 천재는 단순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인물임은 틀림없었다.

또 아우가 안법만으로 위축되었다 하니 무공도 녹록지 않다는 뜻.

‘생각할수록 기이한 자가 아닌가.’

하지만 일단 부문주는 의문을 마음에 갈무리했다.

당장은 천화서고의 능력이 자신들을 위해 결과를 낼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중요한 건 문서 해독이다.

“지금 갈 것이냐?”

“네.”

“다녀오도록 해라.”

“오늘 밤이라도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화청이 탁자 위 두루마리 문서를 챙기며 말했다.

부문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밤? 제아무리 천화서고라도 몇 시진 안에 해독해낼 수 있겠느냐.”

“왜인지…… 저는 기대가 됩니다.”

“물론 그렇게만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 좋다. 그럼 늦더라도 날 찾아오너라. 결과가 어떻든 궁금하긴 하구나. 나는 그사이 은약전으로 가서 아버님을 뵙고 오겠다.”

“네.”

***

촤르륵.

용화청이 두루마리를 펼쳐 건넸다.

“이것입니다.”

방에는 두 사람만 자리했다.

건네받은 후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두루마리의 상태와 붓선의 흔적이 최근이다. 제대로 살펴보고 말 것도 없었다.

“진본이 아니군요.”

이 두루마리가 만들어진 건 짐작컨대 한 달 이내. 그것도 낭랑하게 잡아서일 뿐이다. 그 전에 필사되었다.

난화서원의 묵 공자에게서 잠시 진본을 빼내오기 난처했던 것인가? 감안해주긴 어렵다. 이는 공평치 않다. 사본과 진본의 차이는 크다.

“각주, 진본이 고문서일 경우 종이의 재질이나 문양까지도 암호의 일부로 의미있게 활용됩니다.”

정중히 진본을 요구하자, 뜻밖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말씀대로 필사본입니다. 하지만 진본과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 점은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용화청의 음성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당황하는 기색은 전무.

‘……?’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차분함.

거기에 또 확신에 차 있다.

후공은 바로 생각을 수정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건,

‘확실하겠군.’

그 누구보다 문서 해독에 절실한 건 약왕문이 아닌가.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 이유가 약왕문에는 없었다. 약왕문으로서는 해결자가 난화서원이냐 천화서고냐는 중요치 않을 테니.

진본과 필사본이 차이가 없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궁금했으나, 그건 추후에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럼 보도록 하죠.”

후공은 한눈에 들어오게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펼쳤다.

이제 이 천재적인 두뇌를 활용할 때다.

집중해서 살폈다.

보이는 바는 문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중간 중간 기호와 표식도 보였다. 막연하게나마 어떤 규칙이 있을 것 같지만 바로 알아내지는 못했다.

‘고대 문자인가?’

후공은 몸을 이완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범항의 학식과 범항의 두뇌라면 고대 언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독해낼 수 있을 터.

그렇게 일각여를 뚫어져라 바라봤을까.

후공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붉어지는 걸 인지했음에도 어찌할 길이 없었다.

동공도 확대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쥐죽은 듯 숨소리조차 없이 지켜보던 용화청이 반색했다.

“대……대공자, 답을 찾았습니까?”

후공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도대체……?’

하나도 모르겠다.

하도 눈을 뜨고 있었더니 눈만 따가웠다.

그래서,

겸사겸사 고심하는 척 지그시 눈을 감았다.

“크흠, 조용히 해주십시오.”

들떴던 용화청이 무안해하며 시무룩해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후공은 내심 한숨이 나오는 상황.

‘안 되는 건가. 아……. 내 독양충…….’

독양충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 녀석의 머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인가. 전자였으면 싶다만 감조차 잡을 수 없으니 후공으로서는 불안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대로 불안해하기만 하며 멈춰있을 순 없다.

눈을 뜨고 다시 문서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번엔 안력을 돋워 세세히 문자 하나하나를 눈으로 그려가듯 따라갔다.

한 번을 그려가고 두 번, 이어 세 번째를 맞이할 때였다.

꿈틀.

‘응?’

마음을 비우고 문자를 따라가던 중 놀랍게도, 지나쳐 온 문자 하나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후공은 얼른 되돌아 꿈틀한 지점을 바라봤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 싶게 움직임이 사라졌다.

착시인가?

실망도 잠시.

이번엔 우측 위쪽 시작점의 문자가 꿈틀거렸다.

서둘러 동공을 옮기자, 그 움직임도 바로 멈췄다.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착시가 아니다.

‘보면 멈추는 것인가.’

이내 하단 쪽이 꿈틀.

이번엔 시선을 던지지 않고 허술하게 의식만 두었다. 문자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고 두루마리 문서 전체를 막연하게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문자들이 일제히 지렁이처럼 살아 움직인다.

꿈틀꿈틀 기어가는가 하면, 기어가던 중에 흩어져 사라지기도 했다.

‘뭐 이런…….’

재배열.

문자가 제멋대로 배열을 바꾸고 있었다.

꿈틀거림은 점점 심화되었다.

문자의 형태가 부서졌다가 바뀌는가 하면, 멀쩡하던 문자가 갑자기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다른 문자들이 날아와 채운다.

