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여러분들은 막장입니다
후공이 침소로 들자, 송화가 따라붙었다.
“공자님, 간단히 요깃거리라도 준비할까요?”
“됐다. 혼자 있고 싶구나.”
“네.”
의문이 많아 머리가 복잡했다.
숨겨진 것들이 한가득이다.
후공으로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다.
천공단이 너무 시끄럽다.
별채 안 서재 겸 큰 다실에서 천공단이 떠들썩하게 토론의 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경천동지의 무학!”
“천지개벽의 신공!”
“광세절학!”
토론 중간중간에 이런 외침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후우……. 미친 것들.’
출처도 모르면서 암호문서라는 이유만으로 왜 천하제일무공으로 귀결짓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탓에, 천공단은 원래도 활기찬데 의욕까지 넘치니 소란이 말로 할 수 없었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버럭 소리치자 이내 잠잠해졌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고 소곤거림이 이어졌다.
“목소리들 죽이자구.”
“형님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네.”
“형님께서 예민해질 만하지요. 천재라는 자부심이 박살난 거 아닙니까. 묵 공자라는 경쟁상대도 있는데 패배하면 나락이지요.”
“흥! 형님도 뭔 걱정을 그리 하는지. 생각하는 내가 있는데 말씀이야.”
“누나, 암호문서 해독해 본 적 있어?”
“아니, 첨이야.”
“어…….”
다 들린다.
후공은 미간을 꿈틀.
그래도 뭐 이 정도 소곤거림이면 봐줄 만했다.
좌정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절대적인 보물이라. 절대적…….’
후공은 방금 전 해독해낸 두루마리 문서 내용을 떠올렸다.
- 나 약왕문주.
마음을 보이니, 천하여 들으라.
사람들은 내 필생의 역작을 금공단(錦空丹)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내 생애 가장 빛나는 역작.
내 생애 가장 위대한 보물은,
금공단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과 비할 수 없다.
절대적이며, 특별하고 특별하다.
만약 바라보는가.
보는 것만으로 활력을 찾게 되며 생기를 얻게 된다.
만지는가.
희열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보물을 보았을 때,
그리고 보물이 내게 미소 지을 때라 할 수 있다.
내게 다오.
그러면 웃을 수 있다.
그것을 가져와다오.
달빛 아래 약제실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곳.
그곳에서 일(一) 그리고 삼백칠십오(三百七十五).
‘흐음…….’
침음성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된 게 다시 새로운 암호를 맞이한 느낌.
약제실의 그림자라면 처마나 지붕이 뾰족하게 가리키는 방향일 터. 일과 삼백칠십오라는 구체적인 좌표는 그곳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면 될 일.
하지만 문제는 금공단이다.
금공단보다 더한 보물이라니.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금공단은 영단으로는 소림의 대환단에 버금간다.
물론 둘의 성격은 다르다.
대환단이 내공 증진에 치우쳐 있다면 금공단은 기사회생 쪽이다. 저승길을 건너려는 자를 잡아 끌어온다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 금공단의 비방을 완성한 것이 현 약왕문주.
그런 금공단보다 더한 보물이라면 거의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수준이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바라보고 만지는 것만으로 효능이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이러니 순순히 경악만 하고 있기가 난감하다.
가능성은?
물론 없지 않다.
말한 이가 약왕문주이기 때문.
그도 천재과인 것이다.
후공은 강호를 활보할 당시 몇 달 정도 함께한 적이 있어 약왕문주의 천재성을 알고 있었다.
약왕문주는 말수가 적고 생각에 잠겨 있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말을 하면 대답은 ‘네? 방금 무슨 말씀하셨습니까?’라며 확인하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궁금해 ‘약쟁아, 넌 도대체 뭔 생각을 날마다 그리 골똘히 하냐’ 물으니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약 생각이죠.]
약에 미친 놈답게 새로운 약, 기발한 약에 매달렸고 시행착오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직접 실험해보다가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다고 했다.
또 생각이 떠오를 때면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기록은 전부 자신만의 암호였다. 그런 점에서 두루마리 암호문서의 작성자가 약왕문주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어지는 의문은 역시 약왕문주의 현 상태.
약왕문주는 죽었거나 혼수상태일 가능성이 컸다.
폐관은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뿐.
약왕문주가 멀쩡하다면 당사자를 두고 외부에 의뢰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약왕문주야, 넌 어떻게 된 것이냐…….’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떨쳐냈다.
그림을 크게 봐야 할 때다.
게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약왕문주는 허술하지 않다.
지금 해야 할 일이라면?
‘확인.’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적절하게 써먹기 좋은 수하들도 있지 않는가.
“송화야.”
“네, 공자님. 식사를 준비할까요?”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송화가 냉큼 대답해왔다.
저녁을 거른 것이 계속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지필묵을 준비하거라. 다실로 갈 것이다.”
“……네.”
후공이 천공단이 둘러앉은 탁자로 향하고, 송화가 붓이며 큰 화선지를 탁탁촥촥 절도있게 펼쳐놓았다.
천공단이 천군만마를 얻은 듯 화색을 발했다.
“두목 형아, 적으면서 하게?”
“이여~~, 그 생각을 못했군. 역시 단주는 천재일세. 하나하나 적어버리면 그깟 암호도 별것 아니지.”
“하하, 형님 잘 오셨습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면 아침이 되기 전까진 풀어낼 수 있을 테지요.”
후공은 뚱하니 천공단을 바라봤다.
이놈들은 약을 하는 걸까?
대체 이놈들의 자신감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이해불가다.
후공은 바로 붓을 들었다.
일필휘지로 백지에 ‘나 약왕문주’를 시작으로 ‘그곳에서 일 그리고 삼백칠십오’까지 써내려간 뒤 붓을 내려놓았다.
탁.
어느샌가 천공단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이 내용은 암호를 해독한 결과물인 것이다.
“헐, 단주…….”
“우와, 두목 형아 엄청 대단해.”
“형님, 이미 해독해내셨던 거군요.”
“그런데 어째 내용이 좀…….”
단시간에 암호를 풀어냈다는 경악스러움과 동시에, 천공단의 머리에도 의문이 수없이 점멸했다. 그들도 문밖에서 대화를 모조리 엿들었던 터다. 당연히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묘빙빙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우리 단주 형님께선 해석 다 해놓고 왜 모른 척하셨대요?”
“…….”
“…….”
“그리고 약왕문 사람들도 성격 참 급하네요. 아니 약왕문주가 폐관을 끝내고 어련히 알려줄 텐데, 그걸 못 참고 여기저기 사람을 초빙해서 해석해달라고 안달하다니 말이에요.”
“…….”
“…….”
묘빙빙이 혀를 끌끌 차며 비난하자, 모두의 안색은 침울해졌다.
이보다 어떻게 더 명확히 드러나야 한단 말인가.
이 정도면 그냥 이해해야 하거늘, 도대체 묘빙빙은 왜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주가 외무각주에게 난데없이 약왕문주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의문까지 자연스럽게 해소된 상황인데 말이다.
걱정이다.
빙빙이 가는 곳마다 천공단의 군사라고 떠들고 다닐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란해지는 천공단이었다. 심지어 무산쌍웅은 가슴팍에 새긴 천공단 자수를 쳐다보며 그냥 뜯어낼까를 고심할 지경.
이열이 입을 열었다.
“형님, 머뭇거릴 것 있습니까. 이 밤에 약왕문 엎으시죠.”
벌써 진득하니 피 냄새를 흘리는 이열이었다.
“응?”
“응이 아닙니다. 이건 볼 것도 없이 보물에 눈이 어두워져 벌인 패륜적인 상황이 뻔하지 않습니까.”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재산을 두고 칼부림이 일어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금공단보다 더한 보물이라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금적자등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황이 그랬다.
전형적인 사건이 떠오른다.
상속해 달라, 그리 못한다와 같은 류다.
암호문서와 보물을 둘러싼 갈등.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 약왕문주가 죽임을 당했거나 감금당해 있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후공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억측이 과하군요. 별일 아닐 겁니다.”
“억측이라니요! 형님은 강호를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곳이 강호입니다. 한번 청부는 영원한 청부라는 미친 신념의 무극살부놈들을 잊었습니까.”
항마삼협이 강호를 오시하던 전직 무림맹주에게 강호를 모른다며 열변을 토했다.
거기에 개방까지,
“맞아. 두목 형아야, 한가하게 웃고 앉았을 때가 아닌 것 같아.”
“웃고 있어도 된다.”
후공의 목소리가 너무 차분했음인가.
아니면 강호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싶었음인가.
말문이 막힌 천공단이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후공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보기에 천잠육도는 어떻습니까?”
“육도? 그야 대책 없지. 혼란강호 그 자체가 아닌가.”
금적자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답했다.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잠시 스쳐간다면 모를까, 향을 저리 피워댈 지경이면 함께 지내기엔 골치 아플 테죠. 그럼 천공단은 어떻습니까?”
“우리? 든든하지. 정의롭고. 아주 믿음직…….”
순간 느껴진 바가 있는지 금적자가 말을 하다 말았다.
항마삼협을 비롯 다른 이들도 바로 멍청해졌다.
천잠육도에 더해 천공단.
그들이 지금 약왕문 안에 있는 것이다.
천잠은 보고만 있어도 갑갑하고, 천공단은 약왕문 입장에서 보자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만약 패악한 일이 내부에서 벌어졌다면?
천잠이든 천공단이든 손님으로 맞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겁니다. 약왕문 내부에 암투가 있었다면 천잠육도를 품고 있을 심적 여유 따위는 없겠지요.”
“…….”
“게다가 천공단은 어떻습니까? 누가 봐도 막장입니다.”
“…….”
“그런 천공단이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안으로 들이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저 약왕문은 어떤 불행을 맞이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
천공단이 시무룩해졌다.
그러다 원망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막장 보듯 사납게 노려봤다.
자신들이 봐도 자기 빼곤 전부 막장 같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후공은 말을 이었다.
“보물은 보물이 아닌 듯하고, 모반이나 패악의 의심점도 보이지 않습니다.”
“…….”
“하지만 이것조차 어디까지나 추정. 열길 물 속보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속내이니,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밤 금적선생과 개방이 수고를 해줬으면 싶은데,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뭘 하면 되나?”
“와아, 사형 우리 밥값하게 생겼어!”
금적자가 갸웃한 반면 소천개는 팔딱거리며 좋아했다.
***
별채 부근 나무 위.
금적자는 나뭇가지를 딛고 선 채로 피리를 입에 가져갔다.
음률이 밤을 타고 약왕문 본전 방향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곡조는 구슬프고 애절했다.
“뭐지? 왜 내 눈에 땀이 차려고 하는 거냐.”
“엄마 보고 싶다.”
나무 아래,
은앙개와 소천개가 축 처져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런…….’