기현상은 이어졌다.

흩어졌다가 다른 문자를 끌어와 다른 쪽에 이어붙고,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다 싶을 때, 다시 원래 형태로 복원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주시해도 이제 멈춤은 없다.

도리어 점점 가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흩어지고 생성되고 상하좌우 끝을 모르고 합쳐지고 또 나뉘어 가는 광경을, 후공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규칙을 분석하고 있구나.’

어떤 문자나 암호라 해도 그 안에는 자기만의 규칙이 존재할 터.

근간이 되는 규칙을 파악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결합과 분리를 해보고 그 속에서 공통 인자를 찾아가는 식이었다.

범항이 천재다 천재다 해도 이 정도였단 말인가.

이걸 이런 식으로 해낼 줄이야.

후공은 새삼 이 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두뇌의 놀라운 점은,

이 분석 작업을 암산하듯 단지 머릿속에서 형상화하며 해결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루마리 종이 위 글자가 실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재배열과 구조 분석은 순전히 이 머릿속에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현 상황은 범항의 두뇌 작용이어서,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상황.

이런 식의 분석이 완료되면 해당 암호해독만이 아니라 이 암호체계를 다른 쪽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재배열의 속도는 점점 가공할 정도로 빨라졌다.

그러던 한순간,

모든 문자가 눈앞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모두 하얀 광경. 이미 어느 순간부터 주변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있는 몰입의 지경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후공은 걱정하지 않았다.

왜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나타난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 광경에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법 긴 문장.

‘……?’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의 보물에 관한 것.

‘절대적’이라 칭한 보물의 좌표였다.

하지만 정작 후공이 놀란 건 보물이란 단어 때문이 아니었다.

이 문서의 작성자가 문제였다.

왜 진본과 필사본의 차이가 없다고 했는지 이해된다.

정녕 상상조차 못한 인물이었다.

그때였다.

귓가로 아련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또렷해졌다.

“대공자, 대공자……. 괜찮은 겁니까?”

청각과 동시에 주변이 보였다.

후공이 용화청을 보니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주,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에……. 그게 아니라 대공자의 눈동자가 자줏빛 광채로…….”

“…….”

몰입된 상태에서 자각 없이 자령안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아, 염려하셨던 거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각주는 걱정이 평소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새를 못 참으시고, 라며 뚱하니 쳐다보자 용화청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반시진(1시간) 동안 미동도 없다면 누구라도 걱정하게 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 시간이 그렇게나.”

체감으로는 일각 정도였기에, 후공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런 모습에 도리어 용화청의 눈은 기대감으로 빛났다.

“그리 몰입하셨다면 이미 문서 해독이 끝난 것이로군요.”

“후우…….”

“…….”

“죄송합니다. 아쉽게도 겨우 실마리만 건진 정도입니다. 그 실마리조차 긴가민가하여 확신하기 힘드니 면목이 없습니다. 부끄럽군요.”

기대가 컸던 만큼 용화청의 눈빛이 죽어갔다.

“하긴……. 그리 쉽게 될 일은 아니겠지요.”

“너무 실망 마십시오. 열흘에서 보름이면 답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무조건 해결하겠습니다.”

“……네.”

실망이 컸던 만큼 용화청은 이제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당연히 후공은 그런 반응 따윈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각주, 이 문서를 만든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렇듯 난해한 암호체계는 처음이라 존경심이 들 정도입니다.”

“저희 쪽도 외부에서 우연히 얻은 터라,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군요.”

말을 하며 용화청이 은연중에 시선을 회피했다.

후공은 못 본 척 신중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외부에서요? 허허, 하긴 작성자가 누군지 알고 계시다면 그 계통을 통해 해결하셨을 테지요. 우문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이건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편히 말씀하십시오.”

“언제 시간이 허락된다면 약왕문주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기회가 있을는지요?”

“현재 문주님께선 폐관 중이십니다. 저희조차 뵐 수 없는 상황이지요.”

“이런, 제가 운이 없군요. 그럼 혹시 폐관은 언제쯤이면 끝내시는지요.”

“정확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몇 달은 족히 지나야 할 듯합니다.”

“허허……. 제가 귀인을 만나뵐 운이 아닌 모양입니다.”

용화청의 얼굴에 억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흥미를 잃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수고해주십시오. 또 찾아뵙지요.”

용화청이 문을 열자, 천공단이 문에서 후다닥 물러섰다.

다들 딴청을 피운다고 피웠지만 딱 봐도 문에 달라붙어 엿듣고 있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용화청은 일일이 예를 갖추고 발길을 돌렸다.

그가 멀어져가자 천공단은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가 두루마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은 엄청난 보물이겠지이이이!”

“천하제일무공일지도 모릅니다.”

“얼른 해석해 봅시다.”

“내가 할 거야, 내가 한다고!”

“누나, 이러다 찢어지겠어.”

소란이 일었지만 후공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멀어져가는 용화청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웃기는 놈이네.’

약왕문주가 폐관 중이라고?

두루마리 문서의 작성자는 약왕문주였다.

그리고 절대적이라 칭한 보물의 좌표는,

약왕문 안의 한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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